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幽王嬖褒姒, 廢申后, 逐太子宜臼. 宜臼奔申.
申侯與犬戎既殺幽王, 晉文侯與鄭武公, 迎宜臼立之, 是爲平王, 遷於東都.
平王乃以文侯爲方伯, 賜其秬鬯之酒, 以圭瓚副焉, 作策書命之. 史錄其策書, 作文侯之命.
疏
○正義曰:祭之初, 酌
以灌尸. ‘圭瓚’者, 酌鬱鬯之杓, 杓下有槃. ‘瓚’, 即槃之名也.
是以圭爲杓之柄, 故謂之‘圭瓚’. 周禮典瑞云 “祼圭有瓚, 以肆先王, 以祼賓客.”
鄭司農云 “於圭頭爲器, 可以挹鬯祼祭
之瓚.
也.”
鄭玄云 “肆, 解牲體以祭, 因以爲名.” 爵行曰‘祼’.
詩云 “瑟彼玉瓚, 黃流在中.” 毛傳云 “玉瓚, 圭瓚也, 黃金所以飾流鬯也.”
鄭云 “黃流, 秬鬯也. 圭瓚之狀, 以圭爲柄, 黃金爲勺, 青金爲外, 朱中央.” 是說圭瓚之形狀也.
禮無明文, 而知其然者, 祭統云 “君執圭瓚
,
執璋瓚亞祼.” 鄭云 “圭瓚․璋瓚, 祼器也.
以圭璋爲柄, 酌鬱鬯曰祼.” 然則圭瓚․璋瓚惟柄以圭․璋爲異, 其瓚形則同.
考工記玉人云 “祼圭尺有二寸, 有瓚, 以祀廟. 大璋․中璋九寸, 邊璋七寸, 厚寸.
黃金勺, 青金外, 朱中, 鼻寸.” 鄭云 “鼻, 勺流也, 凡流皆爲龍口也. 三璋之勺, 形如圭瓚.” 是鄭以璋形如此, 知圭瓚亦然.
毛傳又云 “九命然後錫以秬鬯圭瓚.” 則晉文侯於時九命爲東西大伯, 故得受此賜也. ‘秬鬯’, 從經爲傳, 故此惟解‘圭瓚’.
疏
○正義曰:周本紀云 “幽王嬖褒姒, 褒姒生子伯服. 幽王廢申后, 并去太子, 用褒姒爲后, 伯服爲太子.
申侯怒, 乃與西夷犬戎, 共攻殺幽王. 於是諸侯, 乃與申侯, 共立太子宜臼, 是爲平王. 東徙於洛邑, 避戎寇.”
隱六年左傳 “
言於王曰 ‘我周之東遷, 晉鄭焉依.’”
鄭語云 “晉文侯於是乎定天子.” 是迎送安定之, 故平王錫命焉.
疏
○正義曰:‘伯’, 長也, 諸侯之長, 謂之伯也.
僖元年左傳云 “凡
, 救患․分災․討罪, 禮也.” 是
諸侯之長爲‘侯伯’.
王肅云 “幽王既滅, 平王東遷, 晉文侯․鄭武公夾輔王室, 晉爲大國, 功重, 故平王命爲侯伯.”
疏
○정의왈正義曰: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신후申后를 유폐시키고 태자太子 의구宜臼를 쫓아내니, 의구宜臼는 신申나라로 달아났다.
신후申侯가 견융犬戎과 함께 이미 유왕幽王을 살해하자, 진晉 문후文侯가 정鄭 무공武公과 함께 의구宜臼를 맞아 〈천자天子로〉 세우니, 이가 평왕平王인데 동도東都(낙읍洛邑)로 도읍을 옮겼다.
평왕平王은 이에 문후文侯를 방백方伯으로 삼고는 그에게 거창주秬鬯酒를 하사할 때 규찬圭瓚을 함께 하사하고, 책서策書를 지어 임명하였다. 사관史官이 그 책서策書를 기록하여 〈문후지명文侯之命〉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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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제사를 시작할 때에 울창주鬱鬯酒를 떠서 시동尸童에게 올린다. ‘규찬圭瓚’이란 것은 울창주鬱鬯酒를 따르는 술잔인데 술잔 밑에 받침이 있다. ‘찬瓚’이 곧 그 받침의 이름이다.
이는 규圭로써 술잔의 자루를 만들기 때문에 ‘규찬圭瓚’이라 이른 것이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전서典瑞〉에 “관규祼圭에는 찬瓚이란 것이 있어서 선왕先王에게 사肆제사를 지내거나 빈객賓客에게 술잔을 올릴 때에 쓴다.”라고 하였는데,
정사농鄭司農(정중鄭衆)이 “규圭 머리 부분에 그릇을 만들어 〈그 그릇으로〉 울창주鬱鬯酒를 떠서 강신제降神祭를 지냈으니, 이것을 ‘찬瓚’이라 이르는데, 선왕先王에게 사肆제사를 지낼 때나 빈객賓客에게 술잔을 올릴 때에 썼다.”라고 하였고,
정현鄭玄은 “‘사肆’는 생체牲體를 해체해서 제사 지내는 것인데, 따라서 이름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술잔을 주고받는 것을 ‘관祼’이라 한다.
≪한례기제도漢禮器制度≫에 찬반瓚槃은 크기가 닷 되들이인데 아가리 지름이 8촌寸이고, 아래에 받침이 있는데 아가리 지름이 1척尺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치밀한 저 옥찬玉瓚, 누런 술이 그 속에 들어 있네.”라고 하였는데, 모전毛傳은 “‘옥찬玉瓚’은 규찬圭瓚이니, 황금黃金으로 유창流鬯을 꾸민 것이다.”라고 하고,
정현鄭玄은 “누런 술은 거창秬鬯이다. 규찬圭瓚의 형상이 규圭로 자루를 만들고, 황금黃金으로 잔을 만들되 청금靑金(납)으로 밖을 꾸미고 속은 붉은색을 칠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규찬圭瓚의 형상을 설명한 것이다.
≪예禮≫에 분명한 글이 없는데, 그게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임금은 규찬圭瓚을 가지고 시동에게 울창주를 떠서 올리고, 대종大宗은 장찬璋瓚을 가지고 〈임금에 이어서 울창주로〉 강신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규찬圭瓚과 장찬璋瓚은 강신제 할 때 쓰는 그릇이다.
규장圭璋으로써 자루를 만들어 울창주鬱鬯酒를 뜨는 것을 ‘관祼’이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규찬圭瓚과 장찬璋瓚은 오직 자루를 규圭와 장璋으로 한 것만 다르고 그 찬瓚의 형상은 동일한 것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옥인玉人〉에 “‘관규祼圭’는 1척尺 2촌寸에 찬瓚이 달려 있는데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한다. 대장大璋과 중장中璋은 9촌寸이고, 변장邊璋은 7촌寸인데 두께는 1촌寸이다.
황금작黃金勺은 청금靑金으로 밖을 꾸미고 속을 붉은색을 칠하였으며, 코(귀)는 1촌寸이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은 “‘비鼻’는 작류勺流(잔의 주둥이)인데, 대체로 유流(주둥이)는 모두 용龍의 입처럼 만든다. 세 장璋의 작勺은 형상이 규찬圭瓚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현鄭玄이 장璋의 형상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규찬圭瓚도 역시 그러함을 알았던 것이다.
모전毛傳은 또 “구명九命이 된 뒤에 거창秬鬯과 규찬圭瓚을 내렸다.”라고 하였으니, 진晉 문후文侯가 이때에 구명九命으로 동서대백東西大伯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하사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거창秬鬯’은 경문經文에 따라 전傳을 달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직 ‘규찬圭瓚’으로만 풀이를 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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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포사褒姒가 아들 백복伯服을 낳자 유왕幽王은 신후申后를 유폐시키고 아울러 태자太子를 쫓아내고서 포사褒姒를 왕후로 삼고 백복伯服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신후申侯가 노怒하여 곧 서이西夷 견융犬戎과 함께 유왕幽王을 쳐서 죽였다. 이에 제후諸侯가 신후申侯와 함께 태자太子 의구宜臼를 〈천자天子로〉 세웠으니 이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동쪽으로 낙읍洛邑에 옮겨가서 융구戎寇를 피했다.”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6년 조에 “주周의 환공桓公이 환왕桓王에게 진언하기를 ‘우리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옮겨올 때 진晉나라와 정鄭나라에 의지하였습니다.’ 했다.”라고 하였고,
≪국어國語≫ 〈정어鄭語〉에는 “진晉 문후文侯가 이때에 천자天子를 안정시켰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영송迎送하여 〈천자의 자리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평왕平王이 〈방백方伯으로 삼는〉 명命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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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백伯’은 장長의 뜻이니, 제후諸侯의 장長을 ‘백伯’이라 이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원년 조에 “대체로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은 〈다른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해주고, 〈다른 나라에〉 재앙이 생겼을 때 〈구호물자를〉 보내주며, 〈부정을 행한〉 죄가 있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제후諸侯의 장長이 ‘후백侯伯’이 됨을 이른 것이다.
왕숙王肅은 “유왕幽王이 이미 멸망하고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옮겨가자, 진晉 문후文侯와 정鄭 무공武公이 왕실王室을 보필하였는데, 진晉나라가 큰 나라로서 공이 중대重大하기 때문에 평왕平王이 〈진 문후에게〉 명하여 후백侯伯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