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潮八分小篆歌
杜甫
蒼頡鳥跡
注+蒼頡鳥跡 : 蒼頡은 黃帝臣이니 觀鳥跡而制字하니라旣茫昧
하니字體變化如浮雲
이라石鼓又已訛
하니大小二篆生八分
이라注+大小二篆生八分 : 周太史籒 始制大篆하고 秦丞相李斯 爲小篆하고 王次仲이 減隷書爲八分書하니라 蔡邕曰 臣父嘗言 八分書는 割程邈隷字法하여 去八하고 法李斯小篆하여 去二分하여 取八分이라 故曰八分書라하니라秦有李斯漢蔡邕
이요中間作者寂不聞
이라嶧山之碑
注+嶧山之碑 : 始皇이 東行할새 上鄒嶧山하여 刻石頌功德하니 其文은 李斯小篆이라野火焚
하고이라尙骨立
하니書貴瘦硬方通神
이라惜哉李蔡不復得
하니吾甥李潮下筆親
이라尙書韓擇木
과蔡有隣
이開元已來數八分
하니潮也奄有二子成三人
이라況潮小篆逼秦相
하여快劍長戟森相向
이라八分一字
百金
이니蛟龍盤拏肉屈强
이라吳郡
誇草書
나草書非古空雄壯
이라豈如吾甥不流宕
하여丈人行
고巴東逢李潮
하니逾月求我歌
라我今衰老才力薄
하니潮乎潮乎奈汝何
오
李潮의 八分書와 小篆을 읊은 노래
杜甫
창힐의 鳥跡
注+창힐은 黃帝의 신하이니, 새의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은 이미 아득하니
글자체의 변화 뜬 구름 같아 알 수 없네.
陳倉의 石鼓文도 이미 와전되니
大篆과 小篆에서 八分書가 나왔다네.
注+周나라 태사인 籒(주)가 처음으로 대전을 만들고 秦나라의 승상인 李斯가 소전을 만 들고 王次中이 예서를 줄여 八分書를 만들었다. 채옹이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팔분서는 정막의 예서법을 줄여서 팔분을 제거하고 이사의 소전을 본받아 이 분을 제거하여 팔분을 취하였으므로 팔분서라 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秦나라에는 李斯 漢나라에는 蔡邕이 있었는데
중간에는 작자가 적막하여 알려지지 않았다오.
역산의 碑
注+秦始皇이 동쪽으로 巡行할 적에 추역산에 올라 돌에 새겨 공덕을 칭송하니, 이 글은 이사의 소전이다.는 들불에 타버렸고
대추나무에 전각한 것은 자획이 살쪄 참모습 잃었네.
苦縣에 있는 光和의 老子碑 아직도 뼈대가 서 있으니
글씨는 야위고 굳셈 귀하니 神을 통할 수 있네.
애석하다 李斯와 蔡邕 다시 얻을 수 없는데
우리 생질 李潮 붓을 놀리면 이들과 가깝다오.
尙書인 韓擇木과
騎曹인 蔡有隣은
開元 이래로 八分을 잘 쓴다고 꼽아오는데
李潮는 두 사람의 경지 소유하여 셋이 되었다오.
더구나 李潮의 小篆은 秦나라 승상 李斯와 가까워
예리한 칼과 긴 창이 삼엄하게 서로 향한 듯하여라.
八分 한 글자는 百金의 값이 나가니
교룡이 서려 있는 듯 근육이 억세어 보이누나.
吳郡의 張顚이 草書 과시하나
草書는 옛것 아니니 부질없이 웅장하기만 하다오.
어찌 우리 생질이 방탕한 데로 흐르지 아니하여
丞相과 中郞의 丈人 항렬이 됨만 하겠는가.
巴東에서 李潮 만나니
한 달이 넘도록 나에게 노래 지어주기 청하였네.
내 이제 노쇠하고 재주와 힘도 부족하니
李潮여! 李潮여! 너에게 어찌하리.
賞析이 시는《杜少陵集》18권에 실려 있는 바, 작자의 甥姪인 李潮가 八分書와 小篆體에 뛰어남을 노래한 것으로, 大曆 元年(766)에 夔州에서 지은 것이다. 이조는 李斯의 嶧山碑를 본받았다고 하며, 八分書로 쓴 것으로는〈唐慧義寺彌勒像碑〉와〈彭元曜墓誌〉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