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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7)

상서정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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費誓 第三十一
孔氏 傳 孔穎達 疏
魯侯伯禽 宅曲阜
[傳]治封之國하여 居曲阜 ○伯禽 魯侯名이라
徐〮夷竝興하니 東郊不開
[傳]徐戎淮夷竝起하여 爲寇於魯 東郊不開 ○開 馬本作闢이라
作費誓
[傳]魯侯征之於費地而誓眾也 諸侯之事而連帝王 孔子序書 以魯有治戎征討之備하고
秦有悔過自誓之戒 足爲世法이라 錄以備王事하니 猶詩錄商魯之頌이라
[疏]‘魯侯’至‘費誓’
○正義曰:魯侯伯禽, 於成王即政元年, 始就封於魯, 居曲阜之地.
於時徐州之戎․淮浦之夷竝起, 爲寇於魯, 東郊之門不敢開闢.
魯侯時爲方伯, 率諸侯征之, 至費地而誓戒士眾. 史錄其誓辭, 作費誓.
[疏]○傳‘徐戎’至‘不開’
○正義曰:經稱‘淮夷․徐戎’, 序言‘徐․夷’, 略之也. 此戎夷在魯之東, 諸侯之制, 於郊有門, 恐其侵逼魯境, 故東郊之門不開.
費誓
[疏]○傳‘費魯’至‘地名’
○正義曰:甘誓․牧誓皆至戰地而誓, 知‘費’非戰地者, 東郊不開, 則戎․夷去魯近矣.
此誓令其治兵器, 具糗糧, 則是未出魯境, 故知‘費’, 是魯東郊地名, 非戰處也.


노후魯侯 백금伯禽곡부曲阜에 거주하였다.
봉국封國을 다스리기 위하여 곡부曲阜에 거주한 것이다. 백금伯禽노후魯侯의 이름이다.
서융徐戎회이淮夷가 아울러 일어나니, 동교東郊의 〈문을〉 열지 못하였다.
서융徐戎회이淮夷가 아울러 일어나 나라를 노략질하였기 때문에 동교東郊의 〈문을〉 열지 못한 것이다. ○‘’는 마본馬本에 ‘’으로 되어 있다.
비서費誓〉를 지었다.
노후魯侯 땅을 정토征討하면서 군중과 서약한 것이다. 이것은 제후諸侯의 일인데 제왕帝王에 연계한 것은 공자孔子가 ≪≫를 편차할 적에 나라에 서융徐戎을 다스리기 위해 정토征討병비兵備가 있었던 것과
나라에 과오를 뉘우치고 스스로 맹세한 경계가 있었던 것이 족히 세상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록하여 의 일에 대비하였으니, 마치 ≪≫에 〈상송商頌〉과 〈노송魯頌〉을 기록한 것과 같다.
서서書序의 [노후魯侯]에서 [비서費誓]까지
정의왈正義曰노후魯侯 백금伯禽성왕成王이 친정한 원년에 비로소 나라에 봉해져 곡부曲阜의 땅에 거주하였다.
이때 서주徐州융적戎狄회포淮浦이적夷狄이 아울러 일어나서 나라를 노략질하니, 동교東郊을 감히 열지 못하였다.
노후魯侯는 이때 방백方伯이 되어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정토征討하였는데, 땅에 이르러서 군사들에게 서계誓戒를 하였다. 사관史官이 그 서사誓辭를 기록하여 〈비서費誓〉를 지었다.
의 [서융徐戎]에서 [不開]까지
정의왈正義曰에서 ‘회이淮夷’․‘서융徐戎’으로 칭한 것을 서서書序에서 ‘’․‘’로 말한 것은 생략한 것이다. 이 나라의 동쪽에 있었고, 제후諸侯의 제도에 에는 을 두었는데, 〈가〉 나라의 지경을 침범하여 핍박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동교東郊을 열지 못한 것이다.
’는 나라 동교東郊지명地名이다.
의 [費魯]에서 [지명地名]까지
정의왈正義曰:〈감서甘誓〉와 〈목서牧誓〉는 모두 전지戰地에 이르러서 서계誓戒를 한 것이지만, ‘’는 전지戰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니, 동교東郊를 열지 않았다면 서융徐戎회이淮夷나라와의 거리가 가까웠던 것이다.
서계誓戒병기兵器를 다스리고 구량糗糧을 갖추도록 한 것이니, 이는 아직 나라의 지경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는 바로 나라 동교東郊지명地名이고 전처戰處가 아니라는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역주
역주1 費誓 費魯東郊之地名 : 篇題 ‘費誓’와 그 傳인 ‘費魯東郊之地名’은 저본에 書序 ‘作費誓’의 傳인 ‘魯侯征之於費地而誓眾也……猶詩錄商魯之頌’ 뒤에 있었으나, 武英殿本에 의거하여 여기로 옮겨 번역하였다.

상서정의(7)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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