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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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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蘊思鑄辭 動中經緯
君子之於己 自得而已矣 非有待於外也
然而曰 所以與人同其行也
人之於君子 潛心而已矣 非有待於外也
然而有表其閭名其鄕하여 欲其風聲氣烈暴於世之耳目而無窮者 所以與人同其好也
內有以得諸己하며 外有以與人同其好 此所以爲先王之道 而異乎百家之說也니라
隨爲州 去京師遠하여 其地僻絶이라
慶曆之間 起居舍人直龍圖閣河南尹公洙 以不爲在勢者所容謫是州하여 居於城東五里開元佛寺之金燈院이라
尹公 有行義文學하고 長於辨論하여 一時與之游者 皆世之聞人이니 而人人自以爲不能及이라
於是時 尹公之名震天下
而其所學 蓋不以貧富貴賤死生動其心이라
故其居於隨할새 日以考圖書通古今爲事하고 而不知其官之爲謫也러라
嘗於其居之北阜竹柏之間 結茅爲亭하여 以茇而嬉라가 歲餘乃去러라
旣去而人不忍廢壞하여 輒理之하고 因名之曰尹公之亭이라하니
州從事謝景平刻石記其事하니라
至治平四年하여는 司農少卿贊皇李公禹卿 爲是州할새 始因其故基하여 增庳益狹하되 斬材以易之하고 陶瓦以覆之
旣成而寬深亢爽하여 環隨之山 皆在几席이라
又以其舊亭으로 峙之於北하니 於是 隨人皆喜慰其思하고 而又獲游觀之美
其冬 李公以圖走京師하여 屬予記之하니라
蓋尹公之行見於事 言見於書者 固已赫然動人이어늘
而李公於是 又侈而大之者 豈獨慰隨人之思於一時하고 而與之共其樂哉리오
亦將使夫荒遐僻絶之境으로 至於後人見聞之所不及而傳其名覽其跡者 莫不低回俯仰하리라
想尹公之風聲氣烈컨대 至於愈遠而彌新하리니 是可謂與人同其好也
則李公之傳於世 亦豈有已乎
故予爲之書하노니 熙寧元年正月日也


04. 윤공정尹公亭에 쓴 기문
생각을 온축하고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 법도에 들어맞는다.
군자君子가 자신의 덕을 수양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만족할 뿐, 따로 밖에서 바라는 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자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 공자孔子의 말씀은 다른 사람과 그의 행동을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덕이 있는 군자君子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흠모할 뿐, 따로 밖에서 바라는 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자君子가 살았던 마을을 표창하고 그 고장을 세상에 알려 군자의 명예와 기절氣節을 세간의 이목에 드러내어 먼 후대까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그 좋아하는 마음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이다.
안으로는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고, 밖으로는 좋아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는 이것이야말로 선왕先王로써 제가諸家과 차별성을 띠는 이유이다.
수주隨州경사京師와의 거리가 멀어 그 땅이 후미지고 떨어져 있는 곳이다.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기거사인起居捨人 직용도각直龍圖閣 하남河南 사람 윤공尹公 가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아 이 로 좌천되어 수주성隨州城 동쪽 5리 지점에 있는 개원불사開元佛寺금등원金燈院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윤공尹公은 훌륭한 품행과 학식을 갖추고 논변에 뛰어나 동시대에 그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잘 알려진 인사人士들이었으며, 사람들마다 스스로 윤공尹公에게 못 미친다고 여겼다.
이때에 윤공尹公의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그의 학문 경지는 부귀富貴빈천貧賤, 사생死生 때문에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수준이다.
때문에 윤공尹公수주隨州에 기거했을 때 날마다 서적을 열람하고 고금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으로 일삼으며, 수주隨州에서 맡은 관직이 좌천된 것은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대나무와 잣나무가 심어진 언덕에 띠풀을 엮어 정자亭子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쉬며 놀다가 1년여 뒤에 마침내 그 지역을 떠났다.
윤공尹公이 떠난 뒤, 사람들은 차마 이 정자를 방치할 수 없어 번번이 수리를 하고, 이것을 계기로 이 정자를 윤공정尹公亭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주종사州從事 사경평謝景平이 비석을 새겨 그 일을 기록했다.
치평治平 4년(1067) 사농소경司農少卿찬황贊皇 사람 이공李公 우경禹卿이 이 수주隨州를 다스릴 때, 비로소 그가 머물던 옛 터에 비좁던 규모를 증축하고 좁았던 공간을 확장하면서 목재를 베어 원래의 것을 교체하고 기와를 구워 지붕을 얹었다.
중건공사가 끝나자 너비는 넓어졌고 높이도 시원하게 높아져서 수주隨州를 둘러싼 산이 모두 정자의 궤석几席에서 다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예전의 윤공정尹公亭을 북쪽으로 놓고 마주보게 하자, 이에 수주隨州 사람들이 모두 윤공尹公을 흠모하는 마음이 위안이 되었고 또 아름다운 유람거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이공李公도면圖面경사京師로 보내와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윤공尹公의 행실이 일로 드러난 것과 말이 글로 드러난 것은 본디 이미 성대하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공李公이 이때에 또 그 유적을 잘 꾸며 확대하였으니, 이는 어찌 한때 흠모하는 수주隨州 사람들의 마음만 위로하여 그들과 그 즐거움을 함께한 것일 뿐이겠는가.
더 나아가 장차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을, 견문見聞이 닿지 않는 먼 후대 사람에게까지 그 이름을 전하고 그 유적을 관람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고개 숙여 추억하고 흠모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윤공尹公의 명성과 기절氣節이 시대가 멀어질수록 더욱 새로워지게 될 것이니, 이는 다른 사람과 그 좋아하는 마음을 함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공李公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가는 것 역시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때문에 내가 이 문장을 쓰니, 때는 희령熙寧 원년 정월 어느 날이다.


역주
역주1 尹公亭記 : 작자 50세 때인 熙寧 원년(1068)에 쓴 記文이다. 여기서 尹公은 尹洙(1001~ 1047)를 가리킨다. 그는 古文運動의 선구자로 작자가 존경하던 사람이며, 이 작품을 쓴 시점은 尹洙가 사망한 지 21년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尹公亭은 尹洙가 隨州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정자로, 후에 사람들이 이 정자를 다시 수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작품에서는 군자와 일반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을 비교하며 논평한 다음, 尹洙가 정자를 지은 경위를 밝혔으며, 마지막에서는 尹公亭을 보수하고 글을 부탁한 李禹卿을 尹洙와 함께 칭송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역주2 疾沒世而名不稱焉 : 《論語》 〈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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