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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前集

고문진보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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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李白
杜甫
昔年有狂客하니
號爾謫仙人이라注+昔年有狂客 號爾謫仙人 : 賀知章 自號四明狂客하고 呼白爲謫仙人하니라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이라
聲名從此大하니
汨沒一朝伸이라
文彩承殊渥하니
流傳必絶倫이라
龍舟移棹晩이요注+龍舟移棹晩 : 玄宗 泛舟蓮池하고 召太白이러니 被酒어늘 命高力士하여 扶登舟하니라
이라注+獸錦奪袍新 : 白作樂章 帝賜錦袍하니라
白日來深殿하니
靑雲滿後塵이라
乞歸優詔許하니注+乞歸優詔許 : 白爲高力士所譖하여 懇求還山한대 帝賜金放還하니라
遇我宿心親이라
未負幽棲志하고
兼全寵辱身이라
劇談憐野逸이요
嗜酒見天眞이라
醉舞梁園夜하고注+醉舞梁園夜 : 梁園 在汴하니 漢梁孝王所築이라
行歌泗水春이라注+行歌泗水春 : 泗水 在魯地하니 太白 嘗遊梁魯間이라
才高心不展이요
道屈善無隣이라
處士禰衡俊이요注+處士禰衡俊 : 禰衡 字正平이니 爲平原處士
諸生原憲貧이라注+原憲貧 : 孔門弟 原憲至貧하니 二事 比白之有才而無祿也
稻粱求未足이어든
薏苡謗注+薏苡謗 : 馬援 征交趾하고 載薏苡還한대 人謗之하여 以爲明珠라하니 喩白之遇讒也何頻
五嶺炎蒸地
三危放逐臣이라注+五嶺炎蒸地 三危放逐臣 : 大庾, 始安, 臨賀, 桂陽, 揭陽 是爲五嶺이라 長流夜郞하니 五嶺三危與夜郞接境이라
幾年遭鵩鳥注+鵩鳥 : 賈誼爲長沙王傅하여 不得志러니 有鵩鳥集于舍하니라
獨泣向麒麟이라注+獨泣向麒麟 : 孔子見麟而泣曰 出非其時하니 吾道窮矣라하니라
蘇武先還漢하고
豈事秦
楚筵辭醴日이요注+楚筵辭醴日 : 言白在永王璘 如(申公)[穆生]見楚王不設醴則辭去
이라
已用當時法하니
誰將此義陳
老吟秋月下하고
病起暮江濱이라
莫怪恩波隔하라
乘槎與問津이라注+莫怪恩波隔 乘槎與問津 : 言白之才器 當蒙上知而恩波頓隔하니 子美欲乘槎而問之天也


李白에게 부치다
두보
李白이 죄에 연좌되어 潯陽의 옥에 갇혔었는데, 宋若思가 갇힌 것을 풀어주고 불러서 참모를 삼았다. 乾元 元年(758)에 야랑으로 멀리 유배가니, 杜子美가 이 詩를 부쳤다.
옛날에 狂客 있었으니
그를 불러 謫仙人注+賀知章이 스스로 四明狂客이라 호하고는 李白을 이름하여 謫仙人이라고 하였다.이라 하였지.
붓을 들어 글씨 쓰면 비바람 놀라게 하고
詩가 이루어지면 귀신들 곡하게 하였네.
명성이 이로부터 커지니
汨沒하던 몸 하루 아침에 펴졌다오.
아름다운 文章 특별한 총애 받으니
세상에 流傳함 반드시 크게 뛰어나리라.
天子의 龍舟 노를 저음이 더뎠고注+玄宗이 연못에 배를 띄우고는 李太白을 불렀는데, 이백이 술에 취하자 高力士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배에 오르게 하였다.
짐승 무늬의 비단 도포 새로 하사받았네.注+李白이 樂章을 짓자 황제가 비단 도포를 하사하였다.
白日에 깊은 궁전으로 오니
靑雲의 선비들 뒤따라 오느라 먼지 가득하였네.
草野로 돌아가기 원하자 우대하는 詔勅으로 허락하니注+李白이 高力士에게 모함을 당하여 산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청하자, 황제는 금을 하사하고 풀어 보내주었다.
나를 만나 옛마음으로 친하게 대하네.
숨어 살려는 뜻 저버리지 않고
총애받고 욕된 몸 겸하여 온전히 하누나.
재미있게 이야기하니 天眞하고 放逸함 사랑하고
술 좋아하니 天性의 참됨 볼 수 있네.
취해서는 梁園의 밤잔치에 춤 추고注+양원은 汴京에 있으니, 漢나라 梁孝王이 건축한 것이다.
泗水의 봄경치 구경다니며 노래하였다오.注+泗水는 魯나라 땅에 있는 바, 李太白이 일찍이 梁땅과 魯땅 사이에 놀았었다.
재주 높으나 마음 펴지 못하고
道가 굽히니 착하여도 이웃 없네.
處士인 禰衡(예형)처럼 준걸스럽고注+禰衡(예형)은 자가 정평이니, 평원의 처사였다.
諸生 중에 原憲처럼 가난하다오.注+孔門의 제자 중에 原憲이 지극히 가난하였으니, 이 두 가지 일은 李白이 재주가 있으면서 녹봉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벼와 조 구하는 것도 풍족하지 못한데
薏苡의 비방은注+마원이 交趾를 정벌하고는 율무를 싣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비방하여 명주라고 하였으니, 李白이 모함을 만났음을 비유한 것이다. 어찌 잦은가.
五嶺의 무더운 고장에
三危로 추방된 신하라오.注+大庾ㆍ始安ㆍ臨賀ㆍ桂陽ㆍ揭陽을 五嶺이라 한다. 李白이 야랑으로 멀리 유배가니, 오령과 삼위는 바로 야랑과 접경지역이다.
몇 년이나 鵩鳥(복조)注+賈誼가 長沙王의 太傅가 되어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수리 부엉이가 집에 앉아있었다. 만났는가
홀로 麒麟을 향해 울고 있네.注+孔子가 기린을 보고 울면서 말씀하기를 “좋은 때가 아닌데 나왔으니, 우리 道가 궁해질 것이다.” 하였다.
蘇武가 漢나라로 돌아온 것보다 이르고
夏黃公이 어찌 秦나라 섬기겠는가.
楚나라 잔치에 단술이 없다고 하직하던 날이요注+李白이 永王 璘의 처소에 있음은 穆生이 楚王이 단술을 베풀지 않는 것을 보고는 하직하고 떠나간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梁나라 獄에서 글 올릴 때라오.
이미 당시의 법 적용하였으니
누가 이 의리 가지고 말해 주겠는가.
나는 늙어 가을달 아래에서 읊고
병든 몸 저문 강가에서 일어나네.
皇帝의 은혜 물결이 막힘 괴이하게 여기지 마오
뗏목 타고 그대와 나루터 물어 하늘에 오르리라.注+李白의 재주와 器局이 마땅히 임금의 인정을 받을 만한데도 은혜가 전혀 막혔으므로 杜子美가 뗏목을 타고 가서 하늘에 묻고자 한 것이다.
賞析
이 시는《杜少陵集》8권에 실려 있으며, 제목이 〈寄李十二白二十韻〉으로 되어 있는 바, 永王 璘의 죄에 연루되어 유배가는 李白에게 부친 시이다. 영왕 인은 玄宗의 第16子이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현종이 蜀으로 행차할 때에 영왕 인을 江陵郡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영왕은 江陵에 이르러 江淮의 租賦를 거두어 將士 수만 명을 소집한 다음 舟師를 이끌고 東下하여 廣陵에 이르렀는데, 吳郡採訪使 李希言 등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격분하였으며, 또 肅宗의 명을 받들지 않고 丹徒의 太守 閻敬之를 죽였다. 이때 이백은 영왕의 막하에 있었는 바, 협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그 形迹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영왕이 실패하자 이에 연좌되어 멀리 夜郞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러나 야랑으로 가던 도중 赦命을 받아 乾元 2년(759) 3월에는 이미 瞿塘峽을 내려갔다. 이 시는 아마도 건원 2년 가을 작자가 秦州에 있으면서 이백이 恩賜를 받은 것을 알기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의 대부분을 이백을 변호하는데 할애하였다.
蔡彭胤〈1669(현종 10)-1731(영조 7)〉의《希菴集》11권에 이 시에 차운하여 花山 李伯起에게 부친 시가 실려 있다.


역주
역주1 白坐繫潯陽獄……子美寄此詩 : 이에 대하여 李德弘의《艮齋集》續集 4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唐書》〈李白傳〉을 살펴보면 ‘安祿山의 반란에 이백은 匡廬 사이에 전전하였는데 永王 璘이 불러서 幕府의 보좌로 삼았다. 璘이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키자 이백은 도망하여 彭澤으로 돌아갔는데, 璘은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이백도 이에 연좌되었으나 郭子儀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이백이 황제의 명령으로 夜郞에 유배가던 도중에 마침 사면을 받아 潯陽으로 돌아가다가 일에 연좌되어 심양에서 하옥되었다. 이때 宋若思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河南으로 가던 중 潯陽을 지나다가 이백을 풀어주고 불러서 참모로 삼았다. 그러나 이백은 얼마 안있어 사임하고 떠나 當塗의 令인 李陽冰에게 의지하였다. 代宗이 左拾遺로 불렀으나 이때 이백은 죽었다.’ 하였다.
본전에 기록된 전말이 이와 같으니, 연좌되어 심양의 옥에 갇힌 것은 야랑으로 유배갔다가 사면을 받고 심양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다. 만약 이 시가 야랑으로 부친 것이라면 註에 옥에 갇힌 일을 인용할 수 없고, 만약 시의 내용 중에 ‘梁獄’이 심양의 옥을 가리킨 것이라면 이 시는 야랑으로 부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하니 本註는 잘못인 듯하다.”
역주2 獸錦奪袍新 : 李德弘은 “獸錦은 수놓은 비단이니, 禽獸를 수놓은 비단이다. 이 비단으로 만든 宮袍를 이백에게 하사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金隆의 《勿巖集》 4권에 “獸錦은 禽獸를 수놓은 비단이니,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하사받아 새롭다’는 뜻이다.” 하였다.
역주3 黃公 : 商山 四皓 중의 한 사람인 夏黃公으로, 이들은 秦나라 말기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商山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역주4 梁獄上書辰 : 漢나라 때 鄒陽이 옥중에서 上書한 故事를 들어 李白이 자신의 억울함을 밝혔음을 말한 것이다. 鄒陽은 齊지방 사람으로 吳王 濞를 섬겼는데, 오왕이 반란을 획책하자 梁孝王을 섬기기 위해 梁나라에 갔으나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그는 옥중에서 글을 올려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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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이백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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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이백 487

고문진보전집 책은 2017.12.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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