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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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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劉守光傳 多生色이라
劉守光 深州樂壽人也 其父仁恭 事幽州李可擧할새 能穴地爲道以攻城하니 軍中號劉窟頭 稍以功遷軍校하다
仁恭爲人有勇하고 好大言이라 可擧死 子匡威惡其爲人하야 不欲使居軍中하야 徙爲瀛州景城縣令하다
瀛州軍亂하야 殺刺史어늘 仁恭募縣中得千人하야 討平之하다 匡威喜하야 復以爲將하야 使戍蔚州러니 戍兵過期不得代하야 皆思歸하야 出怨言하다
匡威爲其弟匡儔所逐이어늘 仁恭聞亂하고 乃擁戍兵하야 攻幽州라가 行至하여 戰敗하야 奔於晉하니 晉以爲壽陽鎭將하다
仁恭多智詐하야 善事人이라 事晉王愛將尤謹하야 每對寓涕泣하야 自言 居燕無罪 以讒見逐이라하고 因道燕虛實하야 陳可取之謀하니 晉王益信而愛之하다
乾寧元年 晉擊破匡儔하야 乃以仁恭爲幽州留後하고 留其親信燕留得等十餘人하야 監其軍하고 爲之請命於唐하야 拜檢校司空 盧龍軍節度使하다
其後 晉攻羅宏信할새 求兵於仁恭이어늘 仁恭不與하다 晉王以書微責誚之어늘 仁恭大怒하야 執晉使者하고 殺燕留得等以叛하다 晉王自將討之하야 戰於安塞어늘 晉王大敗하다
光化元年 遣其子守文하야 襲滄州하야 逐節度使盧彦威하야 遂取滄景德三州하다
爲其子請命於唐이어늘 昭宗遲之하야 未卽從하니 仁恭怒하야 語唐使者曰 爲我語天子하라 旌節吾自有하니 但要長安本色耳어늘 何屢求而不得耶아하다 하다
仁恭父子率兩鎭兵十萬하고 號稱三十萬하야 以擊魏하야 屠貝州어늘 羅紹威求救於梁이라
梁遣李思安救魏하야 大敗守文於內黃하야 斬首五萬하다 仁恭走어늘 梁軍追擊之하야 自魏至長河 橫尸數百里
梁軍自是連歲攻之하야 破其瀛漠二州어늘 仁恭懼하야 復附於晉하다
天祐三年 梁攻滄州하니 仁恭調其境內凡男子年十五已上七十已下하야 皆黥其面하야 文曰定霸都하고 得二十萬人하고 兵糧自具하야 屯於瓦橋하다
梁軍壁하고 深溝高壘하니 仁恭不能近이라 滄州被圍百餘日 城中食盡하야 人自相食하고 析骸而爨하고 或丸墐土而食하니 死者十六七하다
仁恭求救於晉 晉王爲之攻潞州하야 以牽梁圍러니 晉破潞州 梁軍乃解去
然仁恭幸世多故하고 而驕於富貴하야 築宮大安山하야 窮極奢侈하고 選燕美女하야 充其中하다 又與道士鍊丹藥하야 冀可不死하다
令燕人用墐土爲錢하고 悉斂銅錢하야 鑿山而藏之러니 已而殺其工以滅口하니 後人皆莫知其處
仁恭有愛妾羅氏하니 其子守光烝之 仁恭怒하야 笞守光逐之어늘
梁開平元年 遣李思安攻仁恭이라 仁恭在大安山이어늘 守光自外將兵以入하야 擊走思安하고 乃自稱盧龍節度使하야 遣李小喜元行欽以兵攻大安山하야 執仁恭而幽之하다
其兄守文聞父且囚하고 卽率兵討守光하야 至於盧臺하야 爲守光所敗하고 進戰玉田하야 又敗 乃乞兵於契丹하다
明年 守文將契丹吐渾兵四萬人하야 戰於雞蘇하야 守光兵敗하니 守文陽爲不忍하야 出於陣而呼其衆曰 毋殺吾弟라하다
守光將元行欽識守文하야 躍馬而擒之하야 又囚之於別室이라가 旣而殺之하다
守文將吏孫鶴呂兗等 立守文子延祚하야 以拒守光하다 守光圍之百餘日 城中食盡하야 米斗直錢三萬하니 人相殺而食하고 或食墐土하고 馬相食其鬃尾
兗等率城中饑民食以麴하고하야 日殺以餉軍이러니 久之 延祚力窮하야 遂降하다
守光素庸愚러니 由此益驕하야하야 人有過者 坐之籠中하고 外燎以火하고 或刷剔其皮膚以死하니 燕之士多逃禍於佗境하다
守光身衣赭黃하고 謂其將吏曰 我衣此而南面하야 可以帝天下乎아하니 孫鶴切諫以爲不可하다
梁攻趙 趙王王鎔求救於守光하니 孫鶴曰 今趙無罪而梁伐之하니 諸侯救趙之兵先至者霸 臣恐燕軍未出而晉已先破梁矣 此不可失之時也라하니
守光曰 趙王嘗與我盟而背之러니 今急乃來歸我 且兩虎方鬪 可待之 호리라하고 遂不出兵하다
晉王果救趙하야 大敗梁軍於柏鄕하고 進掠邢洺하야 至於黎陽하다
守光聞晉空國深入梁하야 乃治兵戒嚴하고 遣人以語動鎭定曰 燕有精兵三十萬하니 願率二鎭以從晉이라 然誰當主此盟者아하다
晉人患之하야 謀曰 하고 今吾越千里以伐人이어늘 而彊燕在其後하니 此腹心之患也라하고 乃爲之班師하다
守光益以爲諸鎭畏其彊하야 乃諷諸鎭하야 共推尊己하다
於是 晉王率天德宋瑤振武周德威昭義李嗣昭義武王處直成德王鎔等하야하야 尊守光爲尙書令尙父하다
守光又遣人告於梁하야 請授己河北兵馬하야 以討鎭定河東하다 梁遣閤門使王曈하야 拜守光爲北採訪使하다
有司白守光하야 尙父受冊 用唐冊太尉禮儀라하니
守光問曰 此儀注 何不郊天改元가하니 有司曰 此天子之禮也 尙父雖尊이나 乃人臣耳라하다
守光怒曰 我爲尙父하니 誰當帝者乎 且今天下四分五裂 大者稱帝하고 小者稱王하니 我以二千里之燕으로 獨不能帝一方乎
乃械梁晉使者下獄하고 置斧鑕於其庭하야 令曰 敢諫者死라하다 孫鶴進曰 滄州之敗 臣蒙王不殺之恩이러니 今日之事 不敢不諫이라하다
守光怒하야 推之伏鑕하고 令軍士割而啖之하니 鶴呼曰 不出百日 大兵當至라 하니 命窒其口而하다
守光遂以梁乾化元年八月 自號大燕皇帝하고 改元曰應天하고 以王瞳齊涉으로 爲左右相하다
晉遣太原少尹李承勳賀冊尙父러니 至燕而守光已僭號 有司迫承勳稱臣이어늘 承勳不屈하야 以列國交聘禮入見하니 守光怒하야 殺之하다
明年 晉遣周德威將三萬人하야 會鎭定之兵하야 以攻燕할새하니 其檀涿武順諸州皆迎降하다
守光被圍經年 累戰常敗하야 乃遣客將王遵化致書於德威曰 予得罪於晉이어늘 迷而不復이라 今其病矣 公善爲我辭焉하라하니
德威謂遵化曰 大燕皇帝尙未郊天이어늘 何至此耶 予受命以討僭亂이요 不知其他也라하다
守光益窘하야 乃獻絹千疋銀千兩錦百段하고 遣其將周遵業謂德威曰 吾王以情告公이라 富貴成敗 人之常理 錄功宥過 霸者之事也 守光去歲 妄自尊崇 本不能爲朱溫下耳 豈意大國暴師經年이리오 幸少寬之하라하니 德威不許하다
守光登城呼德威曰 公賢士 獨不急人之危乎 遣人以所乘馬易德威馬而去하고 因告曰 俟晉王至則降이라하다
晉王乃自臨軍이어늘 守光登城見晉王하니 晉王問將如何오하다 守光曰 今日俎上肉耳 惟王所爲也라하더니 守光有嬖者李小喜 勸其毋降이어늘 守光因請俟他日하다
是夕 小喜叛하야 降於晉軍하니 明旦 晉軍攻破其城하야 執仁恭及其家族三百口하다
守光與其妻李氏祝氏子繼珣繼方繼祚等으로 南走滄州라가 迷失道하야 至燕樂界中하다
數日不得食하야 遣祝氏乞食於田家러니 田家怪而詰之어늘 祝氏以實告 乃被擒送幽州하다
晉王方大饗軍할새 客將引守光見한대 晉王戲之曰 主人何避客之遽邪아하니 守光叩頭請死어늘 命械守光幷其父仁恭以從軍하다
軍還過趙 趙王王鎔會晉王하야 置酒러니 酒酣하야 請曰 願見仁恭父子라하니 晉王命破械出之하야 引置下坐어늘 飮食自若하야 皆無慚色하다
晉王至太原하야 仁恭父子 曳以組練하야 獻於太廟하다 守光將死 泣曰 臣死無恨이나 然敎臣不降者 李小喜也 罪人不死 臣將訴於地下라하다
晉王使召小喜어늘 小喜瞋目曰 囚父弑兄하고 烝其骨肉 亦小喜敎爾邪아하니 晉王怒하야 命先斬小喜하다
守光知不免하고 呼曰王將復唐室하야 以成霸業하리니 何不赦臣使自效아하다
其二婦從旁罵曰 事已至此하니 生復何爲리오 願先死라하고 乃俱死하다
晉王命李存霸하야 執仁恭至雁門하야 刺其心血以祭先王墓하고 然後斬之하다
晉之爲恩於燕者三이니 擊破匡儔하야 立爲留後 一也 殺監軍燕留得等하고 而敗晉王於安塞 罪且不赦矣어늘 復因其滄州之困하야 而晉且攻潞以牽梁하야 因卒以解 二也 已而 仁恭囚而守光之驕也로대 晉且冊立爲尙書令史矣 而復械晉使者 三也


04. 유수광劉守光전기傳記
유수광劉守光전기傳記는 생동감이 넘친다.
유수광劉守光심주深州 악수樂壽 사람이다. 그 아버지 유인공劉仁恭유주幽州 이가거李可擧를 섬길 때에 땅에 굴을 파서 길을 만들어 성을 공격하였으니 군중軍中에서 유굴두劉窟頭라 불렀다. 점차 군공軍功을 세워 군교軍校로 승진하였다.
유인공은 사람됨이 용감하고 큰 소리 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가거가 죽자 아들 이광위李匡威가 유인공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군중軍中에 남겨두고 싶지 않아 옮겨 영주瀛州 경성현령景城縣令으로 삼았다.
영주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자사刺史를 죽이자 유인공이 에서 천 명을 모집하여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이광위가 기뻐하며 다시 장수將帥로 삼아 울주蔚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수졸戍卒들이 임기가 지났음에도 교대해주지 않자 모두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이광위가 그의 아우 이광주李匡儔에게 쫓겨나자 유인공이 변란의 소식을 듣고 이에 수졸戍卒들을 거느리고 유주幽州를 공격하려다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러 패전하여 나라로 달아나니, 진나라가 의양진장壽陽鎭將으로 삼았다.
유인공劉仁恭이 꾀가 많아 사람을 잘 섬겼다. 진왕晉王이 아끼는 장수 개우蓋寓를 섬김에 더욱 정중하게 하여 매번 갑우를 만나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에 있을 때에 죄가 없었으나 참소로 쫓겨났다.”라고 하고는 인하여 연의 허실虛實을 말하여 연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진술하니, 진왕이 더욱 믿고 아꼈다.
건녕乾寧 원년(894)에 진나라가 이광주李匡儔를 격파하고서 이에 유인공을 유주유후幽州留後로 삼았다. 그리고 진왕이 자신이 친신親信하던 연유득燕留得 등 10여 인을 남겨두어 그 군을 감독하게 하고 연류득을 위해 나라에 임명해주기를 청하여 검교사공檢校司空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그 후에 나라가 나굉신羅宏信을 공격할 때에 유인공劉仁恭에게 병사를 요구하였는데 유인공이 주지 않았다. 진왕晉王이 서신을 보내 조금 꾸짖자 유인공이 크게 노하여 나라의 사자를 사로잡고 연유득燕留得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왕晉王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안새安塞에서 전투하였는데 진왕晉王이 크게 패하였다.
광화光化 원년(898)에 그 아들 유수문劉守文을 보내 창주滄州를 습격하여 절도사節度使 노언위盧彦威를 내쫓고서 마침내 창주, 경주景州, 덕주德州 세 주를 취하였다.
아들을 위해 나라에 임명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소종昭宗이 지체하고 즉시 따라주지 않으니 유인공이 노하여 나라 사자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해 천자에게 말하라. 정기旌旗부절符節은 내가 본래 소유하고 있으니, 다만 장안長安의 실제 직함職銜을 요구 하였을 뿐인데, 어찌 누차 요구해도 주질 않는가.”라고 하였다. 소종이 마침내 유수문을 횡해군절도사橫海軍節度使로 삼았다.
유인공劉仁恭 부자父子가 두 의 병사 십만 명을 거느리고서 겉으로 삼십만 대군이라고 거짓 소문내고서 위주魏州를 공격하여 패주貝州를 도륙하자 나소위羅紹威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나라가 이사안李思安을 보내 위주魏州를 구원하여 유수문劉守文내황內黃에서 대패시켜 5만 명의 목을 베었다. 유인공이 달아나자 나라 군사軍士가 추격하여 위주로부터 장하長河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에 걸쳐 시체가 널브러졌다.
양나라 군사軍士가 이때부터 해를 이어 공격하여 영주瀛州, 막주漠州를 격파하자 유인공이 두려워 다시 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
천우天祐 3년(906)에 나라가 창주滄州를 공격하니, 유인공劉仁恭이 그 경내境內의 나이 15세 이상 70세 이하인 남자를 모두 징발하여 모두 그 얼굴에 정패도定霸都라는 문신을 새겨 20만 명을 얻고 병량을 스스로 준비하게 하여 와교瓦橋에 주둔시켰다.
양나라 군사軍士장로長蘆에 벽을 쌓고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세우니, 유인공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창주가 포위된 지 100여 일 만에 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어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뼈를 쪼개 부뚜막에 불을 때며 혹 찰흙을 으로 만들어 먹기까지 하니, 죽은 사람이 열에 예닐곱 명이었다.
유인공이 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진왕晉王이 그를 위해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창주를 포위한 나라 군대를 견제하였는데, 진나라가 노주를 격파함에 양나라 군사가 이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그러나 유인공은 세상에 변고가 많은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부귀富貴로 인해 교만해져 대안산大安山을 지어 사치를 한껏 부리고 미녀美女를 선별하여 그 안을 가득 채웠으며 또 도사道士와 함께 단약丹藥을 고아서 복용하여 영생을 바랐다.
나라 사람들에게 찰흙을 돈으로 사용하게 하고 동전銅錢을 모두 거두어 산을 파서 보관하였는데, 이윽고 그 공인工人을 죽여 입을 막으니, 후인後人이 모두 동전을 보관한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하였다.
유인공劉仁恭애첩愛妾 나씨羅氏가 있었는데, 그 아들 유수광劉守光이 그녀와 사통하였다. 유인공이 노하여 유수광을 매질하고 내쫓았다.
나라가 개평開平 원년(907)에 이사안李思安을 보내 유인공을 공격하였다. 유인공이 대안산大安山에 있었는데, 유수광이 외부로부터 병사를 이끌고 들어와 이사안李思安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이에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라 스스로 칭하고 이소희李小喜원행흠元行欽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대안산大安山을 공격하여 유인공을 사로잡아 유폐시켰다.
그 형 유수문劉守文이 아버지가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병사를 거느리고 유수광을 토벌하기 위해 노대盧臺에 이르렀다가 유수광에게 패하고 나아가 옥전玉田에 나아가 전투하여 또 패하니 이에 거란契丹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듬해에 유수문이 거란과 토혼吐渾의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계소雞蘇에서 전투하여 유수광의 병사에게 패하니, 유수문이 거짓으로 인자한 척하면서 군진軍陣에서 나와 병사들에게 “나의 동생을 죽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유수광의 장수 원행흠元行欽이 유수문임을 알아채고는 말에 뛰어올라 그를 사로잡아 또 별실別室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죽였다.
유수문劉守文장리將吏 손학孫鶴여연呂兗 등이 유수문劉守文의 아들 유연조劉延祚를 세워 유수광劉守光을 막았다. 유수광이 포위한 지 100여 일 만에 성 안에 양식이 고갈되어 쌀 한 말[]의 값이 3만 이나 되니, 사람들이 서로 죽여서 먹거나 혹 찰흙을 먹기도 하고 말은 서로 갈기와 꼬리를 뜯어 먹었다.
여연 등이 성 안에 굶주린 백성을 데려다 누룩을 먹이고 재살무宰殺務라고 부르며 날마다 그들을 죽여 군사들을 먹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자 유연조가 힘이 다하여 마침내 유수광에게 항복하였다.
유수광은 평소 어리석었는데 이로부터 더욱 교만해져 철롱鐵籠철쇄鐵刷를 만들어 사람이 과실이 있으면 철롱 안에 앉게 하여 밖에서 불을 지피기도 하고 혹 철쇄로 그 피부를 벗겨서 죽이니, 타국의 국경을 넘어 화를 피해 달아나는 사졸士卒들이 많았다.
유수광이 자황색 옷을 입고 그 장리將吏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를 입고서 남면南面하여 천하에 황제가 될 수 있겠는가?”라 하니 손학孫鶴이 간절히 간하면서 불가하다 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자 조왕趙王 왕용王鎔유수광劉守光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손학孫鶴이 “지금 조나라는 죄가 없는데도 나라가 정벌하니,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병사를 보내는 제후가 패자霸者가 됩니다. 신은 나라의 군사가 출병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이미 먼저 양나라를 격파할까 두려우니, 이는 잃어서는 안 될 기회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말하기를 “조왕은 일찍이 나와 동맹을 맺었으나 배반하였는데 지금 다급해지자 이에 나에게 귀부歸附하였다. 또 두 마리 범이 바야흐로 싸우고 있는지라 기다릴 만하니, 나는 응당 변장자卞莊子가 되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출병하지 않았다.
진왕晉王이 과연 조나라를 구원하여 백향柏鄕에서 양나라 군대를 크게 패퇴시키고 나아가 형주邢州명주洺州를 노략질하고 여양黎陽에 이르렀다.
유수광이 진나라가 나라를 비우고 양나라로 깊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병사를 정돈하여 엄중히 경계하고 사람을 보내 말로 진주鎭州정주定州를 선동하기를 “연나라에 정예병精銳兵 30만 명이 있으니, 원컨대 두 을 거느리고 진나라를 따르려 한다. 그러나 누가 이 맹약을 주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진인晉人이 이를 근심하여 모의하기를 “옛날에 부차夫差황지黃池의 회맹을 다투다가 나라가 나라로 들어갔고, 항우項羽나라를 정벌하는 이익을 탐하다가 나라가 나라를 패퇴시켰다. 지금 우리는 천 리를 건너 타국을 정벌하고 있는데 강한 연나라가 우리 뒤에 있으니, 이는 복심腹心의 우환이다.”라고 하고 이에 회군回軍하였다.
유수광劉守光이 더욱 제진諸鎭이 자신의 강성함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여 제진諸鎭을 넌지시 부추겨 함께 자신을 추존하게 하였다.
이에 진왕晉王천덕天德 송요宋瑤, 진무振武 주덕위周德威, 소의昭義 이사소李嗣昭, 의무義武 왕처직王處直, 성덕成德 왕용王鎔 등을 거느리고서 묵제墨制책봉冊封하여 유수광을 높여 상서령尙書令 상보尙父로 삼았다.
유수광이 또 사람을 보내 나라에 아뢰어, 자신에게 하북병마도통河北兵馬都統을 제수하여 진주鎭州, 정주定州, 하동河東을 토벌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나라가 합문사閤門使 왕동王曈을 보내 유수광을 북채방사北採訪使로 삼았다.
유사有司가 유수광에게 아뢰기를 “상보尙父책봉冊封받을 때에 나라가 태위太尉책봉冊封할 때의 예의禮儀를 사용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묻기를 “이 의주儀注에는 어찌 교외郊外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연호를 바꾸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이는 천자天子입니다. 상부가 비록 존귀하지만 다만 신하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상부가 되었으니 누가 응당 황제가 되겠는가. 또 지금 천하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큰 땅을 소유한 자는 라 칭하고 작은 땅을 소유한 자는 이라 칭하는데, 나는 2천 리 되는 을 가지고도 홀로 한 지역에서 황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와 나라의 사자에게 형구刑具를 채워 하옥下獄하고는 그 뜰에 도끼와 작두를 설치하고 명하기를 “감히 간언諫言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손학孫鶴이 나아와 말하기를 “창주滄州에서 패배하였을 때에 신은 왕께서 죽이지 않으신 은혜를 입었는데, 오늘의 일은 감히 간언諫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노하여 그를 밀어 작두에 엎어지게 하고 군사를 시켜 살을 베어 먹게 하니, 손학이 호통치기를 “100일이 되기도 전에 대병大兵이 응당 이곳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명하여 그 입을 막게 하고 육장肉醬을 담갔다.
유수광劉守光이 마침내 나라 건화乾化 원년(911) 8월에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호칭하고 응천應天으로 연호를 바꾸고 왕동王瞳제섭齊涉좌우상左右相으로 삼았다.
나라가 태원소윤太原少尹 이승훈李承勳을 보내 상보尙父에 책봉된 것을 축하하려 하였는데 에 이르렀을 때에 유수광이 이미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였다. 유사有司가 이승훈을 핍박하여 칭신稱臣하게 하였는데 이승훈이 굴하지 않고 열국列國이 서로 빙문聘問할 때의 로 들어와 만나보니 유수광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이듬해에 나라가 주덕위周德威를 보내 3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진주鎭州정주定州의 병사와 회합하여 을 공격하여 기구관祁溝關으로부터 들어가니, 단주檀州, 탁주涿州, 무주武州, 순주順州 등 여러 가 모두 〈주덕위周德威의 군사를〉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유수광劉守光이 포위된 지 한 해가 지나도록 여러 번 싸워 늘 패하자 이에 객장客將 왕준화王遵化를 보내 주덕위周德威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내가 나라에 죄를 지었는데 어리석어 뉘우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병들었으니 공이 나를 위해 잘 말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주덕위가 왕준화에게 말하기를 “대연황제大燕皇帝가 아직 하늘에 교제사郊祭祀를 지내지 못한 터에 어찌 여기에 왔는가. 나는 명을 받고 황제를 참칭하여 변란을 일으킨 자를 토벌하려는 것일 뿐 다른 것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더욱 군색해져 이에 명주 1,000 1,000 비단 100을 바치고 그 장수 주준업周遵業을 보내 주덕위에게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실정實情으로 공에게 말하였습니다. ‘부귀富貴성패成敗는 사람의 상리常理이고 공이 있는 사람을 녹용錄用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패자霸者의 일입니다. 유수광이 작년에 함부로 스스로 존숭尊崇한 것은 본래 주온朱溫보다 낮은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니, 어찌 대국大國의 군대를 한 해가 지나도록 고생하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부디 조금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주덕위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수광이 성에 올라 주덕위에게 소리치기를 “공은 삼진三晉현사賢士인데, 유독 사람의 위태로움을 돌보아주지 않는가.”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 자신이 타던 말을 주덕위의 말과 바꾸어 떠나게 하고 인하여 고하기를 “진왕晉王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항복하겠다.”라고 하였다.
진왕晉王이 이에 스스로 군중軍中에 이르자 유수광이 성에 올라 진왕晉王을 보니, 진왕晉王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말하기를 “금일 저는 도마 위의 고기일 뿐이니, 오직 왕께서 마음대로 하실 뿐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유수광의 폐신嬖臣 이소희李小喜가 항복하지 말 것을 권하자 유수광이 인하여 훗날을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
이날 저녁에 이소희가 반란을 일으켜 진군晉軍에 항복하니, 다음날 아침에 진군이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유인공劉仁恭 및 그 가족家族 300명을 사로잡았다.
유수광劉守光이 그의 처 이씨李氏, 축씨祝氏와 아들 유계순劉繼珣, 유계방劉繼方, 유계조劉繼祚 등과 함께 남쪽으로 창주滄州로 달아나다 길을 잃고 헤매다 연주燕州낙주樂州의 경계에 이르렀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하여 축씨를 보내 농가에 음식을 구걸하였는데 농가에서 괴이하게 여겨 따져 추궁하자 축씨가 사실대로 고하니 이에 사로잡혀 유주幽州로 보내졌다.
진왕晉王이 바야흐로 군사軍士들에게 크게 잔치를 벌여줄 때에 객장客將이 유수광을 끌고 와서 뵈니, 진왕晉王이 희롱하기를 “주인이 어찌 그리도 손님을 급히 피하는가.”라고 하였다. 유수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줄 것을 청하였는데, 명하여 유수광과 그 아비 유인공劉仁恭에게 형구刑具를 채워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군대가 회군하여 나라를 지날 때에 조왕趙王 왕용王鎔진왕晉王과 만나 주연酒宴을 가졌는데 왕용이 술이 취하여 청하기를 “유인공 부자를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진왕晉王이 명하여 형구刑具를 부수고 데려와서 말석에 두도록 하였는데, 유인공 부자父子가 태연자약 먹고 마시면서 모두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진왕晉王태원太原에 이르자 유인공劉仁恭 부자父子조대組帶로 묶어 끌고서 태묘太廟에 바쳤다. 유수광劉守光이 죽을 즈음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신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권한 사람은 이소희李小喜니, 죄인罪人이 죽지 않으면 신은 장차 지하에서도 호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왕晉王이 사람을 시켜 이소희李小喜를 부르자 이소희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기를 “아비를 가두고 형을 시해하고 그 골육骨肉과 사통한 것도 내가 너에게 시킨 것이냐.”라고 하였다. 진왕晉王이 노하여 이소희를 먼저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유수광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소리치기를 “왕께서 장차 나라 왕실王室을 회복하여 패업霸業을 이루려 하시면서 어찌 신을 용서하여 스스로 몸을 바칠 수 있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두 부인이 곁에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살아서 더 무엇 하겠습니까. 먼저 죽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에 모두 죽었다.
진왕晉王이존패李存霸에게 명하여 유인공을 잡아다 안문雁門에 이르러 그의 심장을 찔러 그 피로 선왕의 에 제사를 지낸 다음 참수하였다.
나라가 에 은혜를 베푼 것이 3가지이다. 이광주李匡儔를 격파하고서 유인공劉仁恭을 세워 유후留後로 삼은 것이 첫 번째이고, 감군監軍 연유득燕留得 등을 죽이고 안새安塞에서 진왕晉王을 패퇴시킨 것은 죄가 또 용서받지 못할 정도인데 다시 창주滄州가 곤경에 처한 일로 진나라가 또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나라를 견제하였기에 인하여 끝내 양나라가 포위를 푼 것이 두 번째이고, 그 뒤에 유인공이 갇히고 유수광劉守光이 교만하였는데도 진왕이 또 유수광을 책립冊立하여 상서령사尙書令史로 삼았는데 유수광이 다시 진나라 사자를 처벌한 것이 세 번째이다.


역주
역주1 劉守光傳 : 劉守光(?~?)은 深州 樂壽 사람이다. 유수광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35 〈僭僞列傳 第2〉, ≪新五代史≫ 卷39 〈雜傳 第27〉에 각각 실려 있다.
劉仁恭은 꾀가 많고 사람을 잘 섬겨 晉나라에 신임을 얻었지만 후에 사소한 일로 진나라를 배반하였고, 梁나라가 공격하자 다시 진나라에 귀부하였으며, 후에 富貴로 인해 교만해져 사치와 여색을 일삼은 인물이다. 유인공은 아버지의 애첩과 사통하다 발각되어 쫓겨나자 군사를 이끌고 아버지를 공격하여 유폐시켰고, 아버지가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하러 온 형 劉守文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로는 梁나라와 晉나라의 계속된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세력을 유지하며 교만에 사로잡혀 충신의 간언을 묵살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가 결국 진나라에 패하여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이 열전에서는 유수광의 아버지 유인공의 사적을 시작으로 아버지를 유폐하고 형을 시해한 유수광의 잔인하고 추악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특히 성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에게 누룩을 먹여 살을 찌운 뒤 그들을 죽여 병사의 식량으로 대용한 장면과 자신에게 충언을 한 孫鶴을 죽여 肉醬을 담그는 모습에서 그의 잔혹한 모습이 잘 드러나고, 진나라에 사로잡힌 뒤 형구를 풀어주고 연회의 말석에 두자 유인공 부자가 태연자약 먹고 마시며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모습과 처형당할 때 끝까지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에서 몰염치한 모습이 더욱 드러난다.
史評에서는 진나라가 이들 부자에게 3가지의 큰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결국 진나라를 배반한 것을 부각시켜 유수광을 의리를 저버린 인물이라 평하였다. 이에 비해 ≪구오대사≫에서는 “유수광이 천륜을 거스르고 도리를 위배한 것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인데, 형벌을 당할 때에 오히려 사형을 면해주길 바랐으니, 몹시 악독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몹시도 어리석은 자이다.[守光逆天反道 從古所無 迨至臨刑 尙求免死 非唯惡之極也 抑亦愚之甚也]”라고 하여 죽을 때까지 몰염치했던 유수광의 모습을 부각시켜 후세에 경계를 드리웠다.
역주2 居庸關 : 중국 北京 북서쪽 60km 지점에 있는 關門으로, 華北 평원에서 蒙古 고원으로 향한 도로가 산맥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지점에 있다. 건설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옛날부터 변방의 요새였고, 太行산맥의 고갯길 太行八徑의 하나로 알려졌다.
역주3 蓋(갑)寓 : ?~905. 당나라 말기 蔚州 사람으로 李克用이 雁門을 지휘할 때 都押牙가 되어 嵐州刺史를 거느렸다. 唐 昭宗 光化(898~901) 초에 檢校太傅까지 올랐고, 成陽郡公에 봉해졌다. 성격이 영리하고 지혜와 술수가 있어 사람들의 심정을 잘 헤아릴 줄 알았다. 이극용의 성격이 모질고 급해 오직 갑우만이 그의 비위를 맞출 수 있어 부드러운 말과 순종하는 어투로 잘 보좌했다.
역주4 昭宗卒以守文爲橫海軍節度使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橫海軍은 응당 義昌軍이 되어야 한다. 〈呂琦傳〉도 똑같이 잘못되었다.[謹按橫海軍 當作義昌軍 呂琦傳同]”라고 하였다.
역주5 長蘆 : 중국 滄州 長蘆縣을 가리키는데, 상인들이 많이 모이던 길목이다.
역주6 宰殺務 : 五代時代에 呂兗 등이 백성들을 도살하여 군대의 식량으로 공급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 만든 機構를 말한다.
역주7 鐵籠鐵刷 : 鐵籠은 刑具의 일종으로 쇠로 새장 모양을 만들어 죄인을 가두고 밖에 불을 지펴 죄인을 죽이는 것이며, 鐵刷는 刑具의 일종으로 철로 만든 솔인데 죄인의 피부를 벗기는 데에 사용한 것으로 劉守光이 만들었다.
역주8 吾當爲卞莊子也 : ≪史記≫ 卷70 〈張儀列傳〉에 春秋時代에 卞莊子가 범을 찌르려 하자, 館豎子가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두 마리의 범이 한 마리의 소를 먹고 있으니 반드시 서로 싸우게 될 것이고, 싸우면 큰 놈은 부상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다. 그때 부상한 놈을 찌른다면 일거에 두 마리의 범을 잡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변장자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겨 기다렸는데, 조금 뒤 과연 두 마리의 범이 서로 싸워 관수자의 말처럼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劉守光이 卞莊子처럼 적이 서로 싸우다 지치면 그 틈을 타서 승리하겠다는 말이다.
역주9 昔夫差爭黃池之會而越入吳 : 吳王 夫差가 중국의 패권을 노려 僭稱했던 王의 칭호를 스스로 버리고 子로 칭하고 晉나라, 魯나라 등과 黃池에서 동맹을 맺었다. 이때가 吳나라는 가장 강성했던 때인데 바로 그해에 越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9년 뒤에는 끝내 越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春秋左氏傳≫ 哀公 13年,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역주10 項羽貪伐齊之利而漢敗楚 : 項羽가 齊나라와 싸우다 彭城을 잃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田榮은 齊나라의 종실로 田市를 세워 齊나라를 평정하였는데, 뒤에 항우가 齊나라를 삼분하여 田氏에게 나누어 줄 때 分封을 받지 못하자, 이에 분노하여 三齊의 땅을 다 병합하여 항우에 대항하니, 항우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항우 역시 전영을 공격하는 동안에 劉邦의 공격을 받아 팽성이 함락되었다.(≪史記≫ 卷94 〈田儋列傳〉)
역주11 墨制 : 朝廷을 거치지 않고 禁中으로부터 바로 나오는 詔書를 말한다.
역주12 (時)[都] : 저본에는 ‘時’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都’로 바로잡았다.
역주13 醢(해) : 고대의 가혹한 형벌로 사람을 잘라 肉醬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역주14 祁溝關 : 지금의 河北省 涿縣에 있는 關이다.
역주15 三晉 : 春秋時代 晉나라의 三卿이었던 文侯 魏斯, 烈侯 趙籍, 景侯 韓虔의 3家가 기원전 453년에 쇠약해진 晉나라를 분할하여 세운 韓, 魏, 趙 세 나라를 세운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그 지역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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