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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3)

상서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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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 제8권 商書
湯誓 第一
釋文凡三十四篇이니 十七篇存이라
伊尹 相湯伐桀 升自陑하여
[傳]桀都安邑하니 湯升道從陑 在河曲之南이라
○馬云 俗儒以湯爲謚하고 或爲號하니 號者 似非其意 言謚近之이나 不在謚法이라 無聞焉이라
及禹 俗儒以爲名이나 帝系 禹名文命이요 王侯世本 湯名天乙이니 推此言之컨대 禹豈復非謚乎
亦不在謚法이라 疑焉이라하니라 夏之末天子
遂與桀戰於鳴條之野하니라
[傳]地在安邑之西 桀逆拒湯이라
作湯誓
[疏]‘伊尹’至‘湯誓’
○正義曰:伊尹以夏政醜惡, 而歸湯. 輔相成湯, 與之伐桀, 升道從陑, 出其不意,
遂與桀戰於鳴條之野. 將戰而誓戒士衆, 史敍其事, 作湯誓.
[疏]○傳‘桀都’至‘之南’
○正義曰:此序湯自伐桀, 必言‘伊尹相湯’者, 序其篇次, 自爲首尾, 以上云伊尹醜夏, 遂相成湯伐之, 故文次言‘伊尹’也.
計太公之相武王, 猶如伊尹之相成湯, 泰誓不言‘太公相’者, 彼文無其次也. 且武王之時, 有周‧召之倫, 聖賢多矣.
湯稱伊尹云 “聿求元聖, 與之戮力.” 伊尹稱 “惟尹躬暨湯, 咸有一德.” 則伊尹相湯, 其功多於太公, 故特言‘伊尹相湯’也.
‘桀都安邑’, 相傳爲然, 卽漢之河東郡安邑縣是也.
史記吳起對魏武侯云 “夏桀之居, 左河濟, 右太華, 伊闕在其南, 羊腸在其北, 修政不仁, 湯放之也.”
地理志云 “上黨郡壺關縣有羊腸阪, 在安邑之北.” 是桀都安邑必當然矣.
將明陑之所在, 故先言‘桀都安邑.’ 桀都在亳西, 當從東而往, 今乃升道從陑.
升者, 從下向上之名. 言陑當是山阜之地, 歷險迂路, 爲出不意故也.
陑在河曲之南, 蓋今潼關左右. 河曲在安邑西南, 從陑向北, 渡河乃東向安邑.
[疏]鳴條在安邑之西, 桀西出拒湯, 故戰於鳴條之野. 陑在河曲之南, 鳴條在安邑之西, 皆彼有其跡, 相傳云然.
湯以至聖伐暴, 當顯行用師, 而出其不意, 掩其不備者, 湯承之後, 嘗爲桀臣, 慙而且懼, 故出其不意.
武王則三分天下有其二, 久不事紂, 紂有浮桀之罪, 地無險要之勢, 故顯然致罰, 以明天誅.
又殷勤誓衆, 與湯有異, 所以湯惟一誓, 武王有三.
[疏]○傳‘地在’至‘拒湯’
○正義曰:鄭玄云 “鳴條, 南夷地名.” 孟子云 “舜卒於鳴條, 東夷之.” 或云 “陳留平邱縣, 今有鳴條亭是也.”
皇甫謐云 “伊訓曰 ‘造攻自鳴條, 朕哉自亳.’ 又曰 ‘夏師敗績, 乃伐三朡.’ 湯誥曰 ‘王歸自克夏, 至於亳.’
三朡在定陶, 於義不得在陳留與東夷也. 今安邑見有鳴條陌‧昆吾亭. 左氏以爲昆吾與桀同以乙卯日亡, 韋顧亦爾.
故詩曰 ‘韋顧旣伐, , 不得與桀異處, 同日而亡,
明昆吾亦來安邑, 欲以衛桀, 故同日亡, 而安邑有其亭也. 且吳起言險以指安邑, 安邑於此而言, 何得在南夷乎.” 謐言是也.
湯誓
[傳]士衆이라
[疏]‘湯誓’
○正義曰:此經皆誓之辭也. 甘誓‧泰誓〮‧牧誓, 發首皆有序引, 別言其誓意, 記其誓處.
此與費誓惟記誓辭, 不言誓處者, 史非一人, 辭有詳略. 序以經文不具, 故備言之也.
하라 爾衆庶 悉聽朕言하라
[傳]契始封商하니 湯遂以爲天下號 湯稱王 則比桀於一夫
非台小子 敢行稱亂이라 有夏多罪일새 天命殛之하시나니라
[傳]稱 擧也 擧亂 以諸侯 伐天子 非我小子 敢行此事 桀有昏德일새 天命誅之 今順天이니라
[傳]汝 汝有衆이요 我后 桀也 言奪民農功而爲割剝之政이라
○舍 廢也
予惟聞汝衆言이어니와
[傳]不憂我衆之言이라
夏氏有罪어늘 予畏上帝 不敢不正이니라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모두 34편인데, 17편만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孔氏 傳 孔穎達 疏
伊尹이 湯임금을 도와 桀을 칠 때에 ‘陑’란 땅으로부터 길에 올라
桀이 安邑에 도읍을 세웠으니, 湯임금이 ‘陑’란 땅으로부터 길에 오른 것은 〈상대방이〉 예측 못할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陑는 河曲의 남쪽에 있다.
○馬融이 “俗儒는 湯을 謚라 하고 혹은 號라 하였는데, 號는 그 뜻이 아닌 것 같고, 謚라고 말한 것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謚法≫에 올라있지 않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禹’를 俗儒는 이름이라고 하였으나 ≪帝系≫에 禹임금의 이름은 ‘文命’으로 되어 있고, ≪王侯世本≫에 湯임금의 이름은 ‘天乙’로 되어 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말한다면 禹는 어찌 謚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또한 ≪謚法≫에 올라있지 않기 때문에 의심한다.”라고 하였다. 桀은 夏나라의 마지막 天子이다.
드디어 桀과 鳴條의 들에서 싸웠다.
〈鳴條〉 땅은 安邑의 서쪽에 있으니 桀이 湯임금을 맞이하여 싸운 곳이다.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湯誓〉를 지었다.
書序의 [伊尹]에서 [湯誓]까지
○正義曰:伊尹은 夏나라 정사가 醜惡하기 때문에 桀을 버리고 湯임금에게 돌아왔다. 伊尹은 成湯을 도와 함께 桀을 칠 때에 ‘陑’란 땅으로부터 길에 오른 것은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桀과 鳴條의 들에서 싸웠다. 장차 싸우려고 할 때에 군사들에게 誓戒하였는데,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해서 〈湯誓〉를 지었다.
○傳의 [桀都]에서 [之南]까지
○正義曰:이 書序에서 湯임금이 스스로 桀을 친 것을 꼭 ‘伊尹이 湯임금을 도왔다.’라고 말한 것은 그 편장의 순서를 차례지어 스스로 首尾가 되게 한 것이니, 위에서 “伊尹이 夏나라의 정사를 추악하다고 여겨 결국 成湯을 도와 정벌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문장의 순서에 ‘伊尹’을 말한 것이다.
太公이 武王을 도운 사실을 살펴보면 마치 伊尹이 成湯을 도운 사실과 같건만, 〈泰誓〉에서 ‘太公이 도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저 〈泰書〉의 문장에는 순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武王 때에는 周公‧召公 같은 성현이 많이 있었다.
湯임금은 伊尹에 대하여 “드디어 큰 聖人을 구하여 그와 함께 힘을 쓰고”라고 칭하였고, 伊尹은 “저는 몸소 湯임금과 함께 一德을 가져”라고 칭하였으니, 伊尹이 湯임금을 도울 때 그 공이 太公보다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伊尹이 湯임금을 도왔다.’라고 말한 것이다.
[桀都安邑] 서로 전하여 그렇게 알고 있으니, 곧 漢나라 적의 河東郡 安邑縣이 이곳이다.
≪史記≫에서 吳起가 魏 武侯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夏桀의 거주지는 왼쪽으로 河水와 濟水가 있고, 오른쪽으로 太華山이 있으며, 伊闕山이 그 남쪽에 있고, 羊腸山이 그 북쪽에 있어 〈천하의 요새지였건만〉 仁政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湯임금이 그를 추방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地理志〉에 “上黨郡 壺關縣에 羊腸阪(구불구불한 고갯길)이 있으니, 安邑의 북쪽에 있다.”라고 적고 있으니, 桀이 安邑에 도읍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장차 ‘陑’란 땅의 소재지를 밝히려고 하였기 때문에 ‘桀이 安邑에 도읍을 세운 일’을 먼저 말한 것이다. 桀의 도읍이 亳의 서쪽에 있었다면 당연히 동쪽을 따라 갔어야 했을 터인데, 지금 ‘陑’란 땅으로부터 길에 오른 것이다.
升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것을 이르는 명칭이다. ‘陑’란 땅이 바로 이 山阜의 땅에 놓여있으므로 험한 곳을 지나가는 우회도로를 택한 것은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陑’란 땅은 河曲의 남쪽에 있으니, 아마 지금의 潼關 근처일 것이다. 河曲이 安邑 서남쪽에 있으니, ‘陑’란 땅을 좇아 북쪽으로 향하다가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安邑을 향해 간 것이다.
鳴條는 安邑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桀이 서쪽으로 나와서 湯임금을 맞이하여 싸웠기 때문에 鳴條의 들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陑는 河曲의 남쪽에 있고, 鳴條는 安邑의 서쪽에 있어 모두 저기에 그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전하여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湯임금은 지극한 성인으로 폭군을 정벌하였으니, 마땅히 명명백백하게 가서 군대를 사용했어야 할 터인데,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가서 아직 준비하지 못한 〈桀을〉 엄습한 것은, 湯임금이 禪代의 뒤를 이어서 일찍이 桀의 신하가 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간 것이다.
武王의 경우는 천하의 3분의 2를 가졌고 紂를 오래 섬기지도 않았으며, 紂는 桀보다 더한 죄가 있었고 지리적 조건도 險要한 지세가 없었기 때문에 드러나게 처벌함으로써 하늘의 주벌을 밝혔고,
또 은근히 군중을 誓戒한 것이 湯임금과 달랐다. 이래서 湯임금은 오직 한 번의 誓戒만을 하였을 뿐이고, 武王은 세 번이나 誓戒를 한 것이다.
○傳의 [地在]에서 [拒湯]까지
○正義曰:鄭玄은 “鳴條는 南夷의 땅이름이다.”라고 하였고, 孟子는 “舜임금은 鳴條에서 작고하셨는데, 東夷의 땅이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陳留 平邱縣에 지금 鳴條亭이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皇甫謐은 “〈伊訓〉에 ‘공격을 시작한 것은 鳴條로부터 하였는데, 우리 〈湯임금이〉 德을 닦은 것은 亳邑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하고, 또 〈〈湯誓〉에〉 ‘夏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자 三朡을 쳤다.’고 하고,
〈湯誥〉에 ‘王이 夏나라를 정복하고 돌아와서 亳邑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은즉, 三朡은 定陶에 있었으니, 의미상 陳留와 東夷에 있을 수 없다. 지금 安邑에 鳴條陌과 昆吾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春秋左氏傳≫에 ‘昆吾와 桀이 함께 乙卯日에 망하고, 韋나라와 顧나라도 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詩經≫ 〈商頌 長發〉에 ‘韋나라와 顧나라를 이미 정벌하고 昆吾와 夏桀을 쳤도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에 의하면 昆吾는 衛나라에 있어 곧 濮陽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니, 夏桀과 처소가 달라 같은 날 망할 수 없는 것으로 볼 때,
분명 昆吾 또한 安邑으로 와서 夏桀을 보위하려고 했기 때문에 같은 날 망하였고 安邑에 그 정자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吳起가 험한 곳을 말할 때 安邑을 지목하였으니, 安邑을 여기에서 말했는데, 어떻게 南夷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皇甫謐의 말이 옳다.
湯임금의 군사들에게 戒誓한 것이다.
書序의 [湯誓]
○正義曰:여기의 經文은 모두 誓戒한 말이다. 〈甘誓〉‧〈泰誓〉〮‧〈牧誓〉는 첫머리에 모두 序引을 두어서 별도로 그 서계한 뜻을 말하고 그 서계한 곳을 기록하였다.
이 〈湯誓〉와 〈費誓〉는 서계한 말만 기록하고 서계한 곳을 말하지 않은 것은 史官이 한 사람뿐이 아니고 文辭에는 자상함과 소략함이 있기 때문이다. 書序는 經文이 완벽하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완벽하게 말한 것이다.
湯王이 말씀하였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너희 여러 군사들아! 모두 朕의 말을 경청하라.
契이 처음 商에 봉해졌으니, 湯임금이 드디어 ‘商’을 天下의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湯이 ‘王’이라 칭한 것은 桀을 일개 匹夫에 견주었기 때문이다.
나 小子가 감히 병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夏나라 임금이 죄가 많기 때문에 하늘이 명하여 죽이도록 하신 것이다.
‘稱’은 擧(거행)의 뜻이니, 병란을 일으킴은 諸侯로서 天子를 치는 것이다. 나 小子가 감히 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桀이 혼암한 德이 있기 때문에 하늘이 명하여 誅伐하게 한 것이니, 지금 하늘의 명을 순종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너희 여러 군사들아! 너희들은 ‘우리 임금이 우리들을 걱정해주지 않아, 우리들의 농사를 폐기시키고 수탈하는 정사를 夏나라에 펴서 〈우리들의 재물을 거두어간다.〉’고 말하니,
汝는 汝有衆을 가리키고, 我后는 桀을 가리킨다. 正은 政의 뜻이니, 백성들의 農功을 빼앗고, 수탈하는 정사를 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舍는 〈捨로서〉 폐기하다의 뜻이다.
나는 너희들의 중론을 들었거니와
“우리들을 걱정해주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다.
夏氏에게 죄가 있으므로 〈하늘이 치라고 명하시니〉 나는 上帝를 두려워하는지라, 감히 〈그의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노라.
감히 桀의 죄를 바로잡아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出其不意 : 宋代 劉敞은 “‘升陑’란 桀이 비록 險地에 의거하였으나 또한 湯임금을 막을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니, 이른바 ‘地利가 人和만 못하다.’는 것이다. 孔氏가 ‘예측 못할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고 한 것은 孫吳兵法에서나 하는 일이지, 湯임금과 伊尹이 할 일은 아니었다.[升陑者 謂桀雖據險 亦不能拒湯 所謂地利不如人和 孔氏乃云 出其不意 孫吴之師 非湯與伊尹之義]”라고 하였다. ≪四庫本의 尙書注疏考證≫
역주2 (志)[去] : 저본에는 ‘志’로 되어 있으나, 諸本에 의거하여 ‘去’로 바로잡았다.
역주3 [其] : 저본에는 없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 禪代 : 堯‧舜‧禹처럼 禪讓에 의하여 天子의 자리가 교체되는 것을 이른다. 禪遞라고도 한다.
역주5 : ≪孟子≫에는 ‘人’으로 되어 있다.
역주6 昆吾……同日而亡 : 淸代 朱鶴齡은 “昆吾의 땅이 濮陽에 있어 夏桀과 처소가 다르니 같은 날 망할 수 없다.[昆吾地在濮陽 與桀異處 不得同日而亡]”라고 하였다. ≪尙書埤傳≫
역주7 於左氏昆吾在衛 乃在濮陽 : ≪春秋左氏傳≫ 哀公 17년 조에 “衛나라 임금이 北宮에서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昆吾의 臺觀 위에 올라가서……[衛侯夢于北宮見人登昆吾之觀……]”라고 한 데 대하여 杜預가 “衛에 臺觀이 있어 昆吾氏의 빈터에 놓여있는데 지금의 濮陽城中이다.[衛有觀 在於昆吾氏之虛 今濮陽城中]”라고 注를 단 것이 보인다.
역주8 戒誓湯士衆 : ≪尙書注疏考證≫에서 “文義를 살펴보면 응당 湯임금이 군사들에게 戒誓하였을 것이다. 또 이 篇의 ‘今爾有衆汝曰’과 ‘今汝其曰’을 살펴보면 모두 군사들이 夏나라를 치고 싶어 하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誓戒를 지어서 반드시 가야 할 뜻을 밝힌 것이다. 孔傳에서 經을 해석한 것은 전연 經의 뜻이 아니다. 書序에서 말한 ‘陑란 땅으로부터 길에 올라 드디어 桀과 鳴條의 들에서 싸웠다.’는 것은 이 誓戒가 있은 이후의 일이다. 林之奇가 ‘이 篇은 바로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 亳邑에서 군사들에게 서계한 말이다.’라고 한 것이 매우 확실한 견해이다.[按文義 應作湯戒誓士衆 又按此篇今爾有衆汝曰及今汝其曰 皆謂士衆不欲伐夏 故作誓明必往之義 孔傳解經全非經意 至序所云 升自陑 遂與桀戰於鳴條之野 則此誓已後之事也 林之奇曰 此篇 是始興師 誓衆於亳邑之辭 甚確]”라고 하였다.
역주9 : 古本‧岳本‧宋本에는 ‘湯’이 ‘其’로 되어 있다.
역주10 王曰 : 蔡傳은 여기 〈湯誓〉에서는 “‘王曰’이라는 것은 史臣이 추후에 서술한 것을 칭한 것이다.[王曰者 史臣追述之稱]”로, 〈周書 泰誓〉에서는 “사신이 추후에 칭한 것이다.[史臣追稱之]”로 풀이하였다.
역주11 我后不恤我衆……而割正夏 : 蔡傳에서는 ‘我后’를 湯으로, ‘正’을 斷正의 뜻으로 보아 “湯임금은 亳邑의 민중을 사랑하지 않아, 우리의 농사짓는 일과 수확하는 일을 버려두고 夏나라를 斷正하게 하려 한다.[湯不恤亳邑之衆 舍我刈穫之事 而斷正有夏]”라고 풀이하였다.
역주12 而割正夏 : 淸代 段玉裁는 ‘割正’을 割剝之政으로 보고 “대개 今文尙書와 古文尙書에 모두 ‘夏’字가 없는데 後人이 正義에 의거하여 망령되이 보탠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古文尙書撰異≫
역주13 (改)[政] : 저본에는 ‘改’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도 처음에는 ‘改’로 되어 있었으나 뒤에 ‘政’으로 고쳤다. 살펴보건대 ‘政’자가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不敢不正桀[之]罪[而]誅之 : 저본에는 ‘之’와 ‘而’가 없으나, “살펴보건대 ≪史記集解≫에 이것을 인용하였는데, ‘桀’ 아래에 ‘之’자가 있고, ‘罪’ 아래에 ‘而’자가 있으니, 文義가 더욱 분명하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상서정의(3)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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