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爲國者四
니 也,
也, 封建也, 學校也
러니 今亡(無)矣
요 獨學校僅存耳
며
古之爲學者四니 其大則取士論政하고 其小則弦誦也러니 今亡矣요 直誦而已라
工以納言으로 時而颺之하야 格則承之庸之하고 否則威之라하시니라
格之言
은 改也
니 이라하고 承之言
은 薦也
니 라하니라
庶頑讒說하야 不率是敎者를 순舜皆有以待之하시니 夫化惡은 莫若進善이라
其不率敎甚者는 則撻之하고 小則書以記之하니 非疾之也요 欲與之竝生而同憂樂也라
此
는 士之有罪
로되 而尙未可棄者
라 故
로 使樂工
으로 採其謳謠諷議之言而颺之
하야 以觀其心
하야 其改過者
는 則薦之
하고 且用之
하며 其不悛者
는 則威之屛之
하야 之類 是也
니 此
는 순舜之學政也
니라
何也오 (由)[曰]射는 所以致衆而論士也니 衆一而後에 論定이라
하니 由此觀之
하면 以射致衆
하고 衆集而後論士
는 蓋所從來遠矣
니라
善者를 吾行之하고 不善者를 吾改之면 是吾師也라한대
古之取士論政者는 必於學하니 有學而不取士하고 不論政하면 猶無學也라
士數萬人
이 하야 自
으로 皆折節下之
하고 에 常出其口
하니 其取士論政
이 可謂近古
라
曰 此는 王政也니 王者不作이어늘 而士自以私意行之於下면 其禍敗固宜니라
雖
이라도 必有學
이어든 況
남안南安은 강서江西之
남안南境
으로 儒術之富 與
等
이요 而
태수太守朝奉郞曹侯
등登이 以治郡顯聞
하야 所至
에 必建學
이라
其建是學也에 以身任其責하야 不擇劇易하고 期於必成하니 士以此感奮하야 不勸而力하고 費於官者 爲錢九萬三千이요 而助者不貲라
爲屋百二十間
하야 禮殿講堂
이 視夫
之居
하며 凡學之用
이 莫不嚴具
라
又以其餘로 增置廩給하야食數百人하니 始於소성紹聖二年之冬하야 而成於四年之春이라
軾이 自해남도海南還할새 過남안南安하야 見聞其事
爲詳이라 士旣德조후侯不已하야 乃具列本末하야贏糧而從軾者 三百餘里하야 願紀其實이라
然이나 순舜은 遠矣하야 不可以庶幾어니와 有賢태수太守하면 猶可以爲정鄭자산子産也하니 學者勉之하야 無愧於古人而已니라
소동파蘇文이 本尙馳騁이요 而此作은 尤渙散하야 不肯受約束이라
然이나 惟장공長公可耳니 구양수歐, 증공曾集內엔 無此也하니라
02. 남안군南安軍의 학교學校에 대한 기문記文
이러한 문장은 담박澹泊하고 호탕한 것이 많아서 법으로 삼을 수 없다.
연보年譜를 살펴보면 바로 동파東坡가 담주儋州에 안치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네 가지였으니 정전井田과 육형肉刑과 봉건封建과 학교學校였는데, 지금 다 없어지고 오직 학교學校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옛날에 학교에서 시행한 것이 네 가지였으니, 큰 것은 선비를 뽑고 정사를 논하고, 작은 것은 현악기를 타고 글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외우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순舜임금의 말씀에 “여러 완악하여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만약 이 충직忠直함에 있지 않으면,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힘으로써 이것을 밝히며 종아리를 쳐서 잘못을 기억하게 하며 작은 잘못을 글에 써서 기억하게 하여, 함께 살고자 해야 한다.
악공樂工이 이들이 바친 말을 가지고 때로 드날려서 이들이 악행을 고쳐서 바로잡혔으면[격格] 올려서[승承] 등용하고, 바로잡히지 않았으면 위엄을 보인다.”라고 하셨다.
격格이라는 말은 고친다는 뜻이니 《논어論語》에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잘못을 고칠 것이다.[유치차격有恥且格]”라고 하였고, 승承이라는 말은 천거해서 올린다는 뜻이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제맹齊盟(동맹同盟)에 쓸 희생犧牲을 받들어 올린다.[봉승제희奉承齊犧]”라고 하였다.
완악하여 참소하는 말을 해서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순舜임금이 모두 대처함이 있었으니, 악惡을 교화하는 것은 선善한 사람을 올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올려줄 만한 자를 가려서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예禮로써 등용하였다.
그리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 중에 심한 자는 종아리를 치고 심하지 않은 자는 글에 써서 기억하게 하였으니, 이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요, 더불어 살면서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하고자 하신 것이었다.
이는 선비 중에 죄가 있으나 아직 버릴 만하지 않은 자이므로,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가요와 풍의諷議하는 말을 채집하여 드날려서 그 마음을 관찰하게 하여, 허물을 고친 자는 올려서 천거하고 또 등용하며, 고치지 않은 자는 위엄을 보이고 물리쳐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따위가 이것이니, 이는 순舜임금의 학정學政이다.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고 맞히지 못하는 것이 선善․악惡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어째서 과녁으로 선善하고 악惡함을 밝혔는가?
이는 활쏘기가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선비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니,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인 뒤에야 의논이 정해지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확상矍相의 마당에서 활을 쏘실 적에 구경꾼이 담처럼 모여 있었는데, 제자들로 하여금 술잔을 들어 올리고 차례대로 구경꾼을 세 번 내치게 하자 남아 있는 자가 겨우 몇 명뿐이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활쏘기로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이 모인 뒤에 선비를 논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죄수를 바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죽인 적의 왼쪽 귀를 바친다.”라고 하였으며,《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학궁學宮에서 〈전쟁을 위해〉 이루어놓은 계책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정鄭나라 사람들이 향교鄕校에서 노닐면서 집정대신執政大臣을 비판하자, 혹자가 자산子産에게 이르기를 “향교鄕校를 헐어버리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향교에 가서 비판하는 말 중에 좋은 것은 내가 그것을 실행하고 또 좋지 못한 것은 내가 그것을 고치면, 이것이 곧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자산子産은 인仁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셨다.
옛날에 선비를 뽑고 정사를 논하는 것을 반드시 학궁學宮에서 하였으니, 학궁學宮이 있는데도 선비를 취하지(선발하지) 않고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면 학궁學宮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학교學校는 동한시대東漢時代보다 더 성한 적이 없다.
선비 수만 명이 마른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살게 만들고 산 나무에 숨을 불어넣어 말라 죽게 해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으로부터 모두가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몸을 낮추었고, 삼부三府에서 사람들을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할 적에 항상 그들의 입에서 나왔으니(결정되었으니), 선비를 가려 뽑고 정사를 논한 것이 옛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것이 당고黨錮의 화禍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은 왕자王者의 정사政事이니, 왕자王者가 나오지 않았는데 선비들이 자기들끼리 아래에서 사사로운 뜻으로 행한다면, 그 화패禍敗를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우리 조정은 경력慶曆․희령熙寧․소성紹聖 연간으로부터 이후로 세 번 학정學政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먼 지방의 군현郡縣이라도 반드시 학교學校가 있는데, 더구나 남안南安은 강서江西의 남쪽 지역으로 유학자儒學者의 많음이 민閩․촉蜀 지방과 대등하고, 태수太守인 조봉랑 조후朝奉郞 曹侯 등登은 군郡을 잘 다스리기로 크게 소문나서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학교學校를 세웠다.
이 때문에 남안南安의 학교學校가 강서江西 지방의 으뜸이 되었다.
조후曹侯(조등曹登)는 어진 사람이고 의리를 행함에 용감하였다.
그가 학교學校를 세울 적에 몸소 책임을 맡아서 일의 어렵고 쉬움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완성할 것을 기약하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감격하고 분발하여 권면하지 않아도 힘썼으며, 관官에서 돈을 소비한 것이 9만3천 전錢이고, 민간에서 도운 것도 적지 않게 많았다.
120칸짜리 집을 지어서 예전禮殿(대성전大成殿)과 강당講堂이 방군邦君의 거처에 비교할 만하였으며, 학교學校의 모든 기물들이 엄격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남은 돈을 가지고 곡식을 마련하여 수백 명의 생도를 먹이고 있었는데, 소성紹聖 2년(1095) 겨울에 시작하여 4년 봄에 완성되었다.
조후曹侯는 학교學校가 완성되자 떠나서 지금은 지조주사知潮州事로 있다.
나는 해남도海南島에서 돌아올 적에 남안南安을 지나면서 이 일을 자세히 보고 들었다.
선비들은 이미 조후曹侯의 은덕恩德을 고마워해 마지않아서, 마침내 이 일의 본말本末을 자세히 열거하여 식량을 싸 짊어지고 나를 3백여 리를 따라오면서 그 사실을 기록해줄 것을 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맨 먼저 순舜임금의 학정學政을 가지고 말하였다.
그러나 순舜임금은 세대가 멀어서 거의 바랄 수 없지만 어진 태수太守가 있어서 그래도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은 될 수가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노력해서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소동파蘇東坡의 문장은 본래 자유분방한 것을 숭상하였고, 이 작품은 더더욱 산만하여 제약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장공長公(소식蘇軾)만이 이렇게 지을 수 있으니, 구양수歐陽脩나 증공曾鞏의 문집文集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