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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5)

상서정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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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公 拜手稽首曰 子明辟하노이다


周公은 손을 이마에 얹고 머리를 땅에 대어 큰절을 하고 나서 말씀하였다. “나는 명철한 임금의 정권을 당신에게 돌려줍니다.
周公이 예의를 다하고 공경을 다해서 ‘나는 밝은 임금의 정권을 (成王)에게 돌려준다.’라고 말한 것이다. ‘’는 成王이다. 〈성왕이〉 나이 20으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정권을 돌려주고 연로를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간 것이다.


역주
역주1 朕復子明辟 : 孔傳에서는 “‘나는 명철한 임금의 정사를 그대(成王)에게 되돌려준다.’라고 말한 것이니, ‘子’는 바로 成王이다.[言我復還明君之政於子 子成王]”라고 풀이하였고, 王安石(≪書傳大傳≫ 小註)은 “復은 ‘復逆’의 復과 같으니, 成王이 周公에게 명하여 가서 成周를 경영하게 하자, 周公이 거북점을 쳐서 吉卦를 얻어 成王에게 復命하였다. ‘子’는 친근히 하는 것이고, ‘明辟’은 높이는 것이다. 先儒(孔安國)는 周公이 成王을 대신해서 임금 노릇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정권을 돌려준 것으로 보았으나 ≪書經≫을 가지고 상고하면 周公은 冢宰가 되어 百官을 통솔했을 뿐이고 일찍이 성왕을 대신해서 임금 노릇을 한 적이 없었는데 무슨 돌려줄 것이 있었겠는가.[復如復逆之復 成王命公往營成周 公得卜 復命于王 曰子親之也 曰明辟 尊之也 先儒以周公代王爲辟 至是反政 以書攷之 周公爲冢宰正百工而已 未嘗代王爲辟 何復之有]”라고 하였고, 葉夢得은 “復은 ≪孟子≫에 있는 ‘王에게 사뢰다.[復于王]’라고 한 復과 같다. 孔氏(孔安國)가 ‘復子明辟’을 周公이 攝政하다가 정권을 돌려주었다는 말을 한 뒤로부터 고금의 儒者들이 그 말을 따르고 감히 바꾸지 못하였는데, 유독 王氏(王安石)만이 그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세상에서 더러 그 말을 믿지 못하였다. 나는 상고하건대, 周公이 天子의 자리에 앉아 천하를 다스렸다는 사실은 애당초 經에 보인 적이 없었다. 다만 ≪禮記≫ 〈明堂位〉에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나 〈明堂位〉는 우리 夫子(孔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대개 武王이 승하했을 때에 周公이 冢宰로서 攝政을 하였는데, 이것은 禮에 있어서의 상례적 攝政이니, 그 일을 攝行한 것이지 王位를 섭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周公이 상중에 섭정한 것을 보고 그것이 成王이 어리기 때문에 섭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洛에 대한 거북점을 칠 때에 가서 외려 정권을 돌려주었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니, 王氏의 말이 신빙성 있는 말이다.[復如孟子有復于王之復 自孔氏以復子明辟 謂周公攝而歸政之辭 古今儒者從之 不敢易 獨王氏以爲不然 世或未之信焉 以予考之 周公踐天子位 以治天下 初無經見 獨明堂位云爾 明堂位非出吾夫子也 蓋武王崩 周公以冢宰攝政 此禮之常攝者 攝其事非攝其位 世見周公在喪之攝 不知其非以成王幼而攝 故至卜洛 猶有歸政之言 則王氏之言爲有證]”라고 하였다.
蘇軾(≪書傳≫)은 “周公이 비록 王位에 앉아 王이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王의 일을 행하다가 이에 와서 정권을 돌려주었다. 成王의 德이 비로소 天下에 밝아졌기 때문에 ‘그대에게 明辟(明君)의 정권을 돌려준다.’라고 했다. ‘子’라고 한 것은 叔父 집 사람이란 말이다.[周公雖不居位稱王 然實行王事 至此歸政 則成王之德 始明於天下 故曰復子明辟 曰子者 叔父家人之辭]”라고 하였다.
蔡傳은 “‘復’은 ‘逆復’에서의 復과 같은 것이다. 成王이 周公에게 가서 成周를 조성하도록 명하니, 周公이 좋은 점괘를 얻어 成王에게 復命한 것이다. 成王을 일러 ‘子’라 한 것은 친근히 대한 것이고, 成王을 일러 ‘明辟’이라 한 것은 높이기 위한 것이다. 周公은 成王을 도왔으니, 尊으로 말하면 임금이고, 親으로 말하면 兄의 아들인 것이다. ‘明辟’은 밝은 임금을 이른다. 先儒가 “成王이 어려서 周公이 成王을 대신하여 임금이 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정권을 成王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復子明辟’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잃음이 있어야 회복함이 있는 법인데, 武王이 승하하자 成王이 즉위하여 하루도 임금의 자리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거늘, 무슨 회복할 일이 있겠는가. 〈蔡仲之命〉에 ‘周公이 冢宰의 자리에 올라 百工(百官)을 바로잡았다.’라고 하였으니, 周公은 총재로서 백관을 총괄만 하였던 것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王莽이 攝政하여 거의 漢室을 전복시킬 뻔한 것은 儒者가 啓導함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것을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復 如逆復1)之復 成王命周公往營成周 周公得卜 復命于王也 謂成王爲子者 親之也 謂成王爲明辟者 尊之也 周公相成王 尊則君 親則兄之子也 明辟者 明君之謂 先儒謂 成王幼 周公代王爲辟 至是反政成王 故曰復子明辟**) 夫有失然後有復 武王崩 成王立 未嘗一日不居君位 何復之有哉 蔡仲之命 言 周公位冢宰 正百工 則周公以冢宰 總百工而已 豈不彰彰明甚矣乎 王莽居攝 幾傾漢鼎 皆儒者有以啓之***) 是不可以不辨]”라고 하였다.
1): 逆復:‘逆’은 上奏, ‘復’은 復命을 가리킨다. ≪周禮≫ 〈天官 宰夫〉의 “諸臣之復 萬民之逆”에 대하여 鄭司農(鄭衆)은 “‘復’은 請의 뜻이요, ‘逆’은 王命을 맞이해 받는 것이다.[復 請也 逆 迎受王命者]”라고 풀이한 반면, 鄭玄은 “‘復’이란 말은 報와 反의 뜻을 다 아우르므로, 왕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니, 곧 조정에서 일을 아뢰는 것을 이른다.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을 ‘逆’이라 하니, ‘逆’은 上書를 이른다.[復之言 報也反也 反報於王 謂於朝廷奏事 自下而上曰逆 逆謂上書]”라고 풀이하였다.
2) 先儒……復子明辟:林之奇의 ≪尙書全解≫에 “漢나라 孔氏(孔安國)가 ‘내가 밝은 임금의 정권을 그대에게 돌려준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王氏(王安石)가 그 說을 깨뜨리기를 ‘先儒가 「成王이 어려서 周公이 王을 대신하여 임금 노릇을 하다가 이때에 와서 그 정권을 成王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밝은 임금의 〈정권을〉 그대에게 돌려준다고 한 것이다.」 했다.’라고 하였다.[漢孔氏曰 言我復還明君之政於子 而王氏破其說曰 先儒謂成王幼 周公代王爲辟 至是乃反政于成王 故曰復子明辟]”란 말이 보인다.
3) 王莽居攝……儒者有以啓之:王莽이 周公의 고사를 따른답시고 攝政하다가 帝位를 찬탈한 것은, 先儒가 周公이 총재로서 백관을 총괄만 한 것을 천자의 일을 攝行한 것으로 잘못 풀이한 데서 발생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復子明辟’을 孔安國이 周公이 成王에게 정권을 돌려준 것으로 풀이함으로부터 고금의 儒者들은 거의 그를 따랐는데, 王安石만은 부정하였다. “周公이 攝位했다.”는 말은 戰國時代부터 전해왔다. ≪禮記≫ 〈明堂位〉는 아마 魯나라의 고루한 선비의 작품일 터이니, 믿을 것이 못되지만, 漢代의 伏生의 ≪尙書大傳≫과 司馬遷의 ≪史記≫에서 모두 그 일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復子明辟’을 정권을 돌려준 것으로 풀이한 것은 孔傳에서 끝나지 않았다. 王莽은 漢 平帝를 시해하고 겨우 두 살 된 孺子 嬰을 세운 다음, 이 글을 끌어다 구실로 삼아 攝政하다가 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新’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明代 王夫之(≪尙書稗疏≫)는 “‘復辟’의 說에 대하여 漢儒가 訛傳을 계승함으로부터 王莽의 禍를 계도하였는데, 王介甫(王安石)가 맨 처음 그 잘못을 변별하였고, 程氏와 蔡氏가 뒤이어서 周公이 居攝한 일이 없었음을 더욱 증명하였다.[復辟之說 自漢儒承訛以啓王莽之禍 王介甫首辨其非 程蔡因之 以益證周公無居攝之事]”라고 하였다.
역주2 : 漢代의 孔安國, 唐代의 孔穎達, 宋代의 蘇軾‧胡士行, 元代의 朱祖義, 淸代의 朱鶴齡 등은 復歸(돌려줌)의 뜻으로, 宋代의 王安石‧葉夢得‧林之奇‧蔡沈, 元代의 吳澄, 明代의 劉三五 등은 復命의 뜻으로 보았다.
역주3 周公盡禮致敬……必歸政而退老 : 兪樾(≪群經平議≫)은 “王氏 應麟의 ≪困學紀聞≫에 ‘〈洛誥〉의 「復子明辟」에 대하여 荊公(王安石)은 「周公이 점괘를 얻어 成王에게 복명하였다.」고 하자, 漢儒가 주장한 「居攝還政」의 說이 이에 싹 씻어졌다.’고 하였다. 이 蔡傳의 說은 荊公에 근거하면서도 그 출처를 말하지 않은 것은 그 說을 답습한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그러나 荊公의 說도 실은 또한 漢儒의 舊說이다. 枚氏의 이 해석은 스스로 통할 수 없지만, 漢儒의 舊說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 荊公의 독창적인 해석이 우연히 漢儒의 舊說과 합하였다. 근래에 漢學을 종주하는 자들이 도리어 枚說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다.[王氏應麟困學紀聞曰 洛誥復子明辟 荊公謂周公得卜 復命於成王也 漢儒居攝還政之說 於是一洗矣 枚氏此解 自不可通 而漢儒舊說 則固不爾也 荊公刱解 適與漢儒舊說暗合 近來宗漢學者 反循用枚說誤矣]”라고 하였다.
역주4 退老 : 늙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감을 뜻한다.

상서정의(5)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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