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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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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之兩守錢塘 其功業 於今猶有存者하니 而其當時所畫一利害 每每指悉如此하니라
臣聞 天下所在陂湖河渠之利 廢興成毁 皆若有數하니 惟聖人在上이면 則興利除害하야 易成而難廢라하니이다
翟子威 飯我豆하고 羹芋魁로다
反乎覆이면 陂當復이니 誰言者
兩黃鵠이라하니
蓋民心之所欲 而託之天하야 以爲有神下告我也니이다
由此觀之하면 陂湖河渠之類 久廢復開 事關興運하니 雖天道難知 而民心所欲 天必從之하니이다
杭州之有西湖 如人之有眉目하니 蓋不可廢也니이다
하니 方是時하야 湖漑田千餘頃이러니
置湖兵士千人하야 日夜開浚하니이다
自國初以來 稍廢不治하니 水涸草生하야 漸成하니이다
熙寧中 臣通判本州하니 則湖之葑合 蓋十二三耳러니 至今纔十六七年之間 遂堙塞其半하니이다
父老皆言호되 十年以來 水淺葑橫하야 如雲翳空하야倐忽便滿하니 更二十年이면 無西湖矣라하니
使杭州而無西湖 如人去其眉目이니 豈復爲人乎잇가
臣愚無知 竊謂西湖有不可廢者五라하노이다
故相王欽若 始奏하야 以西湖爲放生池하고 禁捕魚鳥하야 爲人主祈福하니 自是以來 每歲四月八日 郡人數萬 會于湖上하야 所活羽毛鱗介 以百萬數
皆西北向稽首하야 仰祝千萬歲壽하니이다
若一旦堙塞이면 使蛟龍魚鼈 同爲하리니 臣子坐觀 亦何心哉잇가
此西湖之不可廢者一也니이다
杭之爲州 本江海故地 水泉鹹苦하야 居民零落이러니 하니 然後 民足於水하야 井邑日富하야 百萬生聚하야 待此而後食하니이다
今湖狹水淺하야 六井漸壞하니 若二十年之後 盡爲葑田이면 則擧城之人 復飮鹹苦하야 其勢必自耗散하리니 此西湖之不可廢者二也니이다
白居易作하니 云 放水漑田 每減一寸이면 可漑十五頃이니 可漑五十頃이라
若蓄洩及時하면 則瀕河千頃 可無凶歲라하니이다
今雖不及千頃이나 而下湖數十里間茭菱穀米所獲 不貲하니 此西湖之不可廢者三也니이다
西湖深闊이면 則運河可以取足於湖水 若湖水不足이면 則必取足於江潮 潮之所過 泥沙渾濁하야 一石五斗하니 不出三歲 輒調兵夫十餘萬功하야 開浚이나
而河行市井中 蓋十餘里 吏卒騷擾하고 泥水狼藉하야 爲居民莫大之患하리니 此西湖之不可廢者四也니이다
天下酒稅之盛 未有如杭者也 歲課二十餘萬緡하고
而水泉之用 仰給於湖하니 若湖漸淺狹하야 水不應溝 則當勞人하야 遠取山泉하야
歲不下二十萬功하리니 此西湖之不可廢者五也니이다
臣以侍從으로 出膺寵寄하야 日覩西湖有必廢之漸하고 有五不可廢之憂하니 豈得苟安歲月하야 不任其責이릿가
輒已差官하야 打量湖上葑田하니 計二十五萬餘丈이요 度用夫二十餘萬功이니이다
近者 伏蒙皇帝陛下, 太皇太后陛下 以本路饑饉이라하사 特寬轉運司上供額斛五十餘萬石하고 出糶常平米亦數十萬石하시고 約勅諸路하야 不取五穀力勝稅錢하시니 東南之民所活 不可勝計니이다
今又特賜本路度牒三百 而杭獨得百道하니
臣謹以聖意增價하야라가 減價出賣하야 以濟飢民하니
而增減耗折之餘 尙得錢米 約共一萬餘貫石이라
臣輒以此錢米 募民開湖하면 度可得十萬功이니이다
自今月二十八日 興功이러니
農民父老縱觀太息하야 以謂二聖 旣捐利與民하야 活此一方하시고
而又以其餘棄 興久廢無窮之利하야 使數千人으로 得食其力하야 以度(渡)此凶歲라하고
蓋有泣下者하니이다
臣伏見民情如此로되 而錢米有限하야 所募未廣하야 葑合之地 尙存大半하니이다
若來者不嗣 則前功復棄하리니 深可痛惜이니이다
若更得度牒百道하면 則一擧募民하야 除去淨盡하야 不復遺患矣리이다
伏望 皇帝陛下, 太皇太后陛下 少賜詳覽하사 察臣所論西湖五不可廢之狀하시면 利害較然하리니 特出聖斷하사 別賜臣度牒五十道하시고 仍勅轉運, 提刑司하야 於前來所賜諸州度牒二百道內 契勘賑濟支用不盡者하야 更撥五十道價錢與臣하사
通成一百道하야 使臣得盡力畢志케하소서
半年之間 目見西湖復唐之舊하야 環三十里 際山爲岸이면 則農民父老與羽毛鱗介 同泳聖澤하야 無有窮已리이다
臣不勝大願하야 謹錄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4. 항주杭州서호西湖를 개통할 것을 청한 글
이 두 번 전당錢塘(항주杭州)을 맡음에 그 공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니, 당시에 계획한 이해利害가 매번 자세하게 지적한 것이 이와 같다.
이 들으니, “천하에 있는 제방과 하천의 이로움은 폐지되고 흥하고 이루어지고 망가지는 것이 다 운수가 있는 듯하니, 오직 성인聖人이 높은 자리에 계시면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해서, 이루기가 쉽고 폐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서한西漢 말기에 적방진翟方進승상丞相이 되어 처음 여남汝南에 있는 홍극鴻隙 저수지의 제방을 터놓아 물을 방류하자, 부로父老들이 원망하여 노래하기를 “제방을 무너뜨린 자가 누구인가?
그는 적자위翟子威이니, 우리에게 〈쌀밥을 못 먹게 하고〉 콩밥을 먹고 토란국을 먹게 하도다.
이것을 뒤집으려면 제방을 복구해야 할 것이니, 누가 이것을 고하는가?
두 마리 황곡黃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민심이 원하는 바를 하늘에 의탁해서 “천신天神이 내려와 우리들에게 고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라 손호孫皓 때에 오군吳郡에서 아뢰기를 “임평호臨平湖나라 말기부터 잡초가 무성하여 막혔었는데 이제 갑자기 개통(준설)되니, 장로長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 호수가 개통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손호孫皓는 이것을 자신의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는데, 얼마 후 나라 무제武帝나라를 점령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제방과 하천 등이 오랫동안 폐지되었다가 다시 개통되는 것은 흥왕하는 운에 관계되니, 비록 천도天道를 알기 어려우나 민심이 원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르는 법입니다.
항주杭州서호西湖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미목眉目이 있는 것과 같으니, 없애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나라 장경長慶 연간에 백거이白居易가 이 지방의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이때 서호西湖의 물로 전지田地 1천여 을 관개하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전씨錢氏가 나라를 소유하게 되자 서호西湖에 병사 1천 명을 배치해서 밤낮으로 준설하여 다시 개통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라 초기 이래로 점점 폐지되고 다스리지 않으니, 물이 마르고 잡초가 자라서 점점 줄밭을 이루었습니다.
희령熙寧 연간에 본주本州통판通判으로 있을 적에 호수에 줄풀이 모여 줄밭을 이룬 것이 10에 2, 3할 정도였는데 지금 겨우 16, 7년 사이에 마침내 그 절반이 메워져 버렸습니다.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하기를 “10년 전부터 물이 얕아지고 줄풀이 마구 자라서 마치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아 별안간에 꽉 차버렸으니, 다시 20년이 지나면 서호西湖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만일 항주杭州서호西湖가 없어진다면 사람의 미목眉目을 제거한 것과 같으니, 미목眉目이 없고서 어찌 다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으나 엎드려 생각하건대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이유가 다섯 가지가 있다고 여깁니다.
천희天禧 연간에 별세한 재상 왕흠약王欽若이 처음 상주上奏하여 서호西湖방생지放生池로 삼고 물고기와 새를 잡는 것을 금하여 군주(황제)를 위해 복을 기원하니, 이로부터 매년 4월 초파일이면 군민郡民 수만 명이 호숫가에 모여 방생하여 살려주는 새와 들짐승,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백만으로 헤아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계신 서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천만세 장수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이곳이 메워져 버린다면 교룡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함께 말라 죽는 붕어의 신세가 될 것인데, 신하들이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이것이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항주杭州란 고을은 본래 강해江海의 옛 지역이므로 우물물이 짜고 써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얼마 없었는데, 나라 이필李泌이 처음으로 호수의 물을 끌어와서 여섯 개의 우물을 만드니, 그런 뒤에야 물을 풍족하게 사용하여 정읍井邑(성시城市)이 날로 부유해져서 백만 명이 모여 살면서 서호西湖의 물을 의지하여 먹고살고 있습니다.
지금 호수가 좁아지고 물이 얕아져서 여섯 개의 우물이 점점 파괴되니, 만약 20년이 지난 뒤에 모두 줄밭이 된다면 성시城市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짜고 쓴 물을 마시게 되어 형편상 거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연히 줄어들고 흩어질 것이니, 이것이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서호석함기西湖石函記〉에 이르기를 “물을 방류해서 농지에 관개하는데, 매번 수위水位가 한 치쯤 줄어들면 전지田地 15을 관개할 수 있으니, 매번 하루 밤낮에 50을 관개할 수 있다.
만약 물을 가두고 빼기를 제때에 하면 강가에 있는 전지田地 1천 이 흉년이 들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1천 에는 미치지 못하나 호수 아래에 있는 수십 리 사이에서 교미와 마름과 미곡의 소득이 적지 않으니, 이것이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서호西湖가 깊어지고 넓어지면 운하運河에 필요한 물을 호수에서 충분히 끌어올 수 있고, 만약 호수의 물이 부족하면 반드시 강의 조수潮水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조수潮水가 지나가는 곳은 진흙과 모래로 혼탁해서 물 열 말에 진흙이 다섯 말이나 되니, 3년이 못 되어 곧 병부兵夫(인부人夫) 10만여 명을 징발해서 준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운하가 시정市井 가운데를 10여 리나 흘러가기 때문에 관리와 병졸들이 소란스럽고 흙탕물이 낭자해서 거주민의 막대한 근심이 될 것이니, 이것이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천하에서 항주杭州보다 주세酒稅가 더 많이 걷히는 곳이 없어서 해마다 20여만 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데 필요한 물을 서호西湖에 의지하고 있으니, 만약 서호西湖가 점점 얕아지고 좁아져서 물이 제대로 도랑에 흐르지 못하면, 마땅히 수고롭게 사람들을 동원하여 멀리 산에 있는 물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드는 인부가 해마다 20여만 명 이하가 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시종관侍從官으로 있다가 폐하께서 영광스럽게 지방을 맡겨주시어 항주杭州를 맡고 있는데, 날마다 서호西湖가 반드시 폐해질 조짐을 보면서, 또 다섯 가지 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음을 생각하니, 어찌 구차히 세월을 편안히 보내면서 그 책임을 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미 관원을 임명해서 호수의 줄밭을 측량해보니, 길이가 25만 여 이고 이것을 준설하는 데 필요한 인부가 20여만 명으로 헤아려졌습니다.
근자에 황제 폐하와 태황태후 폐하께서 본로本路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특별히 전운사轉運司상공上供해야 할 50여만 석을 면제해주셨고 상평창의 쌀을 방출한 것이 또한 수십만 석이며 여러 에 명하여 오곡역승세전五穀力勝稅錢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니, 동남 지방의 백성 중에 다시 살아난 자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또다시 본로本路도첩度牒 3백 장을 주셨는데 이 가운데에 우리 항주杭州가 홀로 1백 장을 얻었습니다.
은 삼가 성상聖上의 뜻에 따라 값을 올려서 중등미를 사들이게 했다가 값을 내려서 방매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더하고 줄여 소모한 나머지 아직도 돈과 쌀을 얻은 것이 대략 1만여 관석貫石이 됩니다.
이 곧 이 돈과 쌀을 가지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호수를 준설한다면, 헤아려보건대 10만여 명의 인부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달 28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농민과 부로父老들이 둘러보고 크게 감탄하며 이르기를 “두 분 성인聖人께서 이익을 덜어내어 백성들에게 주어서 이 한 지방 백성들을 살려주시고
또 남아서 버리게 된 것을 가지고 오랫동안 폐지됐던 무궁한 이익을 일으켜서 수천 명의 백성들로 하여금 제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게 하여 이 흉년을 넘기게 하셨다.”라고 하였고,
이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백성들의 실정이 이와 같음을 엎드려 보았으나 돈과 쌀이 한계가 있어 인부를 많이 모집하지 못해서 줄풀이 우거져 있는 땅이 아직도 태반이나 남아 있습니다.
만일 뒤에 부임하는 자가 이 일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예전에 한 일이 다시 버려지고 말 것이니, 매우 애통하고 안타깝습니다.
만일 다시 도첩度牒 1백 장을 얻는다면 일거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줄밭을 깨끗하게 제거해서 다시는 우환이 없게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 폐하와 태황태후 폐하께서는 이 논한, 서호西湖를 폐지할 수 없는 다섯 가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신다면 이해利害가 분명해질 것이니, 특별히 성상聖上의 결단을 내리셔서 별도로 에게 도첩度牒 50장을 하사하시고, 이어서 전운사轉運司제형사提刑司에게 명하시어 예전에 여러 에 하사하신 도첩度牒 2백 장 가운데 백성들을 구제하느라 지출하고 남은 것을 조사해서 다시 50장의 값을 떼어 에게 주소서.
그리하여 모두 1백 장을 만들어서 으로 하여금 힘을 다하여 뜻을 이루게 하소서.
반년 사이에 서호西湖나라 때의 옛 모습을 회복하여 30리 둘레에 을 따라 호안湖岸을 만든 것을 보게 된다면 농민과 부로父老들이 새와 들짐승, 물고기와 자라와 함께 성상聖上의 은혜를 입음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은 큰 소원을 억제할 수 없어 삼가 기록하여 상주上奏하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乞開杭州西湖狀 : 이 글은 本集에는 제목이 〈杭州乞度牒開西湖狀〉으로 되어 있고 郎曄本에는 〈乞開西湖狀〉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 편 머리에 ‘元祐五年四月二十九日 龍圖閣學士 左朝奉郞 知杭州 蘇軾狀奏’라는 26字가 있다.
역주2 翟方進……兩黃鵠 : 翟方進은 漢나라 成帝 때의 문신으로 字는 子威이고 汝南 上蔡 사람이다. 어렸을 적에 빈한하였으나 《春秋左氏傳》을 깊이 공부하여 博士가 되고, 成帝 때에 승상이 되어 高陵后에 봉해졌다. 그는 “汝南의 鴻隙 저수지를 파괴하면 수해의 우려가 없어지고 제방의 유지비를 줄일 수 있다.”는 아전의 보고를 따라 이를 파괴하였는데, 王莽 때에 이곳에 자주 가뭄이 들어 汝南 사람들의 원망을 많이 받았다. 黃鵠은 새 중에 가장 높이 날아 단번에 천 리를 날아간다는 전설상의 새인데, 여기서는 天神의 現身이란 뜻으로 쓰였다. 《漢書 翟方進傳》
역주3 孫皓時……晉武帝平吳 : 孫皓는 三國時代 吳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성질이 난폭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결국 晉나라 武帝의 토벌을 받고 멸망하였다. 武帝는 司馬炎으로 魏나라 司馬昭의 아들이고 司馬懿의 손자이다. 《三國志 吳志》
역주4 唐長慶中 白居易爲刺史 : 長慶은 唐나라 穆宗 때의 연호(821~824)이다. 白居易(772~846)는 唐나라의 시인이자 文臣으로 字는 樂天이고 號는 香山居士이며 河南省 新鄭 사람이다. 德宗 때에 29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진사과에 급제하여 翰林學士, 左拾遺 등을 역임하였고 穆宗 때에 杭州刺史에 제수되었는데, 西湖를 다스리고 둑을 쌓자 백성들이 이 둑을 白公提라 불렀다.
역주5 錢氏有國 : 錢氏는 五代時代 十國 가운데 하나인 吳越國의 錢鏐와 그 자손들을 이르는데, 杭州에 도읍하였다. 吳越國은 황제를 참칭하지 않고 왕이라 칭하고 중원의 통치자에게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아 전쟁의 화를 겪지 않았으며, 錢塘江과 西湖의 治水에 힘을 쏟아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역주6 葑田 : 줄풀이나 마름 등 수초들이 여러 해 동안 자라 뿌리가 얽히고 그 위에 진흙이 쌓여서 묵밭이 된 것을 말한다.
역주7 天禧 : 宋나라 眞宗의 연호(1017~1021)이다.
역주8 涸轍之鮒 : 涸轍은 수레바퀴 자국에 모인 물이 말라가는 것이고, 鮒는 붕어로, 《莊子》 〈外物〉에 보인다.
역주9 自唐李泌……作六井 : 李泌(722~789)은 唐나라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字는 長源이다. 玄宗․肅宗․代宗․德宗 등 네 조정에 연이어 벼슬하였고 끝내 재상에 올랐는데, 代宗 때 杭州刺史로 부임하여 六井을 만드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六井은 相國井, 西井, 金午井, 方井, 百龜井, 小方井으로 杭州 시내에 고르게 위치하였는데, 뒤에 전부 매몰되었다가 穆宗 때에 刺史로 부임한 白居易가 西湖를 준설하고 六井을 다시 복구하였다. 宋나라 때에 이르러 다시 대부분 매몰되었었는데, 蘇軾이 知杭州事로 부임하여 모두 복구하였다.
역주10 西湖石函記 : 원 제목은 〈錢塘湖石記〉로, 白居易가 杭州刺史로 있던 長慶 4년(824)에 기록하였다. 西湖에 대해 刺史가 알아야 할 일 네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역주11 每一伏時 : 白居易가 지은 〈錢塘湖石記〉에는 伏이 復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자세하지 않으나 우선 一晝夜로 해석하였다.
역주12 入中米 : 중등 품질의 쌀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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