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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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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6권 중
蜀漢 後主 景耀 5년(262)~晉 武帝 泰始 6년(270)
壬午年(262)
五年이라
魏景元三年이요 吳永安五年이라
秋八月 吳立子𩅦하여 爲太子注+𩅦, 烏關切. 據吳志 “吳主休爲四子作名字, 𩅦音湖水灣澳之灣.” 非先有此音也.하다
◑冬十月 하다
維將出軍할새 車騎將軍廖化曰 兵不戢하면 必自焚 伯約之謂也注+左傳 “魯衆仲曰 ‘兵, 猶火也. 不戢, 將自焚.’” 伯約, 維字.로다
智不出敵而力少於寇어늘 用之無厭하니 何以自存注+謂較智則不出於敵人之上, 而較力則又弱少 이리오 維遂伐魏하여 攻洮陽注+洮陽, 洮水之陽也. 洮水之陰, 魏不置郡縣, 維渡洮而攻之也.이어늘 鄧艾與戰於侯和하여 破之注+水經註 “洮水逕洮陽城, 又東逕共和山南, 城在四山中, 又東逕迷和城北.” 意侯和卽此地也.하다
黃皓用事하여 與右大將軍閻宇親善이라 欲廢維樹宇어늘 維知之하고 言於帝曰 皓姦巧專恣하니 將敗國家 請殺之하노이다
帝曰 皓 趨走小臣耳 往董允 毎切齒어늘 吾常恨之러니 君何足介意
維見皓枝附葉連하고 遜辭而出이어늘 帝勅皓詣維陳謝하니 維由是疑懼注+此維未出洮陽以前事也.하여 返自洮陽하여 因求種麥沓中하고 不敢歸成都注+沓中, 在諸羌中, 卽沙漒之地.하다
吳以濮陽興爲丞相하다
吳主休在會稽 興爲太守하여 遇之厚하고 而張布嘗爲左右督將이러니 及卽位 二人皆貴寵用事하니
布典宮省하고 興關軍國하여 以佞巧 更相表裏하니 吳人失望이러라
休喜讀書하여 欲與祭酒韋昭博士盛沖으로 講論이러니 布以昭沖切直으로 恐入侍言己過하여 固諫止之하니
休曰 孤欲與昭等으로 講習舊聞 亦何所損 君特恐其道臣下姦慝이라 故不欲令入耳
如此之事 孤已自備之하니 不須昭等然後 解也 布惶恐陳謝하고 且言懼妨政事라한대
休曰 王務學業 其流各異하되 不相妨也注+王務, 猶言王事也.니라 然休恐布疑懼하여 卒廢講業하고 不使昭等入하다
魏司馬昭 殺中散大夫嵇康注+嵇, 姓也.하다.
康文辭壯麗하고 好言老莊而尙奇任俠하여 與阮籍籍兄子咸山濤向秀王戎劉伶으로 相友善하여 號竹林七賢注+阮, 姓也.하니
皆崇尙虛無하고 輕蔑禮法하여 縱酒昏酣하고 遺落世事러라
籍爲步兵校尉러니 其母卒 方與人圍棋러니 對者求止한대 籍留與決賭注+與決勝負也.하고
旣而飮酒二斗하고 擧聲一號 吐血數升하고 毁瘠骨立하나 居喪飮酒 無異平日注+骨立者, 言其瘠甚, 身肉俱消, 唯骨立也.이러라
司隷何曾 面質籍於司馬昭座曰注+曾, 夔之子也. 質, 正也. 面以正義責之也. 縱情背禮敗俗之人이니 不可長也注+長, 知兩切.라하고
因謂昭曰 公方以孝治天下로되 而聽籍以重哀 飮酒食肉於公座하니 何以訓人이리오
宜擯之四裔하여 無令汚染華夏라한대 昭愛籍才하여 常擁護之注+昭之讓九錫也, 籍爲公卿爲勸進牋, 辭甚淸壯, 故昭愛其才.러라
素幸姑婢러니 姑將婢去 咸方對客이라가 遽借客馬追之하여 累騎而還注+累, 重也. 兩人共馬, 謂之累騎.이러라
尤嗜酒하여 常乘鹿車하여 攜一壺酒하고 使人荷鍤隨之曰 死便埋我注+鹿車, 言其小僅可容鹿也. 荷, 上聲, 負也.라하니
當時士大夫 皆以爲賢하여 爭慕效之하여 謂之放達注+放達, 謂以玄虛宏放爲夷達也. 一說“放達謂放誕豁達也.”이러라
鍾會聞康名造之한대而鍛하고 不爲之禮注+踞, 通作倨. 鍛, 都玩切, 小冶也. 之而已, 不消, 故曰小冶. 康性巧而好鍛.러니
會將去 康曰 何所聞而來라가 何所見而去 會曰 聞所聞而來라가 見所見而去라하고 遂深銜之하다
濤爲吏部郞 擧康自代注+魏尙書郞有二十三員, 吏部其一也.한대 康與濤書하여 自說不堪流俗하고 而非薄湯武하니 昭聞而怒之注+湯‧武革命, 而康非薄之, 故昭聞而怒.러라
康與東平呂安으로 親善이러니 安兄巽 誣安不孝어늘 康爲證其不然注+爲, 去聲.한대
會因譖호되 康甞欲助毌丘儉注+言儉反, 而康欲助之.하고 與安皆有盛名於世하되 而言論放蕩하여 害時亂敎하니 宜因此除之라하니
昭遂殺安及康하다 康甞詣隠者孫登한대 登曰 子才多識寡하니 難乎免於今之世矣라하더라
魏以鍾會都督關中軍事하다
魏司馬昭 患姜維數北伐이러니 官騎路遺 求爲刺客入蜀注+官騎, 騶騎也. 路遺, 姓名也.이어늘
從事中郞荀勖曰注+從事中郞, 大將軍屬官. 勖, 爽之曾孫也. 明公爲天下宰하여 宜仗正義以伐違貳로되 而以刺客除賊 非所以刑于四海也注+ 離也, 背也. 貳, 攜貳也, 兩屬也.로다
昭善之하여 遂欲大擧伐漢한대 朝臣多以爲不可로되 獨鍾會勸之어늘
昭諭衆曰 自定壽春已來 息役六年 治兵繕甲하여 以擬二虜注+擬, 度也, 議也. 揣度而待也.러니 今吳地廣大而下濕하니 攻之用力差難이라
不如先定巴蜀하고 三年之後 因順流之勢하여 水陸竝進이니 此滅虢取虞之勢也注+春秋, 晉獻公滅虢, 因以滅虞, 此言滅蜀乘勢可以滅吳也.
計蜀戰士九萬 居守成都及備他境 不下四萬이니 然則餘衆不過五萬이라
今絆姜維於沓中하여 使不得東顧注+繫足曰絆.하고 直指駱谷하여 出其空虛之地하여 以襲漢中하면
以劉禪之闇而邊城外破하고 士女內震하리니 其亡可知也
乃以會爲鎭西將軍하여 督關中하니 鄧艾以蜀未有釁으로 屢陳異議어늘 昭使人諭之한대 艾乃奉命하다
姜維表호되 遣左右車騎張翼廖化督諸軍하고 分護陽安關口及陰平之橋頭하여 以防未然注+時, 翼爲左車騎將軍, 化爲右車騎將軍. 陽安關口, 意卽陽平關也. 杜佑曰 “陰平橋頭在文州界.”이라한대
黃皓信巫鬼하여 謂敵終不自致라하여 啓帝寢其事하니 群臣莫知注+致, 至也, 又詣也, 送也.하더라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6권 중
蜀漢 後主 景耀 5년(262)~ 武帝 泰始 6년(270)
壬午年(262)
[] 나라(蜀漢) 後主 景耀 5년이다.
[] 나라 元帝 曹奐 景元 3년이고, 나라 景帝 孫休 永安 5년이다.
[] 가을 8월에 나라가 皇子 𩅦(손완)을 세워서 太子로 삼았다.注+𩅦은 烏關이다. ≪三國志≫ 〈吳書 三嗣主傳〉에 의하면 “吳主 孫休는 네 아들의 이름자를 지었는데, 𩅦의 湖水의 물굽이라고 할 때의 이다.”라 하였으니, 이전에는 이 음이 없었다.
[] 겨울 10월에 姜維나라 洮陽을 정벌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다.
[] 예전에 姜維가 군대를 출동하려 할 적에 車騎將軍 廖化가 말하였다. “전쟁을 멈추지 아니하면 반드시 자신을 불태워 자멸한다는 것은 바로 伯約(강유)을 말하는 것이다.注+春秋左氏傳隱公 4년에 “나라 大夫 衆仲이 말하였다. ‘戰爭은 불과 같으니, 그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태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伯約姜維이다.
智謀는 적보다 출중하지 못하고 힘은 적보다 약한데 이를 사용함에 만족함이 없으니 어떻게 자신을 보존하겠는가.”注+〈“智不出敵而力少於寇”는〉 智謀를 비교하면 보다 뛰어나지 않고 힘을 비교하면 더욱 약소함을 말한 것이다. (편안하다)은 於鹽이다. 강유가 마침내 나라를 정벌해서 洮陽을 공격하였는데注+洮陽”은 洮水의 북쪽이다. 洮水의 남쪽은 나라에서 郡縣을 설치하지 않아서 姜維洮水를 건너 공격한 것이다. 鄧艾가 그들과 侯和에서 싸워 격파했다.注+水經註≫에 “洮水洮陽城을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가서 共和山 남쪽을 지나는데 성곽이 사방 산 안에 있고 또다시 동으로 가서 迷和城 북쪽을 지난다.”라고 하였으니, 侯和는 곧 이 지역을 의미한다.
[] 이때에 黃皓가 권력을 잡아 右大將軍 閻宇와 친하게 지냈다. 〈황호가〉 姜維를 폐하여 염우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강유가 이를 알고 後主에게 말하기를 “황호는 간교하고 방자하여 장차 국가를 패망하게 할 것이니 그를 죽이십시오.”라고 하니,
황제(後主)가 말하기를 “황호는 잔일하는 낮은 신하일 뿐이다. 과거에 내가 늘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대가 어찌 개의할 만한 존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강유는 황호가 나무줄기에 가지와 잎이 붙은 것처럼 황제와 긴밀한 관계임을 알아차리고 말을 겸손히 하고 나왔다. 황제가 황호에게 칙서를 내려 강유를 찾아가 사과하게 하니, 강유는 이로 말미암아 의구심이 들어서注+이것은 姜維가 아직 洮陽으로 출병하기 이전의 일이다. 스스로 洮陽으로 되돌아가서 이어서 沓中 지역에 보리를 심기를 청하고 감히 成都로 돌아오지 못하였다.注+沓中은 여러 羌族 가운데에 있으니 곧 沙漒 지역이다.
[] 나라가 濮陽興丞相으로 삼았다.
[] 濮陽興會稽太守로 있으면서 손휴를 후하게 대우하였고, 일찍이 張布가 〈손휴의〉 左右督將이 되었었는데, 손휴가 즉위하자 두 사람은 모두 신분이 높아지고 총애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포가 궁정의 일을 관장하였고 복양흥은 軍國의 일을 관계하였는데 아첨하고 간사한 짓을 하여 서로 표리를 이루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 孫休는 독서를 좋아하여 祭酒 韋昭博士 盛沖과 강론하려고 하였는데 張布는 위소와 성충이 강직함으로 入侍할 적에 자기 허물을 말할 것이 두려워 굳이 諫言하여 제지하였다.
손휴가 말하기를 “내가 위소 등과 함께 옛날의 典籍과 전해진 말을 강론하여 익히고자 하는 것이 또한 무슨 손해될 것이 있겠는가. 그대는 다만 위소 등이 신하들의 간특함을 말할까 두려워하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내가 이미 본래 대비하고 있으니, 위소 등의 말을 듣기를 기다린 뒤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장포가 황공하여 사죄하고 또한 그들의 정사에 방해가 될까 우려된다고 말하니,
손휴가 말하기를 “국가 일과 학업은 그 흐름이 각기 다르지만 서로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注+王務”는 王事(국가 일)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손휴는 장포가 의구심을 품을까 걱정되어 결국 강론하는 학업을 폐하고 위소 등을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 나라 司馬昭中散大夫 嵇康(혜강)을 죽였다.注+이다.
嵇康嵇康
[] 嵇康은 문장과 언사가 뛰어나고 老子莊子에 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며 기이한 행동을 숭상하고 의협심이 강해서 阮籍, 완적의 조카 阮咸, 山濤, 向秀(상수), 王戎, 劉伶과 함께 벗하며 잘 지내면서 竹林七賢이라 불렀다.注+이다.
모두가 虛無를 숭상하고 禮法을 경멸하여, 술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해서 세상일을 잊어버렸다.
완적은 步兵校尉가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한창 어떤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대국하는 자가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완적이 만류하면서 승패를 결정지었다.注+〈“與決賭”는〉 함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윽고 술 두 말을 마시고 소리를 질러 한 번 통곡을 하자 피를 몇 되나 토하고 비쩍 말라서 뼈를 세워놓은 것 같았으나 居喪 중에도 술을 마시는 것이 평일과 다르지 않았다.注+骨立”은 심히 수척하여 몸의 살이 모두 사라져 오직 뼈만 서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司馬昭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司隷校尉 何曾阮籍의 면전에 대고 꾸짖기를注+何曾何夔의 아들이다. 은 질정한다는 뜻이니, 〈“面質”은〉 얼굴을 맞대고 정의로 꾸짖는 것이다.은 감정대로 행동하고 예법을 어겨서 풍속을 파괴하는 사람이니 나쁜 풍조를 助長해서는 안 된다.”注+(조장하다)은 知兩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사마소에게 말하기를 “께서는 바야흐로 로 천하를 다스리시는데 완적이 服喪 중에도 이 있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을 내버려두시니, 공께서 무엇으로 다른 사람을 훈계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를 사방 오랑캐들의 지역으로 물리쳐서 華夏 지역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으나, 사마소는 완적의 재주를 아껴서 늘 그를 옹호하였다.注+司馬昭九錫을 사양할 적에 阮籍公卿들을 위하여 勸進牋(나아가기를 청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언사가 심히 청아하고 장중하였으므로 사마소가 그의 재주를 아꼈다.
[] 阮咸은 본래 고모의 여종을 총애했는데 고모가 여종을 데리고 가버렸다. 완함이 한창 손님과 응대하고 있다가 급히 손님이 타고 온 말을 빌려 타고 쫓아가서 여종을 말에 태우고 돌아왔다.注+는 포갠다는 뜻이니,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타는 것을 “累騎”라 말한다.
[] 劉伶은 술을 매우 좋아해서 평상시 鹿車를 타고서 술 한 동이를 가지고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며 말하기를 “죽게 되면 바로 나를 묻어라.”注+鹿車”는 수레가 작아서 겨우 사슴 한 마리 정도 실을 만한 것을 말한다. (메다)는 上聲이니, 등에 진다는 뜻이다.라고 하니,
당시 사대부들이 모두 그를 賢明하다고 여겨 다투어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그를 放達하다고 하였다.注+放達”은 玄虛하고 호방함을 曠達이라 함을 이른다. 一說에 “放達은 방탕하고 허탄하며 활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鍾會嵇康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찾아갔는데 혜강이 다리를 뻗고 앉아서 쇠를 두들기며 그에게 예를 차리지 않았다.注+와 통용한다. (단련하다)은 都玩이니 小冶(가볍게 망치질하는 것)이다. 망치질할 뿐이고 녹이지 않으므로 小冶라고 한다. 嵇康은 성격이 정교해서 쇠를 단련하기를 좋아했다.
종회가 돌아가려 하자 혜강이 말하기를 “무엇을 듣고서 왔다가 무엇을 보고 돌아가는가?”라고 하니, 종회가 말하기를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본 것을 보고 간다.”라고 하고, 결국 이로 인하여 종회는 매우 앙심을 품게 되었다.
山濤吏部郞이 되어서 자신의 후임으로 혜강을 천거하였는데注+나라는 尙書郞이 23명이 있는데 吏部郞이 그 1명이다. 혜강이 산도에게 편지를 보내서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을 세속적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고, 湯王이나 武王도 비루하게 생각한다.”라고 하니, 사마소는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다.注+商湯 武王革命을 하였는데, 嵇康이 비루하게 여겼으므로 司馬昭가 이를 듣고서 성을 낸 것이다.
[] 嵇康東平 사람 呂安과 잘 지냈는데, 呂安의 형 呂巽이, 여안이 불효한다고 무고하자, 혜강이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였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鍾會가 이어서 참소하기를 “혜강이 일찍이 毌丘儉을 돕고자 하였고,注+〈“康甞欲助毌丘儉”은〉 毌丘儉叛亂을 일으켰을 때 嵇康이 돕고자 한 것을 말한다.呂安과 함께 모두 세상에 성대한 명성이 있는데 말하는 것이 방탕하여 時俗을 해치며 교화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司馬昭가 마침내 여안과 혜강을 죽였다. 혜강이 일찍이 隠者孫登을 방문하였는데 손등이 말하기를 “그대는 재주는 많으나 견식이 적으니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鍾會都督關中軍事로 삼았다.
[] 나라 司馬昭姜維가 자주 북쪽을 침략하는 것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官騎 路遺가 자객이 되어서 蜀漢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注+官騎이다. 路遺姓名이다.
從事中郞 荀勖이 말하기를注+從事中郞大將軍의 속관이다. 荀勖荀爽曾孫子이다.明公께서는 천하를 주재하고 계시면서 마땅히 정의에 입각하여 반역한 자들을 정벌하셔야 하는데 자객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은 四海에 본받도록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注+는 떠나가고, 배반한다는 뜻이다. 는 두 마음을 품고 양쪽에 소속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司馬昭가 이 말이 옳다고 하며 마침내 크게 출동하여 蜀漢을 정벌하려고 하자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鍾會만이 이를 권하였다.
사마소가 여러 사람들에게 諭示하기를 “ 그동안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정비하여 〈나라와 蜀漢〉 양쪽 오랑캐를 대비해왔다.注+는 헤아리고 의논한다는 뜻이니, 헤아려 상대하는 것이다. 지금 나라는 땅이 광대하면서 낮고 습하니 그들을 공격하면 힘을 쓰기가 좀 어렵다.
巴蜀 지방을 먼저 평정하고 3년 후에 를 이용하여 水陸으로 함께 전진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나라를 멸하고 나라를 빼앗는 형세이다.注+ 이것은 蜀漢을 멸하고 그 勝勢를 타서 나라를 멸할 수 있다는 말이다. ​​​
蜀漢戰士를 헤아려보면 9만 명인데 成都 지역에 수비하거나 다른 경계 지역을 대비하는 숫자가 4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나머지 무리는 5만 명에 불과하다.
지금 姜維沓中에 묶어놓아 동쪽을 돌아볼 수 없게 하고注+다리를 묶는 것을 이라고 한다. 곧바로 駱谷을 향하여 나아가 그 빈 곳으로 나가서 漢中을 습격한다면
劉禪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변경의 성들이 밖에서 격파를 당하고 남녀 백성들이 안에서 동요할 것이니, 망할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종회를 鎭西將軍으로 삼고 關中 지역을 감독하게 하니, 鄧艾蜀漢이 아직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고 누차 다른 의견을 펼쳤는데, 사마소가 사람을 보내서 유시하자 등애가 마침내 명령을 받들었다.
[] 姜維가 표문을 올리기를 “左車騎將軍 張翼右車騎將軍 廖化를 파견하여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陽安關口陰平橋頭를 나누어 보호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注+이때 張翼左車騎將軍이었고, 廖化右車騎將軍이었다. 陽安關口는 생각건대 陽平關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陰平橋頭文州의 경계에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黃皓鬼神과 무당의 말을 믿어 적군이 끝내 스스로 이르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황제(後主)에게 아뢰고 그 일을 묵살하니 여러 신하들 중에는 아는 자가 없었다.注+는 이른다는 뜻이고, 또 나아간다는 뜻이고 보낸다는 뜻이다.


역주
역주1 姜維伐魏洮陽 不克 : “諸葛亮이 魏나라를 정벌할 때에 6번 정벌에 여섯 번 그 관직을 기록하였다. 姜維도 여기에서 여섯 번 정벌하였으나 모두 관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강유를 죄준 것이다.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자주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진실로 허여할 수 없는 것이다.[亮之伐魏也 六伐六書其官 維於是亦六伐矣 皆不書官 何 罪維也 不量力而數勦民 綱目固不得而予之]” ≪書法≫
“姜維가 누차 魏나라를 정벌하여 한 치를 전진함에 한 자를 후퇴를 하는데도 전쟁을 그치지 않았다. 당시에 지식이 있는 人士로 예컨대 譙周, 廖化 등이 모두 근심을 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그것을 기록하고서 애초에 깎아내린 말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쟁은 원수와 같은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니, 진실로 탐하고 분노하는 사욕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국가 역적을 놓아두고 문책하지 않는다면 비록 구차히 편안하게 되더라도 오히려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이 점을 분명히 헤아리면 ≪春秋≫에서 乾時(齊나라 땅)의 전쟁에서 〈魯나라가〉 비록 패하였으나 영광스럽게 여겼으니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姜維屢擧伐魏 進寸退尺 而用兵不已 當時智識之士 如譙周廖化輩 皆爲之隱憂 然綱目書之 初無貶詞 何也 用兵以討讐賊 固非貪忿私慾之擧 若置國賊而不問 雖可苟安 猶爲深恥 明乎此 則知春秋乾(간)時之戰 雖敗猶榮 而討賊之義 無一日而可忘矣]” ≪發明≫ “春秋乾時之戰 雖敗猶榮”은 ≪春秋≫ 莊公 9년에 “8월 경신일에 魯나라 군대가 齊나라 군대와 乾時에서 전투를 하여 我軍이 大敗하였다.[八月庚申 及齊師戰于乾時 我師敗績]”라고 하였는데, 이때 齊나라는 無知가 齊 襄公을 시해하여 齊나라 公子들이 망명했다가 小白이 이미 귀국하여 임금으로 정해졌는데도 魯 莊公은 군대를 출동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하다가 마침내 大敗하여 돌아왔다. 魯나라가 乾時 전쟁에는 패배하였지만, 임금을 시해한 자를 토벌했다는 명분을 세운 것을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역주2 (出)[也] : 저본에는 ‘出’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也’로 바로잡았다.
역주3 厭 於鹽切 : 平聲으로 ‘편안하다[安]’의 뜻인데, 본서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고 ≪資治通鑑新注≫(陝西人民出版社, 1998)의 ‘만족하다[滿足]’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4 董允이……갈았는데 : 본서 38쪽에 보인다.
역주5 예전에……때에 : 예전에 孫休가 琅邪王에 책봉되어 琅邪에 있다가 會稽에 거처했던 일을 말한다.
역주6 箕踞 : 두 다리를 키처럼 벌리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데 예의를 차리지 않고 거만하게 앉는 것을 말한다.
역주7 (推)[椎] : 저본에는 ‘推’로 되어 있으나, ≪說文繫傳≫의 ‘鍛’에 대한 설명에 의거하여 ‘椎’로 바로잡았다.
역주8 騶騎 : ≪漢書≫ 顔師古 註에 “騶는 본래 마구간의 말을 모는 자이다. 뒤에 그들을 기병으로 삼았기 때문에 騶騎라 하였다.[騶 本廐之馭者 後又令爲騎 因謂騶騎耳]” 하였다. 또한 ≪資治通鑑≫ 註에서 漢官儀를 인용하면서 “騶騎는 王家에서는 官騎라고 하니 廐馬와 함께 모두 太僕에 속한다.[騶騎王家名官騎與廐馬皆屬太僕]” 하였다.
역주9 (達)[違] : 저본에는 ‘達’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違’로 바로잡았다.
역주10 壽春을……6년째인데 : 壽春에서 諸葛誕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한 이후를 말한다. 이 사건은 高貴鄕公 甘露 3년(258)에 일어났으므로 실제로는 5년이 된다.
역주11 長江의……형세 : 蜀 지방이 長江의 上流이므로 蜀漢을 멸망시키고 上流에서 강물을 따라 下流 지역인 吳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이다.
역주12 春秋……것이다 : 春秋時代에 晉 獻公이 虞나라에 길을 빌려 虢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虞나라까지 멸망시킨 일을 말한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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