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日寄杜二拾遺
高適
人日題詩寄草堂
하니遙憐故人思故鄕
이라柳條弄色不忍見
이요梅花滿枝空斷腸
이라身在南蕃無所預
나心懷百憂復千慮
라今年人日空相憶
하니明年人日知何處
오一臥東山三十春
하니豈知書劒老風塵
고하니愧爾東西南北人
이라
[人日에 拾遺 杜二에게 부치
고적
人日에 詩 써서 草堂에 부치니
고향 생각할 故人 멀리서 그리워하네.
버드나무 가지 빛을 희롱하니 차마 볼 수 없고
매화꽃 가지에 가득하니 부질없이 애간장만 태운다오.
몸은 남쪽 변방에 있어 간여하는 바 없으나
마음은 백 가지 근심에 다시 천 가지 생각 품었네.
금년 人日에 부질없이 서로 그리워하니
명년 人日에는 어느 곳에 있을지 알까.
한번 東山에 누워 삼십 년 지내니
어찌 책 읽고 劍術한 선비 風塵에 늙을 줄 알았으랴.
龍鍾한 이 내 몸 도리어 二千石에 오르니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는 그대에게 부끄럽노라.
賞析이 시는《唐詩訓》2권에 실려 있는 바, 정월 7일(人日)에 오랜 친구인 두보에게 부친 시로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高適은 그의 재주를 시기한 李輔國의 비방을 받아 太子少詹事로 좌천되었다가 乾元 2년(759)에 彭州刺史로 나갔는데, 이 시는 上元 2년(761) 그가 蜀州刺史로 있을 때에 지은 것이다. 두보는 이 시를 받은 후 고적의 생사를 모르다가 고적이 죽은 지 5년 뒤에야 이 시에 답하여 ‘故 高蜀州가 人日에 부쳐준 시에 추후에 답하다[追酬故高蜀州人日見寄]’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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