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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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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年(215)
二十年이라 春正月 하다
操之女也
三月 魏公操擊張魯하다
◑夏五月 하다
◑劉備, 孫權 分荊州하여 備使關羽守江陵하고 權使魯肅屯陸口하다
劉備在荊州 周瑜, 甘寧等 數勸孫權取蜀한대 遣使謂備曰 劉璋 不武하여 不能自守하니
若使操得蜀이면 則荊州危矣 今欲先攻取璋하고 次取張魯하노니 一統南方이면 雖有十操 無所憂也니라
備報曰 益州 民富地險하니 劉璋 雖弱이나 足以自守 今曹操方欲觀兵吳會어늘 而同盟 無故自相攻伐하여 使承其隙 非長計也注+觀兵, 示威也.니라
不聽하고 遣孫瑜하여 率水軍住夏口어늘 備遏之不得過하고 謂曰 汝欲取蜀이면 吾當被髮入山하여 不失信於天下也注+言宗室被攻而不能救, 無面目以立於天下也.리라
不得已하여 召瑜還하다
及備攻璋 留關羽하여 守江陵하니 與魯肅으로 數生疑貳로되 常以歡好撫之러라
及備得益州 令諸葛瑾으로 從備求荊州한대 備曰 吾方圖涼州하니 涼州定이면 乃盡以荊州相與耳리라
權曰 此 假而不反하고 乃欲以虛辭引歲也注+謂延引歲時也.라하고 遂置長沙, 零陵, 桂陽長吏하니 羽逐之하다
遣呂蒙하여 取三郡이러니 惟零陵太守郝普不降이라 備自至公安하여 遣羽爭三郡하니
孫權 進住陸口注+水經 “江水左逕烏林南, 又東古岸得蒲磯口, 卽陸口也.”하고 使魯肅으로 將萬人하고 屯益陽하여 以招羽하고 召呂蒙하여 還助肅注+益陽縣, 屬長沙郡. 招羽, 通鑑, 作拒羽.하다
得書秘之하고 召諸將하여 授以方略하여 當攻零陵할새
而詐謂普故人鄧玄之曰 左將軍 在漢中 爲夏侯淵所圍하고 關羽在南郡 至尊 身自臨之하니
彼方首尾倒懸하여 救死不給이라 豈有餘力復營此哉 君可見之하고 爲陳禍福注+爲, 去聲.하라
玄之見普하고 具宣蒙意한대 普懼하여 出降이어늘 乃赴益陽하다
魯肅 邀羽相見하고 因責數羽하니 羽曰 烏林之役 左將軍 身在行間하여 戮力破敵注+卽謂赤壁之戰也. 行, 胡郞切.하니 豈得徒勞하여 無一塊土어늘 而足下來欲收地邪
肅曰 不然하다 始與豫州 覲於長坂注+覲, 見也.할새 豫州之衆 不當一校 計窮慮極하여 圖欲遠竄注+一校, 一部也. 圖欲遠竄, 謂欲投吳也. 上十三年, 魯肅迎備於當陽長坂, 宣權旨, 致殷勤之意, 且問備曰 “豫州今欲何至.” 備曰 “與蒼梧太守吳(臣)[巨]有舊, 欲往投之.” 肅曰 “今爲君計, 莫若遣腹心自結於東, 以共濟世業, 而欲投吳(臣)[巨], (臣)[巨]是凡人, 偏在遠郡, 行將爲人所倂, 豈足託乎.” 備甚悅.이러니
主上 矜愍豫州身無處所하여 不愛土地士民之力하여 以濟其患이어늘 而豫州私獨飾情하여 愆德墮好注+私獨, 謂私其一己之所獨也. 墮, 與隳同. 好, 交好也.
今已藉手西州하고 又欲翦幷荊土注+藉手西州, 謂得益州, 有以藉手也.하니 斯蓋凡夫所不忍行이어든 而況整領人物之主乎 羽無以答이러라
聞曹操將攻漢中하고 備乃求和於權하니 令諸葛瑾報命하고
遂分荊하여 以湘水爲界하여 長沙, 江夏, 桂陽以東 屬權하고 南郡, 零陵, 武陵以西 屬備注+班志 “湘水出零陵陽海山, 至酃入하다
每奉使至蜀 與其弟亮으로 但公會相見하고 退無私面이러라
秋七月 魏公操取漢中하여 走張魯하고 留將軍夏侯淵, 張郃하여 守之而還하다
操至陽平하니 張魯欲降호되 其弟衛不肯하여 率衆拒關堅守注+陽平, 關名, 在漢中郡褒中縣西北.하다
操以降人 多言張魯易攻이라 陽平城下南北山 相遠하여 不可守라하니 信以爲然이러니
至是身履하니 不如所聞이라 乃歎曰 他人商度 少如人意로다하고 攻陽平諸屯하니
山峻難登하여 士卒傷夷하고 軍食且盡이라 操意沮欲還이러라
前軍夜迷하여 誤入張衛別營하니 營中 大驚退散이어늘 操進兵攻之한대 衛等 夜遁하다
魯犇南山하여 入巴中注+胡三省曰 “今興元府, 古漢中之地也. 興元之南, 有大行路, 通於巴州, 其路險峻, 三日而達于山頂. 其絶高處, 謂之孤雲‧兩角, 去天一握. 孤雲‧兩角, 二山名也. 今巴州, 漢巴郡宕渠縣之北界也. 三巴之地, 此居其中, 謂之中巴. 巴之北境, 有米倉山, 下視興元, 實孔道也.”할새 左右欲悉燒寳貨倉庫어늘 魯曰 本欲歸命國家로되 而意未得達이러니
今避鋒銳 非有惡意하니 寳貨倉庫 國家之有라하고 遂封藏而去하다 操入南鄭하여 遣人慰喩之注+南鄭縣, 漢中郡治所.하다
主簿司馬懿 言於操曰 劉備以詐力虜劉璋 蜀人未附어늘 而遠爭江陵하니 此機 不可失也니이다
今克漢中하여 益州震動이라 進兵臨之하면 勢必瓦解하리이다 聖人 不能違時하고 亦不可失時也니이다
操曰 人苦無足이라 旣得隴하고 復望蜀邪注+此引光武語也, 在光武建武八年.
劉曄曰 劉備 人傑也로되 有度而遲하고 得蜀日淺하여 蜀人 未恃也 今破漢中 蜀人震恐하여 其勢自傾하리니 因而壓之하면 無不克也注+壓, 笮也, 臨迫之義.리이다
若小緩之하면 諸葛亮 明於治國而爲相하고 關羽, 張飛 勇冠三軍而爲將하니
蜀民 旣定 據險守要하면 則不可犯矣 今不取하면 必爲後憂하리이다 操不從이러라
居七日 蜀降者 說蜀一日數十驚하여 守將 雖斬之 而不能安也라하여늘
操問曄曰 今尙可擊不注+不, 讀曰否. 曄曰 今已小定하니 未可擊也注+七日之間, 何以遽謂之小定. 曄蓋窺覘備之守蜀有不可犯者. 故爲此言以對操焉耳.니이다 乃還하고 以夏侯淵으로 督張郃, 徐晃等하여 守漢中하다
八月 孫權 攻合肥러니 大敗而還하다
曹操之征張魯也 爲敎하여 與合肥護軍薛悌하고 署函邊曰 賊至乃發注+敎, 令也. 爲敎, 猶言作書. 署, 簽書也. 函, 匱也, 所以盛書者, 謂簽署於敎函之外邊云 “發啓函封也.”하라하다
及是하여 孫權 率衆十萬하고 圍合肥어늘 悌發函하니 敎曰 若孫權至者어든 張, 李將軍 出戰하고 樂將軍하고 護軍 勿得與戰注+時張遼‧李典‧樂進將七千餘人, 屯合肥, 操以遼‧典勇銳, 使之戰, 樂進持重, 使之守, 薛悌 文吏也, 使勿得與戰.하라하다
諸將 以衆寡不敵이라하여 疑之어늘 張遼曰 公 遠征在外하니 比救至 彼破我必矣
是以 敎指及其未合 逆擊之하여 折其盛勢하여 以安衆心이니 然後 可守也니라 樂進等 莫對하니 遼怒하여 將獨出이라
李典 素與遼不睦이러니 慨然曰 此 國家大事 顧君計何如耳 吾豈可以私憾而忘公義乎 請從君而出호리라
於是 夜募敢從之士하여 明旦 陷陣衝壘하여 入至麾下하니 大驚走하고 撤軍還할새 至逍遙津北注+水經註 “合肥東有逍遙津, 水上舊有梁.”하니 遼將步騎奄至注+奄, 忽也.
甘寧, 呂蒙 力戰扞敵하고 凌統 率親近하여 扶權出圍하여 乘駿馬하고 上津橋하니 橋南 已撤하여 丈餘無版이라
親近谷利 使權持鞍緩控하고 於後著鞭하여 遂得超度注+親近谷利, 通鑑作親近監谷利. 親近監, 官也. 谷利, 姓名. 江表傳 “谷利者, 本左右給使也, 以謹直爲親近監.” 控, 卽馬鞚.하다
賀齊率三千人하고 在津南이라가 迎接入船하다 齊涕泣하여 曰 至尊人主 常當持重이라 今日之事 群下震怖하여 若無天地하니 願以此爲終身之誡하소서
自前收其淚하고 曰 大慙이로라 謹已刻心하니 非但書紳也라하니라
冬十月 始置名號侯하여 以賞軍功注+魏書曰 “置名號爵十八級‧關中侯爵十七級, 皆金印‧紫綬. 又置關內外侯十六級, 銅印‧龜紐‧墨綬, 皆不食租.”하다
◑十一月 張魯出降이어늘 以爲鎭南將軍하고 하다
習鑿齒曰 閻圃諫魯勿王이어늘 而曹公 追封之하니 將來之人 孰不思順이리오 塞其本源而末流自止 其此之謂與인저
劉備遣兵하여 擊巴賨破之注+巴, 謂巴郡. 晉中興書云 “賨者, 廩君之苗裔, 巴氏子務相, 乘上船而浮, 衆異之, 立爲廩君, 子孫列巴中. 秦幷天下, 薄其稅賦, 巴人謂賦爲賨, 因名巴賨.”하다
張魯之走巴中也 黃權 言於劉備曰 若失漢中이면 則三巴不振하리니 此爲割蜀之股臂也注+三巴, 巴東‧巴西‧巴郡也.니이다 備乃使權迎魯러니
諸夷帥朴胡, 杜濩, 任約 已降於曹操하고 而魯亦降注+朴, 音浮. 朴胡, 姓名. 濩, 音戶. 杜濩, 亦姓名. 通鑑 “九月, 巴賨夷帥朴胡‧杜濩‧任約, 各擧其衆來附, 於是分巴郡, 以胡爲巴東太守, 濩爲巴西太守, 約爲巴郡太守, 皆封列侯.”이라 遂擊胡等破之하다
操遣張郃하여 徇三巴어늘 備使巴西太守張飛擊之하니 走還하다


乙未年(215)
나라 孝獻皇帝 建安 20년이다. 봄 정월에 貴人 曹氏를 세워 皇后로 삼았다.
曹氏曹操의 딸이다.
】 3월에 魏公 曹操張魯를 공격하였다.
】 여름 5월에 韓遂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劉備孫權荊州를 분할하여 유비는 關羽로 하여금 江陵을 지키게 하고 손권은 魯肅으로 하여금 陸口에 주둔하게 하였다.
】 처음에 劉備荊州에 있을 적에 周瑜甘寧 등이 여러 번 孫權에게 지방을 취할 것을 권하자, 손권이 使者를 보내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劉璋武勇이 없어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니,
만약 曹操가 촉 지방을 얻는다면 형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이제 먼저 유장을 공격하여 취하고 다음에 張魯를 취하고자 하니, 南方을 하나로 통합하면 비록 10명의 조조가 있더라도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에 유비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益州는 백성들이 부유하고 지형이 험고하니 유장이 비록 약하나 충분히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다. 또 지금 조조가 막 吳會(吳郡會稽郡)에서 군대의 위용을 보이고자 하니, 同盟(유장을 가리킴)끼리 연고 없이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조조로 하여금 그 틈을 타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注+觀兵”은 군대의 위용을 보이는 것이다.
孫權劉備의 말을 듣지 않고 孫瑜를 보내어 水軍을 거느리고 夏口에 주둔하게 하자, 유비가 손유를 막아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지방을 취하고자 하면, 내 응당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산중에 들어가서 천하 사람들에게 信義를 잃지 않겠다.”注+〈“吾當被髮入山 不失信於天下也”는〉 宗室(劉璋)이 공격을 당하는데도 구원하지 못하니, 천하에 설 면목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손권이 부득이하여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劉備劉璋을 공격하게 되자 關羽를 남겨두어 江陵을 지키게 하였는데, 관우는 魯肅을 의심하여 반목하는 마음을 자주 품었으나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유비가 益州를 점령하자, 孫權諸葛瑾으로 하여금 유비에게 가서 荊州의 반환을 요구하게 하니, 유비가 말하기를 “내 지금 막 涼州를 도모하고 있으니, 양주가 평정되면 형주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 하였다.
손권이 말하기를 “이는 땅을 빌려서 돌려주지 않고 도리어 빈말로 시간을 끌고자 하는 것이다.”注+〈“引歲”는〉 세월(시간)을 끌어 지연시킴을 이른다. 하고는 마침내 長沙零陵, 桂陽長吏를 배치하니, 관우가 이들을 축출하였다.
孫權呂蒙을 보내어 세 을 점령하게 하였는데, 오직 零陵太守 郝普(학보)가 항복하지 않았다. 劉備가 직접 公安에 가서 關羽를 보내어 세 군을 다투게 하니,
손권이 진군하여 陸口에 주둔하고注+水經≫에 “江水는 왼쪽으로 烏林의 남쪽을 경유하고 또 동쪽으로 옛 강안에 蒲磯口라는 곳이 있으니, 바로 陸口이다.” 하였다. 魯肅으로 하여금 1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益陽에 주둔하여 관우를 견제하게 하고 여몽을 불러 돌아와 노숙을 돕게 하였다.注+益陽縣長沙郡에 속하였다. “招羽”는 ≪資治通鑑≫에는 “拒羽”로 되어 있다.
여몽은 자신을 부르는 손권의 편지를 받은 다음 이를 숨기고는 밤중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方略을 전달하고서 새벽에 零陵을 공격할 적에,
학보의 친구인 鄧玄之에게 거짓으로 이르기를 “左將軍(劉備)은 漢中에서 夏侯淵에게 포위당하였고, 關羽는 현재 南郡에 있는데 至尊(孫權)께서 몸소 가서 토벌하신다.
저들은 머리와 꼬리가 거꾸로 매달려서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여력이 있어 다시 이곳(영릉)을 경영하겠는가. 그대는 가서 학보를 만나보고 그에게 禍福을 말하라.”注+(위해, 향해)는 去聲이다. 하였다.
등현지가 학보를 보고 여몽의 뜻을 자세히 말하자, 학보가 두려워하며 나와 항복하니, 여몽은 마침내 익양으로 달려갔다.
魯肅關羽를 불러 만나보고는 인하여 관우를 책망하자, 관우가 말하기를 “烏林의 전투에 左將軍(劉備)이 몸소 대오에 있으면서 힘써 적을 격파하였으니,注+〈“烏林之役”은〉 바로 赤壁大戰을 이른다. (항오)은 胡郞이다. 한갓 수고롭기만 하고서 한 덩이의 땅도 차지하지 못했는데, 어찌 足下가 와서 이 땅을 거두고자 하는가.” 하니,
노숙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처음 내가 劉豫州長坂에서 만났을 적에注+은 만나봄이다. 유예주의 병력은 한 부대도 감당하지 못하였다. 계책이 곤궁하고 생각이 다하여 멀리 도망하고자 하였는데,注+一校”는 한 부대이다. “圖欲遠竄”은 예전에 劉備吳巨에게 가서 의탁하고자 했던 일을 이른다. 위의 建安 13년(208)에 魯肅이 유비를 當陽長坂에서 맞이하여 孫權의 뜻을 말하고 간곡한 뜻을 전달하였으며, 또 유비에게 묻기를 “劉豫州가 지금 어디로 가고자 합니까?” 하니, 유비가 말하기를 “蒼梧太守 오거와 옛 친분이 있으므로 그에게 가서 의탁하고자 한다.” 하였다. 노숙이 말하기를 “지금 을 위하여 계획해보건대, 心腹을 보내어 동쪽 나라와 스스로 결탁해서 함께 세상의 大業을 이루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오거에게 의탁하고자 하시니, 오거는 범상한 사람으로 먼 에 홀로 치우쳐 있어서 장차 남에게 합병될 것입니다. 어찌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유비가 매우 기뻐했다.
主上(孫權)이 유예주가 몸 둘 곳이 없음을 가엽게 여기시어 토지와 병사와 백성들의 힘을 아끼지 않고서 그 환란을 구제하였다. 그런데 유예주는 사사로이 자기 한 몸을 위하여 실정을 꾸며서 은덕을 배반하고 우호를 파괴하였다.注+私獨”은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사사로이 도모함을 이른다. (파괴하다)는 와 같다. 는 우호이다.
이제 이미 西州(益州)를 얻는 데 도움을 받고도 또다시 荊州 땅을 겸병하고자 하니,注+藉手西州”는 益州를 얻는 데 도움을 받았음을 이른다. 이는 범상한 지아비도 차마 행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들을 통솔하는 군주이겠는가.” 이에 관우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였다.
】 마침 曹操가 장차 漢中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劉備가 마침내 孫權에게 화친을 청하니, 손권은 諸葛瑾으로 하여금 復命하게 하고,
마침내 荊州를 분할해서 湘水를 경계로 삼아 長沙, 江夏, 桂陽의 동쪽은 자신에게 소속시키고 南郡, 零陵, 武陵의 서쪽은 유비에게 소속하게 하였다.注+漢書≫ 〈地理志〉에 “湘水零陵 陽海山에서 발원하여 酃縣(영현)을 지나 長江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제갈근은 매번 使命을 받들고 에 갈 때마다 그의 아우 諸葛亮과는 다만 공식의 모임에서만 서로 만나보고, 물러나서는 사사로이 대면하는 일이 없었다.
】 가을 7월에 魏公 曹操漢中을 취하여 張魯를 패주시키고, 장군 夏侯淵張郃(장합)을 남겨두어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曹操가 漢中에서 張魯를 격파하다曹操가 漢中에서 張魯를 격파하다
曹操陽平에 이르자 張魯는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아우 張衛가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여 병력을 이끌고 관문을 막고서 굳게 수비하였다.注+陽平의 이름이니, 漢中郡 褒中縣 서북쪽에 있다.
】 처음에 張魯 측에서 항복해온 사람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장로는 공격하기가 쉽습니다. 陽平城 아래 南山北山이 거리가 서로 멀어 지킬 수 없습니다.” 하니, 曹操는 그들의 말을 믿고 참으로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때 자신이 직접 가서 보니, 들은 바와 같지 않았다. 조조는 이에 탄식하기를 “다른 사람의 헤아림은 자신의 생각과 같은 경우가 드물도다.” 하고는 양평의 여러 진영을 공격하였는데,
산이 험하여 오르기가 어려워서 사졸들은 부상을 당하고 군대의 양식은 장차 다 떨어지게 되었다. 조조는 의기가 저상되어 돌아가고자 하였다.
】 마침 前軍이 밤에 길을 잃어 張衛別營으로 잘못 들어가니, 장위의 진영이 크게 놀라 후퇴하여 흩어졌다. 曹操가 진군하여 공격하자, 장위 등이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張魯南山으로 달아나 巴中으로 들어갈 적에,注+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興元府는 옛날 漢中郡의 땅이다. 흥원의 남쪽에 큰길이 있어 巴州와 통하는데, 그 길이 매우 험준하여 3일이 지나야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곳을 孤雲兩角이라고 이르니, 하늘과의 거리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고운과 양각은 두 산의 이름이다. 지금의 파주는 나라 때 巴郡 宕渠縣의 북쪽 경계인데, 三巴의 지역 가운데 이곳이 그 중앙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곳을 中巴라 하며, 파주의 북쪽 경계에는 米倉山이 있는데 아래로 흥원을 내려다보니, 실로 큰길이다.” 좌우의 부하들이 寶貨와 창고를 모두 불태우고자 하였는데, 장로가 말하기를 “내 본래 조정에 귀의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지금 銳鋒을 피하는 것은 惡意가 있는 것이 아니니,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이다.” 하고는 마침내 봉함하고 떠나갔다. 조조는 南鄭에 들어간 뒤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를 위로하고 타일렀다.注+南鄭縣漢中郡治所가 있는 곳이다.
主簿司馬懿曹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劉備가 속임수와 무력으로 劉璋을 사로잡아서 지방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멀리 江陵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가 漢中을 점령하여 益州가 진동할 것이니, 진군하여 임하면 저들은 형세가 반드시 와해될 것입니다. 聖人은 때를 어기지도 않고 또한 때를 잃지도 않습니다.”
조조가 말하기를 “사람은 너무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미 땅을 얻고 다시 땅을 바란단 말인가.”注+〈“人苦無足……復望蜀邪”는〉 하였다.
劉曄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劉備人傑입니다. 그러나 도량은 있지만 행동이 더디며, 지방을 얻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촉 지방 사람들이 아직 믿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漢中을 격파함에 촉 지방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 형세가 저절로 기울 것이니, 이 틈을 타서 압박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注+은 압박함이니, 임하여 압박한다는 뜻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추면, 諸葛亮治國에 밝은데 정승이 되었고, 關羽張飛는 용맹이 三軍의 으뜸인데 장수가 되었으니,
촉 지방 백성들이 이미 안정된 뒤에 험한 지세를 믿고 要害處를 지키면 범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後患이 있을 것입니다.” 曹操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7일이 지난 뒤에 지방에서 항복해온 자들이 말하기를 “촉 지방은 병사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놀라서, 守將이 비록 동요하는 자들을 참수하나 안정시키지 못한다.” 하였다.
曹操劉曄에게 묻기를 “지금도 여전히 공격할 만한가?”注+로 읽는다. 하니, 유엽이 말하기를 “지금은 이미 다소 안정되었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注+〈“今已小定 未可擊也”는〉 7일이 지났을 뿐인데, 어찌 대번에 조금 안정되었다고 말하는가. 劉曄은 아마도 劉備 지방을 지킬 적에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음을 엿본 듯하다. 그러므로 이 말을 하여 曹操에게 대답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조조는 이에 돌아가고 夏侯淵으로 하여금 張郃徐晃 등을 거느리고서 漢中을 지키게 하였다.
】 8월에 孫權合肥를 공격하였는데, 대패하고 돌아갔다.
曹操張魯를 공격하러 갈 적에 봉함한 敎令을 만들어서 合肥護軍 薛悌에게 주고, 봉함한 글 한쪽에 쓰기를 “이 쳐들어오거든 뜯어보라.”注+는 교령이니, “爲敎”는 作書(글을 짓다, 편지를 쓰다)와 같다. 는 서명을 하는 것이다. 로 글을 넣는 상자이니, 〈“署函邊曰 賊至乃發”은〉 교령이 들어 있는 함의 밖에 서명하고 쓰기를 “봉함한 함을 열라.” 한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孫權이 1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합비를 포위하자 설제가 봉함을 뜯어보니, 교령에 “만약 손권이 쳐들어오거든 張將軍(張遼)과 李將軍(李典)은 나가서 싸우고, 樂將軍(樂進)은 수비하고, 護軍(薛悌)은 그들과 더불어 싸우지 말라.”注+이때 張遼李典樂進이 7천여 명을 거느리고 合肥에 주둔하였는데, 曹操는 장료와 이전은 용맹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악진은 신중하므로 그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고 薛悌文官이므로 더불어 싸우지 말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 여러 장수들이 衆寡不敵이라 하여 진격을 주저하자, 張遼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曹操)이 멀리 정벌하러 가서 밖에 계시니,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면 저들이 우리를 격파할 것이 틀림없다.
이 때문에 敎令에 저들이 모이기 전에 미리 공격해서 적의 강성한 기세를 꺾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니, 그런 뒤에야 지킬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樂進 등이 대답하지 않으니, 장료는 노하여 장차 홀로 출전하려 하였다.
李典은 평소 장료와 不和하였는데,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는 국가의 대사이니, 다만 그대의 계책이 어떠한지 돌아볼 뿐이다. 내 어찌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공적인 의리를 잊겠는가. 그대를 따라 출전하기를 청한다.” 하였다.
】 〈張遼가〉 이때에 밤중에 용감하게 따르는 병사를 모집해서 다음 날 아침 적진을 함락하고 적의 보루를 무너뜨리고서 孫權麾下에까지 이르렀다. 손권이 크게 놀라 달아나 撤軍하고 돌아갈 적에 逍遙津 북쪽에 이르렀다.注+水經註≫에 “合肥 동쪽에 逍遙津이 있는데, 물가에 원래 橋梁이 있었다.” 하였다. 장료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쳐들어왔다.注+은 갑자기이다.
張遼가 逍遙津에서 크게 싸우다張遼가 逍遙津에서 크게 싸우다
甘寧呂蒙은 힘써 싸워서 적을 막고, 凌統은 시종하는 사람을 거느리고 손권을 부축하여 포위망을 탈출해서 駿馬를 타고 의 다리에 올라와 보니, 다리의 남쪽 부분이 이미 철거되어서 한 길 남짓 판자가 없었다.
親近監 谷利가 손권으로 하여금 말안장을 잡되 고삐를 늦추게 하고는 뒤에서 채찍을 쳐서 말을 몰아 마침내 다리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注+親近 谷利는 ≪資治通鑑≫에는 親近監 谷利로 되어 있으니, 親近監은 관직이고 谷利는 사람의 성명이다. 에 “谷利는 본래 좌우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니, 신중하고 정직함으로써 친근감이 되었다.” 하였다. 은 바로 말고삐이다.
賀齊가 3천 명을 인솔하고 의 남쪽에 있다가 孫權을 영접하여 배에 올랐다. 하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至尊의 군주는 평상시에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의 일에 부하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天地가 없어진 것처럼 여기니, 원컨대 이 일을 終身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였다.
손권은 직접 앞으로 가서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하기를 “크게 부끄럽다. 내가 이미 삼가 명심하였으니, 하였다.
】 겨울 10월에 처음으로 名號侯(封號만 있고 食邑이 없는 )를 설치하여 軍功을 세운 자에게 상으로 주었다.注+三國志≫ 〈魏書 武帝에 “名號爵 18關中侯爵 17급을 두었는데 모두 金印에 붉은 인끈이고, 關內侯關外侯 16급을 두었는데 銅印龜紐(거북 모양 의 손잡이)이고 검은 인끈이니, 이들은 모두 식읍의 조세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 11월에 張魯가 나와 항복하므로 鎭南將軍으로 삼고, 그의 관속인 閻圃를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閻圃張魯에게 왕이 되지 말라고 간하였는데 曹公이 추후에 그를 봉하였으니, 장차 오려는 사람들 중에 누가 조공에게 귀순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本源을 막아서 末流가 저절로 그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
劉備가 군대를 보내어 巴賨(파종)을 격파하였다.注+巴郡을 이른다. 에 “廩君의 후손이니, 巴氏의 아들 務相이 배를 타고 강물을 떠다니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늠군으로 세우니, 자손들이 巴中에 나열되었다. 나라가 천하를 합병하자 세금을 적게 부과하니, 파중 사람들이 賦稅이라 하므로 인하여 巴賨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張魯巴中으로 달아날 적에 黃權劉備에게 말하기를 “만약 漢中을 잃으면 三巴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지역의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注+三巴巴東, 巴西, 巴郡이다. 하니, 유비가 마침내 황권으로 하여금 장로를 맞이하게 하였다.
마침 여러 오랑캐들의 우두머리인 朴胡(부호), 杜濩(두호), 任約이 이미 曹操에게 항복하였고, 장로 또한 항복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朴胡는 사람의 성명이다. 는 음이 이니, 杜濩 또한 사람의 성명이다. ≪資治通鑑≫에는 “9월에 巴賨의 오랑캐의 우두머리인 朴胡, 杜濩, 任約이 각각 그 무리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歸順하니, 이에 巴郡을 나누어 부호를 巴東太守로, 두호를 巴西太守로, 임약을 巴郡太守로 삼고는 모두 列侯에 봉했다.” 하였다. 황권은 마침내 부호 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조조가 張郃을 보내어 삼파 지역을 경략하게 하자, 유비가 巴西太守 張飛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니, 장합이 패주하여 돌아갔다.


역주
역주1 立貴人曹氏爲皇后 : “일찍이 ‘大將軍 霍光의 딸을 세워 皇后로 삼았다.’고 썼고, 또 ‘安漢公 王莽의 딸을 세워 황후로 삼았다.’고 썼는데, 여기에서 魏公 曹操의 딸을 세웠다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명령이 황제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령이 황제로부터 나온 것은 어째서인가. 伏皇后가 시해되자 황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조의 딸을 세워 황후로 삼아서 황제가 장차 조조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였으니, 또한 매우 슬퍼할 만하지 않은가.[嘗書立大將軍光女爲皇后矣 又書立安漢公莽女爲皇后矣 此其不書立魏公操女 何 命自上出也 其自上出 何 伏后之弑 帝蓋凜凜矣 於是立其女爲皇后 帝將求以自媚於操也 不亦可悲甚哉]” ≪書法≫
역주2 韓遂爲其下所殺 : “‘남에게 살해당하였다[爲所殺]’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죽임을 당한 이유가 남에게 있지 않고 〈자신이 자기 몸을 잘 保衛하지 못함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爲所殺’이라고 쓴 것이 11번이다.[爲所殺 何 譏不在人也 終綱目 書爲所殺者十一]” ≪書法≫
역주3 (臣)[巨] : 저본에는 ‘臣’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巨’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4 (汀)[江] : 저본에는 ‘汀’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江’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이는……있다 : 建武 8년(32)에 光武帝가 上邽를 출발하여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쪽으로 달려갈 적에 岑彭 등에게 글을 내리기를 “隗囂(외효)의 두 城이 만약 함락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蜀의 오랑캐(公孫述)를 공격하리라. 사람은 너무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미 隴(외효)을 평정하고 또다시 蜀(공손술)을 바라는구나. 한 번 군대를 일으킬 때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다.[兩城若下 便可將兵 南擊蜀虜 人苦不知足 旣平隴 復望蜀 每一發兵 頭須爲白]” 하였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상 漢 光武帝 建武 8년(32))
역주6 江表傳 : 西晉 사람 虞溥가 撰한 책으로 산실되었는데, ≪三國志≫ 裴松之 注에 일부가 보인다. 양자강 이남인 江表를 묘사한 작품이다.
역주7 단지……아니다 : 원문의 “書紳”은 중요한 말을 잊지 않도록 허리에 맨 실띠에 적어두는 것으로, ≪論語≫ 〈衛靈公〉에 “子張이 道가 행해짐을 묻자, 孔子께서 ‘말이 忠信하고 행실이 篤敬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행해질 수 있지만, 말이 충신하지 못하고 행실이 독경하지 못하면 〈자신이 사는〉 州里라도 행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니, 자장이 〈이 말씀을〉 띠에 썼다.[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子張 書諸紳]”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주8 封其屬閻圃爲列侯 : “閻圃를 어찌하여 봉하였는가. 張魯에게 왕이 되지 말라고 간하였기 때문이다. 賞罰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를 쓴 것은 曹操를 좋게 여긴 것인가. 위에서는 ‘閻圃를 봉했다.’라고 쓰고 아래에서는 ‘魏公 曹操가 작위를 올려 왕이 되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조조를 좋게 여긴 것이 아니고, 조조가 이로써 사람들을 속였다고 여겼을 뿐이다.[閻圃何以封 諫魯毋王也 賞罰不類久矣 書此 其善操與 上書封閻圃 下書魏公操進爵爲王 則非善操也 以是爲欺而已矣]” ≪書法≫
역주9 習鑿齒 : 晉나라의 史學家로 字가 彦威인데 桓溫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뒤에 환온이 배반할 마음을 품자, ≪漢晉春秋≫를 지으면서 蜀漢에 正統을 주어 은밀히 諫하는 뜻을 붙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역주10 晉中興書 : 南朝 宋나라의 史學家인 何法盛인 편찬한 紀傳體 史書로 모두 78권이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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