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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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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書所論이나 然却是蘇長公文章本色이니라
受性剛簡하고 學迂材下하야 不敢復齒縉紳이라
自還으로 見平生親舊 惘然如隔世人이어든 況與 無一日之雅하니 而敢求交乎
數賜見臨하야 하니 幸甚過望 不敢言也로라
所示書敎及詩賦雜文 觀之熟矣
大略如行雲流水하야 初無定質하야 但常行於所當行하고 常止於不可不止하야
文理自然하고 姿態橫生이라
이라하시고 라하시니 夫言止於達意 則疑若不文이나 是大不然이라
하니 能使是物 了然於心者 蓋千萬人而不一遇也어든 而況能使了然於口與手者乎
是之謂辭達이니 辭至於能達이면 則文不可勝用矣
揚雄 好爲艱深之詞하야 以文淺易之說하니 若正言之 則人人知之矣리라
終身雕蟲하고 而獨變其音節하야 便謂之經 可乎
雖與日月爭光이라도 可也어늘
可以其似賦而謂之雕蟲乎
어늘 而乃以賦鄙之하야 至與하니 雄之陋 如此比者甚衆이라
可與知者道 難與俗人言也 因論文하야 偶及之耳로라
言 文章 如精金美玉하야 市有定價하야 非人所能以口舌貴賤也라하시니 紛紛多言 豈能有益於左右리오
愧悚不已로라


10. 사거렴謝擧廉에게 답한 편지
이 글에 논한 것은 문장이나, 이것은 또 소장공蘇長公 문장의 본색이기도 하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소탈하며, 학문은 오활하고 재주는 낮아서 죄에 걸려 폐출당한 지 수년에 감히 다시는 사대부 축에 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북海北에서 돌아와 평소의 친구들을 만나볼 적에도 아득하여 마치 딴 세상의 사람들과 같았는데, 하물며 좌우左右와는 단 하루도 만나 함께한 적이 없으니, 감히 사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족하足下께서 여러 번 왕림하여 일산을 기울이고 잠시 만났어도 구면인 것처럼 대해주시니, 매우 다행으로 기대에 넘치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보여주신 편지와 시부詩賦잡문雜文은 여러 번 익숙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족하足下의 문장은 대략 떠돌아다니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아 애당초 정해진 형질이 없어서, 다만 항상 마땅히 가야 할 곳에는 가고 항상 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는 그칩니다.
그리하여 문리文理가 자연스럽고 미려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이 문채 나지 않으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멀지 못하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말은 뜻이 통달하면 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말이 뜻을 통달하는 데 그치면 말에 문채가 없을 것처럼 생각되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으로 사물의 미묘함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바람을 묶어두고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으니, 이 사물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이해하는 자는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것을 분명하게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는 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말이 통달했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 통달하는데 이르면 문장을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 입니다.
양웅揚雄은 어렵고 심오한 글을 짓기를 좋아해서 천근하고 쉬운 말에 문채를 입혀 어렵게 만들었으니, 만약 이것을 바로 말했으면 사람마다 그 내용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조충雕蟲전각篆刻이라는 것이니,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이 모두 이러한 것들인데도 유독 를 지은 것을 후회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종신토록 조충雕蟲의 짓을 하고 오직 그 음절만을 바꾸어서 곧 이것을 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은 가 두 번 변한 것이니, 비록 해와 달과 광채를 다툰다고 하더라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글이 와 비슷하다고 하여 조충雕蟲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의賈誼공자孔子를 뵈었으면 에 올라가는 것도 충분할 터인데 를 지었다고 하여 그를 비천하게 여겨서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부류로 보았으니, 양웅揚雄의 누추함이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와 함께 말할 수 있고 속인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내가 문장을 논하다가 우연히 여기에 말이 미쳤을 뿐입니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구양수歐陽脩)이 말씀하기를 “문장은 정제精製과 아름다운 과 같아, 시장에 정해진 값이 있어서 사람들이 입과 혀로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분분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어찌 당신에게 유익하겠습니까?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역주
역주1 答謝擧廉書 : 이 글은 元符 3년(1100) 蘇軾이 海南島의 謫地에서 사면을 받아 돌아오면서 廣東의 淸遠을 지날 적에 지어준 것인데, 文學을 논한 글로 유명하다. 謝擧廉은 字가 民師로 新淦 사람이다. 아버지 懋와 叔父인 岐, 그리고 아우 世充과 함께 元豐 8년(1085) 進士試에 급제하여 ‘四謝’라고 일컬어졌는데, 이때 廣州의 推官으로 있었다.
역주2 坐廢累年 : 坐廢는 죄에 걸려 폐출됨을 이르는데, 蘇軾이 紹聖 元年(1094) 惠州로 좌천되었으며, 다시 瓊州의 儋耳로 貶謫되었다가 元符 3년(1100)이 되어서야 겨우 嶺南을 넘어 북쪽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儋耳는 海南島이다.
역주3 海北 : 海南島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4 左右 : 상대방의 좌우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상대방을 높여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左右에 있는 사람을 칭하였는데, 執事라는 말과 같다.
역주5 傾蓋如故 : 일산을 기울여 잠시 만나도 구면과 같다는 뜻으로, 漢나라 때 鄒陽의 〈獄中上書自明〉에 나오는 내용이다. 옛날 길에서 서로 만나면 일산을 기울여 두 사람이 말하기 편리하게 하였는데, 곧 처음 만나고도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낌을 이른다.
역주6 孔子曰……行之不遠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5년조에 “仲尼(孔子)가 말씀하였다. ‘옛 책에 말은 뜻(생각)을 충분히 표현하고, 문장(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을 표현한다.’고 하였으니, 말이 아니면 누가 그 뜻을 알겠는가? 말에 문채가 없으면 세상에 행해져도 멀지 못하다.[仲尼曰 志有之 言以足志 文以足言 不言 誰知其志 言之無文 行而不遠]”라고 보인다.
역주7 又曰 辭達而已矣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에 보이는데, 언어와 문장은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면 된다는 뜻이다.
역주8 求物之妙 如繫風捕影 : 繫風捕影은 바람을 붙잡아 매어놓고 그림자를 잡는다는 뜻으로 실체가 없어 잡기 어려움을 나타내는데, 곧 사물의 오묘함을 문장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9 雕蟲篆刻者……皆是物也 : 太玄은 《太玄經》으로 《法言》과 함께 모두 揚雄이 지은 책이다. 《太玄經》은 《易經》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고 《法言》은 《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것인데, 蘇軾은 이 두 책을 평가절하하여 바로 ‘雕蟲篆刻’이라고 비평한 것이다. 雕蟲篆刻이란 벌레 모양이나 篆書를 조각하듯이 문장을 美辭麗句로 꾸미는 작은 기교를 가리키는데, 본래 揚雄이 辭賦를 비하하여 한 말이다.
역주10 獨悔於賦 : 揚雄은 賦를 하찮게 여겨 자신이 젊어서 賦를 지은 것을 후회하였다. 《法言》 〈吾子〉에 “어떤 사람이 揚雄에게 ‘그대가 젊어서 賦를 짓기 좋아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揚雄은 ‘그러하다. 이것은 雕蟲篆刻과 같아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내가 커서는 짓지 않았다.’라고 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1 屈原作離騷經 蓋風雅之再變者 : 屈原(B.C. 340~B.C. 278)은 戰國時代 楚나라의 충신으로 〈離騷〉 등의 楚辭를 지어 辭賦의 원조로 알려져 있으며, 〈離騷〉는 前漢時代부터 〈離騷經〉으로 불려 經典으로 추앙받았다. 風․雅는 《詩經》 가운데 〈國風〉과 〈小雅〉․〈大雅〉를 이르는데, 〈周南〉과 〈召南〉은 正風, 十三列國의 風은 變風이라 하며, 雅도 正小雅와 正大雅, 變小雅와 變大雅로 구분하는데, 대체로 난세의 것을 變風․變雅라 한다. 그러므로 ‘〈離騷經〉은 風․雅가 두 번 變한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揚雄은 〈離騷經〉 역시 辭賦라 하여 좋게 보지 않았다.
역주12 使賈誼見孔子 升堂有餘矣 : 賈誼(B.C. 200~B.C. 168)는 前漢 文帝 때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升堂은 堂(마루)에 올라가는 것으로 학문의 깊은 경지를 비유한다. 《論語》 〈先進〉에 孔子는 子路(仲由)를 평하여 “由는 堂에는 올라왔고 아직 室(방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由也升堂矣 未入于室也]”라고 하였다. 이후로 升堂入室은 학문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데, 升堂은 入室의 경지에는 못 미치나 역시 상당히 높은 수준을 이른다. 賈誼의 문장은 蘇氏 三父子도 모두 높이 평가하였으나, 揚雄은 賈誼 역시 辭賦를 지었다 하여 비판하였다.
역주13 司馬相如同科 : 司馬相如(B.C. 179~B.C. 117)는 西蜀(成都) 사람으로 前漢時代 辭賦의 大家이며, 同科는 같은 등급을 이른다. 揚雄의 《法言》 〈吾子〉에 “詩人의 賦는 화려하면서도 법칙에 맞는데, 詞人(文章家)의 賦는 화려하여 음탕하다. 만일 孔丘(孔子)의 문하에서 賦를 사용했다면, 賈誼는 堂에 올랐을 것이요, 司馬相如는 室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孔子의 문하에서 賦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어쩌겠는가.[詩人之賦麗而則 詞人之賦麗而淫 如孔丘之門用賦也 則賈誼升堂 相如入室 其如不用何]”라고 하였다. 同科는 同等이란 말과 같다.
역주14 歐陽文忠公 : 文忠은 歐陽脩의 諡號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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