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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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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중
蜀漢 後主 建興 12년(234)~蜀漢 後主 延熙 원년(238)
甲寅年(234)
八月 注+帝王紀曰 “禪陵在濁鹿城西北十里.”하다
이러니 前軍師魏延 作亂이어늘 儀擊斬之하다
數挑戰이로되 懿不出이어늘 乃遺以巾幗婦人之服注+巾, 首飾也. 幗, 古百‧古外二切, 婦人喪冠也. 據劉昭注補輿服志, 公卿‧列侯婦人紺繒幗, 蓋婦人首飾之稱, 不特喪冠也.하니
懿怒하여 上表請戰한대 魏主叡使衛尉辛毗 杖節爲軍師하여 以制之하다
姜維謂亮曰 賊不復出矣로이다 亮曰 彼本無戰情이로되 所以固請者 以示武於衆耳
將在軍 君命 有所不受하나니 苟能制吾 豈千里而請戰邪
遣使者至懿軍하니 懿問其寢食 及事之煩簡하고 而不及戎事注+懿所憚者, 亮也, 問其寢食及事之煩簡, 以覘壽命之久近耳.어늘
使者曰 諸葛公 夙興夜寐하여 罰二十已上 皆親覽焉하고 所噉食 不至數升注+噉, 亦作啖. 古升小, 故曰數升.이라하니 懿告人曰 孔明 食少事煩하니 其能久乎
病篤이어늘 帝使僕射李福으로 省侍하고 因諮大計러니 與亮語已 別去注+已, 竟也. 語竟而別也.라가 數日復還이라
亮曰 孤知君還意로라 公所問者 公琰 其宜也니라호되 前實失不諮請 公百年後 誰可任大事者 輒還耳로이다
又請其次한대 亮曰 文偉可注+文偉, 費褘字.하니라 又問한대 不答注+亮不答繼褘之人, 非高帝此後亦非乃所知之意, 蓋亦見蜀之人士, 無足以繼褘者矣.하다
八月하니 長史楊儀 整軍而出이러니 百姓 奔告懿한대 懿追之어늘 姜維令儀 反旗鳴鼓하여 若將向懿者하니 懿不敢偪注+猶恐亮未死也.이라
於是 儀結陳而去하여 入谷然後發喪注+陳, 讀曰陣. 入谷, 入斜谷也.하다 策贈印綬하고 諡曰忠武라하다
百姓 爲之諺曰 死諸葛 走生仲達注+仲達, 懿字.이라하니 懿聞之하고 笑曰 吾能料生이요 不能料死故也라하니라
嘗推演兵法하여 作八陣圖注+武侯八陣圖凡三, 一在沔陽之高平舊壘, 一在廣都之八陣鄕, 一在魚腹永安宮南江灘水上. 其法六十四陣, 天衡十六陣居兩端, 地軸十二陣居中間, 天前衝四陣居右, 後衝四陣居左, 地前衝六陣居前, 後衝六陣居後, 風八陣附天, 雲八陣附地, 合爲八陣. 天衡倂前後衝二十四陣, 合風八陣, 爲三十二陽, 地軸倂前後衝二十四陣, 合雲八陣, 爲三十二陰. 遊兵二十四陣, 在六十四陣之後. 凡行軍, 結陣合戰, 設疑補闕, 全在遊兵. 天地之前衝, 爲虎翼風, 爲蛇蟠, 兵家先陰, 以右爲前, 又風從虎, 虎與蛇皆陰類, 同位西北也. 天地之後衝, 爲飛龍雲, 爲鳥翔, 兵家後陽, 以左爲後, 又雲從龍, 龍與鳥皆陽類, 同位東南也. 以天‧地‧風‧雲爲四正, 以龍‧虎‧鳥‧蛇爲四奇, 所謂八陣也. 每以二陣相從, 一陣之中, 又有兩陣, 一戰一守, 中外有輕重之權, 陰陽有剛柔之節, 彼此有虛實之地, 主客有先後之數.러니 至是하여 懿案行其營壘하고 嘆曰 天下奇才也로다 追至赤岸호되 不及而還注+水經注 “褒水西北出衙嶺山東南, 逕大石門, 歷故棧道下谷, 俗謂千梁無柱也.” 諸葛亮與兄瑾書曰 “前趙子龍退軍, 燒壞赤崖閣道緣谷一百餘里, 其閣梁一頭入山腹, 一頭立柱於水中, 今水大而急, 不得安柱.” 赤崖, 卽赤岸.하다
前軍師魏延 勇猛過人하고 善養士卒注+蜀置中軍師‧前軍師‧後軍師.이러니 每欲請兵萬人하여 與亮異道하여 會于潼關 如韓信故事注+韓信請兵故事 見高帝二年.로되
不許하니 常謂亮怯하여 不能盡用己才러라 爲人 幹敏하여 每出軍 儀規畫分部하고 籌度糧穀하여 咸取辦焉注+分, 扶問切. 度, 徒洛切.이러라
延性矜高하니 當時皆下之로되 唯儀不假借하니 以爲至忿注+不假借, 謂不以溫辭悅色禮下之也.이러니 深惜二人之才하여 不忍偏廢也러라
費褘使吳 吳主曰 楊儀, 魏延 牧豎小人이라 雖嘗有鳴吠之益이나 然已任之하니 勢不得輕이라
若一朝無諸葛亮이면 必爲禍亂하리니 諸君 憒憒하여 獨不知慮此乎注+憒, 古對切. 憒憒, 心亂也.
褘曰 儀, 延不協 起於私忿이요 而無黥, 韓難御之心注+黥‧韓, 黥布‧韓信也.하니 今方掃除彊賊하여 混一函夏
功以才成이요 業由才廣注+混一函夏, 猶言混一中原也. 函, 謂函谷關, 關之東爲中夏, 故曰函夏. 一說 “函, 容也. 夏, 大也. 言中原之地, 所函容者大也.”이라 若防其後患하여 舍而不用이면 是猶備風波而逆廢舟檝이니 非長計也注+檝, 與楫同.니이다
病篤 作退軍節度하여 令延斷後하고 姜維次之호되 延或不從이어든 軍卽自發注+亮固知延非儀所能令矣.하라하다
儀令費褘 往揣延意한대 延曰 丞相 雖亡이나 吾自見在注+此延矜高之語也. 見, 賢遍切.하니 府親官屬 便可將喪還葬注+府親官屬, 謂長史以下也.이요 吾自當率諸軍擊賊이니
云何以一人死라하여 廢天下之事邪리오 且魏延 何人이완대 當爲楊儀作斷後將乎
儀等 乃案亮成規하여 引還하니 果大怒하여 攙儀未發하여 率所領先歸하여 燒絶閣道注+攙, 初銜切, 自後爭前曰攙.하고
與儀相表叛逆하니 一日之中 羽檄交至 帝以問董允, 蔣琬한대 咸保儀而疑延이러라
儀等 槎山通道하여 晝夜兼行하여 亦繼延後注+槎, 仕下切, 邪斫木也.하니 據南谷口하여 逆擊儀等注+南谷, 卽褒谷也. 南谷曰褒, 北谷曰斜, 長四百七十里, 同爲一谷.이어늘
將軍何平 叱先登曰 公亡 身尙未寒하니 汝輩何敢乃爾注+何平, 卽王平也, 本養外家何氏, 後復姓王, 此從其初姓.오하니 士卒 知曲在延하고 皆散이라
逃奔漢中이어늘 儀遣將斬之하고 夷三族하다 始延 欲殺儀等호되 冀時論 以己代諸葛輔政故 不北降魏而南擊儀 實無反意也러라
表於帝曰 臣 成都 有桑八百株 薄田十五頃하니 子弟衣食 自有餘饒
不別治生하여 以長尺寸注+長, 知兩切.하오니 臣死之日 不使內有餘帛하고 外有贏財하여 以負陛下注+贏, 餘也.하노이다 至是하여 卒如其言하니라
長史張裔嘗稱亮曰 公 賞不遺遠하고 罰不阿近하며 爵不可以無功取 刑不可以貴勢免이니 此賢愚所以僉忘其身者也注+謂奮不顧身.라하니라
陳壽曰 亮 爲相國 撫百姓하고 示儀軌하며 約官職하고 從權制하며 開誠心하고 布公道注+儀, 度也. 軌, 法也.하여
盡忠益時者 雖讐 必賞하고 犯法怠慢者 雖親이나 必罰하고 服罪輸情者 雖重이나 必釋하고 遊辭巧飾者 雖輕이나 必戮하다
善無微而不賞하고 惡無纖而不貶하며 庶事精練하여 物理其本注+言事事物物必從其本而治之.하고 循名責實하여 虛僞不齒하여
終於邦域之內 畏而愛之하여 刑政雖峻而無怨者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 可謂識治之良才 管, 蕭之亞匹矣注+管‧蕭, 管仲‧蕭何也.로다
○初 長水校尉廖立 自謂才名 宜爲亮副라하여 怏怏怨謗注+廖, 力弔切, 姓也.이어늘 廢立爲民하여 徙之汶山注+汶, 音岷. 汶山, 本冉駹國, 漢武帝開置汶山郡, 三國系蜀.이러니
及亮薨 垂泣曰 吾終爲左衽矣로다 李平 聞之하고 亦發病死하니 常冀亮復收己하여 得自補復이러니 策後人不能故也注+策, 猶料度也.러라
習鑿齒曰 昔 管仲 奪伯氏騈邑三百호되 沒齒而無怨言하니 聖人 以爲難이라하시니라
使廖立垂泣하고 李嚴致死하니 豈徒無怨言而已哉리오 夫水至平而邪者取法하고 鑑至明而醜者亡怒 以其無私也
況大人君子 懷樂生之心하고 流矜恕之德하여 法行於不可不用하고 刑加乎自犯之罪하며 爵之而非私 誅之而不怒하니 天下有不服者乎
以吳懿爲車騎將軍하여 督漢中하고 蔣琬爲尙書令하여 總統國事하다
新喪元帥하여 遠近 危悚注+喪, 息浪切.이로되 拔處群僚之右하여 旣無戚容하고 又無喜色하여 神守擧止 有如平日하니 由是 衆望 漸服하니라
遣中郞將宗預使吳하다
吳人 聞諸葛亮卒하고 恐魏乘衰取蜀하여 增巴丘守兵萬人注+此巴丘, 卽巴陵也.하여 一欲以爲救援하고 二欲以事分割注+謂與魏分取蜀.하니
漢人 聞之하고 亦增兵永安하여 以備非常이러라 預至吳 吳主權 問之한대
對曰 東益巴丘之戍하고 西增白帝之守 皆事勢宜然이니 俱不足以相問也니이다 嘉其抗直하여 禮之亞於鄧芝러라
吳以諸葛恪爲丹陽太守하다
以丹陽山險하고 民多果勁이라하여 自求爲官出之호되 三年이면 可得甲士四萬注+爲, 去聲. 官, 謂國家也.이라한대
衆議以丹陽 地勢險阻하고 與吳郡, 會稽, 新都, 番陽四郡隣接하여 周旋數千里 山出銅鐵하여 自鑄甲兵하며
俗好武尙氣하여 仗兵野逸하며 時覩間隙하여 出爲寇盜하여 戰則蠭至하고 敗則鳥竄하니 自前世 所不能羈注+蠭, 螫人飛蟲也. 羈, 管束之意.라하여 皆以恪計爲難이러라
恪父瑾 聞之하고 亦嘆曰 恪 不大興吾家하고 將赤吾族也注+見誅殺者必流血, 故云赤族.로다
盛陳其必捷한대 吳主權 乃拜爲丹陽守하여 使行其策하다
冬十一月 魏洛陽 地震하다
◑吳潘濬 平武陵蠻하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중
蜀漢 後主 建興 12년(234)~蜀漢 後主 延熙 원년(238)
甲寅年(234)
】 8월에 나라가 나라 孝獻皇帝禪陵에 장례하였다.注+帝王紀≫에 말하였다. “禪陵濁鹿城 서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丞相 武鄕侯 諸葛亮이 군중에서 하니, 長史 楊儀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前軍師 魏延을 일으키자 양의가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諸葛亮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司馬懿가 출동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이에 머리 수건과 머리쓰개 등 부인의 복식을 보냈다.注+은 머리의 꾸임이다. 古百古外의 두 가지 이니, 婦人喪冠이다. 劉昭 를 근거해보면 公卿, 列侯婦人은 감색 비단의 을 사용하였으니, 이는 婦人의 머리 꾸밈의 칭호요 喪冠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의가 노하여 表文을 올려서 출전할 것을 청하자, 魏主 曹叡衛尉 辛毗로 하여금 을 가지고 軍師가 되어 제재하게 하였다.
姜維가 제갈량에게 이르기를 “이 다시는 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제갈량이 말하기를 “저 사마의가 원래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굳이 싸움을 청한 이유는, 자기 武勇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將帥가 군중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만일 능히 나를 제재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임금에게 출전할 것을 청하겠는가.” 하였다.
諸葛亮使者司馬懿軍中으로 보내니, 사마의는 제갈량의 자고 먹는 것과 일의 번거롭고 간략함을 묻고, 군대의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다.注+司馬懿가 두려워한 것은 諸葛亮이니, 그는 제갈량의 자고 먹는 것과 일의 번거롭고 간략함을 물어서 수명의 오래고 짧음을 엿본 것이다.
使者가 말하기를 “諸葛公은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笞罰 20대 이상의 안건을 모두 직접 살펴보고, 먹는 음식은 하루에 몇 되에 이르지 못합니다.”注+(먹다)은 또한 으로도 되어 있다. 옛날 되가 작았기 때문에 하루에 몇 되라고 한 것이다. 하니, 사마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孔明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찌 능히 오래 살겠는가.” 하였다.
諸葛亮이 병이 위독하자, 황제가 僕射 李福으로 하여금 병을 살펴보고 모시면서 인하여 큰 계책을 묻게 하였는데, 이복은 제갈량과 말을 마치자 작별하고 떠나갔다가注+는 끝남이니, 〈“語已別去”는〉 말을 끝내고 작별한 것이다. 며칠 뒤에 다시 돌아왔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내 그대가 돌아온 뜻을 알겠다. 이 묻고자 하는 것은 公琰(蔣琬)이 그 적임자이다.” 하였다. 이복이 사례하기를 “사실은 전에 의 100년 뒤(死後)에 누가 큰일을 맡을 만한 자인가를 놓치고 자문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 다음이 누구인지를 묻자, 제갈량이 말하기를 “文偉(費褘)가 하다.”注+文偉費褘의 자이다. 하였다. 또다시 묻자,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았다.注+諸葛亮費褘를 이을 사람을 대답하지 않은 것은, 라는 뜻이 아니요, 또한 蜀漢人士 중에 비위를 이을 만한 자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8월에 諸葛亮하자, 長史 楊儀가 군대를 정돈하여 출발하였는데, 백성들이 달려가 司馬懿에게 고하니, 사마의가 추격하였다. 姜維가 양의로 하여금 깃발을 되돌리고 북을 울려서 장차 사마의에게 향할 것처럼 하게 하니,注+〈“懿不敢偪”은〉 司馬懿諸葛亮이 아직 죽지 않았나 하여 두려워한 것이다. 사마의가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五丈原에 부는 가을바람五丈原에 부는 가을바람
이에 양의가 진영을 결집하여 떠나서 斜谷에 들어간 뒤에야 을 발표하였다.注+(진영)은 으로 읽는다. “入谷”은 斜谷으로 들어간 것이다. 後主策書를 내려 제갈량에게 추증한 印綬를 내리고 諡號忠武라 하였다.
】 백성들이 속담을 만들어 司馬懿를 놀리기를 “죽은 諸葛亮이 산 仲達(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注+仲達司馬懿이다 하니, 사마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가 살아 있는 것만 헤아리고 죽은 것은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제갈량이 일찍이 兵法을 부연해서 八陣圖를 만들었는데,注+武侯 諸葛亮
天地前衝虎翼風이 되고 蛇蟠이 되니, 兵家을 먼저하여 오른쪽을 앞으로 삼으며, 또 를 따르니 는 모두 의 종류여서 함께 서북쪽에 위치한다. 天地後衝飛龍雲이 되고 鳥翔이 되니, 兵家을 뒤로하여 왼쪽을 뒤로 삼으며 또 을 따르니 는 모두 의 종류여서 함께 동남쪽에 위치한다. , , , 四正으로 삼고 , , , 四奇로 삼으니, 이것이 이른바 八陣이다. 매번 두 끼리 서로 따르게 하고, 한 가운데 또 두 이 있어서 하나는 싸우고 하나는 수비함에 中外에는 輕重의 권세가 있고, 陰陽에는 剛柔節度가 있고, 彼此에는 虛實의 땅이 있고, 主客先後가 있다.
이때에 사마의가 그 陣營堡壘를 순행하여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에 기이한 재주이다.” 하였다. 사마의는 추격하여 赤岸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갔다.注+水經注≫에 “褒水는 서북쪽으로 衙嶺山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大石門을 지나 옛 棧道 아래 골짝을 지나가니 世俗에서는 千梁無柱(棧道의 가로댄 나무가 천 개인데 밑을 받쳐주는 기둥이 없다.)라고 칭한다.” 하였다. 諸葛亮이 형 諸葛瑾에게 준 편지에 “예전에 趙子龍이 군대를 후퇴시킬 적에 赤崖의 골짝에 붙어 있는 1백여 리의 閣道를 불태워 파괴하였는바, 閣梁(잔도의 橫木)의 한쪽 끝은 산 중앙으로 들어가고 한쪽 끝은 물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 강물이 크게 불어나고 급히 흘러서 기둥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赤崖는 바로 赤岸이다.
八陣圖八陣圖
】 처음에 前軍師 魏延이 보통 사람보다 용맹이 뛰어나고 士卒들을 잘 길렀는데,注+蜀漢中軍師前軍師, 後軍師를 설치하였다. 매번 만 명의 병력을 청해서 諸葛亮과 길을 달리하여 潼關에서 만나기를 韓信이 군대를 청한 故事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注+
제갈량이 허락하지 않으니, 위연은 항상 제갈량이 겁이 많아서 자신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楊儀는 사람됨이 일을 잘 처리하고 민첩하였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출정할 때마다 양의가 부서를 나누는 일을 계획하고 군량의 조달을 헤아려서, 모두 그에게서 결정을 취하였다.注+(나누다)은 扶問이다. (헤아리다)은 徒洛이다.
魏延은 성품이 교만하고 높은 체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몸을 낮추었으나 양의가 홀로 굽히지 않으니, 위연은 몹시 분하게 여겼다.注+不假借”는 따뜻한 말과 기뻐하는 얼굴빛으로 상대방을 예우하고 자신을 낮추지 않음을 이른다. 제갈량은 두 사람의 재주를 매우 아까워하여 차마 한 사람도 버리지 못하였다.
費褘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吳主 孫權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楊儀魏延은 목동과 같은 小人이다. 비록 일찍이 이 있었으나, 이미 그들에게 임무를 맡겼으니 형편상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만약 하루아침에 諸葛亮이 죽고 없으면 반드시 禍亂을 일으킬 것이니, 諸君들은 마음이 혼란하여 홀로 이것을 염려할 줄 모르는가.”注+古對이니, “憒憒”는 마음이 혼란한 것이다.
이에 비위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양의와 위연이 화합하지 못함은 사사로운 분노에서 나온 것이요, 처럼 제압하기 어려운 마음은 없습니다.注+, ”은 黥布韓信이다. 지금 막강한 (나라)을 깨끗이 청소하여 華夏(중화)를 통일해야 하니,
은 재주로 이루어지고 은 재주로 말미암아 넓혀지는 것입니다.注+混一函夏”는 混一中原이란 말과 같다. 函谷關을 이르니, 函谷關 동쪽은 中夏가 되므로 函夏라 한 것이다. 일설에 “은 용납함이요 는 큼이니, 中原의 지역은 포용하는 것이 큼을 말한다.” 하였다. 만약 그 후환을 방비하기 위하여 이들을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풍파를 대비하여 배와 노를 미리 버리는 것과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注+(노)은 과 같다.
諸葛亮은 병이 위독해지자, 군대를 후퇴할 節度를 만들어서 魏延으로 하여금 뒤를 차단하게 하고 姜維가 그 다음이 되게 하되, 위연이 혹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즉시 따로 출발하게 하였다.注+〈“延或不從 軍卽自發”은〉 諸葛亮魏延楊儀가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안 것이다.
제갈량이 하자 楊儀費褘로 하여금 위연에게 가서 그의 뜻을 헤아리게 하였는데, 위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丞相이 비록 별세하였으나 나는 현재 살아 있으니,注+〈“丞相雖亡 吾自見在”는〉 이는 魏延이 자랑하고 높은 체한 말이다. (현재)은 賢遍이다. 丞相府의 직속 관리들은 곧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례해야 할 것이요,注+府親官屬”은 〈丞相府의〉 長史 이하를 이른다. 나는 마땅히 諸軍들을 인솔하여 을 공격할 것이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 하여 天下의 일을 폐기하겠는가. 또 이 위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를 위해 뒤를 차단하는 장수가 되겠는가.”
楊儀 등이 마침내 諸葛亮이 정해놓은 규정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魏延이 과연 크게 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에 앞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 棧道를 불태워 끊었다.注+初銜이니, 뒤에서 앞을 다투는 것을 이라 한다.
양의와 위연이 서로 表文을 올려 상대방이 반역을 한다고 아뢰니, 하루 안에 두 檄文이 도착하였다. 황제가 이 일을 董允蔣琬에게 물으니,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하였다.
楊儀 등이 산에 나무를 베어 길을 통하여 밤낮으로 행군해서 속도를 倍加하여 魏延의 뒤를 바짝 뒤따르니,注+仕下이니, 나무를 비스듬하게 베는 것이다. 위연이 南谷의 어귀를 점거하고서 양의 등을 맞아 공격하였다.注+南谷은 바로 褒谷이다. 남쪽 골짝을 라 하고 북쪽 골짝을 라 하니, 길이가 470리인데 함께 한 골짝이 되었다.
將軍 何平이 먼저 南谷의 어귀로 올라간 병사들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諸葛公이 별세하시어 몸이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하는가.”注+何平은 바로 王平인데, 본래 외갓집인 何氏에게서 길러져 〈何氏라고 하다가〉 뒤에 王氏 을 회복하였는바, 여기서는 처음 을 따른 것이다. 하니, 士卒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이 도망하여 漢中으로 달아나자, 양의가 장수를 보내어 참수하고 위연의 三族을 멸하였다. 처음 魏延楊儀 등을 죽이고자 하였지만, 時論이 자기를 諸葛亮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좌할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북쪽으로 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양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실로 배반할 뜻은 없었다.
】 처음에 諸葛亮이 황제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成都에 뽕나무 800와 척박한 토지 15이 있으니, 자제들의 衣食이 자연 여유가 있습니다.
〈녹봉 이외에〉 별도로 생업을 다스려서 한 자와 한 치의 재산을 불리지 않았으니,注+(키우다)은 知兩이다. 이 죽는 날에 안에는 남은 비단이 있고 밖에는 남은 재물이 있어서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注+은 남음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끝내 그의 말과 같았다.
長史 張裔가 항상 諸葛亮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을 줄 때에는 소원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벌을 내릴 때에는 가까운 사람을 두둔하지 않았으며, 官爵이 없이 취할 수 없고 형벌은 귀하고 세력이 있다 하여 면할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모두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報國할 수 있었던 것이다.”注+〈“賢愚所以僉忘其身”은〉 사람들이 모두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음을 이른다.
陳壽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諸葛亮相國으로 있을 적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儀軌(법도)를 보였으며, 관직을 축소시키고 權道의 제도를 따랐으며, 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정한 를 펼쳤다.注+法度이고, 이다.
그리하여 충성을 다하고 세상에 유익한 자는 비록 원수라 해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죄를 자백하여 실정을 바치는 자는 비록 죄가 무겁더라도 반드시 풀어주었고, 말을 이리저리 돌려 공교하게 꾸미는 자는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반드시 죽였다.
은 아무리 작아도 상을 주지 않음이 없고 은 아무리 작아도 폄하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여러 일을 정밀하게 익혀서 사물마다 그 근본을 다스렸고,注+〈“物理其本”은〉 모든 事物이 반드시 그 根本을 따라 다스려짐을 말한 것이다. 명칭을 따라 실제를 책망하여 허위가 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나라 안에서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刑政이 비록 준엄하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의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면과 경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으로 정치하는 방도를 아는 훌륭한 재주요, 의 짝이라고 이를 만하다.”注+, ”는 管仲蕭何이다.
】 처음에 長水校尉 廖立이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마땅히 諸葛亮(다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怏怏하여 제갈량을 원망하고 비방하자,注+力弔이니, 이다. 제갈량이 요립을 폐출시켜 평민으로 삼아서 汶山(민산)으로 귀양 보냈다.注+은 음이 이니, 汶山은 본래 冉駹國(염방국)이었는데 나라 武帝가 개척하여 汶山郡을 설치하였는바, 三國時代 蜀漢에 속하였다.
제갈량이 하자, 요립은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나는 끝내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다. 李平 또한 제갈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이 나서 죽으니,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다시 자기를 등용하여 자신의 잘못을 補塡(보전)하여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後人들은 이렇게 하지 못할 줄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注+은 헤아림과 같다.
諸葛亮廖立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하고 李嚴으로 하여금 실망하여 죽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원망하는 말이 없었을 뿐이겠는가. 물이 지극히 평평한데 기울어진 자가 법을 취하고, 거울이 지극히 밝은데 추한 자가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大人君子가 남을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남을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는 을 펴서, 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행하고 형벌은 스스로 범한 죄에만 하며, 官爵을 내리되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고 誅罰을 가하되 노여워하는 감정으로 하지 않았으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吳懿車騎將軍으로 삼아 漢中을 감독하게 하고 蔣琬尙書令으로 삼아 國事總統하게 하였다.
】 이때에 蜀漢은 막 元帥를 잃어서 遠近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으나注+(잃다)은 息浪이다. 蔣琬이 여러 관료의 위로 발탁되어서 슬퍼하는 모습도 없고 또 기뻐하는 기색도 없어서 정신과 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으니, 이 때문에 衆望이 점점 복종하였다.
中郞將 宗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나라 사람들은 諸葛亮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라가 蜀漢의 허약한 틈을 타고 蜀漢을 점령할까 염려해서 巴丘에 수비병 만 명을 증가하여注+여기의 巴丘는 바로 巴陵이다. 첫 번째로는 蜀漢을 구원하고자 하고 두 번째로는 蜀漢 지역을 分割 점거하려고 하였다.注+〈“欲以事分割”은〉 나라와 함께 蜀漢을 분할 점령하고자 함을 이른다.
蜀漢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永安에 병력을 증가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宗預나라에 이르자, 이에 대해 吳主 孫權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쪽 나라가 파구의 수비병을 증가하고, 서쪽 蜀漢白帝城(영안)의 수비를 강화하는 것은 事勢에 당연한 것이니, 모두 따질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손권은 그의 말이 강직함을 가상히 여겨 그에 대한 예우를 鄧芝 다음으로 하였다.
나라가 諸葛恪丹陽太守로 삼았다.
諸葛恪丹陽이 험하고 백성들이 용감하고 강한 자가 많다 하여 스스로 (국가)을 위해 이곳의 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고는 “3년이면 甲士 4만 명을 얻을 수 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國家를 이른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의논하기를 “단양은 지세가 험하고 吳郡, 會稽, 新都, 番陽(파양) 네 과 인접하여 둘레가 수천 리이고, 산에서는 이 생산되어 스스로 갑옷과 병기를 주조하며,
풍속이 무용을 좋아하고 힘을 숭상하여 병기를 가지고 들에서 놀며, 수시로 틈을 보고 나와서 도적질을 한다. 그리하여 싸우게 되면 벌 떼처럼 몰려오고 하면 새처럼 숨으니, 前代로부터 단속하지 못한 바이다.”注+(벌)은 사람을 쏘는 나는 벌레이다. 管束하는 뜻이다. 하여 모두 제갈각의 계책을 어렵게 여겼다.
제갈각의 아버지 諸葛瑾도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제갈각이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고, 장차 우리 집안을 붉은 피로 물들이겠구나.”注+誅殺를 당한 는 반드시 피를 흘리므로 “赤族”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제갈각이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강력히 아뢰자, 吳主 孫權은 마침내 그를 丹陽太守로 임명하여 그 계책을 시행하게 하였다.
】 겨울 11월에 나라 洛陽地震이 있었다.
나라 潘濬武陵蠻을 평정하였다.


역주
역주1 魏葬漢孝獻皇帝于禪陵 : “魏나라가 장례했다고 쓴 것은 厚德함을 보존함을 인정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멸망한 나라의 군주를 장례했다고 쓴 것이 5번인데(山陽公과 晉나라의 陳留王, 宋나라의 晉 恭帝, 陳나라의 梁 孝元帝, 石晉(後晉)의 故唐主), 오직 晉 恭帝는 弑害를 당했는데 장례했다고 썼으므로 비난한 것이다.[書魏葬 予存厚也 終綱目 滅國之君書葬五(山陽公 晉陳留王 宋晉恭帝 陳梁孝元帝 石晉故唐主) 惟晉恭帝弑書葬 故譏之]” ≪書法≫
역주2 丞相武鄕侯諸葛亮……引軍還 : “무릇 ‘軍中에서 卒했다.’라고 쓴 것은 國事를 위해 죽은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官職과 爵位와 姓을 갖춰 쓴 것이다. ‘諸葛亮이 나가 漢中에 주둔하여 中原을 도모하였다.’라고 쓴 뒤로부터 이때까지 모두 5번 ‘魏나라를 정벌했다.’라고 썼는데, 첫 번째는 ‘街亭에서 싸워 敗績했다.’라고 썼고, 두 번째는 ‘陳倉을 포위하여 그 장수를 참수했다.’라고 썼고, 세 번째는 ‘武都와 陰平을 함락했다.’라고 썼고, 네 번째는 ‘司馬懿를 패퇴시키고 張郃을 죽였다.’라고 썼고, 여기에서는(이해 4월) ‘進軍했다’라고 쓰고 ‘屯田했다’라고 썼으니,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인데, 오직 가정에서 1번 패한 것은 馬謖의 죄이다. 제갈량은 막 양식을 풍족히 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군중에서 卒했다.’라고 썼다. ≪資治通鑑綱目≫에서 ‘군중에서 卒했다.’고 쓴 것이 8번인데, 丞相이라고 쓴 경우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丞相 武鄕侯 諸葛亮이 군중에서 卒했다.’라고 썼으니, 軍國의 애통함이 깊은바, 이는 ≪자치통감강목≫에서 매우 애석히 여긴 것이다. 이로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 諸臣이 卒했을 때에 관직과 작위를 갖춰 쓴 사람이 12명이다.(諸葛亮, 司馬孚, 司馬攸, 張軌, 溫嶠, 陶侃, 王導, 郗鑑, 何充, 謝安, 袁宏, 桓冲)[凡書卒于軍 嘉死事也 故具官爵姓 亮自書出屯漢中以圖中原 至是凡五書伐魏 一書戰街亭敗績 二書圍陳倉 斬其將 三書拔武都陰平 四書敗司馬懿 殺張郃 於是書進軍 書屯田 皆可紀也 唯街亭一敗 馬謖之罪耳 亮方爲足食計 而以卒于軍書矣 綱目書卒于軍八 未有以丞相書者 書丞相武鄕侯諸葛亮卒于軍 軍國之可痛深矣 此綱目所甚惜也 自是至晉諸臣卒 具官爵者十二人(諸葛亮 司馬孚 司馬攸 張軌 溫嶠 陶侃 王導 郗鑑 何充 謝安 袁宏 桓冲)]” ≪書法≫
“군대가 돌아왔다고 써도 되는데 楊儀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양의를 가상히 여긴 것이다. 이때에 막 元帥를 잃었는데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양의는 時宜에 맞게 대처했다고 이를 만하다.[書軍還 可矣 書楊儀 何 嘉儀也 於是新喪元帥 全軍而歸 儀可謂能權矣]” ≪書法≫
“아, 諸葛亮이 中原을 經略한 뒤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겨우 8년인데, ≪資治通鑑綱目≫에서 5번 魏나라를 정벌했다고 썼으니, 한 번은 街亭에서 싸웠고, 한 번은 成固에 주둔하였고, 한 번은 陳倉과 祁山을 포위하였고, 한 번은 武都와 陰平을 함락하였고, 한 번은 王雙을 참수하고 司馬懿을 패퇴시키고 張郃을 죽였으며, 이때에 군대를 동원함에 이르러는 渭水의 남쪽으로 進軍하고 군대를 나누어 屯田했다고 썼으니, 사마의가 비록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항거하여 지켰으나, 머리 수건과 머리쓰개 등 부인의 복식을 달게 받아서 형세가 이미 곤궁하고 위축되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마침내 죽음을 告하였으니, 하늘이 漢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功業이 성취되지 못한 것을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제갈량은 先主(劉備)로부터 孤(아들 劉禪)를 부탁하는 遺詔를 받을 때에 일찍이 股肱의 힘을 다하여 忠貞의 절개를 바치고 죽음으로써 잇겠다고 告하였고, 출병하면서 유선에게 表文(〈出師表〉)을 올림에 이르러는 또 몸을 굽히고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말하였으니, 지금 글을 살펴보면 그 말을 食言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군중에서 卒하였다.’라고 써서 王事를 위해 죽은 실제를 나타냈으니, 그가 역적을 토벌한 의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凜凜하여 여전히 生氣가 있다. 저 曹氏와 司馬氏 등이 고아를 속이고 과부를 무시하여 여우처럼 술수를 써서 남의 집안과 나라를 취한 것을 보면, 저들은 전혀 개돼지만도 못하니, 세상에 어찌 성패를 가지고 인물을 논하겠는가.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쓰고 여러 번 써서 표출하지 않았으면 孔明 또한 보통 사람과 같았을 것이니, 아! 슬프다.[嗚呼 亮自經略中原 至是首尾僅八載 綱目五書伐魏 一戰街亭 一次成固 一圍陳倉祁山 一拔武都陰平 一斬王雙 敗司馬懿 殺張郃 至於是擧 書進軍渭南 分兵屯田 懿雖引兵拒守 甘受巾幗婦人之服 勢已窮蹙 而亮乃告終 天不祚漢 使之功業不就 謂之何哉 然亮受遺託孤之際 蓋嘗以竭股肱之力 效忠貞之節 繼之以死爲告 至其出軍上表 又以鞠躬盡力死而後已爲言 由今觀之 可謂不食其言矣 書卒于軍 以見歿於王事之實 其討賊之義 死而不屈 至今凜凜 猶有生氣 其視曹馬輩欺孤弱寡 狐媚以取人家國者 曾犬彘之不若 世豈可以成敗論人物哉 不有綱目特書屢書 表而出之 則孔明亦若而人耳 噫]” ≪發明≫
역주3 補輿服志 : ≪輿服志≫는 ≪後漢書≫ 志의 하나로, 范曄이 ≪후한서≫를 저술할 적에 志 부분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뒤에 梁나라의 劉昭가 이것을 보충하였으므로 ≪補輿服志≫라 하며 유소는 또 여기에 註를 달았다. 유소는 高唐 사람으로 字가 宣卿이며 ≪후한서≫의 志에 註를 달았다.
역주4 高帝가……아니다 : 高帝는 劉邦으로 黥布를 토벌하러 갔다가 流矢를 맞고 병이 위독하였다. 呂后가 “陛下께서 돌아가신 뒤에 蕭相國(蕭何)이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고제는 “曹參이다.” 하였다. 그 다음을 묻자, 대답하기를 “王陵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우직하니, 陳平이 보좌할 수 있으며, 진평은 지혜는 충분하나 홀로 맡기기는 어렵다. 周勃이 중후하고 文雅가 적으나 우리 劉氏를 편안히 할 자는 필시 주발일 것이다.” 하였다. 여후가 또다시 그 다음을 묻자, 고제는 “이 뒤는 또한 그대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3권 중 漢 高祖 12년(B.C.195)에 보이는바, 고제가 “이 뒤는 또한 네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때가 되면 呂后 또한 죽어서 더 이상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때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천거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이다.
역주5 八陣圖는……있다 : 이 내용은 자세하지 않은 부분이 많음을 밝혀둔다.
역주6 韓信이……보인다 : 漢 高祖 2년(B.C.205)에 “韓信은 魏나라를 평정한 다음 사람을 漢王(高祖)에게 보내어 3만 명의 병력을 얻어 북쪽의 燕과 趙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齊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楚(項羽)의 군량수송을 차단하고서, 서쪽으로 漢王과 滎陽에서 만날 것을 청하니, 한왕이 이를 허락하였다.”라고 보이는데, 한신은 이 계획대로 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역주7 닭……유익함 : 하찮은 재주로 국가를 유익하게 함을 이른다. 戰國時代 齊나라 孟嘗君(田文)의 食客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고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었는데, 뒤에 맹상군이 秦나라에 들어가 곤궁했을 때에 이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는 개처럼 도둑질[狗盜]을 잘하는 것을 ‘개가 주인을 위해 짖는 것’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역주8 黥布와 韓信 : 모두 漢나라 高祖의 名將들인데, 뒤에 謀反을 하다가 처형되었다.
역주9 管仲과 蕭何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 桓公을 보좌하여 霸者가 되게 한 名相이고, 蕭何는 漢나라 高祖를 보좌하여 開國한 名相이다.
역주10 옛날……하셨다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명재상인바, 이름이 夷吾인데 字인 仲으로 행세하였다. 伯氏는 齊나라의 大夫이고 騈邑은 地名이며,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論語≫ 〈憲問〉에 “어떤 사람이 孔子에게 관중을 묻자,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伯氏의 騈邑 300戶를 빼앗았는데, 伯氏는 (食邑을 빼앗기고) 거친 밥을 먹었으나 죽을 때까지 관중을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人也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라고 하셨다.”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集註≫에 “齊나라 桓公이 백씨의 식읍을 빼앗아 관중에게 주니, 백씨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았고 진심으로 관중의 功에 복종하였으므로 곤궁하게 몸을 마치면서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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