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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前集

고문진보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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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德舞
白居易
唐太宗 爲秦王時 征伐四方할새 每克輒奏 故製樂舞하고 名秦王破陣樂이라하더니 卽位七年正月 改秦王破陣樂曰七德이라 詩言太宗功德之盛하니라
七德舞七德歌
傳自武德至元和注+傳自武德至元和 : 武德 高祖年號 元和 憲宗年號
元和小臣白居易
觀舞聽歌知樂意하니
曲終稽首陳其事
太宗十八擧義兵하여
白旄黃鉞定兩京이라
擒充戮竇四海淸하니注+擒充戮竇四海淸 : 王世充 弑隋越王侗하고 據洛稱鄭帝하며 竇建德 據河間하고 稱夏王하더니 武德四年 秦王 擊世充한대 建德 來援이어늘 幷擒戮之하니라
二十有四功業成이라
二十有九卽帝位하여
三十有五致太平이라
功成理定何神速
速在推心置人腹이라
하고
飢人賣子分金贖이라
魏徵夢見天子泣하고注+魏徵夢見天子泣 : 徵疾甚하니 帝親問疾하다 是夕 帝夢徵若平生이러니 及旦薨이어늘 帝臨哭하여 爲之慟하니라
張謹哀聞辰日哭이라注+張謹哀聞辰日哭 : 張公謹이어늘 出次發哀하니 有司奏辰日忌哭이라한대 上曰 君之於臣 猶父子也 情發於衷이어늘 安避辰日이리오하니라
怨女三千放出宮하고
死囚四百來歸獄이라注+死囚四百來歸獄 : 六年 親錄囚徒하여 死罪者三百九十人 縱之還家하고 期以明年秋卽刑이러니 及期 囚皆詣朝堂하여 無後者 太宗 嘉其誠信하여 悉赦之하니라
剪鬚燒藥賜功臣하니
李勣嗚咽思殺身이라注+李勣嗚咽思殺身 : 李勣 嘗暴疾이어늘 帝乃自剪鬚하여 以和藥이러니 及愈入謝 頓首流涕하니라
含血吮瘡撫戰士하니
思摩奮呼乞效死注+思摩奮呼乞效死 : 貞觀十八年 征高麗할새 右衛大將軍李思摩 中毒矢한대 親爲吮血하니 將士聞之하고 皆感泣하니라
則知不獨善戰善乘時
以心感人人心歸
爾來一百九十載
天下至今歌舞之
歌七德舞七德하니
聖人有作垂無極이라
豈徒耀神武
豈徒誇聖文이리오
太宗意在陳王業하여
王業艱難示子孫이라


칠덕무
백거역
唐나라 太宗이 秦王이었을 때에 사방을 정벌하면서 언제나 승리하면 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러므로 樂舞를 만들고 秦王破陣樂이라 이름하였는데, 즉위한 지 7년되는 해 정월에 秦王坡陣樂을 고쳐 七德舞라 하였다. 그러므로 詩에 태종의 功德의 훌륭함을 말한 것이다.
七德舞와 七德歌는
武德 연간으로부터 전하여 元和 연간에 이르렀네.注+武德은 高祖의 연호이고, 元和는 憲宗의 연호이다.
元和의 小臣 白居易는
춤 보고 노래 듣고서 음악의 뜻 알아
곡이 끝나자 머리 조아려 그 일 아뢰노라.
太宗은 십팔 세에 義兵 일으켜
흰 깃발에 황금 斧鉞로 長安과 洛陽 평정하였네.
王世充 사로잡고 竇建德 죽여 四海를 맑게 하니注+王世充은 隋나라 越王 侗을 시해하고 낙양을 점거하고서 鄭帝라 칭하였으며, 竇建德은 하간을 점거하고서 夏王이라 칭하였다. 武德 4년(621)에 秦王이 왕세충을 공격하자, 두건덕이 구원하러 오거늘 함께 사로잡아 죽였다.
이십사 세에 功業이 이루어졌네.
이십구 세에 皇帝의 지위에 오르시어
삼십오 세에 太平 이루었다오.
功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됨 어찌 이리도 신속한가
마음을 미루어 남의 뱃속에 두었기 때문이라오.
죽은 병졸의 遺骸 비단 흩어 거두어주고
굶주린 사람이 팔아먹은 자식 금을 나누어 贖良하였네.
魏徵이 꿈에 나타나니 天子가 우셨고注+魏徵의 병이 심해지자 황제가 친히 문병을 하였다. 이날 밤에 황제는 위징이 평소처럼 지내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訃音이 이르니, 황제는 가서 곡하여 애통해 하였다.
張公謹의 訃音에 辰日에도 곡하였네.注+張公謹이 죽자 임금이 喪次로 나아가 슬픔을 표하니, 有司가 “辰日에는 곡하는 것을 꺼린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말하기를 “君臣間은 父子間과 같으니, 슬픈 정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데 어찌 辰日을 피하겠는가.” 하였다.
원한의 궁녀 삼천 명 궁에서 내보내고
사형수 사백 명 스스로 옥으로 돌아왔다오.注+唐나라 貞觀 6년(632)에 죄수들을 직접 기록하여 死刑에 해당하는 자 3백 90명을 풀어주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가을에 형벌을 받으러 돌아오기로 기약하였는데, 기약한 날이 되자 죄수들이 모두 朝堂으로 나와서 뒤늦은 자가 없었다. 태종은 이들의 진실함을 가상하게 여겨 모두 사면시켰다.
수염 잘라 태워서 藥에 섞어 功臣에게 하사하니
李勣은 오열하며 목숨 바칠 것 생각하였으며注+李勣이 일찍이 갑자기 병을 앓자, 황제가 마침내 스스로 수염을 잘라 태워서 약에 섞어 먹게 하였는데, 이적은 병이 낫자 들어가 사례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다.
피를 머금고 상처를 빨아 戰士들 어루만지니
李思摩는 분발해 함성 지르며 목숨 바치기 원하였다오.注+貞觀 18년(644)에 高句麗를 정벌할 적에 우위대장군 李思摩가 독화살에 맞았는데 임금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병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면 비단 잘 싸우고 때를 잘 탔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 감동시켜 人心이 돌아와서임 알겠네.
이래로 일백구십 년 동안
천하가 지금까지 七德을 노래하고 춤추누나.
七德을 노래하고 七德을 춤추니
聖人이 만드시어 무궁한 후세에 드리우네.
어찌 한갓 神武를 드날리며
어찌 한갓 聖文을 과시할 뿐이겠는가.
太宗의 뜻 王業을 말하여
王業의 어려움 자손에게 보여줌에 있었다오.
賞析
이 시는《白香山集》3권에 실려 있는 바, 칠덕무를 보고서 唐 太宗이 난을 평정하고 王業을 일으킨 것을 찬미하고 당나라의 國運이 무궁하기를 기원한 내용이다.


역주
역주1 亡卒遺骸散帛收 : 貞觀 2년(628) 4월에 隋나라 병졸들의 버려진 遺骸를 거두어 장사 지내주었고, 또 4년 9월에 長城 남쪽의 隋나라 병졸들의 버려진 유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고문진보전집 책은 2017.12.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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