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司馬公曰 三代之前에 海內萬國에 有人民社稷者를 通謂之君하고 合萬國而君之者를 乃謂之王하고
王德旣衰에 方伯連帥 能帥其屬하여 以尊天子면 則謂之霸러니
自漢儒
로 推五德生勝
하여 以秦爲閏位
하여 在木火之間
이라하여 霸而不王
하니 於是
에 正閏之論
이 興矣
注+五德生勝, 詳見秦始皇二十六年. 秦以水德, 在周漢木火之間, 不在五德相生之正運, 故曰閏位.라
及三國五胡南北之亂
에 各有國史
하여 互相排黜
注+三國, 漢‧魏‧吳也. 晉惠帝以來, 五胡肆虐, 漢劉淵, 匈奴也, 後趙石勒, 羯也, 前燕慕容廆, 鮮卑也, 前秦苻洪, 氐也, 後秦姚弋仲, 羌也. 南, 謂宋‧齊‧梁‧陳. 北, 謂後魏‧北齊‧後周也. 互相排黜, 謂彼此貶斥也. 南謂北爲索虜, 北謂南爲島夷, 索虜者, 以北人辮髮, 謂之索頭也, 島夷者, 以東南際海, 土地卑下, 謂之島中也.이라 朱氏代唐
에 四方幅裂
하고
朱邪入汴
에 比之窮新
注+後梁朱晃, 受唐禪. 邪音耶, 後唐莊宗李存勖, 本姓朱邪氏. 入汴, 滅後梁, 自以爲繼唐, 比朱梁於有窮簒夏, 新室簒漢.하여 運歷年紀
를 皆棄而不數
하니 此皆偏辭
요 非公論也
라
故로 今此書는 獨以周, 秦, 漢, 晉, 隋, 唐爲正統하고 其後子孫이 雖微弱播遷이나 然猶承祖宗之業하고
四方與之爭衡者는 皆其故臣也라 故로 猶得用天子之制以臨之하고 至於天下離析하여는 本非君臣이면 則皆以列國之制處之라
然
이나 不可無歲, 時, 月, 日以識事之先後
注+識, 音誌.라 漢傳於魏而晉受之
하고
晉傳於宋以至於陳하여 而隋取之하고 唐傳於梁以至於周하여 而大宋이 承之라
故로 不得不取其年號하여 以紀其國之事하니 非尊此而卑彼하여 有正閏之辨也라
昭烈
이 雖云中山靖王之後
나 然不能紀其世次
하여 與南唐稱吳王恪後
로 無異
注+五代間, 李知誥據淮南, 自謂唐太宗第三子吳王恪之後.라 故
로 不敢以後漢, 東晉爲比
하여 使得紹漢氏之遺統也
로라
目
【目】 司馬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三代 이전에 海內 모든 나라 중에 人民과 社稷을 보유한 자를 통틀어 君이라 일렀고, 모든 나라를 합하여 군주 노릇을 하는 자를 王이라 일렀고,
王의 德이 이미 쇠한 뒤에 方伯과 連帥(연수)가 능히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서 天子를 높이는 자를 霸者라 일렀다.
漢나라의
儒者로부터
五德(
五行의 덕)이
相生하고
相剋하는 이치를 미루어
秦나라를
閏位(비정통의
帝位)로 보아
木德과
火德의 사이에 있다 해서
秦나라를 패자로 여기고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正位와
閏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注+ 秦나라는 水德을 사용하여 周나라와 漢나라의 木과 火의 사이에 있어서 오덕이 상생하는 正運에 있지 않으므로 閏位라 한 것이다.
三國과
五胡,
南朝와
北朝의 혼란에 이르러서는 나라마다 각각
國史가 있어서 상대되는 나라를 서로 배척하였다.
注+“三國”은 漢나라(蜀漢), 魏나라, 吳나라이다. 晉나라는 惠帝 이후로 五胡가 포학함을 부리니, 漢나라의 劉淵은 匈奴族이었고 後趙의 石勒은 羯族이었으며, 前燕의 慕容廆는 鮮卑族이었고 前秦의 苻洪은 氐族이었으며, 後秦의 姚弋仲은 羌族이었다. 南朝는 宋, 齊, 梁, 陳을 이르고, 北朝는 後魏(北魏), 北齊, 後周를 이른다. “互相排黜”은 피차 공격하고 배척함을 이른다. 남조에서는 북조를 일러 索虜(삭로)라 하고 북조에서는 남조를 일러 島夷라 하였으니, 삭로란 북쪽 사람들이 머리를 땋아 늘어뜨렸으므로 그들을 ‘머리에 새끼를 꼬았다.’고 말한 것이고, 도이는 동남쪽이 바닷가에 있어서 토지가 낮으므로 그들을 ‘섬 가운데’라고 말한 것이다. 朱氏(
朱全忠)가
唐나라를 대신하자 사방이 분열되었고,
朱邪氏(
李存勖)가
汴京에 들어오자 〈
朱氏의
後梁을〉 옛날
夏나라를 찬탈한
有窮氏와
漢나라를 찬탈한
王莽의
新나라에 비유하여
注+後梁의 朱晃(朱全忠)이 唐나라의 禪位를 받았다. 邪는 音이 耶이니, 後唐의 莊宗인 李存勖은 本姓이 朱邪氏인데, 汴京에 들어가 後梁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唐나라의 뒤를 이었으므로 朱梁(後梁)을 夏나라를 찬탈한 有窮과 漢나라를 찬탈한 新室(新나라)에 견준 것이다. 曆法과
紀年을 모두 버리고 따지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편벽된 말이고 공정한 의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책에서는 오직 周‧秦‧漢‧晉‧隋‧唐만을 정통으로 삼아서 그 뒤의 자손들이 비록 미약하고 流離하였더라도 祖宗의 基業을 잇게 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이들과 더불어 優劣을 다투는 자들은 모두 옛 신하이기 때문에 여전히 天子의 제도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군림하게 하였고, 천하가 분열됨에 이르러는 본래 君臣 관계가 아니었으면 모두 列國의 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歲,
時(
四時)와
月,
日로써 일의
先後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注+識(기록하다)는 音은 誌이다. 帝位를,
漢나라가
魏나라에 전하였는데
晉나라가 받았고,
晉나라가 宋나라(南朝)에 전하여 陳나라에 이르렀는데 隋나라가 취하였으며, 唐나라가 梁나라에 전하여 周나라에 이르렀는데 大宋이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그 年號를 취하여 그 나라의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正位(正統)와 閏位(閏統)의 구분을 둔 것이 아니다.
昭烈이 비록
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나 그
世次를 기록할 수가 없어서 이 또한
南唐의
烈祖 李昇이
吳王 李恪의 후손이라고 칭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注+五代 사이에 李知誥(李昇)가 淮南을 점거하고 스스로 唐 太宗의 세 번째 아들인 그러므로 감히
에 견주어
漢나라의
傳統을 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目
【目】 황제(劉備)는 關羽가 戰歿한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장차 孫權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장군 趙雲이 다음과 같이 諫하였다. “나라의 賊은 曹操이고 손권이 아니니, 만약 먼저 魏나라를 멸망시키면 손권이 저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지금 조조가 비록 죽었으나 그의 아들 曹丕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도둑질하였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인하여 일찍 關中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河水와 渭水의 上流를 점거하여 흉악한 역적을 토벌하면 關東의 義士들이 반드시 양식을 싸서 짊어지고 말을 채찍질하여 왕자의 군대를 맞이할 것이니,
魏나라를 버려두고 먼저
吳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兵勢는 한 번 교전하면 반드시 단번에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注+卒(갑자기)은 猝로 읽는다.
신하들 중에 간언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昭烈帝는 모두 듣지 않고 마침내 諸葛亮을 남겨두어 太子를 보좌해서 成都를 지키게 하고, 직접 諸軍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目
【目】 孫權이 사신을 魏나라에 보내어 臣을 칭하고 于禁 등을 魏나라에 돌려보내니, 魏나라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劉曄이 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권이 이유 없이 항복을 청하니, 반드시 국내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中國(魏나라)이 가서 그 틈을 탈까 염려되므로 땅을 바치고 항복을 청해서 첫 번째로는 중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두 번째로는 중국의 지원을 빌려 그 무리를 강성하게 하고 敵을 의심하게 하려는 술책일 뿐입니다.
吳와
蜀漢이 각각 한
州를 확보하고 있으니,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구원함은 이는 약소국의 이익입니다.
注+“各保一州”는 요약하여 말한 것이니, 吳나라는 揚州를 보유하고 蜀漢은 益州를 보유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니,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군대를 일으켜서 곧바로 長江을 건너가 기습해야 하니, 蜀漢이 그 밖을 공격하고 우리가 그 안을 공격하면, 吳나라의 멸망이 열흘에서 한 달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吳나라가 망하면 蜀漢 또한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目
【目】 魏主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吳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太常 邢貞을 보내어 策書를 받들어 孫權을 제수해서 吳王으로 삼고 九錫을 가하니,
劉曄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손권은 비록 영웅의 재주가 있으나 옛날
漢나라의
票騎將軍 南昌侯일 뿐입니다. 관직이 하찮고 권세가 낮으며, 군사와 백성들이 중국(
魏나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백성들과 더불어 자신이 도모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注+“所謀”는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왕 노릇 하고자 함을 이른다.
왕의 지위는 천자와의 차이가 한 등급일 뿐이니,
禮秩(
禮儀와
爵秩)과
服御(
服飾,
車馬,
器用 등)가 서로 혼란스럽습니다.
注+漢나라는 景帝와 武帝 이후로 藩王(제후왕)들을 제재하여 京師(천자)와 제도를 똑같이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曹操가 魏王이 되어서 九錫을 가한 뒤로부터 禮秩과 服御가 천자와 차이가 없어 혼란하게 되었다. 이제 그가 거짓 항복하는 것을 믿고서 그의 작위와 칭호를 높여주어 후대하고 번성하게 하면 이는 호랑이를 위하여 날개를 달아주는 격입니다.
注+封은 땅을 더하여 후대하는 것이고, 殖은 길러서 번성하게 하는 것이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國”의 爲도 같다. 傅(붙이다)는 附로 읽는다.
손권은 蜀漢의 군대를 물리친 뒤에 반드시 겉으로는 禮를 다하여 중국을 섬기고 안으로는 무례한 짓을 자행하여 陛下를 노하게 할 것입니다.
폐하가 그를 정벌하면 그는 서서히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중국을 섬김에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우리를 정벌하니,
이는 반드시 우리 국가를 멸망하고 우리
人民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와
妾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注+俘는 사로잡음이다. 하면 백성들이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함께하여 전투력이 10배나 증가할 것입니다.”
魏主 曹丕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目
【
目】
邢貞이
吳나라에 이르니,
吳나라 사람들은
孫權을 마땅히
上將軍,
九州伯이라고 칭해야 하고
魏나라의 봉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注+≪禮記≫ 〈王制〉에 “九州 중에 한 州는 천자의 縣內(畿內)가 되고, 나머지 여덟 주는 여덟 명의 伯이 된다.” 하였다.
이에 손권이 말하기를 “沛公 또한 項羽의 봉작을 받아 漢王이 되었으니, 時宜에 마땅하게 할 뿐이다. 어찌 손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都亭에 나가서 형정을 기다렸다.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오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張昭가 말하기를 “君이 감히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아마도 江南이 약소하여 한 치 되는 칼날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가.” 하니, 형정이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目
【目】 吳나라가 中大夫 趙咨를 보내어 魏나라에 들어가 사례하게 하였다. 魏主 曹丕가 묻기를 “吳王은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조자가 대답하기를 “귀 밝고 눈 밝고 인자하고 지혜로우며 영웅스럽고 지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하였다.
魏王이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조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魯肅을 보통 사람 중에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귀 밝음이요, 呂蒙을 行伍(졸병)에서 발탁하였으니 이는 눈 밝음이요, 于禁을 사로잡고도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함이요,
荊州를 취할 적에 군대를 출동시키고도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지혜로움이요, 세
州를 점거하고서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이는 영웅스러움이요, 폐하에게 몸을 굽히니 이는 지략입니다.”
注+“三州”는 荊州, 揚州, 交州이다.
조비가 묻기를 “오왕이 자못 학문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왕은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려서 뜻이
經略함에 있으니, 비록 한가로운 여가에 서책과
史籍을 널리 보지만,
書生들이
文章을 찾고
文句를 뽑아다 쓰는 것은 본받지 않습니다.”
注+擿은 뽑아냄이니, 魏主가 문장을 좋아하였으므로 趙咨가 이 말로써 기롱한 것이다. 하였다.
“
吳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
注+不는 否로 읽는다. 하니, 대답하기를 “
大國은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小國은 수비하는 견고함이 있습니다.”
注+〈“大國……有備禦之固”〉 하였다.
“吳나라가 魏나라를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갑옷 입은 병사가 백만이고 長江과 漢水를 해자로 삼으니, 어찌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吳나라에 大夫(趙咨)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명하여 특별히 통달한 자가 8, 90명이고, 臣과 같은 무리는 수레로 싣고 말[斗]로 헤아릴 정도여서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하였다.
目
【目】 吳王 孫權이 孫登을 위해 師友를 잘 선발하여 諸葛瑾의 아들 諸葛恪, 張昭의 아들 張休, 顧雍의 아들 顧譚, 陳武의 아들 陳表를 中庶子로 삼아서,
들어가서는 ≪詩經≫과 ≪書經≫을 講하고 나와서는 따르며 말 타고 활 쏘면서 布衣의 禮로 대하고는, 그들을 四友라고 하였다. 魏나라에서 손등을 萬戶侯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