曰 學者皆稱周伐紂
하고 居
이라하니 其實
은 不然
이라
自平王
으로 至於亡
히 非有大無道者也
요 을 諸侯服享
이라 然
이나 終以不振
은 則東遷之過也
일새니라
昔
에 武王克商
하고 遷九鼎于洛邑
하며 成王, 周公
이 復增營之
러니 하야 以重王室而已
요 非有意于遷也
라
不幸而有敗하야 至於乞假以生이라도 可也라 然이나 終不敢議田宅하나니라
今平王이 擧文武成康之業하야 而大棄之하니 此는 一敗而鬻田宅者也라
夏商之王
은 皆五六百年
하니 其先王之德
이 無以過周
요 而後王之敗
도 亦不減
라
然이나 至于桀紂而後亡하고 其未亡也엔 天下宗之하야
요 는 方是時
에 周人如狄人也
하야 逐水草而居
하니 豈所難哉
리오
其餘避寇而遷都는 未有不亡이요 雖不卽亡이라도 未有能復振者也하니라
宗廟宮室
이 盡爲灰燼
이어늘 는 欲遷都
하고 하야 將從之矣
러니
王者는 不以豊儉移都하나니 若弘衛文大帛之冠이면 何適而不可리오
且北寇方彊하니 一旦示弱하야 竄於蠻越이면 望實皆喪矣라한대
平王之初에 周雖不如楚之彊이나 顧不愈於東晉之微乎아
使平王有一王導하야 定不遷之計하고 收豊鎬之遺民하야 而修文武成康之政하야 以形勢로 臨東諸侯런들 齊晉雖彊이나 未敢貳也리니 而秦何自霸哉리오
하고 하고 하고 이러니 皆不復振
하야 有亡徵焉
하니라
予覽此文
컨대 以遷之一字
로 爲案
하니 으로 共十三國
이니 以錯證存亡處 如一線矣
로다
이 글은 한유韓愈의 〈휘변諱辯〉과 같아 소씨蘇氏의 본색이 아니니, 이는 분명 송宋나라가 남南으로 건너간 데 대한 한 단안斷案이 된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학자들이 모두 ‘주周나라가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낙읍洛邑에 거주했다.’라고 말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무왕武王이 낙읍洛邑을 경영하였고 성왕成王이 소공召公으로 하여금 점을 쳐서 거주하게 한 다음 구정九鼎을 여기에 두었는데, 주周나라가 다시 풍酆․호鎬에 도읍하다가 견융犬戎이 유왕幽王을 패망시키자, 주周나라가 비로소 동쪽으로 낙읍洛邑에 천도했다.”라고 하였다.
주周나라의 실책은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있지 않다.
주周나라는 평왕平王으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크게 무도한 군주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자왕頿王의 신성함에 제후들이 복종하여 공물을 올렸으나, 그런데도 주周나라가 끝내 떨치지 못한 것은 천도遷都한 잘못 때문이었다.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구정九鼎을 낙읍洛邑으로 옮겼으며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이 다시 낙읍洛邑을 경영했었는데, 주공周公이 별세함에 군진君陳과 필공畢公이 번갈아 이곳에 거주하여 왕실을 중하게 했을 뿐이요, 천도遷都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공周公은 자신을 성주成周에 장례하고자 했는데 성왕成王이 그를 필畢 땅에 장례하였으니, 이 어찌 천도遷都에 뜻이 있었던 것이겠는가?
지금 부유한 백성의 집안이 그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전지田地와 집뿐이다.
그런데 자손들이 불행히 실패함이 있어서 구걸하며 사는 지경에 이르는 수는 있으나, 자손들이 끝내 전지田地와 집을 팔 것을 의논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평왕平王은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기업을 들어서 크게 버렸으니, 이는 한 번 실패하자 부자의 자손이 전지田地와 집을 팔아먹은 셈이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왕업은 모두 5, 6백 년이 되었는데, 선왕先王들의 덕이 주周나라보다 나을 것이 없고 후대後代 왕들의 실패 또한 주周나라의 유왕幽王과 여왕厲王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夏나라와 상商나라는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에 이른 뒤에야 멸망하였으며, 멸망하기 전에는 천하가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종주로 섬겼다.
그리하여 동주東周처럼 천자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실제로는 망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바로 전지田地와 집을 팔아먹지 않은 효험이었다.
반경盤庚이 천도한 것은 은殷나라의 옛터로 돌아간 것이요,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한 것은 이때에 주周나라 사람들이 오랑캐들과 똑같아서 물과 풀을 따라 거주한 것이었으니, 어찌 천도하기가 어려웠겠는가?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황하를 건너간 것은 제齊나라를 믿고 의지하여 나라를 보존한 것이며, 제齊나라가 임치臨淄로 천도하고 진晉나라가 강絳과 신전新田으로 천도한 것은 모두 전성기의 일이었으니, 두려운 바가 있어서 천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나머지 적을 피하여 천도한 자들은 망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비록 즉시 망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떨친 자가 있지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초楚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여러 오랑캐들이 배반하여 신성申城과 식성息城의 북문을 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초楚나라 사람들이 판고阪高로 천도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위가蔿賈가 말하기를 “불가하다.
우리가 간다면 적 또한 따라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楚나라는 진秦나라 사람과 파巴 땅 사람들을 거느리고 용庸나라를 멸망시켜 이에 초楚나라가 비로소 강대국이 되었다.
동진東晉은 소준蘇峻의 난리에 나라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이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온교溫嶠는 예장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였고, 삼오三吳의 호걸들은 회계會稽로 천도하고자 해서 장차 이들의 의견을 따르려 하였다.
이때 왕도王導가 홀로 불가하다 하여 말하기를 “금릉金陵은 왕자王者의 도읍지이다.
왕자王者는 재정이 풍족하고 부족함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으니, 만약 옛날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거친 명주베로 만든 관을 쓴 것처럼 검소함을 넓힌다면 어디를 간들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낙토樂土라도 빈 터가 되고 말 것이다.
또 북쪽 오랑캐들이 지금 강성하니, 하루아침에 우리가 약함을 보여서 만월蠻越 지방으로 도망간다면 명분과 실제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도를 결행하지 아니하여 진晉나라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훌륭하다.
평왕平王의 즉위 초기에 주周나라가 비록 초楚나라의 강성함만은 못했으나, 다만 동진東晉의 미약함보다는 낫지 않았겠는가?
만일 평왕平王에게 왕도王導와 같은 신하 한 명이 있어서 천도하지 않을 계책을 확정하고 풍酆․호鎬의 유민遺民을 거두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정사를 닦아 그 형세로써 동쪽 제후들에게 임했더라면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비록 강성하다 하더라도 감히 배반하지 못했을 것이니, 진秦나라가 어찌 자기 마음대로 패자霸者가 될 수 있었겠는가?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진秦나라를 두려워하여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고, 초楚나라 소왕昭王은 오吳나라를 두려워하여 약鄀 땅으로 천도하였고, 경양왕頃襄王은 진秦나라를 두려워하여 진陳 땅으로 천도하였고, 고열왕考烈王은 진秦나라를 두려워하여 수춘壽春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다시 떨치지 못하여 망할 징조가 있었다.
동한東漢 말기에 동탁董卓이 헌제獻帝를 겁박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해서 한漢나라가 마침내 망하였고, 근세에는 이경李景이 예장豫章으로 천도하여 또한 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실책은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보건대, 천遷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았으니, 두려움이 없이 그냥 천도한 경우가 다섯이고,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천도를 결행하지 않은 경우가 둘이고, 두려움 때문에 천도한 경우가 여섯으로 모두 열세 나라인데, 이것을 가지고 존망存亡을 번갈아 증명한 부분이 한 줄의 선처럼 일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