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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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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文 하니 非蘇氏本色이니 分明是一斷案이니라
曰 學者皆稱周伐紂하고이라하니 其實 不然이라
武王營之하고 하야이러니라가 하니라
蘇子曰
周之失計 未有如東遷之謬也
自平王으로 至於亡 非有大無道者也 諸侯服享이라이나 終以不振 則東遷之過也일새니라
武王克商하고 遷九鼎于洛邑하며 成王, 周公 復增營之러니 하야 以重王室而已 非有意于遷也
하니 此豈有意于遷哉리오
今夫富民之家 所以遺其子孫者 田宅而已
不幸而有敗하야 至於乞假以生이라도 可也이나 終不敢議田宅하나니라
今平王 擧文武成康之業하야 而大棄之하니 一敗而鬻田宅者也
夏商之王 皆五六百年하니 其先王之德 無以過周 而後王之敗 亦不減
이나 至于桀紂而後亡하고 其未亡也 天下宗之하야
不如東周之名存而實亡也하니
是何也
則不鬻田宅之效也니라
方是時 周人如狄人也하야 逐水草而居하니 豈所難哉리오
其餘避寇而遷都 未有不亡이요 雖不卽亡이라도 未有能復振者也하니라
楚人 謀徙于阪高러니 曰 不可하다
我能往이면 寇亦能往이라하니
於是乎以하야 而楚始大하니라
宗廟宮室 盡爲灰燼이어늘 欲遷都하고 하야 將從之矣러니
王者 不以豊儉移都하나니 若弘衛文大帛之冠이면 何適而不可리오
不然이면 雖樂土라도 爲墟矣리라
且北寇方彊하니 一旦示弱하야 竄於蠻越이면 望實皆喪矣라한대
乃不果遷하야 而晉復安하니 賢哉
導也
可謂能定大事矣로다
嗟夫
平王之初 周雖不如楚之彊이나 顧不愈於東晉之微乎
使平王有一王導하야 定不遷之計하고 收豊鎬之遺民하야 而修文武成康之政하야 以形勢 臨東諸侯런들 齊晉雖彊이나 未敢貳也리니 而秦何自霸哉리오
曰 周之失計 未有如東遷之謬也라하노라
予覽此文컨대 以遷之一字 爲案하니 으로 共十三國이니 以錯證存亡處 如一線矣로다


02. 평왕平王에 대한
이 글은 한유韓愈의 〈휘변諱辯〉과 같아 소씨蘇氏의 본색이 아니니, 이는 분명 나라가 으로 건너간 데 대한 한 단안斷案이 된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학자들이 모두 ‘나라가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낙읍洛邑에 거주했다.’라고 말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무왕武王낙읍洛邑을 경영하였고 성왕成王소공召公으로 하여금 점을 쳐서 거주하게 한 다음 구정九鼎을 여기에 두었는데, 나라가 다시 에 도읍하다가 견융犬戎유왕幽王을 패망시키자, 나라가 비로소 동쪽으로 낙읍洛邑에 천도했다.”라고 하였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나라의 실책은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있지 않다.
나라는 평왕平王으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크게 무도한 군주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자왕頿王의 신성함에 제후들이 복종하여 공물을 올렸으나, 그런데도 나라가 끝내 떨치지 못한 것은 천도遷都한 잘못 때문이었다.
옛날 무왕武王나라를 이기고 구정九鼎낙읍洛邑으로 옮겼으며 성왕成王주공周公이 다시 낙읍洛邑을 경영했었는데, 주공周公이 별세함에 군진君陳필공畢公이 번갈아 이곳에 거주하여 왕실을 중하게 했을 뿐이요, 천도遷都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공周公은 자신을 성주成周에 장례하고자 했는데 성왕成王이 그를 땅에 장례하였으니, 이 어찌 천도遷都에 뜻이 있었던 것이겠는가?
지금 부유한 백성의 집안이 그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전지田地와 집뿐이다.
그런데 자손들이 불행히 실패함이 있어서 구걸하며 사는 지경에 이르는 수는 있으나, 자손들이 끝내 전지田地와 집을 팔 것을 의논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평왕平王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기업을 들어서 크게 버렸으니, 이는 한 번 실패하자 부자의 자손이 전지田地와 집을 팔아먹은 셈이다.
나라와 나라의 왕업은 모두 5, 6백 년이 되었는데, 선왕先王들의 덕이 나라보다 나을 것이 없고 후대後代 왕들의 실패 또한 나라의 유왕幽王여왕厲王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라와 나라는 걸왕桀王주왕紂王에 이른 뒤에야 멸망하였으며, 멸망하기 전에는 천하가 나라와 나라를 종주로 섬겼다.
그리하여 동주東周처럼 천자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실제로는 망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이는 어째서인가?
바로 전지田地와 집을 팔아먹지 않은 효험이었다.
반경盤庚이 천도한 것은 나라의 옛터로 돌아간 것이요, 고공단보古公亶父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한 것은 이때에 나라 사람들이 오랑캐들과 똑같아서 물과 풀을 따라 거주한 것이었으니, 어찌 천도하기가 어려웠겠는가?
나라 문공文公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황하를 건너간 것은 나라를 믿고 의지하여 나라를 보존한 것이며, 나라가 임치臨淄로 천도하고 나라가 신전新田으로 천도한 것은 모두 전성기의 일이었으니, 두려운 바가 있어서 천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나머지 적을 피하여 천도한 자들은 망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비록 즉시 망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떨친 자가 있지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나라에 큰 기근이 들자 여러 오랑캐들이 배반하여 신성申城식성息城의 북문을 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판고阪高로 천도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위가蔿賈가 말하기를 “불가하다.
우리가 간다면 적 또한 따라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는 나라 사람과 땅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멸망시켜 이에 나라가 비로소 강대국이 되었다.
동진東晉소준蘇峻의 난리에 나라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묘宗廟궁실宮室이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온교溫嶠예장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였고, 삼오三吳의 호걸들은 회계會稽로 천도하고자 해서 장차 이들의 의견을 따르려 하였다.
이때 왕도王導가 홀로 불가하다 하여 말하기를 “금릉金陵왕자王者의 도읍지이다.
왕자王者는 재정이 풍족하고 부족함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으니, 만약 옛날 나라 문공文公이 거친 명주베로 만든 관을 쓴 것처럼 검소함을 넓힌다면 어디를 간들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낙토樂土라도 빈 터가 되고 말 것이다.
또 북쪽 오랑캐들이 지금 강성하니, 하루아침에 우리가 약함을 보여서 만월蠻越 지방으로 도망간다면 명분과 실제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도를 결행하지 아니하여 나라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훌륭하다.
왕도王導여!
능히 대사大事를 결정했다고 이를 만하다.
아! 슬프다.
평왕平王의 즉위 초기에 나라가 비록 나라의 강성함만은 못했으나, 다만 동진東晉의 미약함보다는 낫지 않았겠는가?
만일 평왕平王에게 왕도王導와 같은 신하 한 명이 있어서 천도하지 않을 계책을 확정하고 유민遺民을 거두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정사를 닦아 그 형세로써 동쪽 제후들에게 임했더라면 나라와 나라가 비록 강성하다 하더라도 감히 배반하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가 어찌 자기 마음대로 패자霸者가 될 수 있었겠는가?
나라 혜왕惠王나라를 두려워하여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고, 나라 소왕昭王나라를 두려워하여 땅으로 천도하였고, 경양왕頃襄王나라를 두려워하여 땅으로 천도하였고, 고열왕考烈王나라를 두려워하여 수춘壽春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다시 떨치지 못하여 망할 징조가 있었다.
동한東漢 말기에 동탁董卓헌제獻帝를 겁박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해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고, 근세에는 이경李景예장豫章으로 천도하여 또한 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나라의 실책은 동쪽으로 천도遷都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보건대, 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았으니, 두려움이 없이 그냥 천도한 경우가 다섯이고,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천도를 결행하지 않은 경우가 둘이고, 두려움 때문에 천도한 경우가 여섯으로 모두 열세 나라인데, 이것을 가지고 존망存亡을 번갈아 증명한 부분이 한 줄의 선처럼 일관되어 있다.


역주
역주1 平王論 : 이 글은 本集에는 제목이 〈論周東遷〉으로 되어 있고, 趙刻의 《志林》에는 〈周東遷失計〉로 되어 있다. 《總案》에는 蘇軾이 젊은 시절에 썼다고 하였으나 실은 〈武王論〉과 같은 시기에 해남도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저작 시기는 미상이다.
역주2 類韓諱辯 : 韓은 唐나라의 문장가인 韓愈이며, 諱는 선조나 군주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피하여 쓰지 않는 것으로 〈諱辯〉은 韓愈가 당시 지나치게 諱하는 세태를 논변한 글이다. 李賀가 進士試에 급제하자 사람들은 李賀의 아버지 이름이 晉肅으로 音이 進士와 유사하다 하여 李賀가 진사시에 응시해서는 안 된다고 비평하므로 韓愈가 이 글을 지었는데, 《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다.
역주3 宋南渡 : 宋나라의 徽宗과 欽宗이 金나라의 공격을 받고 金나라로 끌려가서 죽자, 高宗이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 遷都한 일을 가리킨다. 이것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北宋, 이후를 南宋이라 칭하였다.
역주4 太史公 : 司馬遷을 이른다. 여기에서 인용한 글은 《史記》 〈周本紀〉에 보이는데, 이 글과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역주5 洛邑 : 옛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 洛陽市이다.
역주6 成王使召公卜居之 : 《史記》 〈周本紀〉에 의하면 “成王 즉위 7년에 成王이 豐 땅에 있으면서 召公으로 하여금 洛邑을 다시 경영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召公은 周나라 宗親인 姬奭이다. 일설에는 文王의 아들이고 成王의 숙부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卜居는 거주할 곳을 점치는 것이다.
역주7 九鼎 : 나라에 전해오는 보물로 王權을 상징한다. 《史記》 〈孝武本紀〉에 이르기를 “禹임금이 九牧의 쇠붙이를 한데 모아 九鼎을 주조하여 九州를 상징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8 周復都酆鎬 : 酆과 鎬는 모두 지명으로 豐․鄗로도 쓴다. 酆은 지금의 西安市 서북쪽에 있었는데 文王이 도읍한 곳이고, 鎬는 西安市 서쪽에 있었는데 武王이 천자가 된 뒤에 도읍한 곳이다.
역주9 至犬戎敗幽王 周乃東徙于洛 : 周나라 幽王이 褒姒를 총애하여 申后를 축출하고 申后의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위한 다음 褒姒의 아들 伯服을 후사로 세우자, 國舅인 申侯가 犬戎을 불러들여 周나라를 공격하고 幽王을 驪山 아래에서 시해하였다. 宜臼가 제후들에게 의지하여 王으로 추대되고 洛邑으로 천도하니, 이가 곧 平王이다. 이때 서쪽 鎬京에서 동쪽 洛邑으로 遷都했다 하여 이것을 東遷이라 하는데, 이후로 周나라는 권위가 실추되어 천자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孔子가 지은 《春秋》는 魯나라 隱公 元年(B.C. 722)부터 시작되었는데, 隱公 원년은 바로 平王 49년이다. 犬戎은 周나라 당시 북방의 戎狄이다.
역주10 頿王之神聖 : 頿王은 周나라 靈王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수염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졌다. 《春秋左氏傳》 昭公 26년조에 의하면 “定王 6년에 요괴가 秦나라 사람에게 내려 이르기를 ‘周나라에 수염이 난 王者가 태어나 그 직분을 잘 수행해서, 제후들이 심복하여 공물을 바치며 두 대에 걸쳐 그 직분을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靈王이 태어났을 적에 수염이 있었고 왕은 심히 神聖스러워 제후들과 미워함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1 周公旣沒 蓋君陳畢公更居焉 : 君陳은 周나라의 신하로,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周公의 아들로 伯禽의 아우라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으며, 畢公은 文王의 제15번째 아들로 이름이 卓이다. 《書經》 〈周書〉의 〈君陳〉과 〈畢命〉은 바로 이들을 洛邑으로 보내면서 훈계한 내용이다. 孔穎達은 〈君陳〉에 대하여 “周公이 완악한 殷나라 유민들을 下都로 옮기고 자신이 직접 감독하였는데, 周公이 별세하자 成王이 君陳에게 명하여 周公을 대신하게 하였으니, 〈君陳〉이 바로 그 策命한 말씀이다.”라고 하였고, 蔡沈은 〈畢命〉에 대하여 “康王이 成周의 백성들을 畢公에게 명하여 보호하고 다스리게 하였으니, 〈畢命〉이 바로 그 策命한 글이다.”라고 하였다. 康王은 이름이 釗로 成王의 아들이다.
역주12 周公欲葬成周 而成王葬之畢 : 成周는 洛邑을 가리킨다. 周公이 豐 땅에서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반드시 나를 成周에 장사하여 이로써 내가 成王을 떠나지 못함을 밝히라.”고 하였는데, 成王이 周公을 文王을 따라 畢 땅에 장사하여 감히 周公을 신하로 여기지 못함을 밝혔다. 《史記 魯世家》 畢 땅은 文王의 능이 있는 곳으로 鎬京의 남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西安 부근이다.
역주13 幽厲 : 幽는 昏愚하다는 뜻으로 幽王을 가리키고, 厲는 포악하다는 뜻으로 厲王을 가리킨다. 厲王은 이름이 胡로 周나라의 제10대 왕이고, 幽王은 이름이 宮涅로 厲王의 손자인데 褒姒라는 여자에게 미혹되어 결국 犬戎에게 시해당하였다. 그리하여 周나라는 洛邑으로 천도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유명무실한 왕실이 되었다.
역주14 盤庚之遷也 復殷之舊也 : 殷나라 陽甲이 서거하고 그의 아우 盤庚이 즉위하였는데, 당시 殷나라는 河北의 耿 땅에 도읍하고 있었으나 黃河에 의해 자주 침수되었다. 盤庚은 成湯의 치세를 회복하고자 하여 옛 도읍지인 河南의 亳 땅으로 천도하고 成湯의 政事를 행하여 마침내 殷나라가 부흥하게 되었다. 《史記 殷本紀》 그리고 《書經》 〈商書 盤庚〉은 盤庚이 천도하면서 신하와 백성들을 효유한 글이다.
역주15 古公遷于岐 : 古公은 古公亶父로 后稷의 12대손이며 文王의 조부이다. 周나라 사람들은 원래 豳 땅에 살았는데 戎狄에게 시달리던 끝에 古公亶父 때에 岐周로 옮겼다. 이로부터 周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武王이 천자가 된 다음 古公亶父는 太王으로 추존되었다.
역주16 衛文公東徙渡河 恃齊而存耳 : 衛나라가 황하 북쪽에 있을 적에 戎狄이 자주 침략하자 文公이 황하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제후들의 패자였던 齊나라 桓公이 楚丘에 터를 잡아 도읍하게 하였다. 文公은 이름이 燬로 戴公의 아들이다.
역주17 齊遷臨淄 : 武王이 姜太公을 齊나라에 봉하여 營丘에 도읍하게 하였는데, 胡公 때에 薄姑로 천도하였고, 獻公 때에 다시 臨淄로 천도하였다. 臨淄는 지금의 山東省 臨淄市이다.
역주18 晉遷于絳于新田 : 春秋時代 晉나라 獻公 때에 莊伯과 桓叔의 후손인 公子들의 세력이 막강하여 公室을 핍박하자, 獻公이 이를 염려하여 士蔿로 하여금 이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獻公 8년에 士蔿가 먼저 公子들을 사주하여 游氏의 종족을 모두 죽이게 한 다음 聚 땅에 성을 쌓고 거주하게 하였다. 士蔿는 이해 겨울 獻公으로 하여금 이들을 포위해서 모조리 죽이게 하였으며, 이듬해 여름에 聚 땅에 城을 수축하고 도읍을 옮기고 絳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때부터 絳이 晉나라의 도읍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莊公 25년, 26년》, 《史記 晉世家》 絳은 지금의 山西省 翼城縣이다. 晉나라는 또 景公 때에 新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成公 6년 4월에 보인다. 新田은 絳州 曲沃縣 남쪽 2리 쯤 되는 곳에 있다.
역주19 春秋時……謀徙于阪高 : 春秋時代는 B.C. 722년(魯 隱公 원년)부터 B.C. 481년(魯 哀公 14년)까지이다. 申은 申城으로 지금의 河南 南陽市 북쪽에 있었고, 息은 息城으로 지금의 河南 息縣 남쪽에 있었다. 阪高는 長阪으로 지금의 湖北省 竹山縣 동쪽에 있었다. 이 일은 楚나라 康王 때에 있었는데, 《春秋左氏傳》 僖公 27년조에 보인다.
역주20 蔿賈 : 楚나라 莊王 때 사람으로 司馬를 지냈으며 字는 伯嬴인데 명상 孫叔敖의 아버지이다.
역주21 秦人巴人滅庸 : 巴는 春秋時代의 작은 나라로 지금의 川東과 卾西 일대에 있었다. 庸 또한 春秋時代의 작은 나라로 楚나라와 晉나라 사이에 있었다.
역주22 蘇峻之亂……盡爲灰燼 : 蘇峻은 字가 子高로 掖縣 사람이다.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永嘉의 난리에 유민 수천 명을 거느리고 本縣에 주둔하였으며, 元帝 때에 歷陽內史로 있다가 王敦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庾亮은 그가 반란할 것을 염려하여 그를 大司農으로 불렀으나 蘇峻은 이에 응하지 않다가 끝내 成帝 咸和 2년(327)에 반란을 일으켜 종묘와 여러 궁궐을 불태우고 도읍인 金陵을 점령하였다. 蘇峻의 반란은 다음 해 溫嶠와 陶侃에 의해 평정되었다.
역주23 溫嶠 : 晉나라 成帝 때의 명장이다. 字가 太眞이며 太原 사람으로 蘇峻의 난을 진압하였다.
역주24 豫章 : 지금의 江西省 南昌市이다.
역주25 三吳之豪 欲遷會稽 : 三吳는 吳興, 吳郡, 會稽 세 지역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吳 지역 전체를 말한 것이다. 會稽는 지금의 浙江省 紹興이다.
역주26 獨王導不可曰……爲墟矣 : 王導는 晉나라의 명재상으로 臨沂 사람이며 字는 茂弘이고 諡號는 文獻이다. 元帝가 琅邪王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도와 帝位에 오르는 데 큰 功을 세웠고 뒤이어 丞相이 되었으며, 元帝의 遺詔를 받들어 明帝, 成帝를 보필하였다. 衛文은 衛나라 文公으로 이름이 燬이다. 《春秋左氏傳》 閔公 2년조에 의하면 “衛나라 文公은 거친 삼베옷을 입고 거친 명주관을 썼다.”라고 하였는데, 文公은 이처럼 검소한 생활을 하고 국정에 힘써 나라를 부흥시켰다.
역주27 魏惠王……遷于大梁 : 魏惠王은 이름이 罃으로 수도인 安邑이 秦나라와 가깝다 하여 秦나라의 침공을 피해 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이후로 魏나라를 梁나라라고도 칭하였는데, 《孟子》에 나오는 梁惠王이 바로 그이다. 大梁은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이다.
역주28 楚昭王……遷于鄀 : 楚나라 昭王 12년에 吳나라가 다시 공격해 오자, 楚나라는 두려워하여 도성인 郢을 버리고 북쪽으로 옮겨 鄀에 도읍하였다. 鄀은 지금의 湖北省 宣城縣 동남쪽에 있었다.
역주29 頃襄王……遷于陳 : 頃襄王 21년에 秦나라 장수 白起가 楚나라의 수도인 郢을 공격하자, 楚나라는 싸워 크게 패하고는 郢을 떠나 북쪽인 陳城으로 옮겨 가 나라를 보존하였다. 《史記 楚世家》 陳은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이다.
역주30 考烈王……遷于壽春 : 考烈王은 頃襄王의 아들로 이름은 熊元이다. 考烈王 22년에 楚나라는 제후들과 공모하여 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동쪽 壽春으로 천도하고 壽春의 이름을 郢으로 고쳤다. 壽春은 지금의 安徽省 壽縣이다.
역주31 董卓劫帝 遷于長安 : 董卓은 後漢 靈帝 때의 장군으로 袁紹의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와 宦官들을 모두 도륙하고 獻帝를 옹립한 다음, 황제를 겁박하여 제멋대로 洛陽에서 長安으로 천도하고 洛陽의 백성 수백만 명을 강제로 長安으로 이주시켰다.
역주32 近世李景 遷于豫章亦亡 : 李景은 南唐 中宗의 이름이다. 南唐의 도읍은 원래 金陵이었는데 中宗 때에 周나라 世宗의 군대에게 패하여, 강북의 여러 州를 周나라에게 바치고 洪州의 豫章으로 천도하였다. 豫章은 洪州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南昌이다. 南唐은 中宗이 죽고 後主 李煌이 즉위하였으나 宋나라 太祖 趙匡胤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33 以無畏而遷者五……以畏而遷者六 : 두려움이 없이 그냥 천도한 다섯 가지 경우는 殷의 盤庚과 周의 古公亶父, 春秋時代 衛의 文公, 齊의 獻公, 晉의 獻公이며,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천도하지 않은 두 가지 경우는 春秋時代 楚의 康王과 東晉의 成帝이며, 두려움 때문에 천도한 여섯 가지 경우는 戰國時代 魏의 惠王, 楚의 昭王과 頃襄王과 考烈王, 後漢의 獻帝, 南唐의 中宗인 李景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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