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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6)

상서정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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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在應門之內어시늘
[傳]出畢門하여 立應門內之中庭하여 南面하니라
太保 率西方諸侯하여 入應門左하고 畢公 率東方諸侯하여 入應門右하니
[傳]二公爲二伯하여 各率其所掌諸侯하여 隨其方爲位하여 皆北面하니라
皆布乘黃朱러라
[傳]諸侯皆陳四黃馬朱鬛하여 以爲이라
稱奉圭兼幣하여 曰一二臣衛 敢執壤奠이라하고
[傳]賓 諸侯也 舉奉圭兼幣之辭 言一二 見非一也
爲蕃衛 故曰臣衛 來朝而遇國喪하고 遂因見新王하니 敢執壤地所出而奠贄也
皆再拜稽首한대 하시다
[疏]‘王出’至‘答拜’
○正義曰:此敍諸侯見新王之事. 王出畢門, 在應門之內, 立於中庭.
太保召公爲西伯, 率西方諸侯, 入應門左, 立於門內之西廂也.
太師畢公爲東伯, 率東方諸侯, 入應門右, 立於門內之東廂也.
諸侯皆布陳一乘四匹之黃馬朱鬛, 以爲見新王之庭實.
諸侯爲王之賓, 共使一人少前進, 舉奉圭兼幣之辭, 言曰 “一二天子之臣, -在外爲蕃衛者-, 敢執土壤所有, 奠之於庭.”
既爲此言, 乃皆再拜稽首, 用盡禮致敬, 以正王爲天子也.
康王先爲太子, 以義嗣先人明德, 不以在喪爲嫌, 答諸侯之拜, 以示受其圭幣, 與之爲主也.
[疏]○傳‘出畢’至‘南面’
○正義曰:出在門內, 不言‘王坐’, 諸侯既拜, 王即答拜, 復不言‘興’, 知立庭中南面也.
[疏]○傳‘二公’至‘北面’
○正義曰:二公率領諸侯, 知其“爲二伯, 各率其所掌諸侯.”曲禮所謂‘職方’者, 此之義也.
王肅云 “畢公代周公爲東伯, 故率東方諸侯.” 然則畢公是太師也.
當太師之名, 在太保之上, 此先言太保者, 於時太保領冢宰, 相王室, 任重, 故先言西方. 若使東伯任重, 亦當先言東方.
北面, 以東爲右, 西爲左, 入左入右, 隨其方爲位. 嫌東西相向, 故云“皆北面.” 將拜王, 明北面也.
[疏]○傳‘諸侯’至‘庭實’
○正義曰:諸侯朝見天子, 必獻國之所有, 以表忠敬之心, 故“諸侯皆陳四黃馬朱鬛以爲庭實.” 言實之於王庭也.
四馬曰‘乘’, 言‘乘黃’, 正是馬色黃矣. ‘黃’下言‘朱’, ‘朱’非馬色.
定十年左傳云 “宋公子地有白馬四. 公嬖向魋, 魋欲之. 公取而朱其尾․鬛以與之.”
是古人貴朱鬛. 知‘朱’者, 朱其尾․鬛也.
於時諸侯其數必眾, 眾國皆陳四馬, 則非王庭所容. 諸侯各有所獻, 必當少陳之也.
案周禮小行人云 “, , , ,
, , . 此六物者, 以和諸侯之好.”
鄭玄云 “六幣所以享也, 五等諸侯, 享天子用壁, 享后用琮. 用圭璋者, 二王之後也.”
如鄭彼言, 則諸侯之享天子, 惟二王之後用馬.
此云 皆陳馬者, 下云 “奉圭兼幣”, 幣即馬是也, 圭是馬之物.
鄭云 “此幣圭以馬, 蓋舉王者之後以言耳. 諸侯當璧以帛, 亦有庭實.”
然則此陳馬者, 是二王之後, 享王物也. 獨取此物, 以總表諸侯之意, 故云諸侯皆陳馬也.
圭亦享王之物, 下言‘奉圭’, 此不陳圭者, 圭奉以(文)[致]命, 不陳之也.
案覲禮諸侯享天子, “” 此用乘黃者, 因喪禮而行朝, 故略之.
[疏]○傳‘賓諸’至‘奠贄’
正義曰:天子於諸侯有不純臣之義, 故以諸侯爲賓. ‘稱’, 訓舉也.
‘舉奉圭兼幣之辭’, 以圭幣奉王而爲之作辭. 辭出一人之口而言‘一二’者, 見諸侯同爲此意, 意非一人也.
鄭玄云 “釋辭者一人, 其餘奠幣拜者稽首而已.”是也. 言‘衛’者, 諸侯之在四方, 皆爲天子蕃衛, 故曰‘臣衛’.
此時成王始崩, 即得有諸侯在京師者, 來朝而遇國喪, 遂因見新王也.
諸侯享天子, 其物甚眾, 非徒圭馬而已. 皆是土地所有, 故云 “敢執壤地所出而奠贄”也. 然‘舉奉圭兼幣’, 乃是享禮.
凡享禮, 則每一國事畢, 乃更餘國復入, 其朝則侯氏總入, 故鄭玄注曲禮云 “, 受享於廟.” 是朝與享別.
此既諸侯總入而得有庭實享禮者, 以新朝嗣王, 因行享禮, 故鄭注云 “朝兼享禮也, 與常禮不同.”
[疏]○傳‘諸侯’至‘其幣’
○正義曰:周禮太祝“辨九拜, 一曰稽首” 施之於極尊, 故爲‘盡禮’也. ‘義嗣德’三字, 史言王答拜之意也.
康王先是太子, 以義繼先人明德, 今爲天子, 無所嫌, 故答其拜, 受其幣, 自許與諸侯爲也.


이 나가서 응문應門의 안에 계시거늘,
필문畢門을 나가 응문應門 안의 중정中庭에 서서 남면南面(남쪽으로 향함)을 하였다.
태보太保서방西方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응문應門으로 들어와서 왼쪽에 서고, 필공畢公동방東方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응문應門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에 서니,
이 두 이 되어 각각 관장하는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그 방위에 따라 자리를 정하여 모두 북면北面(북쪽으로 향함)을 하였다.
모두 네 필의 누런 말로 〈꼬리와 갈기에〉 붉은색을 칠한 것을 진열하였다.
제후諸侯들이 모두 네 필의 누런 말로 〈꼬리와〉 갈기에 붉은색을 칠한 것을 진열하여 정실庭實로 삼은 것이다.
(제후諸侯)이 받든 와 폐백을 곁들여서 들어 올리며 아뢰기를 “한두 명의 신위臣衛는 감히 토양土壤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와서 드리옵니다.”라고 하고,
’은 바로 제후諸侯이다. 받든 와 폐백을 곁들여서 들어 올리며 아뢴 말이다. ‘한둘’이라 말한 것은 하나뿐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번위蕃衛가 되었기 때문에 ‘신위臣衛’라 한 것이다. 조회하러 왔다가 국상國喪을 만났고, 드디어 따라서 새 왕을 보게 되니, 감히 토양土壤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예물을 드린다는 것이다.
모두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거늘, 를 가지고 〈선왕先王의〉 을 계승하여 답배答拜하셨다.
제후諸侯들이 절하여 폐백을 보내되 머리가 땅에 닿음은 를 다한 것이다. 강왕康王를 가지고 선인先人명덕明德을 계승하여 그 절에 답하고 그 폐백을 받았다는 것이다.
의 [王出]에서 [답배答拜]까지
정의왈正義曰:이는 제후諸侯들이 새 을 뵙는 일을 서술한 것이다. 필문畢門을 나가 응문應門의 안에 있어 중정中庭에 섰다.
태보太保 소공召公서백西伯이 되어 서방西方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응문應門으로 들어와서 왼쪽에 서고, -문 안의 서쪽 사랑채에 섰다.-
태사太師 필공畢公동백東伯이 되어 동방東方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응문應門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에 서서 -문 안의 동쪽 사랑채에 섰다.-
제후諸侯들이 모두 수레 한 채, 네 필의 누런 말로 갈기에 붉은색을 칠한 것을 진열하여 새 왕을 뵙는 정실庭實로 삼았다.
제후諸侯들이 이 되어, 함께 한 사람을 시켜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 받든 와 폐백을 곁들여서 들어 올리며 아뢰기를 “한두 명 천자天子의 신하는 -밖에 있어 번위蕃衛가 된 자- 감히 토양土壤에서 나온 것(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와서 뜰에 진열해 드립니다.”라고 하게 한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말을 하고는 이에 모두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를 다하고 공경을 다해서 천자天子가 됨을 정당화한 것이다.
강왕康王이 먼저 태자太子가 되고 로써 선인先人명덕明德을 이었으므로 상중에 있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제후諸侯들의 절에 답하여 그 와 폐백을 받아 주군主君이 됨을 허여한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의 [出畢]에서 [남면南面]까지
정의왈正義曰:나가서 문 안에 있었건만, ‘이 앉았음’을 말하지 않았고, 제후諸侯가 이미 절을 하고 이 곧 답배를 하였건만, 다시 ‘일어남’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뜰 가운데 서서 남면을 하였음’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의 [이공二公]에서 [북면北面]까지
정의왈正義曰:두 제후諸侯들을 거느렸기 때문에 “〈두 이〉 두 이 되어 각각 그 관장한 제후들을 거느렸다.”는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이른바 ‘직방職方’이란 것이 이 뜻이다.
왕숙王肅은 “필공畢公주공周公을 대신해서 동백東伯이 되었기 때문에 동방東方제후諸侯를 거느렸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필공畢公이 바로 태사太師였던 것이다.
응당 태사太師의 이름이 태보太保의 위에 있어야 하지만, 여기서 먼저 태보太保를 말한 것은 이때에 태보太保총재冢宰를 겸임하고 왕실王室을 도와 책임이 무겁기 때문에 먼저 서방西方을 말한 것이다. 만일 동백東伯이 책임이 무거웠다면 또한 응당 먼저 동방東方을 말했을 것이다.
북면北面은 동쪽을 오른쪽으로 삼고 서쪽을 왼쪽으로 삼으니, 〈응문應門으로〉 들어와 왼쪽에 서고 들어와 오른쪽에 선 것은 그 방위에 따라 자리를 정한 것이다. 동쪽과 서쪽이 서로 마주 본다는 오해를 살까 싶기 때문에 “모두 북면을 했다.”라고 한 것이다. 장차 에게 절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북면北面을 밝힌 것이다.
의 [제후諸侯]에서 [정실庭實]까지
정의왈正義曰제후諸侯천자天子조현朝見할 때에는 반드시 그 나라가 소유한 물건을 바쳐서 충경忠敬의 마음을 표하기 때문에 “제후諸侯들이 모두 네 필의 누런 말로 갈기가 붉은 것을 진열하여 정실庭實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의 뜰에 가득 채움을 말한 것이다.
네 필의 말을 ‘’이라 하는데, ‘승황乘黃’이라 말함은 정히 이 말의 색깔이 누런 것이다. ‘’ 아래에서 ‘’를 말하였는데, ‘’는 말의 색깔이 아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정공定公 10년 조에 “나라 공자公子에게 백마白馬 4필이 있었는데, 경공景公이 사랑하는 상퇴向魋가 그 말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경공景公은 그 말을 취해다가 꼬리와 갈기에 붉은색을 칠해서 상퇴向魋에게 넘겨주었다.”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붉은 갈기를 귀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는 그 꼬리와 갈기에 붉은색을 칠한 것임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이때에 제후諸侯는 그 수효가 반드시 여럿이었을 것인데, 여러 나라가 모두 네 필의 말을 진열한다면 의 뜰이 다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제후諸侯들은 각각 드리는 바가 있을 터이니, 반드시 적게 진열해야 되었을 것이다.
살펴보면, ≪주례周禮≫ 〈추관秋官 소행인小行人〉에 “여섯 가지 폐백을 함께 사용하니, 는 말[]과 함께 사용하고, 은 가죽과 함께 사용하고, 은 비단과 함께 사용하고,
은 무늬 있는 비단과 함께 사용하고, 는 수놓은 비단과 함께 사용하고, 무늬를 수놓은 비단과 함께 사용한다. 이 여섯 가지 물건은 제후諸侯들과 우호를 다지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은 “여섯 가지 폐백은 향례享禮를 위한 것인데, 5등급 제후諸侯천자天子에게 향례를 드릴 때에는 을 사용하고 향례를 드린 뒤에는 을 사용한다. 을 사용하는 이는 두 분 (하우夏禹은탕殷湯)의 후손들이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의 저 말과 같은 것은 제후諸侯들이 천자天子에게 향례를 드릴 때에 오직 두 분 의 후손만이 말[]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모두 말을 진열했다.”는 것은 아래에서 말한 “받든 와 폐백을 곁들였다.”란 폐백이 곧 말[]이 이것이었으니, 는 바로 말을 전달하는 물건이었다.
정현鄭玄은 “이 폐백에서 는 말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은 아마 왕자王者의 후손을 들어서 말했을 뿐이리라. 제후諸侯는 응당 을 비단과 함께 사용했을 터이므로 또한 정실庭實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을 진열한 것은 바로 두 분 의 후손이 에게 향례를 드리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유독 이 물건만을 취하여 제후諸侯라는 뜻을 총괄하여 표시하였기 때문에 “제후諸侯가 모두 말을 진열했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에게 향례를 드리는 물건인데, 아래에서는 ‘봉규奉圭’라 말하고, 여기서는 를 진열하지 않은 것은, 는 받들어 명령만을 전달했을 뿐, 진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의례儀禮≫ 〈근례覲禮〉에서 제후諸侯천자天子에게 향례를 하는 것을 살펴보면, “필마匹馬 중에서 뛰어난 놈을 뽑아서 〈앞잡이를 세우니,〉 아홉 필 말이 그를 따랐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승황乘黃’을 쓴 것은 상례喪禮로 인하여 조회를 행하였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다.
의 [賓諸]에서 [奠贄]까지
정의왈正義曰천자天子제후諸侯에 대하여 순전한 신하로 삼지 않는 의의가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으로 삼은 것이다. ‘’은 (들다)의 뜻으로 풀이한다.
와 폐백을 에게 받들어 올리면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한둘’이라 말한 것은 제후諸侯들이 다 같이 이런 뜻을 가졌음을 보인 것이지, 뜻이 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정현鄭玄은 “말을 하는 이는 한 사람이고, 그 나머지 폐백을 드리고 절하는 자들은 머리만 조아렸을 뿐이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라 말한 것은 사방에 있는 제후가 모두 천자天子번위蕃衛이기 때문에 ‘신위臣衛’라 말한 것이다.
이때에 성왕成王이 갓 승하하였기 때문에 경사京師에 있는 제후諸侯들이 조회하러 와서 국상國喪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새 을 뵙게 된 것이다.
제후諸侯천자天子에게 향례를 드릴 때에는 그 물건이 매우 많아, 비단 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바로 토지土地의 소유이기 때문에 “감히 토지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폐백을 드린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받든 와 폐백을 곁들어 든 것’은 바로 향례享禮이다.
무릇 향례享禮는 매양 일국一國의 일이 끝날 때마다 나머지 나라가 다시 들어오게 되므로 그 조회는 후씨侯氏가 다 들어오기 때문에 정현鄭玄이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를 달기를 “봄에는 조정에서 폐백을 받고, 묘당廟堂에서 향례를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이 조회와 향례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제후諸侯들이 모두 들어와서 정실庭實향례享禮가 있게 된 것이니, 사왕嗣王에게 새로 조회하고 인하여 향례享禮를 행했기 때문에 정현鄭玄에 “조회하고 향례享禮를 곁들인 것이니, 상례常禮와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의 [제후諸侯]에서 [其幣]까지
정의왈正義曰:≪주례周禮≫ 〈춘관春官 태축太祝〉에 “‘구배九拜’를 변별하여, 첫 번째는 ‘계수稽首’이다.”라고 하였는데, 극존極尊에 베풀기 때문에 를 다한 것이다. ‘사관史官답배答拜한 뜻을 말한 것이다.
강왕康王이 이에 앞서 태자太子였기 때문에 를 가지고 선인先人명덕明德을 계승하여 지금 천자天子가 되었으니, 혐의스러울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절에 답하고 그 폐백을 받아 제후諸侯들이 주군主君으로 삼음을 스스로 허여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庭實 : 뜰 가운데 진열하는 물품으로, 곧 제후들이 貢獻한 물품을 천자의 뜰에 진열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2 王義嗣德義答拜 : 蔡傳은 “‘義’는 宜의 뜻이니, ‘德을 계승하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史官의 말이다. 康王이 前人의 德을 계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답배한 것이다.[義宜也 義嗣德云者 史氏之辭也 康王 宜嗣前人之德 故答拜也]”라고 풀이하였다.
역주3 康王以義繼先人明德……受其幣 : 兪樾은 “傳에서 ‘王義嗣德’ 4자를 連文한 것은 그 句讀를 잃은 것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14년 조에 실린 吳나라 季札의 말에 ‘君(季札의 兄인 諸樊)은 義嗣입니다. 누가 감히 君을 범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杜注에서 ‘諸樊이 適子이기 때문에 「義嗣」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適子’를 ‘義嗣’라 이른 것은 옛적에 이런 칭호가 있었던 것 같다. 이 經文에서 곧장 ‘王’이라 하지 않고 ‘王義嗣’라 한 것은 아마 喪을 당해 아직 임금이 되지 못한 칭호였으리라. 윗글에서 ‘王’으로 적은 것은 ≪公羊傳≫에 이른바 ‘백성과 신하들의 마음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란 것이고, 여기의 글에서 ‘王義嗣’로 적은 것은 ≪公羊傳≫에 이른바 ‘孝子의 마음엔 3년 안에 차마 아버지의 자리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란 것이다. ≪儀禮≫ 〈覲禮〉의 ‘侯氏再拜稽首’란 데에 ‘王答拜’란 글이 없는 것에 의거하면, 여기 康王이 答拜한 것은 아직 임금이 되지 못해서 降禮를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유독 ‘王義嗣’라 칭한 것이다. ‘德答拜’ 3자는 연달아 읽고, ‘德’은 ‘特’으로 읽었다. 옛날엔 ‘德’자를 ‘悳’으로 적었다. ≪詩經≫ 〈鄘風 柏舟〉편에 ‘實惟我特’이라 한 것을 ≪韓詩≫에는 ‘實惟我直’으로 적었으니, ‘直’은 ‘特’과 통용하였다. 그러므로 ‘悳’ 또한 ‘特’과 통용했던 것이다. ≪周官≫ 〈司士職〉의 ‘孤卿特揖’에 대한 鄭注에 ‘「特揖」은 일일이 읍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特答拜’는 일일이 답배한 것이다. 그런데 傳은 그 구두를 잃고 따라서 그 뜻까지 잃었다.[傳以王義嗣德四字連文 失其讀矣 襄十四年左傳 載吳季札之言曰 君義嗣也 誰敢奸君 杜注曰 諸樊適子 故曰 義嗣 疑適子謂之義嗣 古有此稱 此經不直曰王而曰王義嗣者 蓋當喪未君之稱也 上文書王者 所謂緣民臣之心 不可一日無君也 此文書王義嗣者 所謂緣孝子之心 則三年不忍當也 據覲禮侯氏再拜稽首 無王答拜之文 是康王答拜 正以未成君而從降禮 故於此獨稱王義嗣也 德答拜三字連讀 德讀爲特 古德字作悳 詩柏舟篇 實惟我特 韓詩作實惟我直 直通作特 故悳亦通作特也 周官司士職孤卿特揖 鄭注曰 特揖 一一揖之 然則特答拜者 一一答拜也 傳失其讀 因失其旨矣]”라고 하였다.(≪群經平議≫)
역주4 合六幣 : 여섯 가지 폐백은 諸侯가 王(天子)에게 향례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合’이란 것은, 이를테면 圭는 말[馬]과 함께 사용하고, 璋은 가죽과 함께 사용하는 따위이다.
역주5 圭以馬 : 머리가 뾰족한 것을 ‘圭’라 하는데, 그 폐백은 말[馬]을 함께 사용한다.
역주6 璋以皮 : 半圭를 ‘璋’이라 하는데, 그 폐백은 豹皮를 함께 사용한다. 圭와 璋은 두 분 王의 후손이 사용하는 것이다.
역주7 璧以帛 : 璧은 둥글면서 가운데가 빈 것인데, 그 폐백은 비단을 함께 사용한다.
역주8 琮以錦 : 琮은 모가 나서 8면으로 된 것인데, 그 폐백은 무늬 있는 비단을 함께 사용한다. 璧과 琮은 侯爵과 伯爵이 사용하는 것이다.
역주9 琥以繡 : 琥는 虎形으로 된 것인데, 그 폐백은 수놓은 비단을 함께 사용한다.
역주10 璜以黼 : 半璧을 璜이라 하는데, 그 폐백은 黼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함께 사용한다. 琥와 璜은 子爵과 男爵이 사용하는 것이다.
역주11 (文)[致] : 저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儀禮≫ 〈覲禮〉의 賈疏에 의거하여 ‘致’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12 [匹] : ≪儀禮≫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3 [匹]馬卓上 九馬隨之 : 鄭玄은 “‘卓’은 的과 같으니, 흰색으로 한 필의 말을 칠해서 으뜸 말로 만든 것이다.[卓猶的也 以素的一馬 以為上]”라고 풀이하고, 明代 敖繼公(≪儀禮集說≫)은 “‘匹馬卓上’은 한 필의 말[馬]이 우뚝 앞에 서서 먼저 감을 이르니, 이를 말한 것은 그 말의 들어감이 아홉 필의 말과 서로 연속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匹馬卓上 謂以一馬卓然居前而先行 言此者 明其入不與九馬相屬]”라고 풀이하였으며, 또한 明代 郝敬(≪儀禮節解≫)은 “‘匹馬卓上’은 아마도 우뚝 서서 앞으로 향한다는 뜻인 듯한데, 鄭玄의 注는 잘못 ‘卓’을 的의 뜻으로 보았다.[匹馬卓上 葢卓立向前之義 鄭注誤以卓爲的]”라고 하였다.
역주14 春受贄於朝 : ≪禮記≫ 〈曲禮〉의 正義에는 “諸侯春見曰朝 受贄於朝受享於廟”로 되어 있다.
역주15 (王)[主] : 저본에는 ‘王’으로 되어 있으나, 宋刊 單疏本에 의거하여 ‘主’로 바로잡았다.

상서정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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