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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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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世人之所共嗜者 美飮食, 華衣服, 好聲色而已
有人焉 自以爲高而笑之하야 彈琴弈棋하고 蓄古法書圖畫하야 客至 出而誇觀之하야 自以爲至矣어든
則又有笑之者하야 曰 古之人 所以自表見於後世者 以有言語文章也 是惡足好리오하며
而豪傑之士 又相與笑之하야 以爲士當以功名聞於世 若乃施之空言하고 而不見於行事 不得已者之所爲也라하니
而其所謂功名者 自知(智)效一官으로 等而上之하야 至於之所營 之所爭하야 極矣로되
而或者猶未免乎笑하야 曰 是區區者 曾何足言이리오
하고 이라하니 허유此言之하면 世之相笑 豈有旣乎
士方志於其所欲得하야는 雖小物이라도 有捐軀忘親而馳之者
有好書而不得其法이면하니 是豈有聲色臭味足以移人이리오마는 方其樂之也 雖其口라도 不能自言이어든 而況他人乎
人特以己之不好 笑人之好 則過矣니라
비릉毗陵人張君希元 家世好書하야 所蓄古今人遺跡 至多러니 盡刻諸石하야 築室而藏之하고 屬予爲記
人也
人諺曰 라하니 此言 雖小 可以喩大
世有好功名者 以其未試之學으로 而驟出之於政이면 其費人 豈特醫者之比乎리오
장군張君 以兼人之能으로 而位不稱其才하야 優游終歲하야 無所役其心智하니 則以書自娛
이나 以予觀之컨대 장군豈久閑者리오
蓄極而通이면 必將大發之於政하리니 장군知政之費人也 甚於醫 則願以予之所言者 爲鑑하노라
당형천唐荊川
此文 前後各自爲議論하야 暗相照映 甚密하니라


09. 묵보당墨寶堂에 대한 기문記文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의복과 아름다운 음악과 여색女色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스스로 고상한 체하여 이러한 것들을 비웃고는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옛날 법서法書(법첩法帖)와 도화圖畫를 모아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꺼내어 자랑스레 보여주고 스스로 지극하다고 여긴다.
그러면 또 그것을 비웃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후세에 자신을 표출해서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언어와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 거문고나 서화 같은 것을 어찌 좋아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또 호걸스러운 선비는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공명功名으로 세상에 알려져야 하니, 만약 이것을 빈말인 언어와 문장에 베풀기만 하고 행하는 일에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는 부득이한 자가 하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공명功名이라는 것은 지혜가 한 관직을 맡아 큰 성과를 올리고 차례로 올라가서 이윤伊尹여상呂尙, 후직后稷이 경영한 바와 유방劉邦항우項羽, 탕왕湯王무왕武王이 다툰 바에 이르러서 지극해진다.
그런데 혹자는 오히려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이 구구한 것들을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허유許由는 이것을 사양하여 곤란하게 여겼고, 공자孔子는 이것을 아는 것을 그저 해박한 것으로 여기셨다.”라고 하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서로 비웃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선비가 한창 얻고자 하는 것에 뜻을 둘 적에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이것을 위해 몸을 버리고 어버이를 잊고서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글씨를 좋아하는데 서법書法을 얻지 못하면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여 거의 죽었다가 겨우 살아나기도 하며, 심지어 무덤을 파헤치고 을 쪼개어 서법書法을 구하기까지 하니, 이런 것들이 어찌 아름다운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마는, 한창 이것을 좋아할 적에는 비록 자기 입으로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타인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단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비웃는 것은 잘못이다.
비릉毗陵 사람 장군 희원張君 希元은 집안이 대대로 글씨를 좋아해서 소장한 고금의 유적遺跡이 지극히 많은데, 이것을 모두 돌에 새겨서 집을 지어 보관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지방 사람이다.
우리 지방 사람들의 속담에 이르기를 “글씨를 배우는 자는 종이만 허비하고, 의술을 배우는 자는 사람만 허비한다.”라고 하니, 이 말이 비록 하찮으나 큰 일을 비유할 수 있다.
세상에 공명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직 시험해보지 않은 학문을 가지고 갑자기 정사政事에 써먹는다면, 그가 백성들의 목숨을 허비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의원이 사람을 잘못 치료하여 폐해를 입히는 것에 견줄 뿐이겠는가?
지금 장군張君이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지위가 재주에 걸맞지 못하여 한가롭게 놀면서 한 해를 마쳐서 마음과 지혜를 쓸 곳이 없으니, 그렇다면 글씨를 가지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내 보건대, 장군張君이 어찌 오랫동안 한가하게 지낼 자이겠는가?
쌓인 것이 지극하여 통달하면 반드시 장차 이것을 정사에 크게 펼칠 것이니, 장군張君은 잘못된 정사가 백성들의 목숨을 허비하는 것이 의원보다 심하다는 것을 안다면, 부디 내가 말한 것을 교훈 삼기 바란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앞과 뒤의 의논이 각각 따로이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서로 조응照應됨이 매우 치밀하다.”


역주
역주1 墨寶堂記 : 熙寧 5년(1072)에 東坡가 杭州通判으로 있을 적에 張希元의 요청에 응하여 이 글을 지었다.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張君墨寶堂記〉로 되어 있다. 郎曄의 《經進東坡文集事略》에는 제목 아래에 “張君은 이름이 次山이다.[名次山]”라는 注가 있다. 그렇다면 希元은 그의 字임을 알 수 있다.
역주2 伊呂稷契 : 伊는 伊尹, 呂는 呂尙, 稷은 后稷으로 이 네 사람은 모두 뛰어난 명신들이다. 伊尹은 商나라를 개국한 成湯의 재상으로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후세의 冢宰와 같은 阿衡을 맡아 成湯을 도와 夏나라의 桀王을 정벌하고 商나라를 개국하였으며, 湯王의 손자인 太甲이 즉위한 다음 무도한 짓을 자행하자 추방하였다가 다시 왕위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呂尙은 周나라를 개국한 武王의 재상으로 성이 姜이고 이름이 尙이고 氏가 呂이고 또 다른 이름은 望이어서 太公望 또는 呂望으로 불린다. 殷나라 말기 난세를 피하여 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周나라 文王인 姬昌을 만나 國師로 기용되어 周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文王이 죽고 武王 發이 즉위하자 8백 명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殷나라의 紂王을 공격하여 牧野의 一戰으로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后稷은 堯임금 때에 백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처음 가르친 棄를 이른다. 后稷은 본래 堯임금과 舜임금 때에 농사를 담당한 관직의 이름인데, 棄의 별칭이 되었다. 성이 姬로 帝嚳의 妃인 姜嫄이 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내다버렸으나 마소와 새들이 모두 보호하므로 다시 주워 기르면서 이름을 棄라고 하였다 한다. 뒤에 邰나라에 봉해져 周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契은 舜임금 때의 司徒로서 백성들을 五倫으로 교화하였으며, 성이 子氏로 帝嚳의 아들인데 뒤에 商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역주3 劉項湯武 : 劉는 劉邦, 項은 項羽, 湯은 湯王, 武는 武王을 가리킨다. 劉邦은 漢나라를 창건한 高祖로 字는 季이고 시호는 高皇帝이다. 泗水 지방의 亭長 출신으로 秦나라 二世皇帝가 즉위한 뒤의 혼란기를 틈타 반란군에 가담하여 차츰 세력을 확장하고 漢王으로 봉해졌으며, 이후 項羽와 패권을 다투다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고 漢나라를 창건하였다.
項羽는 이름이 籍으로 楚나라 장수 項燕의 아들인데, 秦나라 말기에 봉기하여 제후들을 거느리고 秦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후 동쪽으로 돌아와 스스로 楚霸王이 되어 彭城에 도읍하고 劉邦과 패권을 다투었으나 끝내 패하여 자살하였다.
湯王은 契의 후손이며, 商나라의 창건자로 성이 子이고 이름이 履인데 成湯이라고도 칭하는바, 夏나라의 폭군 桀王을 몰아내고 商나라를 세웠다.
武王은 后稷의 후손이며 文王의 아들인데, 周나라의 창건자로 성이 姬이고 이름이 發이다. 殷나라 紂王의 학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고 여러 제후국의 군사를 이끌고 殷나라를 정벌하고 周나라를 세웠다.
역주4 許由辭之以爲難 : 許由는 상고시대의 高士로 堯임금이 천하를 양보하였으나 거절하고 潁水 북쪽의 箕山 아래에 隱居하였으며, 다시 堯임금이 九州의 長이라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潁水로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하는바, 이 내용은 皇甫謐의 《高士傳》에 보인다.
皇甫謐(215~382)은 晉나라 때의 학자로 자가 士安이며 자호는 玄晏先生이다. 여러 전적과 제자백가에 정통했으며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하여 《高士傳》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역주5 孔丘知之以爲博 : 이 내용은 《莊子》 〈秋水〉에 “五帝가 차례로 帝位를 이어받은 것과 三王이 다투어 王業을 이룩한 것과 仁人이 근심하는 것과 유능한 선비가 노력하는 일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나, 伯夷는 이것을 사양하여 명성을 얻었고 仲尼는 이것을 말하여 해박하다 여겼다.[五帝之所連 三王之所爭 仁人之所憂 任士之所勞 盡此矣 伯夷辭之以爲名 仲尼語之以爲博]”라는 내용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6 拊心嘔血……至於剖塚斲棺而求之 : 삼국시대 魏나라 鍾繇의 故事로, 앞의 〈王君寶繪堂記〉의 역주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7 學書者紙費 學醫者人費 : 속담으로 “書法을 배우나 뛰어난 書法家가 되기 어려우니 이는 종이만을 허비하는 것이요, 醫術을 배우나 항상 사람을 살리는 名醫가 되기 어려우니 이는 환자를 잘못 치료하여 사람의 목숨을 허비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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