或設敎以馭下하고 或展禮以事上하고 或宣威以肅震曜하고 或敷和而散風雨하니 得之則百度惟貞하고 失之則千里斯謬라
所以辭不苟出이니 君擧必書는 欲其昭法誡愼言行也라
其泉源所漸은 基於出震之君하고 黼藻斯彰은 郁乎如雲之后라
修聖道以顯聖人하사 芟煩亂而翦浮辭하고 擧宏綱而撮機要하여 上斷唐虞하고 下終秦魯하시니 時經五代하여 書總百篇이라
採翡翠之羽毛하고 拔犀象之牙角하며 罄荊山之石하니 所得者는 連城이요 窮漢水之濱하니 所求者는 照乘이라
巍巍蕩蕩하여 無得而稱이요 郁郁紛紛하여 於斯爲盛하니 斯乃前言往行이 足以垂法將來者也라
曁乎七雄已戰
엔 未聚
하여 儒雅與深穽同埋
하고 經典共積薪俱燎
하니라
漢氏大濟區宇하고 廣求遺逸하여 採古文於金石하고 得今書於齊魯하니 其文則歐陽夏侯二家之所說을 蔡邕碑石刻之하고 古文則兩漢亦所不行을 安國注之나 寔遭巫蠱하여 遂寢而不用하고 歷及魏晉하여 方始稍興이라
但古文經은 雖然早出晩始得行이나 其辭富而備하고 其義宏而雅라
故復而不厭하고 久而愈亮하니 江左學者 咸悉祖焉이라
近至隋初에 始流河朔하니 其爲正義者는 蔡大寶‧巢猗‧費甝‧顧彪‧劉焯‧劉炫等이라
其諸公旨趣
는 多或因循
釋注文
이니 義皆淺略
하고 惟劉焯‧劉炫
이 最爲詳雅
라
然이나 焯乃織綜經文하여 穿鑿孔穴하고 詭其新見하여 異彼前儒하니 非險而更爲險하고 無義而更生義니라
若其言必託數하고 經悉對文이면 斯乃鼓怒浪於平流하고 震驚飊於靜樹니 使敎者煩而多惑하고 學者勞而少功이나
雖復微稍省要나 又好改張前義하여 義更太略하고 辭又過華하니 雖爲文筆之善이나 乃非開獎之路니라
義旣無義하고 文又非文하니 欲使後生으로 若爲領袖인댄 此乃炫之所失이니 未爲得也니라
今奉明勅하여 考定是非하니 謹罄庸愚하고 竭所聞見하며 覽古人之傳記하고 質近代之異同하여 存其是而去其非하며 削其煩而增其簡하니 此亦非敢臆說이요 必據舊聞이니라
謹與朝散大夫行太學博士臣王德韶前四門助敎臣李子雲等
과 謹共
敍
하고 至十六年
에 又奉勅
하여 與前修疏人 及通直郞行四門博士驍騎尉臣朱長才, 給事郞守四門博士上騎都尉臣蘇德融, 登仕郞守太學助敎雲騎尉臣隨德素, 儒林郞守四門助敎雲騎尉臣王士雄等
이 對勅使趙弘智
하고 覆更詳審
하여 爲之正義
하니 凡二十卷
이라
국자좨주國子祭酒 상호군上護軍 곡부현개국자曲阜縣開國子 신臣 공영달孔穎達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찬撰하였다.
대개 《서書》라는 것은 임금의 말씀과 고명誥命을 적은 전칙典則이요, 우사右史가 임금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옛날의 왕은 모든 일을 총괄해야 하기 때문에 명령하는 방법이 한 가지뿐이 아니었다.
혹은 가르침을 베풀어 아랫사람을 어거하기도 하고, 혹은 예절을 갖추어 윗사람을 섬기기도 하며, 혹은 추상같은 위엄을 베풀어서 두렵게 하기도 하고, 혹은 온화한 은혜를 펴서 비바람처럼 적셔주기도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모든 법도가 바르게 펼쳐지고, 이렇게 하지 못하면 크게 잘못된다.
입은 지도리와 오늬의 역할을 하므로 명령에 따라 영욕榮辱이 결정되니, 명령하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령辭令을 구차하게 내보내지 못하니, 임금의 처사를 반드시 적는 것은 그 법계法誡를 밝히고 언행言行을 신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샘물의 근원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듯 덕정德政이 펼쳐지는 것은 임금에게서 시작되고, 화려한 보불 문장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읍양揖讓하니 전典‧모謨가 일어나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혁명革命하니 서誓‧고誥가 생겨났다.
선군先君 선보宣父(孔子)께서 주周나라 말기에 태어나시어, 지극한 덕德이 있었으나 지극한 위位를 가지지 못하셨다.
그래서 성도聖道를 닦아 성인聖人을 드러내시어, 번란煩亂한 것을 베어내고 근거없는 말을 잘라내셨으며, 대강大綱을 들고 기요機要를 취하여 위로는 당唐‧우虞에서 시작하고 아래로는 진秦‧노魯에서 끝내셨는데, 오대五代의 시기를 거쳐서 《서書》가 총 100편이 되었다.
비취翡翠의 우모羽毛를 채취하고 서상犀象의 아각牙角을 뽑은 셈이며, 형산荊山의 돌을 다 쪼갠 결과 얻은 것은 연성벽連城璧이요, 한수漢水의 물가를 끝까지 뒤진 결과 구한 것은 조승벽照乘璧이었다.
우람하여 무어라 일컬을 수 없고, 찬란하여 이에 최고로 빛났으니, 그래서 전인의 언행이 충분히 장래에 법이 될 수 있었다.
7국國의 영웅들이 이미 전쟁을 벌일 때에 와서는 오정五精이 모이지 못하여 유아儒雅(儒生)가 깊은 함정과 함께 매몰되고, 경전經典이 쌓인 섶과 함께 타버렸다.
한漢나라가 크게 구우區宇(天下)를 구제하고 널리 숨은 인재를 구하여 고문古文을 금석金石에서 채취하고 금서今書를 제齊‧노魯에서 얻었으니, 금문今文은 구양歐陽(歐陽和伯)과 하후夏侯 이가二家(夏侯勝‧하후건夏侯建)가 설명한 것을 채옹蔡邕이 비석碑石에 새겼고, 고문古文은 양한兩漢에서도 행해지지 못한 것을 공안국孔安國이 주注를 달았으나 마침 무고巫蠱 사건을 만나서 결국 좌절되고 쓰이지 못하였고, 위魏‧진晉시대에 와서 비로소 약간 흥성하였다.
그러므로 마융馬融과 정현鄭玄 제유諸儒가 〈공안국孔安國의 고문古文〉學을 보지 못하여, 경전經傳에 주注를 단 것이 때로 혹 차이가 생김을 면하지 못하였다.
진晉나라 세대에 황보밀皇甫謐이 홀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실었으니, 그 뒤로 전수傳授가 자상할 수 있었다.
다만 고문경古文經은 비록 일찍 나와서 늦게야 비로소 행해졌으나 그 말이 풍부하고 자세하였으며 그 뜻이 웅대하고 아담하였다.
그러므로 반복해도 싫증이 나지 않고 오래갈수록 더욱 명랑하니, 강좌江左의 학자學者들이 모두 경전의 조종祖宗으로 삼았다.
근대 수隋나라 초기에 와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비로소 하삭河朔(河北)에 유입되었으니, 《정의正義》를 만든 사람들은 채대보蔡大寶‧소의巢猗‧비감費甝‧고표顧彪‧유작劉焯‧유현劉炫 등이었다.
그러나 제공諸公의 취지는 대부분 예전대로 주석을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뜻이 모두 천단淺短하였고, 그중에 오직 유작劉焯과 유현劉炫만이 가장 상세하고 아정雅正하였다.
그러나 유작劉焯은 경문經文을 짜 맞추어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고 새로운 견해를 내세워서 전유前儒들과 다르게 해석하였으니, 험한 것이 아닌데서 다시 험한 것을 만들고 별 뜻이 없는데서 다시 다른 뜻을 만들어낸 꼴이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옛사람의 말과 고명誥命은 오직 뜻을 전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비록 다시 때로는 상象을 취하였지만, 반드시 말에 모두 뜻을 담지는 않았다.
만일 그 말들이 반드시 숫자를 맞추고 경經이 모두 문文을 대응하게 한다면 이것은 바로 평탄하게 흐르는 물에 격랑激浪을 일으키고 가만히 있는 나무에 폭풍이 몰아치는 격이니, 가르치는 사람은 번잡하여 의혹이 많아지게 되고 배우는 사람은 고생만 잔뜩 하고 성과는 적어지게 된다.
지나친 것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유현劉炫은 유작劉焯의 주석이 번잡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주석을 산삭刪削하였다.
비록 약간은 요약하였지만 또한 전인의 뜻을 고치기를 좋아하여 뜻은 다시 너무 소략해지고 말은 또 너무 화려해졌으니, 비록 문장은 잘 되었으나 곧 독자를 인도하는 길은 아니었다.
뜻이 이미 뜻답지 못하고 글 또한 글답지 못하니,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만일 영수領袖(儀則)로 삼게 한다면 이것은 유현劉炫의 실책이니, 득이 되지 못한다.
지금 칙명勅命에 의하여 옳고 그른 것을 고찰하여 정하니, 삼가 어리석은 생각과 견문을 다 기울여 쏟으며, 고인古人의 전기傳記를 열람하고 근대近代의 이동異同을 살펴서 옳은 것은 놓아두고 그른 것은 제거하며,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간략한 것은 보탰으니, 이것은 또한 감히 억설臆說을 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구문舊聞에 근거한 것이다.
삼가 조산대부朝散大夫 행태학박사行太學博士 신臣 왕덕소王德韶, 전사문조교前四門助敎 신臣 이자운李子雲 등과 더불어 신중하게 서술하였고, 정관貞觀 16년(642)에 이르러 또 칙명에 의하여 전에 주소注疏를 한 사람 및 통직랑通直郞 행사문박사行四門博士 효기위驍騎尉 신臣 주장재朱長才, 급사랑給事郞 수사문박사守四門博士 상기도위上騎都尉 신臣 소덕융蘇德融, 등사랑登仕郞 수태학조교守太學助敎 운기위雲騎尉 신臣 수덕소隨德素, 유림랑儒林郞 수사문조교守四門助敎 운기위雲騎尉 신臣 왕사웅王士雄 등이 칙사勅使 조홍지趙弘智와 머리를 맞대고 다시 자세하게 살펴서 《상서정의尙書正義》를 만들었으니, 무릇 20권이다.
성상聖上의 전범典範이 널리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아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