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金陵鳳凰臺
李白
在保寧寺後라 宋元嘉中에 王顗見異鳥集于山하니 時謂鳳凰이라하여 遂起臺하니라
鳳凰臺上鳳凰遊
러니鳳去臺空江自流
라吳宮
注+吳宮 : 孫權이 始都金陵하고 國號吳라하니라花草埋幽徑
이요晉代
注+晉代 : 晉宗室瑯琊王睿都金陵하니 是爲東晉이라衣冠成古丘
라라總爲浮雲能蔽日
하니長安不見使人愁
라
金陵의 봉황대에 오르다
이백
鳳凰臺는 보령사 뒤에 있다. 南朝 宋나라 元嘉年間에 王顗가 이상한 새가 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鳳凰이라 이르고는 마침내 봉황대를 지었다.
鳳凰臺 위에 봉황새 놀더니
봉황새 떠나가 대는 비었는데 강물만 절로 흐르누나.
吳나라 궁궐의
注+孫權이 처음 金陵에 도읍하고 국호를 吳라 하였다. 화초 그윽한 길에 묻혔고
晉代
注+晉나라 宗室인 낭야왕 司馬睿가 금릉에 도읍하니, 이것이 東晉이다.의 衣冠 古冢 이루었네.
세 산은 靑天 밖에 반쯤 떨어져 있고
두 물은 白鷺洲 가운데 두고 나누어졌네.
모두 뜬구름이 태양 가리고 있으니
長安을 볼 수 없어 사람 시름겹게 하여라.
賞析이 시는《李太白集》21권에 실려 있다. 玄宗이 이백을 총애하여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楊貴妃와 高力士 등의 저지로 결국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를 안 이백이 휴가를 청하고 장안을 떠나 사방을 周遊하며, 崔宗之와 함께 採石江에서 배를 타고 金陵의 鳳凰臺에 올라 逐臣의 신세를 생각하여 지은 것이다. 元나라 方回는《瀛奎律髓》에서 “이태백의 이 시는 崔顥의〈黃鶴樓〉시와 흡사하여 格律과 氣勢에 있어 우열을 논하기 어렵다. 이 시는 봉황대로 제목을 삼았으나 봉황대를 읊은 것은 고작 起語 2句에 불과할 뿐이고, 아래 6구는 곧 臺에 올라 관망한 내용이다. 3ㆍ4구는 古人을 보지 못함을 서글프게 여긴 것이요, 5~8구는 오늘의 경치를 읊고 帝都를 보지 못함을 개탄한 것이다.” 하였다. 劉會孟은《唐詩訓解》에서 “그의 雄偉한 표현[開口雄偉]과 꾸밈이 없음[脫落雕飾]은 모두 말할 것이 없지만 만약 끝의 두 구가 없었다면 또한 반드시 최호의〈황학루〉시보다 뛰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평하였다.
李德弘〈1541(중종 36)-1596(선조 29)〉은《艮齋集》續集 4권에 “諷諭, 謳吟, 嗟歎, 憫惻한 끝에 小人이 속이고 엄폐하여 자기로 하여금 도성을 떠나 流落하게 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나 만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시를 제대로 보는 것이 된다. ‘總’字가 이 시의 오묘한 부분이다.” 하였다.
李玄錫〈1647(인조 25)-1703(숙종 29)〉의《游齋集》2권에 이 시를 모방하여 지은 시가 있으므로 아래에 소개한다.
“천리 먼 금릉에 영락하여 떠도니 층대에서 술에 취해 흘러가는 물 굽어보네.…… 길에 묻힌 시든 꽃에 고국이 희미하고 구름 사이로 새어나온 달빛 모래섬에 비추누나. 서풍이 부는데 가을 강가에서 노 두드리니 끝없는 물결은 만고의 수심이라오.[千里金陵落拓遊 層臺一醉俯淸流……埋徑殘花迷故國 漏雲新月印滄洲 西風鼓枘秋江上 無限煙波萬古愁]”
이 외에 宋寅〈1516(중종 11)-1584(선조 17)〉의《頤庵遺稿》1권에도〈鳳凰臺口占〉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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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금릉봉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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