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全椒山中道士
韋應物
全椒는 滁州縣이니 韋時爲州刺史하니라
今朝郡齋冷
하니忽念山中客
이라澗底束荊薪
하고歸來煮白石
이라注+ 澗底束荊薪 歸來煮白石 : 荊者는 木也요 薪者는 柴也니 白石을 煮之如芋하여 可食也라 思道士束澗薪하여 來煮白石之藥이라遙持一盃酒
하여遠慰風雨夕
이라落葉滿空山
하니何處尋行迹
고注+ 落葉滿空山 何處尋行迹 : 詩謂坐郡齋而思憶道士山中之樂하니 何時持酒하여 慰此牢落이리오 但見落葉遍山而道士不見爾라
全椒 山中의 도사에게 부치다
위응물
전초는 제주현이니 韋應物이 이때 제주자사가 되었다.
오늘 아침 郡廳이 차가우니
갑자기 산중의 손님 생각나네.
시내 밑에서 가시나무 섶 묶고
돌아와 白石 삶으리라.
注+荊은 나무이고 薪은 땔나무이니, 白石을 삶으면 토란과 같아져서 먹을 수 있다. 道士가 시내의 섶을 묶어 가지고 와서 백석의 약을 삶던 것을 생각한 것이다.멀리 한 잔 술 가져다가
아득히 비바람 부는 저녁 위로하려 하나
낙엽이 빈 산에 가득하니
어느 곳에서 행적 찾을건가.
注+詩에 이르기를 “郡廳에 앉아서 道士가 산중에서 즐거워하던 것을 생각하니, 언제나 술을 가져와 이 쓸쓸함을 위로하겠는가.” 하였으니, 다만 온 산에 낙엽 지는 것만 보고 도사는 보지 못한 것이다. 賞析이 시는《唐詩正音》1권과 《韋蘇州集》3권에 실려 있다. 당시 滁州刺史로 있던 위응물이 날씨가 쌀쌀해지자 全椒의 산중에서 수도하고 있는 벗을 걱정하여 지은 시이다. 이 시는 陶淵明의 풍격을 지닌 名篇으로, 沈德潛은 이 시를 가리켜 ‘化工의 붓[化工筆]’이라고 극찬하였다. 田園의 風物을 주로 읊은 도연명의 시풍은 王維, 柳宗元, 韋應物, 孟浩然으로 계승되는데 唐詩에 있어서 李杜의 양대 산맥과는 별도로 하나의 流派를 형성하였다. 소동파도 이 시를 몹시 애송하였다 한다. 施補華의 《峴傭說詩》에 “동파가 작심하고 이 시를 배우려 하였으나 끝내 흡사하지 못하였다. 이는 동파는 힘을 들였으나 韋公은 힘을 들이지 않았고 동파는 의도가 있었으나 위공은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니, 미묘한 경지이다.” 라고 하여, 아래에 보이는 동파의 화답시보다 훨씬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바로 自然과 人爲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情感과 形象의 배합이 매우 자연스러운 바, ‘화공필’이라는 칭찬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李安訥〈1571(선조 4)-1637(인조 15)〉의《東岳集》16권에는 監役 李竣汝가 原州의 별장에서 방문해 준 것에 사례하여 이 시의 운을 사용하여 지은 시가 실려 있다.
“月峰의 병든 거사요 花山의 늙은 축객이라오. 아스라히 지나가는 한 조각 구름 우뚝히 깎아지른 천 개의 벼랑. 여름에는 쌀을 보내왔고 중추에는 술을 실어보냈지. 南川의 물 동쪽 바위에 이 행적 썼으면 하네.[月峰病居士 花山老逐客 蒼茫一逕雲 犖角千涯石 送米當夏月 載酒趁秋夕 南川水東巖 願書此行迹]”
柳潚〈1564(명종 19)-?〉의 《醉吃集》4권에도 이 시에 차운한 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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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초산중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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