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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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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老臣典刑之言이라
素無學術하고 老不讀書하니 每欲披竭愚忠하야 上補聖明萬一이나하야 卒無可言이니이다
近者因病求醫하야 偶悟一事하니 推之有政이면 似可施行이니 惟陛下財(裁)幸하소서
臣近患러니 醫云 據病 一日而愈 若不下 半月而愈라하니이다
然中年以後 一下一衰하니 積衰之患 終身之憂也
臣私計之호니 終不以一日之快 而易終身之憂
遂用其言하야 以善藥磨治하야 半月而愈하니 初不傷氣하야 體力益完하니이다
因悟近日臣僚獻言하야 欲用兵西方 皆是醫人欲下하야 一日而愈者也 其勢亦未必不成이니이다이나 終非臣子深愛君父하야 欲出萬全之道也니이다
以陛下聖明으로 將賢士勇하니 何往不克이리오마는
而臣尙以爲非萬全者 俗言 觀井 自係大木之上하고 以車輪井而後 敢觀이라하니 此言雖鄙 而切於事
陛下愛民憂國 非特如彭祖之愛身이요 而兵者 凶器 動有存亡하야 其陷人可畏 有甚於井이라
臣願陛下之用兵 如彭祖之觀井이니 然後 爲得也하리이다
臣竊觀自古善用兵者 莫如 其破滅袁氏 最有巧思하니 請試爲陛下論之호리이다
이어늘 而操斂兵不追者 何也
所以緩紹而亂其國也니이다
紹歸國益驕하야 忠賢就戮하고 이라가 不及八年 而袁氏無遺種矣니이다
向使操急之라도 紹旣未可以一擧蕩滅이니 若懼而修政하야而立袁譚이면 則成敗 未可知也니이다
其後 北征烏丸하고 討袁尙, 袁熙하니 尙熙走遼東이어늘
或勸操遂平之한대 操曰 彼素畏尙等하니 吾今急之則合이요 緩之則自相圖하리니 其勢然也라하고
遂引兵還하야 曰 吾方使斬送其首라하더니 已而 果然하니
若操者 可謂巧於滅國矣니이다
滅國 大事也
不可以速이니 譬如小兒之毁齒 以漸搖撼之 則齒脫而小兒不知 若不以漸하야 一拔而得齒 則毁齒可以殺兒
臣願陛下之取西夏 如曹操之取袁氏也하노이다
方元昊强時 謀臣猛將 盡其智力호되 十年而不敢近이러니
今者 主弱臣强하야 하니 陛下使偏師一出하야 하고 築蘭, 會等州하시면 此眞千載一時 天以此賊授陛下之秋也니이다
今秉常 雖爲母族所簒이나 以意度之하면 其世家大族 亦未肯俯首連臂하야 爲此族用也어늘 今乃合而爲一하야 堅壁淸野하야 以抗王師 如左右手 此正同舟遇風之勢也
法當緩之니이다
今天威已震하니 臣願陛下選用大臣宿將素爲賊所畏服者하야 使兼帥하고 聚(衆)[重]兵境上하야 號稱百萬하고
蒐乘補卒호되 牛酒日至하고 金鼓之聲 聞於數百里間하야 外爲必討之勢로되 而實不出境하며 多出金幣하야하야 離壞其黨與하시고
且下令曰 尺土 吾不愛하고 一民 吾不有也리니 其有能以地與衆降者 卽以封之 有敢攘其地, 掠其人者 皆斬하리라하시면
不出一年 必有權均力敵하야 內自相疑者하니이다
人情不遠하야 各欲求全하야 及王師之未出 爭爲先降하야 以邀重賞하리니 陛下因而分裂之하시고 卽用其酋豪하야 命以爵秩하야 棋布錯峙하야
務使相仇 如漢封하고 通西域故事하며 不過於要害處 築一城하야 屯數千人하고 置一將하야 以護諸部하시면
可使數百年面內保境이요 不煩城守饋運하리니 豈非萬全之至計哉잇가
臣願陛下斷之於中하사 深慮而遠計之하노이다
夫爲人臣計 與爲人主計 不同하니이다
人臣 非攘地效首擄 無以爲功이어니와 爲陛下計 惟天下安, 社稷固耳니이다
陛下神聖冠古하사 動容擧意 皆是功德이니 但能措泰山之安하야 與天地等壽하시면하야 而堯, 舜, 禹, 湯 不足過也리이다
議者不知出此하고 爭欲急於功名하야 履危犯難하야 以勞聖慮하니 臣竊不取하노이다
劉洎諫唐太宗曰 皇天 以不言爲貴하고 聖人 以不言爲德이라
老子稱大辯若訥하고 莊子言至道無文이라하니이다
且多記則損心하고 多語則損氣하니 心氣內損하고 形神外勞하면 初雖不覺이나 後必爲累하리니 須爲社稷自愛라하니
人臣愛君 未有如洎之深切者也 臣竊慕之하노이다
雖謫守在外하야 不當妄言이나 然自念舊臣 譬之老馬
雖筋力已衰하야 不堪致遠이나 而經涉險阻하야 粗識道路하오니 惟陛下哀愍其愚而憐其意하시면 不勝幸甚이리이다
與代張方平諫用兵書同이나 而此篇行文處 不如張方平書
이나 引曹操之不追袁紹하고 所遺公孫康斬尙一節 卻切秉常情事하니 兵略 甚奇니라


05. 등보滕甫를 대신해서 서하西夏를 정벌할 것을 논한 글
노대신老大臣의 전형적인 말이다
은 평소 학술이 없고 늙어서 책을 읽지 못하니, 매번 어리석은 충심忠心을 모두 피력해서 만분의 일이나마 성명聖明한 군주를 돕고자 하나, 이 바짝 말라서 끝내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근자에 질병으로 인하여 의원을 찾다가 우연히 한 가지 일을 깨달았는데, 이것을 정사政事에 미루어가면 시행할 만할 듯하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잘 재량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 근래 적취병積聚病을 앓았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병에 근거해보면 마땅히 하제下劑를 써서 내려야 하니, 내리면 하루에 치료될 것이요, 내리지 않으면 반달이 되어야 치료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년中年 이후로는 한 번 내리면 한 번 쇠약해지니, 쇠약함이 쌓이는 근심은 종신의 우환이었습니다.
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끝내 하루의 상쾌함을 가지고 종신의 우환과 바꿀 수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원의 말을 따라 좋은 약을 가지고 치료하여 반달 만에 나으니, 애당초 기운을 손상하지 않아서 체력이 더욱 완전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근래에 신료臣僚들이 폐하께 말씀을 올려 서방西方(西夏)에 용병用兵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의원들이 하제下劑를 써서 하루 만에 병을 치료하려는 것임을 깨달았으니, 그 형세가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아니나, 끝내 신자臣子들이 군부君父를 깊이 사랑해서 만전萬全의 방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스럽고 밝으신 폐하께서는 장수가 어질고 군사들이 용맹하니 어디 간들 이기지 못하시겠습니까마는,
그런데도 이 오히려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세속에서 말하기를 “팽조彭祖가 우물을 굽어보아 살필 적에 자신이 우물에 빠질까 염려하여 몸을 큰 나무 위에 묶어놓고 수레바퀴로 우물을 덮은 뒤에야 살펴보았다.”라고 하니, 이 말이 비록 비속하나 일에는 간절합니다.
폐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나라를 우려하심이 비단 팽조彭祖가 자기 몸을 아끼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요, 병기兵器는 흉기여서 걸핏하면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으니, 사람을 죽음에 빠뜨려 두려울 만함이 우물보다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은 폐하께서 팽조彭祖가 우물을 관찰한 것처럼 용병用兵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만전萬全을 기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엎드려 살펴보니, 예로부터 용병用兵에 뛰어난 자로는 조조曹操만 한 이가 없고 그중에서도 원씨袁氏(袁紹)를 격파하여 멸망시킨 것이 가장 교묘한 생각이었으니, 한번 폐하를 위하여 논증論證해보겠습니다.
원소袁紹조조曹操의 열 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관도官渡에서 대패하여 겨우 자기 한 몸만 죽음을 면하였는데, 조조曹操가 군대를 거두고 추격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이것은 원소袁紹를 느슨히 풀어주어서 그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원소袁紹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더욱 교만해져서 충현忠賢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적자嫡子서자庶子가 서로 다투다가 8년이 채 못 되어 원씨袁氏는 남은 종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일 조조曹操가 급하게 몰아쳤더라도 원소袁紹를 일거에 소탕하여 멸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니, 원소袁紹가 만약 두려워하여 정사政事를 닦아 전풍田豐을 등용하고 원담袁譚을 후계자로 세웠더라면 성패成敗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뒤에 조조曹操가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고 원상袁尙원희袁熙를 토벌하자, 원상袁尙원희袁熙요동遼東으로 달아났습니다.
이에 혹자가 조조曹操에게 이들을 평정할 것을 권하자, 조조曹操는 말하기를 “원담袁譚이 평소 원상袁尙 등을 두려워하였는데, 내가 이제 급하게 몰아치면 형제가 연합할 것이고 느슨하게 버려두면 자기들끼리 서로 도모할 것이니, 그 형세가 그러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며 말하기를 “내 바야흐로 공손강公孫康으로 하여금 저들의 머리를 베어 보내게 만들겠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후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조曹操와 같은 자는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아주 교묘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큰 일입니다.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되니, 비유하면 어린아이의 썩은 이를 조금씩 흔들어 뽑으면 이가 빠져도 아이가 알지 못하나, 만약 조금씩 뽑지 않고 일거에 이를 뽑으면 썩은 이가 아이를 죽일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은 폐하께서 서하西夏를 점령하시기를 조조曹操원씨袁氏를 취한 것처럼 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옛날 원호元昊가 한참 강성할 적에는 우리 나라의 모사謀士와 용맹한 장수가 지혜와 힘을 다하였어도 감히 10년 동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하西夏가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내란이 일어났으니, 폐하께서 일부의 군대를 한번 출동시켜 이름난 들을 목 베고 거짓 공주公主들을 사로잡고 난주蘭州회주會州 등에 축성築城을 하신다면, 이는 참으로 하늘이 적을 폐하께 주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입니다.
병법兵法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으니, “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전혀 모르는 이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구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병상秉常이 비록 모족母族(외척)에게 찬탈을 당하였으나, 헤아려보면 그 세가世家대족大族들이 또한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팔뚝을 나란히 하여 이 외척을 위해 쓰이려 하지 않을 터인데, 지금 도리어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을 깨끗이 청소하고서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기를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구원하듯이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한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났을 때의 형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법상 마땅히 이들을 느슨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천자의 위엄이 이미 진동하고 있으니, 은 원컨대 폐하께서 대신과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수로서 평소 적이 두려워하고 복종할 만한 자를 선용選用하시어, 그로 하여금 5의 군대를 겸하여 거느리게 하고 많은 군대를 국경에 결집시킨 다음 백만 대군이라고 칭하게 하소서.
그런 다음 전차병戰車兵을 모으고 보졸步卒들을 보충하되 소고기와 술이 날로 이르게 하고 징소리와 북소리가 수백 리 사이에 들리게 해서, 겉으로는 반드시 토벌할 형세인 것처럼 하나 실제로는 국경을 나가지 않으며, 금과 폐백을 많이 풀어서 간사間使변사辯士를 보내어 그 당여黨與(같은 세력)들이 이반하고 무너지게 하소서.
또 한편으로 명령을 내리시기를 “한 자의 땅도 내가 아까워하지 않고 한 명의 백성도 내가 소유하지 않을 것이니, 땅과 백성을 가지고 항복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것을 가지고 봉해줄 것이요, 감히 땅을 빼앗고 인민을 노략질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겠다.”라고 하소서.
이렇게 하시면, 1년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저들과 권력이 비슷하고 힘이 대등하여 안에서 스스로 서로 의심하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인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각자 온전하기를 구하고자 하므로 저들은 천자의 군대가 출동하기도 전에 다투어 먼저 항복하여 많은 상을 바랄 것이니, 폐하께서 인하여 땅을 나누어주고 즉시 그 추호酋豪들을 등용하여 관작과 품계로써 임명하여, 바둑알들이 이곳과 저곳에 배치되어 서로 대치하듯이 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되도록 서로 원수가 되게 하여 옛날 나라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봉해준 것처럼 하고 서역西域을 통한 고사와 같이 하며, 또 다만 그 요해처要害處에 한 성을 축조하여 수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 장수를 설치하여 여러 를 보호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수백 년 동안 국내를 향하여 국경을 잘 보존할 것이고, 굳이 성을 지키고 군량을 운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어찌 만전萬全의 지극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마음속으로 결단하셔서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리소서.
인신人臣을 위한 계책은 군주를 위한 계책과는 똑같지 않습니다.
신하는 적의 땅을 빼앗고 적의 수급首級과 포로를 바치는 경우가 아니면 공을 세울 수가 없지만, 폐하를 위한 계책은 오직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사직社稷을 견고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성神聖함이 고금에 으뜸이셔서 용모를 움직이고 생각을 일으키시는 것이 모두 공덕功德이니, 다만 국가를 태산泰山처럼 편안한 곳에 두어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똑같이 오래가게 하신다면 죽백竹帛(靑史)에 공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어서 을 굳이 넘으려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이런 쪽으로 계책을 세울 줄을 알지 못하고, 다투어 공명을 급히 이루고자 하여 위험한 일을 하고 어려움을 무릅써서 성상聖上의 생각을 수고롭게 하니, 은 적이 취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을 줄이는 것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 일을 줄이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계劉洎나라 태종太宗에게 간하기를 “황천皇天은 말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성인聖人은 말하지 않는 것을 으로 여깁니다.
노자老子는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은 어눌한 듯하다.’고 하였고, 장자莊子는 ‘지극한 는 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기억을 많이 하면 마음을 손상시키고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을 손상시키니, 마음과 기운이 안에서 손상되고 형체와 정신이 밖에서 수고로우면 처음은 비록 깨닫지 못하나 뒤에는 반드시 가 될 것이니, 모름지기 사직社稷을 위하여 스스로 아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인신人臣중에 군주를 사랑하기를 유계劉洎처럼 깊고 간절하게 한 자가 있지 않으니, 은 속으로 그를 사모합니다.
이 비록 좌천되어 고을을 맡아 외지에 있으므로 망언妄言을 해서는 안 되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오래된 신하는 늙은 말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늙은 말은 이미 근력이 쇠해서 멀리 갈 수는 없으나 일찍이 험준하고 막힌 곳을 지나고 건너서 대강 길을 아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시고 저의 뜻을 어여삐 여겨주신다면 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위의 〈대장방평간용병서代張方平諫用兵書〉와 내용은 같으나 이 행문行文한 곳은 〈대장방평간용병서代張方平諫用兵書〉만 못하다.
그러나 조조曹操원소袁紹를 추격하지 않고 공손강公孫康에게 남겨주어서 원상袁尙의 목을 베어 오게 한 것을 인용한 한 대문大文(본문)은 서하西夏병상秉常의 실정과 일에 매우 절실하니, 병략兵略이 참으로 기이奇異하다.


역주
역주1 代滕甫論西夏書 : 滕甫는 字가 元發인데, 魯王의 諱를 피하여 字를 이름으로 쓰고 다시 字를 達道라 하였으며, 東陽 사람이다. 進士科로 출사하여 神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知制誥와 知諫院을 역임하였는데, 처족 李逢의 반역에 연좌되어 安州로 폄적되었다. 이때 蘇軾 또한 烏臺詩案으로 黃州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滕甫를 위하여 이 글을 지은 것이다.
역주2 肝肺枯涸 : 생각이 고갈되어 心中에 사려하는 바가 없음을 이른다.
역주3 積聚 : 뱃속에 氣血이 뭉쳐 응어리가 생기는 병증인데, 溫白元이나 沈香 등의 下劑를 써서 치료한다.
역주4 當下 : 마땅히 下劑를 써서 아래로 배설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역주5 彭祖 : 본명은 籛鏗으로 堯임금 때 彭城에 봉해진 뒤 夏‧殷‧周 三代에 걸쳐 8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인데, 《史記》 〈楚世家〉에는 五帝 중 한 명인 顓頊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劉向의 《列仙傳》에 彭祖의 행적과 장수비결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은 그 典據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蘇軾 당시의 俗說로 후대에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역주6 : 부
역주7 曹操 : 字는 孟德이고 廟號는 太祖이며 諡號는 武帝이다. 沛國 譙縣 사람으로 後漢 말기 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다. 뒤에 아들 曹丕가 선양을 받아 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太祖 武帝로 추존되었다.
역주8 袁紹以十倍之衆……僅以身免 : 後漢 建安 5년(200)에 중원의 패권을 놓고 袁紹와 曹操가 官渡에서 결전하였는데, 曹操가 대승하여 천하쟁패의 기틀을 닦았으며 袁紹는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陳壽의 《三國志》에 의하면 袁紹의 군사는 총 10여 만이었고 曹操의 군사는 1만에 불과하였으나 패전 후 袁紹는 겨우 8백여 騎의 패잔군을 거느리고 도망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9 嫡庶幷爭 : 여기서의 庶子는 妾의 아들이 아니고 衆子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後漢 建安 7년(202) 河北 지방의 패자였던 袁紹가 曹操에게 官渡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병을 얻어 죽으면서 後嗣를 미처 정하지 못했는데, 막하의 장수 審配와 逢紀 등이 袁紹의 유명이라고 칭탁하고는 적자인 袁譚을 물리치고 셋째 아들 袁尙을 후사로 세웠다. 이에 袁譚이 격분하여 袁尙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이후 형제간의 반목과 공격이 계속되다가 결국 曹操에게 모두 패망하였다.
역주10 田豐 : 後漢 靈帝 때에 茂才로 천거되어 侍御史로 있다가 환관들의 전횡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袁紹의 참모가 되어 뛰어난 계책을 많이 올렸다. 袁紹가 曹操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출병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袁紹의 노여움을 유발하여 군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으며, 그의 예언대로 袁紹가 官渡의 전투에서 대패하자 그의 慧眼을 시기한 참모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11 公孫康 : 後漢 獻帝 때에 遼東太守였던 公孫度의 아들이다. 袁熙와 袁尙이 曹操에게 쫓겨 귀의해 오자, 公孫康은 曹操를 두려워한 나머지 두 사람의 목을 베어 보내고 귀순하였다.
역주12 其國內亂 : 1067년 秉常이 7세에 西夏의 3代 임금으로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어머니 梁太后가 섭정하였다. 元豐 4년(1081)에 친정을 하게 된 秉常이 宋나라에 귀순하고자 하였으나 母后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끝내 母后에 의해 왕권을 박탈당하였다. 이에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역주13 斬名王하고 虜僞公主 : 名王은 西夏에서 봉한 큰 왕이며, 僞公主는 거짓 公主란 뜻으로 西夏를 괴뢰정권으로 보아 폄하한 명칭이다.
역주14 兵法有之……如左右手 : 吳와 越은 春秋時代 사이가 나빴던 두 나라로, 이 내용은 《孫子兵法》 〈九地〉에 보인다.
역주15 五路 : 鄜延路‧環慶路‧涇原路‧秦風路‧永興路의 5路를 이른다.
역주16 間使辯士 : 間使는 敵의 내정을 탐지하고 이간시키기 위해 보내는 使者를 이르고, 辯士는 戰國時代의 縱橫家처럼 변론이 뛰어나 遊說를 잘하는 선비를 이른다.
역주17 呼韓邪 : 匈奴 單于의 이름이다. 漢나라 宣帝 甘露 3년(B.C. 51)에 종족간의 내분에서 郅支單于에게 패하고 漢나라에 귀순할 것을 청하자, 宣帝가 이를 받아들여 董忠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도와 匈奴를 평정하게 하여 북방을 안정시켰다. 이로부터 漢나라와 匈奴는 강화하게 되었는데, 특히 元帝 建昭 6년(B.C. 33) 呼韓邪單于가 元帝의 後宮인 王昭君을 單于의 왕비인 閼氏로 맞이하여 漢과 匈奴의 화친이 더욱 굳어져 평화가 유지되었다.
역주18 竹帛에 不可勝紀 : 竹帛은 역사책으로, 고대에는 종이가 없어 竹簡과 비단에 글을 써서 전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세운 공이 너무 뛰어나 역사책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는 뜻이다.
역주19 古人有言……省(생)功不如省事 省事不如淸心 : 이 내용은 《晉書》 〈荀勖傳〉에 보인다. 荀勖은 말하기를 “관리를 줄이는 것이 관직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 관직을 줄이는 것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 일을 줄이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것만 못하다.[省吏不如省官 省官不如省事 省事不如淸心]”라고 하였다. 郞本에는 省功이 ‘省官’으로 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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