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신안臣按] 옛날의 군자는 예악禮樂을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이를 떼어놓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치致’라는 것은 그 지극함을 완전히 다한다는 말입니다. 악樂의 소리는 조화롭고 온화하며 치우치지 않고 바릅니다. 그러므로 악樂의 이치를 지극히 하여 마음을 수양하면 온화하고 정직하며 자애롭고 신실한 마음이 무럭무럭 생겨나서 저절로 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겨나면 즐겁게 된다.’라는 것은 선한 단서의 싹이 자연히 기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우면 편안하게 된다.’라는 것은 이를 즐거워한 뒤에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오래하게 된다.’라는 것은 이를 편안히 여기게 된 뒤에 오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하면 자연스럽게 된다.’라는 것은 온전히 자연스러움이 이루어져서 인위적人爲的으로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우면 신묘하게 되는 것은 변화에 일정한 방향이 없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되면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이를 믿는다.’라는 것은 그것이 어그러짐이 없기 때문이고, ‘신묘하게 되면 비록 노여워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이를 두려워한다.’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겨나고 즐겁고 오래하고 편안한 것은 맹자가 말한 선인善人․신인信人․미인美人․대인大人과 같으니 자연스럽고 신묘한 데 이르면 대인이면서 저절로 변화하게 됩니다.
原注
예禮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물러나고 사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예의의 규정과 품목의 수량에 대한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의 이치를 지극히 하여 몸을 수양하면 저절로 엄숙하고 공경하게 되고, 엄숙하고 공경하면 저절로 위엄이 있게 되니 저 예와 악樂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를 가지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위엄이 있는 데 그칠 뿐이어서 악과 같이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신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니 어째서이겠습니까? ‘자연스러움[천天]’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몸을 수양하여 위엄이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 또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그 효과가 같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악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기질을 변화하며 그 찌꺼기를 없애기 때문에 예가 외면에서 이를 순히 하고 악이 내면에서 이를 화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면과 내면을 같이 함양涵養하는 공부입니다. 하지만 내면을 함양하는 것이 진실로 그 주인이 되기 때문에 성인 문하의 가르침에 확립하는 것은 예로써 하지만 이루는 것은 악으로 한 것입니다.
原注
예를 기록한 사람이 그 효험을 미루어 밝히기를 또한 이와 같이 지극히 하였고, 여기에서 또 “몸과 마음이 주인이 없으면 야비하고 간사한 마음이 쉽게 파고든다. 속마음이 잠시라도 화평하고 즐겁지 않으면 야비하고 거짓된 마음이 이를 파고들고, 겉모습이 잠시라도 엄숙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이 이를 파고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악善惡이 서로 잦아들고 자라남이 물과 불이 그러한 것과 같기에 이것이 왕성하면 저것이 쇠퇴하는 것입니다. 야비하고 거짓되며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이 모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화평하고 즐거운 마음이 있지 않으면 야비하고 거짓된 마음이 파고들어 그 주인이 되고,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서지 않으면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이 파고들어 그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면에 주인이 되었다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흙탕은 물이 아니지만 뒤섞어 탁하게 만들면 이것도 물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예악禮樂을 잠시도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