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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5)

대학연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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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29-1-나(按)
按 孟子라하니 其災 雖起堯時하나 至舜攝位 害猶未息이라 故舜 自謂此 天之所以儆我也라하시니 聖帝明王之畏天省己 類如此하니
其後 成湯 憂旱하사 亦以六事 自責曰 政不節與 使人疾與 何以不雨 至此極也 宮室 女謁 盛與 何以不雨 至此極也 오하시니
夫以成湯之聖으로 安得有此而反躬自責 若是其至하시니 湯之心 即舜之心也
原注
至漢武帝時하여 對策 乃曰 堯 遭洪水하사 使禹治之하시니 未聞라하니
夫舜 以水自儆而 歸之於堯하고 以旱自責而 歸之於桀하니 姦諛之情 所以惑誤其君하여 使傲忽天戒者 凡皆若此하니 不可以不察이니이다


原注
[신안臣按]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물이 역류하는 것을 홍수洚水(홍수洪水)라고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홍수의 재해가 비록 임금 때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이 제위를 섭행攝行할 때까지 재해가 여전히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순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를 경계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성명聖明한 제왕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 후에 성탕成湯이 가뭄을 근심하여 또한 여섯 가지 정사를 가지고 스스로 책망하기를 “정사가 알맞게 되지 않았던가? 백성을 부리기를 혹독하게 하였던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비가 오지 않는가. 궁실宮室이 지나치게 컸던가? 궁녀의 청탁이 성행하였던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비가 오지 않는가. 뇌물이 자행되었던가? 참소하는 자들이 창궐하였던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비가 오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왕聖王인 저 성탕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에게 돌이켜 스스로 책망한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으니, 탕왕湯王의 마음은 곧 순임금의 마음입니다.
原注
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공손홍公孫弘대책對策을 올려 마침내 이르기를 “임금이 홍수를 당하여 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임금 때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탕왕湯王 때의 가뭄으로 말하면 걸왕桀王 때의 남은 영향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순이 홍수를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였는데 공손홍은 그 탓을 요임금에게 돌렸고, 탕왕이 가뭄을 가지고 스스로 책망하였는데 공손홍은 그 탓을 걸왕에게 돌렸습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마음이 자신의 임금을 현혹시키고 그르쳐서 하늘의 경계를 태만히 하고 경시하게 만드는 것이 대개 이와 같으니, 잘 살펴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水逆行謂之洚水 : 《孟子》 〈告子 下〉 제11장에 보인다.
역주2 : 대전본에는 ‘榮’으로 되어 있다.
역주3 苞苴 : ‘苞苴’는 뇌물을 이른다. 楊倞의 《荀子注》에 “뇌물은 반드시 물건을 싸거나 깔았기 때문에 총괄하여 ‘苞苴’라고 이른다.[貨賄必以物苞裹 故總謂之苞苴]”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4 成湯……極也 : 《荀子》 〈大略〉에 보인다. ‘六事’는 여섯 가지 잘못된 정사로, 천하에 크게 가뭄이 들자 商나라 湯王이 桑林의 들에서 기도하면서 위의 여섯 가지 일로써 자책하였다.
역주5 公孫弘 : 기원전 200~기원전 121. 西漢의 재상이다. 자는 季 또는 次卿으로, 菑川國 薛縣 사람이다. 40여 세에 胡毋生에게 《春秋公羊傳》을 전수받았다. 60세인 漢 武帝 建元 원년(기원전 140)에 對策에 응하여 博士가 되었으나 匈奴의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무제 元光 5년(기원전 130)에 賢良對策으로 박사에 제수되고 待詔金馬門이 되었다. 이후 左內史, 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무제 元朔 5년(기원전 124)에 丞相이 되고 平津侯에 봉해졌다. 매양 조회에서 정사를 논의할 때 공손홍은 그 단서만 제시하여 무제가 직접 채택하게 할 뿐 면전에서 반대하거나 논쟁하지 않았고, 여러 공경과 어떤 사안을 함께 건의하기로 약속하고도 무제의 뜻을 살펴 약속을 저버려 汲黯에게 논척을 당하기도 하였다. 《漢書 권58 公孫弘傳》
역주6 : 대전본․사고본에는 ‘禹’로 되어 있다. 통행본 《漢書》에도 ‘禹’로 되어 있다.
역주7 堯遭……烈也 : 《漢書》 권58 〈公孫弘傳〉에 보인다. 漢 武帝 元光 5년(기원전 130) 賢良對策 때 무제의 制書에 禹王과 湯王 때의 홍수와 가뭄의 원인에 대해 묻는 내용이 있었다. 公孫弘은 대책을 올려 이에 대해 “신은, 堯임금이 홍수를 당하자 禹에게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은 들었지만 우임금 때 홍수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탕왕 때의 가뭄으로 말하면 桀王 때의 남은 영향입니다.[臣聞堯遭鴻水 使禹治之 未聞禹之有水也 若湯之旱 則桀之餘烈也]”라고 답하였다. 太常은 공손홍의 대책을 하등급으로 평가하였으나 무제가 직접 1등으로 선발하여 박사에 제수하고 待詔金馬門으로 삼았다. 《漢書 권58 公孫弘傳》
역주8 : 대전본에는 ‘洪’으로 되어 있으나, 宋 宣祖 趙弘殷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9 : 대전본에는 ‘烈’로 되어 있다.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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