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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經注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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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尼
[注]仲尼 謂閒居
曾子러니
[注]曾子 孔子弟子 謂侍坐
[疏]‘仲尼居 曾子侍’
正義曰:夫子以六經設敎, 隨事表名. 雖道由孝生, 而孝綱未擧, 將欲開明其道, 垂之來裔.
以曾參之孝, 先有重名, 乃假因閒居, 爲之陳說. 自己字, 稱“仲尼居”, 呼參爲子, 稱“曾子侍”.
建此兩句, 以起問答之體, 似若別有承受而記錄之.
[疏]○注‘仲尼’至‘閒居’
○正義曰:云 “仲尼 孔子字”者, 案家語云 “孔子父叔梁紇, 娶顔氏之女徵在.
仲尼有兄字伯, 故曰仲. 其名則案桓六年左傳, 申繻曰 ,
其三曰 “以類命爲象”. 杜注云 “若孔子首象尼丘”,
蓋以孔子生而頂, 象尼山, 故名, 字仲尼.
仲尼之先, 殷之後也. 案史記殷本紀曰 “帝嚳之子契爲堯司徒, 有功, 堯封之於商, 賜姓子氏.
案家語孔子世家皆云 “孔子其先宋人也. 宋公有子弗父何, 長而當立, 讓其弟厲公.
, 其言不經, 今不取也.
云 “居 謂閒居”者, 古文孝經云 “仲尼閒居”. 蓋爲乘閒居而坐,
與論語云義同, 而與下章不同.
[疏]○注‘曾子’至‘侍坐’
○正義曰:云“曾子 孔子弟子”者, 案史記仲尼弟子傳稱 “曾參, 南武城人, 字子輿, 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爲能通孝道, 故授之業. 作孝經, 死於魯.” 故知是仲尼弟子也.
云“侍 謂侍坐”者, 言侍孔子而坐也. 案古文云 “曾子侍坐”, 故知侍謂侍坐也.
卑者在尊側曰侍, 故經謂之侍. 凡侍有坐有立, 此曾子侍卽侍坐也.
曲禮有侍坐於先生, 侍坐於所尊, 侍坐於君子. 據此而言, 明侍坐於夫子也.


중니仲尼가 한가로이 계실 때
중니仲尼공자孔子이다. 는 한가로이 거처함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모시고 앉았더니
증자曾子공자孔子의 제자이다. 는 모시고 앉음을 말한다.
의 [중니거 증자시仲尼居 曾子侍]
정의왈正義曰부자夫子(공자孔子)가 육경六經으로 가르침을 베풀 적에 일에 따라 명목을 드러내었다. 비록 (인간의 도리)가 로 말미암아 생기기는 하나 강령綱領이 아직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그 를 열어 밝혀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증삼曾參의 효성이 먼저 크게 이름나 있었기 때문에, 한가로이 계신 틈을 이용하여 그에게 진술해주는 〈상황을〉 가설한 것이다. 〈공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의 를 내세워 “중니仲尼가 한가로이 계실 때”라고 하고, 증삼에 대해서는 로 칭하여 “증자曾子가 모시고 앉았더니”라고 하였다.
이 두 구를 설정하여 마치 〈증삼이〉 별도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어 기록한 것처럼 사제師弟간에 묻고 답하는 형식〈의 글을〉 시작하였다.
의 [중니仲尼]부터 [한거閒居]까지
정의왈正義曰:[중니 공자자仲尼 孔子字] 살펴보건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孔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안씨顔氏의 딸 징재徵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징재徵在는 시집가서 사당에 알현한 다음, 남편의 나이가 많아 제때에 아들을 가지지 못할까 두려워 남몰래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빌었다. 이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라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장유長幼의 차례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니仲尼에게는 형이 있어 에 ‘’자를 썼기 때문에 〈그의 자에는〉 ‘’자를 쓴 것이다. 그의 이름〈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살펴보건대 환공桓公 6년조의 ≪춘추좌씨전≫에 신수申繻가 “이름 짓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다.”라고 하고,
그중 세 번째가 ‘유사한 물체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름 짓는 방법을 이라고 한다.’라는 것인데, 두예杜預의 주에 “공자孔子의 머리가 이구산尼丘山처럼 생긴 것 같은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우묵하여 니구산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을 라고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환劉瓛장우張禹의 뜻을 전술傳述하여 “이고, 이다. 공자孔子에게 중화中和의 덕이 있기 때문에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은중문殷仲文은 또 “부자夫子(공자孔子)는 효도孝道를 깊이 공경했기 때문에 〈≪효경≫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을 표상하는 를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 무제梁 武帝는 또 를 마을[]의 뜻이라 하고 를 조화[]의 뜻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취하지 않는다.
중니仲尼(공자)의 선대는 나라의 후예이다. 살펴보건대,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제곡帝嚳의 아들 임금의 사도司徒가 되어 을 세우자 임금이 그를 에 봉해주고 자씨 성子氏 姓을 하사하였다.
의 먼 후손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의 먼 후손이 〈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무도無道하였다. 주 무왕周 武王이 그를 죽이고 그의 서형庶兄미자 계微子 啓나라에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자가어≫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모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孔子는 그 선조가 나라 사람이다. 송 양공宋 襄公에게 불보하弗父何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라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마땅했으나 아우인 여공厲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송부주宋父周를 낳고, 세자 승世子 勝을 낳고, 정고보正考父를 낳고, 정고보正考父을 받아 나라의 이 되어서 공부가孔父嘉를 낳았다. 가 별도로 공족公族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로 삼았다.”
공씨孔氏의 ‘’자 어원에 대해〉 혹자는 ‘’자를 ‘’자에 배합했다고 하고, 혹자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로 바위를 뚫었다고 하지만, 이 말들은 근거가 없으므로 지금은 취하지 않는다.
공부가孔父嘉목김부木金父를 낳고, 목김부木金父고이부皐夷父를 낳고, 고이부皐夷父방숙防叔을 낳았는데, 〈방숙防叔은〉 화씨華氏를 피하여 나라로 망명하였다. 방숙防叔백하伯夏를 낳고, 백하伯夏숙량흘叔梁紇을 낳고, 공자孔子를 낳았다.
[거 위한거居 謂閑居] ≪고문효경古文孝經≫에는 ‘중니한거仲尼閒居(중니가 한가로이 계실 때)’로 되어 있다. 이는 한가로이 있는 틈을 타 앉아 있다는 말로,
≪논어≫에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라고 했을 때의 〈와〉 뜻이 같고, 뒤 (〈기효행장紀孝行章〉)의 ‘평상시[]에는 자신의 공경을 다하고[거즉치기경居則致其敬]’라고 할 때의 〈와는〉 다르다.
의 [증자曾子]부터 [시좌侍坐]까지
정의왈正義曰:[증자 공자제자曾子 孔子弟子] 살펴보건대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증삼曾參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자는 자여子輿이고, 공자孔子보다 46살 어리다.
공자孔子는 그가 효도孝道에 달통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효경孝經≫을 지었으며, 나라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증자曾子)이 중니(공자孔子)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시 위시좌侍 謂侍坐] 공자孔子를 모시고 앉았다는 말이다. 살펴보건대 고문古文에는 ‘증자시좌曾子侍坐’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가 ‘모시고 앉았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곁에 있는 것을 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경문에서 라고 한 것이다. 에는 시좌侍坐(모시고 앉음)가 있고 시립侍立(곁에 섬)이 있는데, 여기서 증자가 ‘했다’는 것은 곧 시좌侍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선생先生을 모시고 앉는다.’, ‘존경하는 분을 모시고 앉는다.’, ‘군자君子를 모시고 앉는다.’는 〈예법이〉 있다. 이에 의거하여 말하면 부자夫子를 모시고 앉았음이 분명하다.


역주
역주1 : 古文本에는 ‘閑居’로 되어 있다.
역주2 孔子 : 孔은 姓이고, 子는 春秋時代에 有德者 또는 先生의 姓 밑에 붙여 존경의 뜻을 나타내던 말이다. 孔子의 이름은 丘이다. 魯 襄公 22년(B.C.551) 노나라에서 태어나, 魯 哀公 16년(B.C.479) 73세로 일생을 마쳤다.(鄭太鉉 譯註, ≪孝經大義≫, 傳統文化硏究會, 2009, 23쪽) 17쪽 주3) 참조.
역주3 : 고문본에는 ‘侍坐’로 되어 있다.
역주4 : 標의 통용자로 쓰였다.
역주5 師資 : 師生, 곧 스승과 제자를 뜻한다.
역주6 孔子父叔梁紇……字仲尼 : ≪孔子家語≫ 〈本姓解〉에서 요약 발췌한 것이다.
역주7 名有五 : 이름 짓는 다섯 가지 방법이란, 信(출생할 때의 특징을 사용하는 방법), 義(덕행을 나타내는 글자를 사용하는 방법), 象(유사한 물체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 假(물건 이름을 假借하는 방법), 類(父親과 유관한 글자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역주8 (汙)[圩] : 저본에는 ‘汙(더러울 오)’로 되어 있으나, ≪史記≫ 권47 〈孔子世家〉 본문과 해당 부분에 대한 ≪史記索隱≫ 및 ≪白虎通≫ 권8 〈姓名〉의 내용에 의거하여 ‘圩(오목할 우)’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9 : 저본에는 좌측 ‘丘’ 중앙의 짧은 세로획이 없는 총7획의 못 갖춘 글자로 표기되어 있으나, 공자의 이름자 丘를 피하기 위한 避諱法의 연장으로 缺劃한 것이므로 갖춘 글자로 돌려놓았다.
역주10 : 저본에는 중앙의 짧은 세로획이 없는 총 4획의 못 갖춘 글자로 표기되어 있으나, 공자의 이름자 丘를 피하기 위해 결획한 것이므로 갖춘 글자로 돌려놓았다. 注와 疏의 ‘丘’는 대부분 이와 같다.
역주11 劉瓛述張禹之義……故曰仲尼 : 劉瓛(434~489)은 南朝 齊나라의 경학가로 ≪周易乾坤義≫‧≪周易繫辭義疏≫‧≪毛詩序義≫‧≪孝經劉氏說≫ 등을 저술하였다. ≪효경유씨설≫은 이른 시기에 유실되어 ≪隋書≫ 〈經籍志〉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馬國翰이 邢昺의 正義에서 5조항을 집록했는데, 이 대목도 집록 대상에 포함되었다.
張禹(?~B.C.5)는 前漢의 관료‧경학가로 安昌侯에 봉해졌다. ≪논어≫를 전문으로 연구하여 ≪論語章句≫(일명 ≪魯安昌侯說≫ 또는 ≪張侯論≫)를 저술하였고, ≪易≫과 ≪효경≫도 연구했는데, ≪孝經安昌侯說≫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 인용된 劉瓛의 말을 통해 한 조항이 전해질 뿐이다.
역주12 殷仲文又云……故稱表德之字 : 殷仲文(?~407)은 東晉의 관료‧문학가이다. 그의 ≪孝經殷氏注≫는 유실되었고, 다만 馬國翰이 邢昺의 正義에서 3조항을 집록했는데, 이 대목도 집록 대상에 포함되었다.
역주13 梁武帝 : 464~549. 남조 齊나라의 和帝를 폐하고 梁나라를 세웠다가 東魏에서 망명해온 장수의 반란으로 죽음에 이른 인물로, 유학을 중시하고 문학‧악률‧서법에 뛰어났다. 저술이 많았으나 모두 유실되었고, 明나라 때 집일된 ≪梁武帝御制集≫이 있다.
역주14 (娶)[聚] : 저본에는 ‘娶(장가들 취)’로 되어 있으나, 監本‧毛本에 의거하여 ‘聚(모일 취)’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5 湯裔孫 : 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紂王을 가리킨다.
역주16 帝嚳之子契爲堯司徒……封其庶兄微子啓於宋 : ≪史記≫ 권3 〈殷本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역주17 : 武英殿本에는 ‘及’으로 되어 있다. 다만 ‘又’도 의미가 통하므로 교감은 하지 않았다.
역주18 (閔)[襄] : 저본에는 ‘閔’으로 되어 있으나, ≪孔子家語≫ 〈本姓解〉에 의거하여 ‘襄’으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9 正考父 : ≪孔子家語≫ 〈本姓解〉에는 ‘正考甫’로 되어 있다.
역주20 孔子其先宋人也……故其後以孔爲氏 : ≪孔子家語≫ 〈本姓解〉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형병은 이 대목의 인용처를 ≪사기≫ 권47 〈공자세가〉로 들었으나, 〈공자세가〉에 기록된 공자의 先代에 대한 내용은 이 인용문과 차이가 비교적 크다.
역주21 或以爲用乙配子 或以滴溜穿石 : 孔氏의 ‘孔’자 어원에 대해 당시에 이 같은 설이 있었던 것이다. 用乙配子는 ‘孔’자의 형태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以滴溜穿石은 ‘孔’자의 의미 ‘구멍’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역주22 孔父嘉生木金父……紇生孔子也 : ≪孔子家語≫ 〈本姓解〉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역주23 居 吾語汝 : ≪論語≫ 〈陽貨〉에 보인다. ≪논어≫에는 ‘汝’가 ‘女’로 되어 있다.
역주24 居則致其敬 : 본서 〈紀孝行章〉에 보인다.

효경주소 책은 2019.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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