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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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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年(256)
十九年이라
魏甘露元年注+蓋以甘露降而改元也.이요 吳太平元年이라
春正月 以姜維爲大將軍하다.
◑夏四月 魏司馬昭 始服袞冕赤舄注+九錫之漸也.하다
◑魏主髦視學하다
魏主髦 宴群臣於東堂하고 與諸儒 論夏少康 漢高祖優劣하여 以少康爲優注+魏主謂 “少康生於滅亡之後, 降爲諸侯之隷, 能布其德而兆其謀, 卒滅過‧戈, 克復禹績, 祀夏配天, 不失舊物, 非至德弘仁, 豈濟斯勳. 漢祖因土崩之勢, 杖一時之權, 專任智力以成功業, 行事動靜多違聖檢, 爲人子則數危其親, 爲人君則囚繫賢相, 爲人父則不能衛子, 身沒之後, 社稷幾傾者, 與少康易時而處, 或未能復大禹之績也.”하고
至是하여 幸太學하여 與諸儒 論書易及禮하니 諸儒莫能及注+時魏主與博士淳于俊論易, 庾峻論書, 馬照論禮記.이러라
常與中護軍司馬望侍中王沈散騎常侍裴秀 及鍾會等으로 講宴於東堂하여 特加禮異注+秀, 潛之子也.러라
魏主性急하여 請召欲速하니 以望職在外 特給追鋒車虎賁五人注+望爲中護軍, 其職在外. 傅子曰 “追鋒車, 施通幰, 遽則乘之, 令虎賁五人舁之也.” 晉志曰 “追鋒車, 去小平蓋, 加通幰, 如軺車, 駕二馬. 追鋒之名, 取其迅速也. 施於戎陳之間, 是爲傳乘.”하여 每有集會 輒馳而至하더라 孚之子也
姜維自狄道 還駐鍾提注+鍾提, 當在羌中, 蜀之州界也.하니 魏人以其力竭 未能更出한대
安西將軍鄧艾曰 彼有乘勝之勢로되 我有虛弱之實 一也 彼上下相習이로되 我將易兵新 二也注+將, 卽亮切. 將易, 艾自謂初代王經也. 兵新, 謂遣還洮西敗卒, 更差軍守也.
彼以船行하되 我以陸軍 三也注+言蜀船自涪戍‧白水, 可以上沮水, 由沮水入武都下辨, 自此而西北, 水路漸峻陿, 小舟猶可入也, 魏軍度隴而西, 皆陸行. 狄道隴西南安祁山 各當有守 彼專爲一하되 我分爲四 四也
彼從南安으로 因食羌穀하고 若趣祁山하면 熟麥千頃 五也注+趣, 嚮也. 賊有黠計하니 其來必矣리라
維復出祁山하여 聞艾有備하고 乃回趣南安이어늘 艾與戰於段谷하여 大破之하니 死者甚衆이라 蜀人由是怨維注+杜佑曰 “秦州上邽縣有段谷水.”하더라
◑吳大司馬呂岱하다
始岱親近徐原하니 慷慨有才志 岱賜以巾褠하고 與共言論注+巾, 首服也. 褠, 古侯切, 單衣也. 漢‧魏以來, 士庶以爲禮服.이러니 後遂薦拔하여 官至侍御史하니
原好直言하여 岱有得失 輒諫諍하고 又公論之注+公然於衆中, 論其得失.어늘 或以告岱한대 岱嘆曰 是我所以貴德淵者也注+德淵, 原字.
及原死 哭之甚哀曰 德淵 岱之益友러니 今不幸하니 岱復於何所聞過乎하니 年九十六이러라
吳車騎將軍呂據 在江都注+江都縣. 屬廣陵郡.하여 聞孫綝輔政하고 大怒하여 表薦滕胤爲丞相하니 更以胤爲大司馬하여 出駐武昌이러니
未行 據引兵還하여 約胤廢綝하니 遣從兄憲將兵逆據하고 而使人趣胤行하니
胤懼하여 勒兵自衛어늘 綝表胤反하고 發兵攻圍之하니
勸胤曰 引兵至蒼龍門하면 將士必委綝就公矣注+蒼龍門, 吳建業宮之東門也. 委, 棄也.리라 時夜已半이라
恃與據期하고 又難擧兵向宮이러니 比曉注+比, 近也. 據不至하니 綝兵 大會하여 殺胤夷三族하니
勸據奔魏한대 據曰 吾恥爲叛臣이라하고 遂自殺注+據父範, 佐孫策以造吳, 故恥爲叛臣, 自殺以明節.하다
魏以盧毓爲司空하다
魏以盧毓爲司空하니 毓固讓司隷校尉王祥한대 詔不許注+祥, 漢諫議大夫吉之後也.하다 祥至孝하니 繼母朱氏 遇之無道로되 祥愈恭謹이라
朱氏子覽 年數歲 每見祥被箠하고 輒涕泣抱持母하고 母以非理使祥 覽輒與俱러니
及長娶妻 母虐使祥妻 覽妻亦趨之하니 母爲少止注+爲, 去聲.러라
祥漸有時譽하니 母深疾之하여 密使酖祥이러니 覽徑起取酒어늘 祥不與하니 母奪而反之注+反, 孚袁切, 覆也.하다
母賜祥饌 覽輒先嘗하니 母懼遂止하다 漢末遭亂하여 隱居三十餘年 不應州郡之命하고
母終 毁瘁하여 杖而後起注+母終, 母之壽終也. 瘁, 病勞也.러라 徐州刺史呂虔 檄爲別駕하여 委以州事하니 政化大行이라
時人 歌之曰 海沂之康 實頼王祥이요 邦國不空 別駕之功注+徐州之地, 東際海, 西北距泗‧沂, 故曰海沂.이라하더라
吳孫綝 殺將軍王惇하다
綝負貴倨傲하여 多行無禮하니 惇與峻從弟憲으로 謀殺之러니 事泄皆死하다


丙子年(256)
[] 나라(蜀漢) 後主 延熙 19년이다.
[] 魏主 曹髦 甘露 원년이고,注+甘露가 내려서 甘露改元한 것이다. 吳主 孫亮 太平 원년이다.
[] 봄 정월에 姜維大將軍으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나라 司馬昭가 처음으로 袞龍袍冕旒冠과 붉은 신을 착용하였다.注+九錫을 내려줄 조짐이다.
袞冕袞冕
赤舄赤舄
[] 魏主 曹髦太學을 시찰하였다.
[] 예전에 魏主 曹髦東堂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여러 선비들과 함께 나라 少康나라 高祖優劣을 논하여 소강을 우수하다고 하였다.注+魏主가 이르기를 “ 예전의 문물(국가)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지극한 덕과 큰 이 아니면 어떻게 이 공로를 이루었겠는가.
高祖는 땅이 꺼져가는 형세를 이용하여 한 시대의 권력을 잡고, 지혜와 무력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功業을 이루었고, 일과 거동이 성인의 법도에 많이 어긋나서, 소강과 시대를 바꾸어 처했다면 大禹의 공적을 능히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太學에 행차하여 여러 儒生들과 ≪書經≫‧≪易經≫‧≪禮記≫를 강론하니, 여러 유생들 가운데 조모를 따라갈 수 있는 자가 없었다.注+이때 魏主博士 淳于俊과 ≪易經≫을 강론하고, 庾峻(유준)과 ≪書經≫을 강론하고, 馬照와 ≪禮記≫를 강론하였다.
항상 中護軍 司馬望侍中 王沈散騎常侍 裴秀鍾會 등과 東堂에서 강론하며 연회를 하여 특별히 예우를 더해주었다.注+裴秀裴潛의 아들이다.
魏主는 성질이 조급하여 소집할 때에 빨리 오기를 원하였는데, 사마망이 직책상 궁전 밖에 있기 때문에 특별히 追鋒車虎賁(호위병) 5인을 주어注+司馬望中護軍이 되어 그의 직임이 궁전 밖에 있었다. 에 이르기를 “追鋒車는 전체를 휘장으로 덮었으니, 긴급하면 타는데 虎賁 5인에게 들도록 하였다.”라고 하였고, ≪晉書≫ 〈輿服志〉에 이르기를 “追鋒車는 작은 평평한 덮개를 떼어내고 전체를 휘장으로 덮어서 軺車와 비슷한데 두 마리 말에 멍에 메운다. 追鋒이라는 이름은 신속함을 취한 것이다. 軍陣에서 사용하니, 傳乘(兵車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즉시 달려오게 하였다. 사마망은 司馬孚의 아들이다.
[] 가을 7월에 姜維나라를 정벌하여 나라 장군 鄧艾와 전투를 치러 크게 패배하였다.
[] 姜維狄道에서 鍾提로 돌아와 주둔하니,注+鍾提는 마땅히 羌中에 있으니 蜀漢涼州 경계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의 힘이 고갈되어 다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安西將軍 鄧艾가 말하였다. “저들은 승리를 틈타는 기세가 있으나 우리들은 허약한 실상이 있으니 저들이 쳐들어올 첫 번째 이유이다. 저들은 위아래 사람들끼리 서로 잘 알지만 우리들은 장군이 바뀌고 병사들이 새로 왔으니, 저들이 쳐들어올 두 번째 이유이다.注+(장수)은 卽亮이다. “將易”은 鄧艾 자신이 생각하기를 막 王經의 후임으로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兵新”은 洮西에서 패배한 군졸들을 돌려보내고 군인들을 다시 파견하여 지킨 것을 이른다.
저들은 배로 행군하지만 우리들은 육지로 행군하니, 저들이 쳐들어올 세 번째 이유이다.注+〈“彼以船行 我以陸軍”은〉 蜀漢의 배가 涪戍(涪城)와 白水로부터 沮水로 올라갈 수 있고, 저수를 경유하여 武都郡 下辨縣으로 들어가고, 이곳으로부터 서북쪽으로 가면 水路가 점점 험준하고 좁아지지만 작은 배가 여전히 들어갈 수 있으나, 나라 군사는 隴山을 지나 서쪽으로 가는 데 모두 육지로 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狄道隴西南安祁山에 각각 수비가 있어야 하는데, 저들은 오로지 하나가 되지만 우리들은 네 곳으로 나누어 있어야 하니 저들이 쳐들어올 네 번째 이유이다.
저들은 南安으로부터 그대로 羌族의 곡식을 먹고 만약 祁山으로 향하면 익은 보리 1천 이 있게 되니 저들이 쳐들어올 다섯 번째 이유이다.注+는 향한다는 뜻이다. 적들은 교활한 계책이 있으니 적들은 반드시 침략해올 것이다.”
가을에 강유가 다시 祁山으로 진격하면서 등애가 대비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려서 남안으로 향하였는데, 등애가 강유와 段谷에서 싸워서 크게 격파하니,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蜀漢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강유를 원망하였다.注+杜佑가 말하기를 “秦州 上邽縣段谷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鄧艾가 段谷에서 姜維를 격파하다鄧艾가 段谷에서 姜維를 격파하다
[] 8월에 나라 司馬昭가 스스로 大都督이 되고 일을 아뢸 때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黃鉞을 주었다.
[] 나라 孫峻하니 그의 從弟 孫綝(손침)을 侍中으로 삼아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다.
[] 나라 大司馬 呂岱하였다.
[] 예전에 呂岱徐原을 친근히 여겼는데, 그는 慷慨한 데다 재주와 뜻이 있었다. 여대가 두건과 홑옷을 주고 그와 함께 담론을 하였는데,注+首服(두건)이다. 古侯이니, 單衣(홑겹 옷)이다. 〈“巾褠”는〉 이래로 와 서민들의 禮服이 되었다. 뒤에는 마침내 서원을 추천하여 관직이 侍御史에 이르렀다.
서원은 直言하기를 좋아하여 여대의 잘잘못에 즉시 諫諍을 하고 또 공공연하게 논의하였다.注+공공연히 많은 사람 안에서 그 잘잘못을 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를 여대에게 고하였는데, 여대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德淵(서원)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注+德淵徐原이다.라고 하였다.
서원이 죽자 통곡을 매우 슬프게 하면서 말하기를 “덕연은 나의 유익한 친구였다. 지금 불행하게 죽으니 여대가 다시 누구에게서 과실을 들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여대가 하니, 향년이 96세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 孫綝大司馬 滕胤將軍 呂據를 죽였다.
[] 나라 車騎將軍 呂據江都에 있으면서注+江都縣廣陵郡에 속하였다. 孫綝이 정사를 보좌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표문을 올려 滕胤丞相으로 추천하니, 손침이 다시 등윤을 大司馬로 삼아서 武昌에 나가 머물게 하였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적에 여거가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등윤과 함께 손침을 제거하자고 약속하였다. 손침이 그의 從兄 孫憲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서 여거를 대응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 등윤을 재촉하여 〈武昌으로〉 가게 하였다.
등윤이 두려워하여 병사를 정돈하여 자신을 호위하였는데 손침이 표문을 올려 등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고는, 병사를 출동하여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어떤 사람이 등윤에게 권하기를 “병사를 이끌고 蒼龍門으로 가면 將士들이 반드시 손침을 버리고 을 따를 것입니다.”注+蒼龍門나라 建業宮東門이다. 는 버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나고 있었다.
등윤은 여거와 약속한 것을 믿고 또 병사를 동원하여 궁궐로 향하는 것도 어렵게 여겼는데, 새벽이 가까워지도록注+는 가깝다는 뜻이다. 여거는 오지 않았다. 손침의 병사들이 많이 모여서 등윤을 죽이고 그 三族을 멸하였다.
어떤 사람이 여거에게 나라로 망명하도록 권하니, 여거가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되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注+呂據의 아버지 呂範孫策을 도와서 나라를 창업하였으므로 나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살함으로써 절개를 밝힌 것이다.
[] 나라가 盧毓司空으로 삼았다.
[] 나라가 盧毓司空으로 삼았다. 노육이 司隷校尉 王祥에게 굳이 사양하였는데 조칙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注+王祥나라 諫議大夫 王吉의 후손이다. 왕상은 지극히 효도하였는데, 繼母 朱氏無道하게 대하였으나 왕상은 더욱 공손하며 삼갔다.
朱氏의 아들 王覽이 두세 살 때부터 왕상이 늘 매 맞는 것을 볼 때마다 울면서 어머니를 꽉 껴안았고, 계모가 왕상에게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킬 적마다 왕람이 그와 함께하였다.
자라서 아내를 맞이했을 때에 계모가 왕상의 아내를 학대해서 부리면 왕람의 아내 역시 따라가서 하니, 계모가 이 때문에 조금 누그러졌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왕상이 점점 당시에 명예를 얻게 되니 계모가 더욱 미워하여 몰래 왕상에게 독주를 마시게 하였다. 왕람이 곧바로 일어나서 독주가 든 잔을 잡았는데 왕상이 주지 않자 계모가 빼앗아 엎어버렸다.注+孚袁이니, 뒤엎는다는 뜻이다.
王覽이 형 王祥과 독주 마시기를 다투다王覽이 형 王祥과 독주 마시기를 다투다
그 뒤에 계모가 왕상에게 음식을 줄 적마다 왕람이 먼저 먹어보니 계모가 겁을 내어 마침내 그쳤다. 나라 말기에 난리를 만나서 은거한 지 30여 년에 州郡辟召에 응하지 않았고,
계모가 죽었을 때에는 상을 치르느라 초췌해져서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섰다.注+母終”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는 병들어 피로하다는 뜻이다. 徐州刺史 呂虔檄文으로 불러 別駕를 삼아 徐州의 일을 맡기니 정치 교화가 크게 시행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서주의 편안함은 실로 왕상에게 의지하고, 邦國(서주)이 텅 비지 않은 것은 별가의 공이로다.”注+徐州 땅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고 서북으로 泗水沂水에 닿으므로 海沂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 나라 孫綝將軍 王惇을 죽였다.
[] 孫綝이 귀함을 믿고 거만하여 무례한 짓을 많이 행하였다. 王惇孫峻從弟 孫憲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고 도모하였는데 사건이 누설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
역주1 少康이……하고 : 少康은 夏나라의 6대 왕이다. 3대 왕 太康이 정사를 돌보지 않자, 有窮氏의 임금 羿(예)가 왕위를 빼앗아 태강의 동생 仲康을 세웠다가 중강이 죽자 그의 아들 相을 쫓아내고 자신이 夏나라 왕이 되었다. 그러나 羿도 寒浞에게 정사를 맡기고 사냥을 다녔다. 한착은 羿를 살해하고, 相도 죽였다. 相의 아내는 임신 중에 본가가 있는 仍氏 부락으로 도망가서 少康을 낳았다. 소강이 성장한 후 한착이 잡으러 오자, 舜임금의 후예들이 사는 虞氏 부락으로 도망을 쳤다. 소강은 우씨들의 도움으로 한착을 물리치고 왕권을 되찾았다. 소강이 집정한 후에 나라가 안정되고 국력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니, 역사상 이를 ‘少康中興’이라고 한다. “卒滅過戈”는 ≪春秋左氏傳≫ 襄公 4년에 “少康이 澆(한착의 아들)를 過國에서 죽이고, 后杼(소강의 아들)가 豷(한착의 아들)를 戈國에서 죽였다.[少康滅澆(요)于過, 后杼滅豷(희)于戈]”라고 하여, 소강과 그의 아들 杼가 過國과 戈國에서 한착의 아들들을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2 아들의……되었으니 : 劉邦이 項羽와 싸울 적에 항우가 유방의 부친인 太公(劉執嘉)과 아내인 呂后를 포로로 잡아 죽이려고 하자, 유방은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던 일을 들어 “나의 부친은 바로 너의 부친이니, 기필코 너의 부친을 삶아 죽이려고 한다면 나에게도 고깃국 한 그릇을 나눠 주면 좋겠다.[吾翁則若翁 必欲烹而翁 則幸分我一杯羹]”라고 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돌보지 않았고, 휘하의 최고 공신으로 재상인 周勃과 蕭何 등이 수감된 적이 있으며, 태자 劉盈을 바꾸려고 하다가 商山四皓의 힘으로 무사하게 되었으며, 戚夫人 소생의 아들 趙王(劉如意)이 呂后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아들들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했다.(≪漢書≫ 〈高祖本紀〉)
역주3 傅子 : 晉나라 傅玄(217~278)이 지은 책이다.
역주4 姜維伐魏……敗績 : “鄧艾가 강유를 패배시켰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蜀漢을 존중한 것이다.[不書鄧艾敗之 尊漢也]” ≪書法≫
역주5 (京)[涼] : 저본에는 ‘京’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魏司馬昭……假黃鉞 : “曹操를 본받았으나 과감함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일을 아뢸 때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과 賛禮 때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일을 아뢸 때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한 번 기록했을 뿐이다. 黃鉞을 준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黃鉞을 준 것을 기록한 것이 일곱 번이고, 黃鉞을 기록한 것이 네 번이다.(晉 惠帝 永熙 원년(290)에 자세하다.)[效操而未盡敢者也 然奏事不名 與賛拜不名 則有間矣 終綱目 奏事不名 一書而已 書假黃鉞始此 終綱目 書假黃鉞七 黃鉞四(詳晉惠帝永熙元年)]” ≪書法≫
역주7 吳孫峻……輔政 : “孫峻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손준을 죄준 것이다. 吳나라 신하가 卒했을 적에 관직을 기록하지 않은 자가 없는데, 오직 呂蒙과 손준만 기록하지 않았으니 폄삭한 것이다.[孫峻何 罪峻也 吳臣卒 無不書官者 惟呂蒙孫峻不書 削之也]” ≪書法≫
역주8 吳孫綝……將軍呂據 : “滕胤과 呂據는 역시 孫儀와 같은 무리일 뿐이니, 무엇 때문에 기록하였는가. 孫綝은 국가 역적이니, 孫峻에 비할 바가 아니므로, ‘殺’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손침을 죄준 것이다.[胤據亦孫儀耳 則何以書 綝國賊 非峻比也 故書殺 罪之]” ≪書法≫ 본서 124쪽 역주 27) ≪서법≫에 손준을 죽이려 한 손의를 綱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삭제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의 등윤과 여거도 손침을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였으므로 삭제해도 되는데 기록한 이유를 밝힌 것이다.
역주9 (其)[共]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共’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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