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大學衍義(5)

대학연의(5)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대학연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問 開元治道 最盛하니 何致而然 宰相 對曰
卽位하사하시니 此二人 蚤夜 孜孜하여 納君於道하더니
嘗手寫尙書無逸하여 爲圖以獻하여 勸帝出入觀省하여 以自戒러니
其後이어늘 乃代以山水圖하시고 稍怠于勤이어시늘 左右 不復箴規하고 姦臣 日用事하여 以至于敗하시니
今願陛下 以爲元龜則天下 幸甚하리이다


30-8-가
목종穆宗이 질문하였다. “개원開元(713~741) 때 치세治世가 가장 융성했으니, 무엇 때문에 그러했는가?” 재상 최식崔植이 대답하였다.
현종玄宗께서 즉위하여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얻으니, 이 두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애써서 군주를 도리로 이끌었습니다.
송경이 한번은 《상서尙書》 〈무일無逸〉을 손수 베껴 쓰고 그림으로 그려서 현종께 바친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종께서 출입할 때마다 보고 살펴서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무일〉 그림이 더럽고 칙칙해지자 마침내 산수도山水圖로 교체하였으며, 현종玄宗께서 정무에 근면했던 데에서 차츰 나태해지자 근신近臣이 더 이상 경계하고 간하지 않고서 간신姦臣들이 날마다 권력을 휘둘러 실패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감계鑑戒로 삼으소서. 그렇게 하시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唐 玄宗 姚崇 宋璟 唐 玄宗 姚崇 宋璟


역주
역주1 30-8-가 : 《新唐書》 卷142 〈崔祐甫列傳 崔植〉에 보인다. 여기에서 인용된 내용은, 長慶(821~824) 연간 초에 崔植이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을 때 穆宗과 나눈 대화이다. 《舊唐書》에는 목종이 侍臣에게 질문했을 때 최식이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淸나라 때 편찬된 《全唐文》에는 최식이 답변한 내용이 〈對穆宗疏〉라는 제목의 글로도 수록되어 있다. 《舊唐書 卷119 崔祐甫列傳 崔植》 《全唐文 卷695 崔植 對穆宗疏》
역주2 唐穆宗 : 795~824(재위 820~824). 唐나라 제12대 황제인 李恒으로, 초명은 宥(유)이며, 시호는 睿聖文惠孝皇帝이다. 憲宗(778~820)의 셋째 아들로, 처음에 建安郡王으로 봉해졌다가 헌종 元和 1년(806)에 遂王으로 進封되었다. 원화 7년(812)에 惠昭太子 李寧이 죽자 황태자가 되면서 이름이 恒으로 바뀌었으며, 원화 15년(820)에는 환관들에 의해 제위에 올랐다. 향락과 사치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아 환관이 전횡을 일삼고 牛李黨爭이 벌어졌으며, 백성들의 조세 부담이 더욱 커지고 盧龍․成德․魏博 등 3개 藩鎭이 兵變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長慶 4년(824)에 金石으로 만든 약을 복용하고 나서 얼마 후에 죽었다.
역주3 崔植 : 772~829. 字는 公修로, 中書侍郞 崔祐甫의 조카이자, 廬江縣令 崔嬰甫의 아들이다. 唐 穆宗이 즉위하자 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목종에게 《尙書》 〈無逸〉편을 지침으로 삼을 것과 漢 文帝를 본받을 것을 간한 적이 있었다. 이후 목종 長慶 2년(822)에 재상에서 파직되어 刑部尙書가 되었다. 文宗 大和 1년(827)에는 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華州刺史가 되었다가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역주4 玄宗 : 685~762(재위 712∼756). 唐나라 제12대 황제인 李隆基로, 睿宗의 셋째 아들이다. 中宗 景龍 4년(710)에 중종을 시해한 韋皇后 세력을 제거한 뒤 부친인 李旦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태자가 되었다. 景雲 3년(712)에 예종의 양위로 즉위한 뒤 姚崇, 宋璟, 張九齡 등 충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재상으로 임명했으며, 때로는 청렴의 기풍을 위해 盧懷愼과 같이 무능해도 깨끗한 관리를 재상에 기용하기도 했다. 또 태수․현령 등과 같은 지방관도 직접 선발하여 훌륭한 인재들을 州縣으로 내려보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則天武后 이후로 이어졌던 혼란을 안정시켜 開元之治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天寶 연간(742∼756)으로 접어들면서 李林甫․楊國忠 등과 같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失政을 거듭한 끝에 천보 14년(755)에 安祿山의 난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蜀 땅으로 播遷하였으며, 아들인 肅宗 李亨이 즉위한 뒤 上皇으로 높여졌으나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
역주5 姚崇 : 650~721. 초명은 元崇, 자는 元之로, 陝州(섬주) 硤石(협석) 사람이다. 일찍이 則天武后 때부터 재상을 지냈으며 中宗, 睿宗 때에도 두루 관직을 지내다가 玄宗 開元 1년(713)에 同中書門下三品이 되면서 다시 재상이 되었다. 이 무렵 盧懷愼 등 다른 재상들은 현종의 위엄에 눌려 겸양하고 꺼리는 자세를 취했으나, 요숭만은 독자적으로 정무를 처결하였으며 현종도 요숭에게 많은 자문을 구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趙誨라는 사람이 뇌물을 받았음에도 현종에게 그의 죄를 감해달라고 상주했으나 현종이 조회를 용서하지 않자, 황송하고 두려워하던 나머지 재상 직에서 물러나면서 宋璟을 후임 재상으로 추천하였다. 시호는 文獻이다.
역주6 宋璟 : 663~737. 邢州 南和 사람이다. 高宗 때 進士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睿宗 景雲 1년(710)에 吏部尙書․同中書門下三品이 됨으로써 재상이 되었다. 玄宗이 즉위하고 나서 御史大夫, 刑部尙書를 역임하다가 開元 4년(716)에 吏部尙書 兼 侍中이 되어 다시 재상이 되었다. 현종에게 여러 차례 직언을 올려 현종의 존중을 받았으며, 요숭과 함께 명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개원 20년(732)에 致仕하였으며,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7 : 대전본․사고본에는 ‘朽’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