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십이월 신축년에
나는 처음 정사에 종사하여 孔子
注+魯나라 노인은 孔子이다.를 뵈었네.
옛부터 石鼓가 있단 말 들었는데 이제 보게 되니
文字가 구불구불하여 교룡과 뱀이 달리는 듯하여라.
자세히 보며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배 위에 썼고
注+虞世南이 글씨를 배울 적에 항상 이불 밑에서 손가락으로 배 위에 글씨를 쓰고는 하였다.읽자니 한스럽게도 입에 재갈이 물린 듯하였다오.
韓公은 옛것을 좋아하였는데도 늦게 태어남 한하였는데
나는 지금 하물며 또 백 년이 지난 뒤에 있어서랴.
偏旁을 억지로 찾아보고 點劃을 추측해 보니
때로 한두 가지는 알고 여덟아홉 가지는 모르겠네.
내 수레 이미 수리하고 말도 갖추어졌다는 것과
물고기는 연어인데 이것을 버들 가지에 꿴다는 말뿐이네.
注+公(蘇軾)이 스스로 註를 내기를 “〈石鼓文〉의 글에 ‘내 수레를 이미 수리하였고 내 말을 또한 같은 색으로 구비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물고기는 무엇인가? 연어와 잉어로다. 무엇으로 꿰는가? 버드나무와 수양버들이다.’ 하였으니, 오직 이 여섯 구만 읽을 수 있고 그 나머지는 통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옛날 器物들 종횡으로 놓여 있는데 겨우 솥만 알고
별들 어지러운데 겨우 北斗星만 아는 것과 같구나.
모호하여 절반은 이미 흉터와 딱정이 같은데
구불구불한데 사람의 발꿈치와 팔꿈치 분별하는 듯하네.
곱고 고운 조각달 雲霧에 숨어 있는 듯하고
깨끗한 아름다운 벼 잡초 중에 빼어난 듯하여라.
수백 번의 전쟁에 표류하면서도 우연히 남았으니
천년에 홀로 서 누구와 벗하였나.
위로 軒轅氏와 蒼頡 좇아 서로 응답하고
아래로 李陽冰과 李斯 굽어보니 새새끼같네.
注+‘氷斯’는 唐나라 李陽冰과 秦나라 李斯이니, 두 사람은 篆書를 잘하였다. 㝅(누)는 젖먹이이니, 석고의 글이 위로 黃帝 軒轅氏에게 짝할 만하고 아래로 이양빙과 이사를 보기를 아직 자라지 않은 새새끼처럼 여김을 말한 것이다.저 옛날 周 宣王이 鴻雁을 노래하였으니
당시에 史官인 籒
(주)가 과두문자를 변형하였다오.
注+周나라 宣王 때에 사주가 大篆 15편을 지었고 魯나라 恭王이 孔子의 집을 허물면서 옛책을 얻었는데 모두 蝌蚪文字로 기록되어 있었다.혼란 싫어하여 사람들 聖賢을 생각하니
中興 위해 하늘이 元老들을 탄생하였네.
동쪽으로 徐虜 정벌하여 포효하는 범이 싸우는 듯하였고
북쪽으로 犬戎 정벌하여 지시에 따르게 했네.
象胥들 어지러이 모여 이리와 사슴 바치고
注+象胥는 바로 후세의 譯史이니, 사방 오랑캐의 말에 통한 자이다.方叔과 召虎는 나란히 笏과 검은 기장술
注+圭는 서옥으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져서 공^후^백^자^남의 관작을 봉할 때에 사용하였으니, 각각 제도가 있다. 卣는 중간 크기의 술잔이니, 功이 있는 자에게는 옥 술잔과 검은 기장술 한 그릇을 하사하였다. 하사받았다오.
마침내 鼙鼓 소리에 장수들의 功德 생각하니
注+《禮記》〈樂記〉에 “북소리를 들으면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를 생각한다.” 하였다.어찌 악기를 두드려 樂工들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어느 사람이 頌 지어 詩經의 崧高에 견주었나
萬古의 이 碑文 岣嶁山의 神禹碑와 똑같구나.
注+行陽縣 북쪽 산의 神禹碑이니, 지금 碧碑라고 이름한다. 두 글자는 한 음을 거루라고 하니, 이 노래는 韻을 따라 古后力后反(구루번)으로 읽는다. 韓退之의 詩에 “구루산 뾰족한 곳의 신우비 글자가 푸르고 돌이 붉은데 모양이 기이하다.” 하였다.공로가 지극히 크지만 자랑하지 않으니
文王 武王의 세대와 멀지 아니하여 아직도 忠厚하다오.
年代를 찾고자 하나 甲乙의 干支 없으니
어찌 누가 지었다고 기록한 文字 있겠는가.
周나라가 쇠한 뒤로 七國을 지나
끝내 秦나라 사람들이 九有를 소유하였네.
詩書를 쓸어버리고 법률만 외우며
俎豆를 던져버리고 채찍과 형틀만 늘어놓았다오.
당년에 어떤 사람이 祖龍 도왔던가
上蔡의 公子로 黃狗 끌고 다녔다네.
泰山에 올라 비석에 새겨 功烈 칭송하니
注+진시황이 鄒嶧山에 올라가 돌에 새겨 秦나라를 칭송하였다.뒤에도 이을 이 없고 앞에도 짝할 이 없다 하였다오.
비석마다 모두 말하기를 皇帝가 사방 나라 순행하여
강포한 자들 삶아 없애고 백성
注+秦나라는 백성을 검수라 하였으니, 그 머리가 검음을 말한 것이니, ‘黎民’이란 말과 같다.을 구제했다 하였네.
六經이 이미 재와 먼지 되어 버렸으니
이 石鼓도 마땅히 쳐서 버려졌으리라.
九鼎이 泗水 가에 빠졌다는 말 전해 듣고는
만 명을 동원하여 물에 들어가 취하려 하였다오.
폭군이 욕심 부려 人力을 다하였으나
신묘한 물건 의롭게도 秦나라 때에 더럽혀지지 않았네.
이때에 石鼓文 어느 곳에서 피난하였던가
天工이 귀신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지 않았을까.
흥망이 백 번 변하였으나 이 물건 스스로 한가로웠으니
부귀는 하루 아침이나 이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누나.
자세히 사물의 이치 생각하며 앉아서 탄식하니
인생이 어이하면 이 石鼓처럼 영원히 남을 수 있을까.
이 시는《蘇東坡集》2책 2권에 실려 있다. 소동파는 仁宗 嘉祐 6년(1061)에 制科에 응시하여 鳳翔縣에 부임하였다. 이해에〈鳳翔八觀〉시를 지었는데, 이 시의 序에 “鳳翔八觀이란 볼 만한 곳 여덟 곳을 기록한 것이다. 옛날 司馬子長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會稽에 올라가 禹穴을 찾았고 李太白은 七澤의 볼 만한 곳을 찾아 荊州에 이르렀으니, 두 사람 모두 세속을 서글퍼하고 자신이 古人을 만나지 못함을 슬퍼한 나머지 그 유적이나마 보기 위해 이처럼 수고하였던 것이다. 鳳翔은 秦과 蜀의 경계로 사대부들이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는 곳이고, 또 이 八觀은 모두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곳이므로 好事者들이 두루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지어 가서 보고 싶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말해 주고자 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