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云“曾子 孔子弟子”者, 案史記仲尼弟子傳稱 “曾參, 南武城人, 字子輿, 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爲能通孝道, 故授之業. 作孝經, 死於魯.” 故知是仲尼弟子也.
云“侍 謂侍坐”者, 言侍孔子而坐也. 案古文云 “曾子侍坐”, 故知侍謂侍坐也.
卑者在尊側曰侍, 故經謂之侍. 凡侍有坐有立, 此曾子侍卽侍坐也.
曲禮有侍坐於先生, 侍坐於所尊, 侍坐於君子. 據此而言, 明侍坐於夫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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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부자夫子(공자孔子)가 육경六經으로 가르침을 베풀 적에 일에 따라 명목을 드러내었다. 비록 도道(인간의 도리)가 효孝로 말미암아 생기기는 하나 효孝의 강령綱領이 아직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그 도道를 열어 밝혀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증삼曾參의 효성이 먼저 크게 이름나 있었기 때문에, 한가로이 계신 틈을 이용하여 그에게 진술해주는 〈상황을〉 가설한 것이다. 〈공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의 자字를 내세워 “중니仲尼가 한가로이 계실 때”라고 하고, 증삼에 대해서는 자子로 칭하여 “증자曾子가 모시고 앉았더니”라고 하였다.
이 두 구를 설정하여 마치 〈증삼이〉 별도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어 기록한 것처럼 사제師弟간에 묻고 답하는 형식〈의 글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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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중니 공자자仲尼 孔子字] 살펴보건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孔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안씨顔氏의 딸 징재徵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징재徵在는 시집가서 사당에 알현한 다음, 남편의 나이가 많아 제때에 아들을 가지지 못할까 두려워 남몰래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빌었다. 이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백伯과 중仲은 장유長幼의 차례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니仲尼에게는 형이 있어 자字에 ‘백伯’자를 썼기 때문에 〈그의 자에는〉 ‘중仲’자를 쓴 것이다. 그의 이름〈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살펴보건대 환공桓公 6년조의 ≪춘추좌씨전≫에 신수申繻가 “이름 짓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다.”라고 하고,
그중 세 번째가 ‘유사한 물체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름 짓는 방법을 상象이라고 한다.’라는 것인데, 두예杜預의 주에 “공자孔子의 머리가 이구산尼丘山처럼 생긴 것 같은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우묵하여 니구산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환劉瓛은 장우張禹의 뜻을 전술傳述하여 “중仲은 중中이고, 이尼는 화和이다. 공자孔子에게 중화中和의 덕이 있기 때문에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은중문殷仲文은 또 “부자夫子(공자孔子)는 효도孝道를 깊이 공경했기 때문에 〈≪효경≫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덕德을 표상하는 자字를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 무제梁 武帝는 또 구丘를 마을[취聚]의 뜻이라 하고 이尼를 조화[화和]의 뜻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취하지 않는다.
중니仲尼(공자)의 선대는 은殷나라의 후예이다. 살펴보건대,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제곡帝嚳의 아들 설契이 요堯임금의 사도司徒가 되어 공功을 세우자 요堯임금이 그를 상商에 봉해주고 자씨 성子氏 姓을 하사하였다.
설契의 먼 후손 탕湯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탕湯의 먼 후손이 〈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무도無道하였다. 주 무왕周 武王이 그를 죽이고 그의 서형庶兄인 미자 계微子 啓를 송宋나라에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자가어≫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모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孔子는 그 선조가 송宋나라 사람이다. 송 양공宋 襄公에게 불보하弗父何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라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마땅했으나 아우인 여공厲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하何가 송부주宋父周를 낳고, 주周가 세자 승世子 勝을 낳고, 승勝이 정고보正考父를 낳고, 정고보正考父가 명命을 받아 송宋나라의 경卿이 되어서 공부가孔父嘉를 낳았다. 가嘉가 별도로 공족公族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공孔을 씨氏로 삼았다.”
〈공씨孔氏의 ‘공孔’자 어원에 대해〉 혹자는 ‘을乙’자를 ‘자子’자에 배합했다고 하고, 혹자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로 바위를 뚫었다고 하지만, 이 말들은 근거가 없으므로 지금은 취하지 않는다.
공부가孔父嘉가 목김부木金父를 낳고, 목김부木金父가 고이부皐夷父를 낳고, 고이부皐夷父가 방숙防叔을 낳았는데, 〈방숙防叔은〉 화씨華氏의 화禍를 피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다. 방숙防叔이 백하伯夏를 낳고, 백하伯夏가 숙량흘叔梁紇을 낳고, 흘紇이 공자孔子를 낳았다.
[거 위한거居 謂閑居] ≪고문효경古文孝經≫에는 ‘중니한거仲尼閒居(중니가 한가로이 계실 때)’로 되어 있다. 이는 한가로이 있는 틈을 타 앉아 있다는 말로,
≪논어≫에 “앉거라[거居].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라고 했을 때의 〈거居와〉 뜻이 같고, 뒤 장章(〈기효행장紀孝行章〉)의 ‘평상시[거居]에는 자신의 공경을 다하고[거즉치기경居則致其敬]’라고 할 때의 〈거居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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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왈正義曰:[증자 공자제자曾子 孔子弟子] 살펴보건대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증삼曾參은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자는 자여子輿이고, 공자孔子보다 46살 어리다.
공자孔子는 그가 효도孝道에 달통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효경孝經≫을 지었으며, 노魯나라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증자曾子)이 중니(공자孔子)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시 위시좌侍 謂侍坐] 공자孔子를 모시고 앉았다는 말이다. 살펴보건대 고문古文에는 ‘증자시좌曾子侍坐’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시侍가 ‘모시고 앉았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곁에 있는 것을 시侍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경문에서 시侍라고 한 것이다. 시侍에는 시좌侍坐(모시고 앉음)가 있고 시립侍立(곁에 섬)이 있는데, 여기서 증자가 ‘시侍했다’는 것은 곧 시좌侍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선생先生을 모시고 앉는다.’, ‘존경하는 분을 모시고 앉는다.’, ‘군자君子를 모시고 앉는다.’는 〈예법이〉 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부자夫子를 모시고 앉았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