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癸酉] 〈梁承聖二年이요 魏主欽二年이요 齊天保四年이라〉
正月에 梁王僧辯이 發建康하고 承制하야 使陳霸先으로 代鎭揚州하다
○ 魏太師泰 廢魏主欽
注+[頭註]文帝寶炬長子이니 爲宇文泰所廢弑라하고 立其弟齊王廓
注+[原註]文帝第四子니 是爲恭帝라하다
○ 梁主好玄談
注+[頭註]莊, 老尙玄이요 釋氏尙空이라하야 九月
에 於龍光殿
에 하다
○ 魏遣于謹, 宇文護, 楊忠하야 將兵五萬하야 入寇하니 梁王詧이 帥衆會之하다
梁主停講
하고 內外戒嚴
이러니 王
이 報曰 吾至石梵
하니 境上
이 帖然
이러이다
梁主聞而疑之러니 乃復開講一日하니 百官이 戎服以聽이라
丁亥
에 魏兵
이 至柵下
호되 梁主巡城
하야 猶口占爲詩
하고 群臣
이 亦有和者
注+[頭註]和는 去聲이니 應也라라
甲寅에 魏人이 百道攻城하니 反者開(四)[西]門하고 納魏師어늘
武帝
注+[頭註]蕭衍이라當齊之季
하야 任居方面
注+[頭註]謂爲荊州刺史라하고 危不自安
하야 乘時奮起
하야 以除昏主而成大業
이라
及享國日久
에 普通, 大通之際
에 遭魏氏衰微
하야 王公牧守 繈
注+[頭註]繈은 索也니 言若繩索之相屬이라而歸之
하고 戎車北征
하야 至於洛汭
라
觀其勤身約己하고 好尙文雅하야 拊循士大夫하면 亦可謂恭儉寬惠之君矣라
然
이나 以萬乘之主
로 爲
하야 屈身傾國
하야 以奉浮屠
하고 恩勝於威
하야 紀綱不立
이라
信佞臣之謀
하고 貪河南之地
하야 棄與國
注+[頭註]謂東魏라하고 寵叛人
注+[頭註]侯景이라하야 遂使臺城覆沒
하고 老而餒死
하야 江淮以南
이 鞠爲荊棘
하니 其智未足稱也
라
夫德澤不能及而享其大利를 聖人禍之하니 譬如悅盜賊之財而延之入室이면 財不可得而喪其所有 必矣라
其子孫
이 各擁强兵
하야 列居重鎭
이나 不救君父之危
하고 而窺間乘便
하야 更相屠滅
하니 元帝
注+[頭註]繹이라於兄弟之中
에 殘忍尤甚
이라
是以
로 雖翦兇渠
注+[頭註]渠는 大也니 謂侯景이라하야 而克復故業
이나 旋踵之間
에 身爲俘馘
注+[頭註]生獲曰俘요 斷耳曰馘이라하니 豈特人心之不與哉
리오
魏立梁王詧
하야 爲梁王
하고 資以荊州之地
하니 是爲後梁
注+[原註]梁昭明太子之子니 附於魏하니라[頭註]魏取襄陽하야 徙梁王詧하야 使稱帝于江陵하고 屯兵守之하니 名曰助防이라하나 實以制詧也라 詧은 音察이라이라
方其京師覆沒
하고 君父告危
하니 於斯時
에 奔走赴難
이 可也
어늘 而竟逡巡不進
하고 繼而徵兵湘州
하야 少不如意
면 則含忍以就大事 可也
어늘 而遽行骨肉之誅
하고 終而簡文嗣位
하야 國祚幸存
이면 則翼戴以隆梁祚 亦可也
어늘 而乃不稟正朔
하고 復興
라
觀其始終一念이 上不在其君親하고 下不在其兄弟하야 僥倖國釁하고 希覬身謀하야 師出無名하니 何以討賊이리오
是以로 纔誅侯景하고 卽安江陵이라가 未越三期에 寇戎交逼이라
身在漂搖扤捏之中하야 不思保國之計하고 方且躬御龍光하야 親講老子하야 使百官으로 戎服以聽하며 不思反己하고 猶焚圖書하니 其愚蔽亦甚矣라
卒之喪師覆旅하고 身就拘囚하니 豈非上靈降鑑에 此焉假手리오
계유(553) - 양梁나라 승성承聖 2년이고, 위주魏主 원흠元欽의 2년이고, 제齊나라 천보天保 4년이다. -
정월에 양梁나라 왕승변王僧辯이 〈군대를 이끌어〉 건강建康을 출발하고, 황제皇帝의 제制를 받들어 진패선陳霸先으로 하여금 양주揚州를 대신 진무하게 하였다.
○
위魏나라
태사太師 우문태宇文泰가
위주魏主 원흠元欽注+[頭註]위주魏主 원흠元欽은 문제文帝 원보거元寶炬의 장자長子이니, 우문태宇文泰에게 폐위되어 시해당하였다. 을 폐하고, 그의 아우
제왕齊王 원곽元廓注+[原註]제왕齊王 원곽元廓은 문제文帝의 넷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공제恭帝이다. 을 세웠다.
○
양주梁主가
현담玄談注+[頭註]장자莊子와 노자老子는 현허玄虛를 숭상하고, 석씨釋氏는 공空을 숭상하였다. 을 좋아하여 9월에
용광전龍光殿에서 《
노자老子》를 강하였다.
○ 위魏나라가 우근于謹‧우문호宇文護‧양충楊忠을 보내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니, 양왕梁王 소찰蕭詧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회합하였다.
양주梁主가 강講을 정지하고 내외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는데, 왕침王琛이 보고하기를 “제가 석범石梵에 이르니 국경이 조용하였습니다.” 하였다.
양주梁主가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였는데, 다시 《노자老子》 강講을 하루 동안 여니, 백관百官들이 군복 차림으로 강講을 들었다.
정해일丁亥日(11월 5일)에
위魏나라 군대가
성책城柵 아래에 이르렀으나
양주梁主는 성을 순행하면서 여전히 입으로
시詩를 지어 읊었고 신하들 중에도 화답하는 자
注+[頭註]화和는 거성去聲이니, 응답하는 것이다. 가 있었다.
갑인일甲寅日(12월 2일)에 위魏나라 사람들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니, 성城안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서쪽 성문城門을 열어 위魏나라 군대를 들어오게 하였다.
양주梁主가 백마白馬에 소복素服 차림으로 나와서 항복하였다.
“
무제武帝注+[頭註]무제武帝는 소연蕭衍이다. 는
제齊나라 말엽을 당하여
방면方面注+[頭註]방면方面은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음을 이른다. 의 임무를 맡고는 위태롭게 여기고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않아서 때를 틈타 분발하여 일어나서 어두운 군주를 제거하고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황제의 지위에 오른 지 오래되자
보통普通 연간과
대통大通 연간 사이에
위魏나라가 쇠미해질 때를 당하여
왕공王公과 지방 수령들이 계속 이어서
注+[頭註]강繈은 끈이니, 강속繈屬은 마치 끈이 서로 이어진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돌아오고
병거兵車로 북쪽을 정벌하여
낙예洛汭에까지 이르렀다.
몸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하며 문아文雅를 좋아하고 숭상해서 사대부士大夫들을 어루만진 것을 보면 또한 공손하고 검소하며 너그럽고 은혜로운 군주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만승萬乘의 군주로서 상문桑門(승려)의 행실을 하여 몸을 굽히고 나라를 기울여 부도浮屠를 받들었으며 은혜가 위엄을 이겨 기강이 서지 못하였다.
간신(朱异)의 꾀를 믿고
하남河南 땅을 탐내어 동맹국인
동위東魏注+[頭註]여국與國(동맹국)은 동위東魏를 이른다. 를 배반하고 모반한
후경侯景注+[頭註]모반한 사람은 후경侯景이다. 을 총애하여 마침내
대성臺城을 전복시켰으며 늙어서 굶어 죽어
강회江淮 이남 지방이 마침내 쑥대밭이 되게 하였으니, 그 지혜는 칭찬할 것이 못 된다.
덕택이 미치지 못하면서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을 성인聖人은 재앙으로 여겼으니, 비유하건대 도적의 재물을 좋아하여 도적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어오게 하면 재물을 얻기는커녕 자신의 소유를 잃을 것이 틀림없다.
자손들이 각각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서
중진重鎭에 포진하고 있었으나
군부君父의 위태로움을 구원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고 편리한 틈을 타서 번갈아 서로 도륙하고 멸망시켰으니,
원제元帝注+[頭註]원제元帝는 소역蕭繹이다. 는 형제 중에서도 잔인함이 더욱 심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원흉元兇인
후경侯景注+[頭註]거渠는 큼이니, 흉거兇渠는 후경侯景을 이른다. 을 제거하여 옛 기업을 회복하였으나 돌아서기도 전에 몸이 포로
注+[頭註]사로잡은 것을 부俘라 하고, 귀를 베는 것을 괵馘이라 한다. 가 되었으니, 어찌 다만
인심人心이 허여하지 않았을 뿐이겠는가.
위魏나라가
양왕梁王 소찰蕭詧을 세워
양왕梁王으로 삼고
형주荊州 지역을 밑천으로 삼게 하니, 이것이 바로
후량後梁이다.
注+[原註]魏立梁王詧……是爲後梁:[原註]梁王 소찰蕭詧은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아들이니, 위魏나라에 붙었다.[頭註]魏나라가 양양襄陽을 취하고 양왕梁王 소찰蕭詧을 옮겨서 강릉江陵에서 칭제稱帝하게 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니, 명색은 방어를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소찰蕭詧을 제재하고자 한 것이었다. 찰詧은 음이 찰이다.
“원제元帝(蕭繹)는 무제武帝(蕭衍)의 아들로 양자강揚子江 상류上流 지역의 중임重任을 총괄하고 있었다.
경사京師인 건강建康이 함락되고 군부君父가 위태로움을 고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급히 달려가 국난國難을 구원하는 것이 옳았는데 끝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았으며, 뒤이어 상주湘州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에 치욕을 참고서 대사大事를 이루는 것이 옳았는데 대번에 골육간의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간문제簡文帝가 왕위를 계승하여 국통國統이 다행히 보존되었으면 그를 돕고 추대하여 양梁나라의 국통國統을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았는데 마침내 정삭正朔을 받지 않고 다시 성제成濟의 계책을 일으켰다.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생각이 위로는 군주와 어버이에게 있지 않고 아래로는 형제들에게 있지 않아서, 국가의 재화災禍를 요행으로 여기고 오직 자신을 위한 계책만을 생각하여 명분 없는 군대를 출동시켰으니, 어떻게 역적을 토벌하겠는가.
이 때문에 겨우 후경侯景을 토벌하고 곧바로 강릉江陵을 안정시켰다가 3년이 못 되어 오랑캐가 번갈아 핍박하였던 것이다.
몸이 표요飄搖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또 몸소 용광전龍光殿에 나아가 친히 《노자老子》를 강講해서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군복 차림으로 듣게 하였으며, 자기 몸에 돌이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고금古今의 도서 14만 권을 불태웠으니, 어리석음과 가려짐이 또한 심하다.
끝내 군대를 패망시키고 자신이 구속되고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상천上天의 신령이 굽어보시어 이들에게 손을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를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