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川先生 洛陽城 안에
부서진 집 몇 칸뿐이라오.
하나뿐인 종은 긴 수염에 머리도 싸매지 않았고
하나뿐인 계집종은 맨 다리에 늙어서 이도 없다오.
어렵게 십여 명 봉양하니
위에는 慈親 계시고 아래에는 처자식 있다오.
선생은 젊어서부터 세속의 무리 싫어하여
문 닫고 나오지 않은 지 一紀 되었네.
이웃 승려들 쌀을 빌어다 보내 줄 지경이니
내 縣尹이 되어 부끄럽지 않겠는가.
公私에 쓰고 남은 녹봉으로
때때로 하찮은 물건 보내 주어 제사 돕는다오.
留守 뵙고 大尹 뵈라고 권하였더니
말이 겨우 미치자 귀 막누나.
水北山人
注+石洪은 자가 濬川이니, 洛水의 북쪽 가에 살았다.은 명성 얻어
지난해 떠나가서 幕下의 선비 되었으며
水南山人
注+溫造는 자가 簡輿이니, 洛水의 남쪽 가에 살았다.도 뒤이어 가서
안장 얹은 말과 따라가는 하인들 마을을 꽉 메웠다오.
少室山人은 높은 값 요구하여
注+李渤은 자가 濬之이니, 李涉의 형이다. 처음에는 廬山에 은둔하였고 나중에는 嵩岳 少室山에 은둔하였다. 글을 올려 시정을 말하였는데,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두 번이나 諫官으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네.
저들은 모두 비판하는 입으로 세상 일 논하였으나
힘 있는 자에게 부리워짐 면치 못하였다오.
선생의 사업 측량할 수 없으니
오직 법률 가지고 스스로 몸을 다스리네.
春秋 三傳
注+春秋는 좌씨ㆍ공양씨ㆍ곡량씨의 三傳이 있다. 모두 통달하여 높은 집에 묶어 놓고
홀로 聖人의 遺經 안고 始終을 연구한다오.
지난해에 붓 희롱하여 같고 다름 조롱하니
괴이한 말 사람들 놀래켜 비방 그치지 않네.
근래에는 스스로 순탄한 글 쓰겠다고 말하나
아직도 허공에 騄駬 타고 올라가는 듯하다오.
지난해에 아이 낳아 添丁이라 이름하니
이 뜻은 나라에 주어 농사일에 충당하려 함이었네.
국가의 丁口 四海에 연해 있으니
어찌 농부 없어 친히 쟁기자루 잡게 하는가.
선생은 재주 간직하여 끝내 크게 쓰여지리니
재상의 지위 허락하지 않으면 끝내 벼슬하지 않으리라.
가령 힘을 펴는 대열에 있지 않더라도
글로 써서 법 남기면 또한 믿을 수 있다오.
후손들 十世 뒤까지 죄 지어도 용서받을 것이니
注+《左傳》襄公 21년 조에 “社稷의 신하이니 오히려 장차 十代에 이르도록 죄를 용서해 주어 능한 자를 권면해야 한다.” 하였다.어찌 후손들에게 基址를 물려줌 없다 하겠는가.
내 진실로 忠孝가 天性에서 나왔음 아노니
몸 깨끗이 하려 人倫 어지럽히는 자에게 어찌 비기겠나.
어젯밤 수염 긴 종이 와서 글 전하니
담너머 악한 소년들 惡行이 비길 데 없다 하였네.
언제나 지붕에 올라가 아래 굽어보니
온 식구 놀라고 두려워 도망하다가 발 다친다네.
婚媾를 빙자하여 관리 능멸하니
명령이 행해지고 금령이 그침 믿지 않는다네.
선생은 굴욕 당해도 일찍이 말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번에 와서 말함 진실로 이유가 있으리라.
아! 내몸이 赤縣의 尹 되었으니
권력을 잡아 쓰지 않고 어느 때 기다리려 하는가.
당장 刑曹 시켜 五百
注+韋昭가 말하기를 “五百은 본래 伍陌으로 되어 있으니, 伍는 당한다는 뜻이요 陌은 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인도하여 길 가운데에 당하게 하고서 구제하는 것이다. 지금 풍속에 곤장을 치는 사람을 일러 ‘오백’이라 한다.” 하였다.을 불러
쥐새끼 같은 자들 잡아다 시장에서 戮屍하였노라.
선생은 또다시 수염 긴 종 보내와서
이와 같은 조처는 내 기뻐하는 바 아니라 하시네.
더구나 지금 때가 長養하는 시절 당하였으니
도읍을 사나운 정사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하시네.
선생은 진실로 내가 존경하는 분이니
넓은 도량 끝을 엿볼 수 없어라.
제멋대로 처형함 이 누구의 잘못인가
마부 죽인 잘못 본받아 옛 역사에 부끄럽네.
注+만약 晉나라의 魏絳이 楊干의 마부를 죽인 잘못을 본받는다면 春秋의 옛 역사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다.羊 사고 술 받아 不敏함 사죄하니
마침 밝은 달이 桃李花에 비칠 때 만났노라.
선생께서 枉臨할 뜻 계시다면
다시 수염 긴 종 보내어 雙鯉 전하소서.
이 시는《韓昌黎集》5권에 실려 있는 바, 元和 6년(811) 봄에 한유가 河南令으로 있을 때 盧仝에게 지어 준 것이다.《唐書》〈韓愈列傳〉끝에 “盧仝은 東都에 살았는데 한유가 하남령으로 있을 때 그의 시를 아껴 예우하였다. 盧仝은 玉川子라 自號하였는데, 일찍이〈月蝕〉시를 지어 元和의 逆黨을 비판하였는 바, 한유가 그의 작품을 칭찬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시를 통해 盧仝의 사람됨과 한유와의 교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바, 두보가 鄭虔에게 준〈醉時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