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術
이 攻劉備
하야 以爭徐州
어늘 備使張飛守下邳
하고 自將拒術
이러니 呂布
注+[附註]初에 騎都尉丁原이 以布爲主簿하야 甚見親待러니 董卓이 誘布殺原하고 幷其兵하고 以布爲騎都尉하야 誓爲父子하고 甚愛信之하다 嘗小失有隙이러니 王允謀誅卓할새 使布爲內應하니 布遂刺殺卓하고 與卓將李傕等戰敗하야 投袁紹하니 袁術이 引布擊劉備하다 〈豫州刺史〉術이 勸布襲下邳하고 許助軍糧한대 布襲下邳하고 虜備妻子及將吏家口라 備收餘兵하야 與術戰敗하고 降於布하니 布亦忿術運糧不繼하야 復以備爲豫州刺史하니라襲下邳
하니 張飛敗走
라
備降於布하니 布復以備爲豫州刺史하고 布는 自稱徐州牧이라하다
○ 楊奉, 韓
이 奉車駕至雒陽
하니 是時
에 宮室
이 燒盡
하야 百官
이 披荊棘
注+[釋義]荊은 楚木也요 棘은 小棗叢生者라하고 依牆壁間
이러라
曹操在許하야 謀迎天子한대 衆以爲山東未定이라하니
荀彧曰 昔
에 晉文公
이 納周襄王
에 而諸侯景(影)從
注+[通鑑要解]景은 讀曰影이니 言如影之從形也라 左傳에 孤偃이 言於晉文公曰 求諸侯인댄 莫如勤王이니 諸侯信之요 且大義也라하니 晉侯以左師逆王하다 王入于王城하야 以取太叔于溫하야 殺之于濕城하다 遂定霸業하니 天下服從하니라하고 漢高祖爲義帝
注+[釋義]繒之精白者라素
에 而天下歸心
이니이다
自天子蒙塵
注+[釋義]左傳註云 天子出奔을 謂之蒙塵이라하니라[頭註]言播越하야 在草莽蒙冒塵埃也라으로 將軍
이 首唱義兵
이나 徒以山東擾亂
으로 未遑遠赴
러니
今鑾駕旋軫
注+[釋義]軫은 車後橫木也니 旋軫은 猶言回轅이라에 東京
이 蕪
注+[釋義]榛은 木叢生之貌요 蕪는 荒穢也라라
誠因此時하야 奉主上以從人望은 大順也요 秉至公以服天下는 大略也요 扶弘義以致英俊은 大德也니
操乃將兵詣雒陽
하야 引董昭
注+[通鑑要解]曹操謀臣이라問計
한대 昭曰 惟有移駕幸許耳
라한대
○ 中平
注+[通鑑要解]靈帝年號라以來
로 天下亂離
하야 民棄農業
하니 諸軍竝起
에 率乏糧穀
하야 無終歲之計
라
飢則寇略
注+[頭註]略은 掠通이니 取也라하고 飽則棄餘
하야 瓦解
注+[釋義]瓦解는 言如衆瓦之解라流離
하야 無敵自破者 不可勝數
러라
袁紹
는 在河北
에 軍人
이 仰食桑注+[通鑑要解]椹은 桑實也라하고 袁術
은 在江, 淮
에 取給蒲注+[頭註]蠃는 或作螺니 蚌屬이라하니 民多相食
하야 州里蕭條라
羽林監棗祗 請建置屯田
이어늘 曹操從之
하야 以祗爲屯田都尉
하고 以騎都尉任峻
으로 爲典農中郞將
하야 募民屯田許下
注+[通鑑要解]許는 謂許州也라 許下는 洛曰洛下, 曰郟下之類也라하야 得穀百萬斛
이라
於是에 州郡이 例置田官하야 所在에 積穀하야 倉廩이 皆滿이라
故로 操征伐四方에 無運糧之勞하야 遂能兼幷群雄하니 軍國之饒 起於祗而成於峻이러라
○ 劉備合兵
하야 得萬餘人
하니 呂布
之
하야 自出兵攻備
라
備敗走하야 歸曹操하니 操厚遇之하고 以爲豫州牧하다
원술袁術이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서주徐州를 다투자,
유비劉備가
장비張飛로 하여금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고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원술袁術을 막았는데,
여포呂布注+[附註]처음에 기도위騎都尉 정원丁原이 여포呂布를 주부主簿로 삼아서 매우 친애하고 우대하였는데, 동탁董卓이 여포呂布를 유인하여 정원丁原을 죽이고 그 군대를 병합한 다음 여포呂布를 기도위騎都尉로 삼아서 부자간父子間이 되기로 맹세하고, 매우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일찍이 작은 잘못으로 틈이 있었는데, 왕윤王允이 동탁董卓을 죽일 것을 모의할 적에 여포呂布를 시켜서 내응하게 하니, 여포呂布가 마침내 동탁董卓을 찔러 죽였다. 동탁董卓의 장수인 이각李傕 등과 싸워 패하고는 원소袁紹에게 돌아가니 원술袁術이 여포呂布를 데리고 유비劉備를 공격하였다. 예주자사豫州刺史 원술袁術이 여포呂布에게 하비下邳를 습격하도록 권하고 군량을 도울 것을 허락하였는데, 여포呂布가 하비下邳를 습격하고 유비劉備의 처자妻子 및 장수와 관리들의 가솔家率들을 사로잡았다. 유비劉備가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원술袁術과 싸워 패하고는 여포呂布에게 항복하니, 여포呂布 또한 원술袁術이 군량을 계속 운반해 주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다시 유비劉備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가
하비下邳를 습격하니
장비張飛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비劉備가 여포呂布에게 항복하니, 여포呂布가 다시 유비劉備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 여포呂布는 서주목徐州牧이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
양봉楊奉과
한섬韓暹이
거가車駕를 받들고
낙양雒陽에 이르니, 이때에 궁실이 불타 없어져서 백관들이
형극荊棘注+[釋義]형荊은 가시나무이고, 극棘은 멧대추나무로 총생叢生한다. 을 헤치고 담장과 벽 사이에 의지해 있었다.
조조曹操가 허許 땅에 있으면서 천자天子를 맞이해 올 것을 모의하자, 사람들은 산동山東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순욱荀彧은 말하기를 “옛날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주周나라
양왕襄王을 맞아들이자
제후諸侯들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注+[通鑑要解]경景은 영影으로 읽으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고언孤偃이 진晉 문공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의 패자霸者가 되려고 한다면 천자天子의 일에 진력盡力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다른 제후諸侯들이 믿을 것이고 또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습니다.” 하니, 문공文公이 좌군左軍으로 양왕襄王을 맞이하였다. 양왕襄王이 왕성王城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킨 태숙太叔을 온溫 땅에서 잡아 습성濕城에서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공文公이 마침내 패업霸業을 정하니 천하가 복종하였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의제義帝를 위하여
상복喪服注+[釋義]호縞는 비단 중에 정精하고 흰 것이다. 을 입자
천하天下의 마음이 돌아왔습니다.
천자天子가
몽진蒙塵注+[釋義]《춘추좌전春秋左傳》의 주註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도망하여 달아나는 것을 몽진蒙塵이라 한다.” 하였다.[頭註]蒙塵은 제왕帝王이 파월播越(播遷)하여 초야草野에서 먼지를 뒤집어씀을 말한다. 한 뒤로
장군將軍께서 먼저
의병義兵을 제창하였으나 다만
산동山東이 소란하므로 멀리 달려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난가鑾駕가 멍에를 돌림
注+[釋義]진軫은 수레 뒤에 가로댄 나무이니, 선진旋軫은 멍에를 돌린다는 말과 같다.에
동경東京이 황폐해졌습니다.
注+[釋義]진榛은 나무가 총생叢生하는 모양이고 무蕪는 황폐함이다.
그리하여 충의忠義의 선비는 근본을 보존할 생각이 있고 억조億兆의 백성들은 옛날을 생각하는 슬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진실로 이때를 이용하여 주상主上을 받들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의리義理에 크게 순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함을 잡아 지켜 천하를 복종시킴은 큰 지략이고, 대의大義를 붙들어 영걸들을 초치招致함은 큰 덕德이니,
사방에 비록 반역하는 적신賊臣이 있으나 그들이 어찌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조조曹操가 이에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雒陽에 나아가서
동소董昭注+[通鑑要解]동소董昭는 조조曹操의 모신謀臣이다. 를 데려다가 계책을 물으니,
동소董昭가 말하기를 “오직
거가車駕를 옮겨
허許 땅으로 감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조조曹操는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본뜻이다.” 하고는 마침내 허許 땅으로 천도遷都하였다.
○
중평中平注+[通鑑要解]중평中平은 영제靈帝의 연호年號이다. 이래로 천하가 혼란하고 분열되어 백성들이 농업을 폐기하니, 여러 군대가 아울러 일어남에 대부분
양곡糧穀이 부족하여 한 해를 마칠 계책도 없었다.
굶주리면 노략질
注+[頭註]약略은 약掠(약탈)과 통하니, 빼앗음이다. 하고 배부르면 나머지를 버려서 와해
注+[釋義]와해瓦解는 기와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되고 유리하여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멸망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원소袁紹는
하북河北에 있을 때에 군사들이 〈먹을 것이 없어〉 뽕나무 열매(오디)
注+[通鑑要解]심椹은 뽕나무 열매(오디)이다. 를 따서 먹었고
원술袁術은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사이에 있을 때에
포라蒲蠃(소라)
注+[頭註]나蠃는 혹 나螺로 쓰기도 하니, 포라蒲蠃는 방합蚌蛤(조개)의 종류이다.를 채취해 먹으니, 백성들이 대부분 서로 잡아먹어서
주리州里가 쓸쓸하였다.
우림감羽林監 조지棗祗가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청하자,
조조曹操가 그의 말을 따라
조지棗祗를
둔전도위屯田都尉로 삼고
기도위騎都尉 임준任峻을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으로 삼아서 백성을 모집하여
허도許都 아래
注+[通鑑要解]허許는 허주許州를 이른다. 허하許下는 낙洛을 낙하洛下라 하고, 겹郟을 겹하郟下라고 말하는 따위이다. 에서
둔전屯田을 경작하게 하여 곡식 백만
곡斛을 얻었다.
이에 주군州郡에서 으레 전관田官(농사짓는 관원)을 두어 소재지마다 곡식을 쌓아 두어 창름倉廩이 모두 가득하였다.
이 때문에 조조曹操가 사방四方을 정벌할 때에 양식을 운반하는 노고가 없어 마침내 군웅群雄들을 겸병할 수 있었으니, 군대와 국가의 풍요로움이 조지棗祗에게서 시작되어 임준任峻에게서 이루어졌다.
○ 유비劉備가 병력을 규합하여 만여 명을 얻으니, 여포呂布가 이를 미워하여 스스로 군대를 내어 유비劉備를 공격하였다.
유비劉備가 패주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의하니, 조조曹操가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