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此‘先王’文在‘公劉’之前, 知“謂后稷也.” 后稷非王, “尊其祖, 故稱先王.”
周語云 “昔我先王后稷.” 又曰 “我先王不窋.” 韋昭云 “王之先祖, 故稱王.”
商頌亦以契爲玄王. 文武之功, 起於后稷, 后稷始封於邰, 故言“建邦啓土.”
傳
[傳]后稷의 曾孫이다 公은 爵이요 劉는 名이니 能厚先人之業이라
疏
○正義曰:周本紀云 “后稷卒, 子不窋立. 卒, 子鞠陶立. 卒, 子公劉立.” 是公劉爲后稷曾孫也.
本紀云公劉之後有公非‧
, 知公是爵. 殷時未諱, 故稱劉名. 先公多矣, 獨三人稱公, 當時之意耳.
本紀云 “公劉復修后稷之業, 百姓懷之, 多徙而歸保焉. 周道之興, 自此
.” 是“能厚先人之業”也.
至于大王하여 肇基王迹하여시늘 王季其勤王家하시고
傳
[傳]大王은 修德하여 以翦齊商人하여 始王業之肇迹하고 王季는 纘統其業하여 乃勤立王業이라
○大는 音太라 王跡은 于況反이요 又如字니 注의 王業과 王功이 同이라
疏
○正義曰:詩云 “后稷之孫, 實惟大王, 居岐之陽, 實始翦商.” 是大王翦齊商人, 始王業之兆迹也.
周本紀云 “王季修古公之道, 諸侯順之.” 是能纘統大王之業, 勤立王家之基本也.
我文考文王이 克成厥勳하사 誕膺天命하사 以撫方夏하신대
傳
[傳]言我文德之父가 能成其王功하고 大當天命하여 以撫綏四方中夏라
傳
[傳]言天下諸侯 大者畏威하고 小者懷德이니 是文王威德之大라
疏
○正義曰:大邦力足拒敵, 故言“畏其力”, 小邦必畏矣. 小邦或被棄遺, 故言“懷其德”, 大邦亦懷德矣. 量事爲文也.
傳
[傳]言諸侯歸之하고 九年而卒이라 故로 大統未就라
疏
○正義曰:文王斷虞芮之訟, 諸侯歸之, 改稱元年. 至九年而卒, 故云 “大業未就”也.
文王旣未稱王, 而得輒改元年者, 諸侯自於其國各稱元年, 是己之所稱, 容或中年得改矣.
汲冢竹書 魏惠王有後元年, 漢初文帝二元, 景帝三元, 此必有因於古也.
伏生‧司馬遷‧韓嬰之徒, 不見此書, 以爲文王受命七年而崩, 故鄭玄等, 皆依用之.
傳
그 조상의 업적을 따라 歎美해서 諸侯들에게 고한 것이다.
先王(后稷)께서 나라를 세워 국토를 여셨거늘,
傳
〈先王은〉 后稷을 이른다.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先王’이라 칭한 것이다.
疏
○正義曰:이 ‘先王’은 글이 ‘公劉’의 앞에 놓였기 때문에 “后稷을 이른다.”는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后稷은 王이 아니므로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先王’이라 칭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國語≫ 〈周語〉에 “옛날 우리 先王 后稷께서”라고 하였고, 또 “우리 先王 不窋께서”라고 하였는데, 韋昭는 “王의 先祖이기 때문에 王이라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詩經≫ 商頌에도 契을 玄王이라고 하였다. 文王과 武王의 功이 后稷에서 일어났고, 后稷이 비로소 邰에 봉해졌기 때문에 “나라를 세워 국토를 여셨거늘”이라고 한 것이다.
傳
〈公劉는〉 后稷의 曾孫이다 公은 爵位이고 劉는 이름인데, 능히 先人의 업적을 도탑게 하였다는 것이다.
疏
○正義曰:≪史記≫ 〈周本紀〉에 “后稷이 작고하자 아들 不窋이 즉위하였다. 〈不窋이〉 작고하자 아들 鞠陶가 즉위하였다. 〈鞠陶가〉 작고하자 아들 公劉가 즉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公劉는 后稷의 曾孫이다.
〈周本紀〉에 公劉의 후손에 公非‧公祖 같은 이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公’이 바로 벼슬이란 점을 〈孔安國이〉 알았던 것이다. 殷나라 때에는 諱(忌諱)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劉’라고 이름을 칭한 것이다. 선대에 ‘公’ 벼슬을 한 이가 많았을 것인데, 유독 이 세 사람만을 ‘公’이라 칭한 것은 당시에 생각나는 대로 적었을 뿐이다.
〈周本紀〉에 “公劉가 다시 后稷의 業을 닦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많이 옮겨와서 편안함을 누렸으므로 周道의 흥기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래서 “능히 先人의 業을 도탑게 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大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업의 터전을 닦으셨거늘, 王季께서는 王家의 일에 노력하셨으며,
傳
大王은 德을 닦아 商나라 사람을 약화시켜 처음으로 王業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王季는 그 업적을 계승하여 王業을 열심히 세웠다.
○大는 音이 太이다. 王跡〈의 王〉은 于와 況의 반절이고, 또 본음대로 읽으니, 注의 ‘王業’과 ‘王功’의 〈王과〉 같은 뜻이다.
疏
○正義曰:≪詩經≫ 〈魯頌 閟宮〉에 “后稷의 손자가 실로 大王이신데, 岐山의 남쪽에 거하여 실로 商나라를 약화시키기 시작하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大王은 德을 닦아 商나라 사람을 약화시켜 처음으로 王業의 기초를 마련했다.”란 것이다.
≪史記≫ 〈周本紀〉에 “王季가 古公의 道를 닦자, 諸侯들이 순종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능히 大王의 업적을 계승하여 王家의 기본을 열심히 세웠다.”란 것이다.
우리 文考이신 文王께서는 그 공훈을 잘 이루시어 크게 天命을 받아 사방의 중원 땅을 어루만져 보살피시니,
傳
나의 文德을 가지신 아버지께서 능히 그 王功을 이루고 크게 天命을 받아서 사방의 中夏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만드셨다고 말한 것이다.
큰 나라는 그 힘을 무서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德을 기린 지
傳
천하의 諸侯들 중에 큰 나라는 그 위엄을 무서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德을 기렸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文王의 위엄과 德의 큰 점이다.
疏
○正義曰:큰 나라는 힘이 충분히 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무서워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작은 나라는 〈물어볼 것 없이〉 반드시 무서워했을 것이다. 작은 나라는 혹시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德을 기렸다.”라고 하였으니, 큰 나라도 〈물어볼 것 없이〉 또한 덕을 기렸을 것이다. 일을 헤아려서 문장을 구성한 것이다.
傳
諸侯들이 〈文王에게〉 歸附하였고, 그로부터 9년 만에 〈문왕이〉 작고하였기 때문에 大統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疏
○正義曰:文王이 虞나라와 芮나라의 송사를 결단하자, 諸侯들이 〈그 소식을 듣고〉 歸附하였으므로 元年을 개칭하였다. 그로부터 9년 만에 작고하였기 때문에 “大業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다.
文王이 이전에 王이라 칭하지 못하였는데 문득 元年을 고치게 된 것은, 諸侯들은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각각 元年을 칭하였으므로 자신들이 칭한 것을 혹시 中年에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汲冢竹書≫에 의하면, 魏 惠王은 後元年이 있었고, 漢初에 文帝는 元年이 두 번, 景帝는 元年이 세 번이었으니, 이는 반드시 예전의 사례를 따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伏生‧司馬遷‧韓嬰의 무리는 이 ≪汲冢竹書≫를 보지 못해서 “文王이 천명을 받은 지 7년 만에 서거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鄭玄 등이 모두 이에 의거하여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