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黃鶴樓
崔顥
上四句는 敍樓名之由요 下四句는 寓感慨之情이라 〇 按黃鶴樓는 在鄂州子城西北隅黃鶴山上이라 方輿勝覽에 此樓因山得名이라하니 蓋自南朝已著矣라 南齊志에 仙人子安이 乘黃鶴過此라하니라
昔人已乘黃鶴去
하니此地空餘黃鶴樓
라黃鶴一去不復返
하니白雲千載空悠悠
라晴川歷歷漢陽樹
요注+晴川歷歷漢陽樹 : 漢陽軍은 漢沔之南이라 故曰漢陽이라芳草萋萋鸚鵡洲注+鸚鵡洲 : 後漢禰衡은 字正平이니 有才하여 尙氣剛傲하다 與孔融楊修善이러니 融이 薦于曹操한대 操喜하여 勅門者하여 有客便通하다 衡乃坐大營門하여 以杖捶地大罵어늘 吏請案之한대 操曰 禰衡은 孺子니 孤殺之는 猶雀鼠耳라 此人이 素有虛名하니 遠近이 將謂孤不能容之라하고 遂送與劉表하다 復慢侮한대 表恥不能容하여 以與江陵太守黃祖하니 時年三十六이라 祖長子射 大會賓客할새 人有獻鸚鵡者어늘 射擧巵謂衡曰 願先生賦之하여 以娛佳客하라 衡이 攬筆作文에 不加點하다 後亦以言不遜罵祖한대 祖殺之하여 葬四洲하니 後人이 因以鸚鵡名洲하니라 라日暮鄕關何處是
오煙波江上使人愁
라
黃鶴樓에 오르다
최호
위의 네 句는 黃鶴樓라는 이름의 유래를 서술한 것이요, 아래 네 句는 감개하는 情을 붙인 것이다.
〇 살펴보건대 황학루는 鄂州(악주)의 子城 서북쪽 모퉁이인 황학산 위에 있다. 《方輿勝覽》에 “이 누대는 산으로 인하여 황학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였으니, 南朝時代부터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南齊志》에 “仙人 子安이 황학을 타고 이곳을 지나갔다.” 하였다.
옛사람 이미 黃鶴 타고 떠났으니
이곳에는 부질없이 黃鶴樓만 남아 있네.
黃鶴이 한 번 떠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흰구름만 천년 동안 부질없이 흘러가네.
맑은 냇물은 漢陽의 나무들 역력하고
注+漢陽軍은 漢水와 沔水의 남쪽에 있으므로 한양이라 한 것이다.꽃다운 풀은 鸚鵡洲
注+後漢의 禰衡(예형)은 자가 正平이니 재주가 있어 기개를 숭상하며 강하고 오만하였다. 孔融, 楊修와 친하였는데, 공융이 曹操에게 천거하자 조조는 기뻐하여 문지기에게 명하여 손님이 오면 곧 통지하게 하였다. 예형이 마침내 큰 營門에 앉아서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크게 꾸짖으니, 관리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조조는 “예형은 孺子이니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참새와 쥐를 죽이는 것과 같을 뿐이다. 이 사람은 평소에 헛된 명성이 있으니, 그를 죽이면 원근에서 장차 나더러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劉表에게 보내었다. 예형이 다시 오만하고 업신여기자 유표는 그를 용납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강릉태수인 黃祖에게 보내니, 이때 나이가 36세였다. 황조의 장자인 射가 손님들을 크게 모아 잔치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앵무를 올리자, 사는 술잔을 들고 예형에게 이르기를 “선생이 시를 지어서 아름다운 손님들을 즐겁게 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예형이 붓을 잡고 글을 지었는데 점획을 하나도 더하지 않았다. 뒤에 또 예형이 말을 불손하게 하여 황조를 꾸짖자, 황조가 죽여서 四洲에 장례하니 후인들이 이로 인하여 이곳을 앵무주라 이름하였다.에 무성하게 자라누나.
해 저무는데 고향은 어느 곳인가
煙波의 강 위는 사람 시름겹게 하네.
賞析《三體詩》ㆍ《唐詩訓解》ㆍ《唐詩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唐詩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널리 人口에 膾炙된다. 이 시를 평하여 嚴羽는《滄浪詩話》에서 “唐人의 칠언율시 중에〈황학루〉를 제일로 꼽아야 할 것이다.” 하였고, 顧華玉은 “이 시는 이백도 감탄했던 一氣渾成의 작품으로 스스로 압도당했다고 여겼다. 작자가 이곳에 올라옴에 저절로 시흥이 유출된 것이요, 꼭 능가할 만한 작품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였다. 田子藝는 “疊字를 열 자나 쓰고 다만 나머지 46자로 문장을 이루었으니 더욱더 기묘하다.” 라고 평하였고, 또 “사람들은 이백의 〈鳳凰臺〉시와〈鸚鵡洲〉시가 황학루에서 나왔다는 것만 알고 최호의 〈황학루〉가 沈佺期의 〈龍池篇〉에서 나온 것은 잘 모른다.” 하였다.〈용지편〉은 龍池樂章 10수의 제1장으로, 구구한 법식에 구속받지 않는 格調와 疊字를 써서 자연스런 節奏를 이룬 점을 최호가 취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용지편〉을 싣는다.
“용이 뛰어오른 龍池에 용이 이미 날아가니 용의 덕 천부적이어서 하늘에 어김이 없네. 못에는 은하가 펼쳐져 黃道가 나뉘었고 용은 天門을 향해 紫薇宮으로 들어갔네. 저택과 누대 氣色이 아름다우니 군왕의 오리들도 광채가 나누나. 천하의 온갖 냇물에 알리노니 이곳에 오면 동쪽으로 흘러가지 말지어다.[龍池躍龍龍已飛 龍德先天天不違 池開天漢分黃道 龍向天門入紫微 邸第樓臺多氣色 君王鳧雁有光輝 爲報寰中百川水 來朝此地莫東歸]”
李獻慶〈1719(숙종 45)-1791(정조 15)〉의《艮翁集》7권에 靑鶴臺에서 崔顥의〈黃鶴樓〉體를 본떠서 지은 시가 실려 있으므로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청학이 언제 이곳에서 노닐었나 대 위에는 청학의 이름만 남아 전해지네. 청학이 높이 나니 날개가 크고 맑은 바람 불어 보내니 하늘이 우뚝하네.[靑鶴何年遊此地 臺上留傳靑鶴名 靑鶴高飛翅翎大 泠風吹送天崢嶸]”
이외에 李玄逸〈1627(인조 5)-1704(숙종 30)〉의《葛庵集》1권에도 靑鶴樓에 올라 崔顥의 〈黃鶴樓〉韻을 써서 회포를 적은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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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황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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