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처음에 漢나라 征西將軍司馬鈞이 豫章太守司馬量을 낳고, 사마량은 潁川太守司馬儁을 낳고, 사마준은 京兆尹司馬防을 낳고, 사마방은 宣帝인 司馬懿를 낳았다.
이때에 이르러 魏나라 廟制를 써서 征西府君(사마균) 이하와 景帝를 아울러 七廟로 삼아 제사 지냈다.注+沈約의 ≪宋書≫ 〈禮志〉에 “晉나라 초에는 征西將軍‧豫章府君‧潁川府君‧京兆府君‧宣皇帝‧景皇帝‧文皇帝를 3昭 3穆으로 삼아 제사 지냈다. 이때 宣皇帝는 아직 종묘에 올리지 않았으며, 太祖 자리는 비어 있어서 6世와 景帝를 함께 제사하여 七廟가 되었는데 그 禮는 王肅의 말을 근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는 바로 天帝입니다. 왕성한 기운은 철마다 다르기 때문에 명칭에 5가지가 있는 것이니,注+王은 于放의 切이며 흥성한다는 뜻이다. 오행 중에 用事하는 것이 王(旺의 뜻임)이다. 지금부터 明堂南郊에 오제의 자리를 철폐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그것을 따랐다.
晉主는 王肅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有司가 郊祀의 禮를 대부분 왕숙의 의논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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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3월에 吳나라가 사신을 보내 晉나라에 가서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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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나라 使者丁忠이 돌아와 吳主孫皓에게 말하기를 “북방(晉나라)에는 수비하거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니 弋陽을 습격하면 빼앗을 수 있습니다.”注+弋陽縣은 漢나라 때에 汝南郡에 속하였는데 魏文帝가 나누어 弋陽郡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吳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鎭西大將軍陸凱가 말하였다. “북방 사람들은 막 巴蜀을 합병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화친을 청하니 우리에게 도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저축하여 때를 기다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적의 세력이 강한데, 요행으로 승리하기를 바라니 그 유리함을 알 수 없습니다.” 吳主는 병사들을 출동시키지 않았으나 마침내 晉나라와는 절교하였다. 육개는 陸遜의 族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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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吳나라가 散騎常侍王蕃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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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王蕃은 기질이 고상하고 정직하여 윗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윗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으니 吳主가 기뻐하지 않았다. 萬彧과 陳聲이 이를 따라 왕번을 참소하였다.
후에 吳主가 여러 신하들과 회합을 할 적에 왕번이 술에 몹시 취하여 넘어지자, 吳主는 거짓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殿閣 아래에서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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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 6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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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가을 8월에 晉主(司馬炎)가 崇陽陵을 배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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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文帝司馬昭의 상례에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임시제도를 따라 3일 만에 상복을 벗었고, 장사를 지내고 나서 晉主 역시 상복을 벗었다.
그러나 흰색의 관을 쓰며 素饌만으로 식사를 하고 슬픔으로 몸이 수척해져서 마치 居喪하는 사람과 같았다. 이때에 와서 崇陽陵을 배알하였는데 조서를 내리기를 “〈나만〉 衰絰(상례 복장)을 입고서 예를 시행하고,注+여기서 구두를 뗀다. 여러 신하들은 옛 제도대로 하라.”라고 하니,
尙書令裴秀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이미 상복을 벗으시고 다시 상복을 입으시는 것은 예법의 뜻에 근거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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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中軍將軍羊祜가 傅玄에게 말하였다. “三年喪은 비록 존귀한 사람이라도 服喪의 기한을 마치는 것이 예의인데,注+三年喪은 天子에서부터 庶人에게까지 공통된 것이니, 비록 존귀한 천자일지라도 또한 그 효성으로 喪服을 입는 3년의 기한을 마쳐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미 수백 년이니 갑자기 옛 제도로 회복시키는 것은 아마 시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양호가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에게 모두 예법대로 하게 할 수는 없으나 우선 主上께 服喪의 기한(三年)을 마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부현이 말하였다. “主上께서 상복을 벗지 않으셨는데 천하 사람들이 상복을 벗는다면 이는 부자 관계만 있을 뿐이고, 군신 관계는 없는 것이다.” 마침내 논의를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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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여러 신하들이 평소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평소 반찬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상복을 입는 기한을 마치는 예의를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침통한데, 하물며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겠는가.注+苴은 七餘의 切이고 씨가 있는 삼이다. 喪禮에는 苴痲를 입으니 그 거칢을 취한 것이다.
朕은 본래 유생의 가정에서 생장하여 禮法을 전해온 것이 오래되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부모에 대한 효심을 바꿀 수 있겠는가.注+신하가 하늘로 여기는 것이 임금이고, 자식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 아버지이다.
을 살펴보아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注+省은 살피고 알아본다는 뜻이다. 마침내 素餐을 먹고 素服을 입으며 3년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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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말하였다. “三年喪은 천자에서부터 서인에까지 공통된 것이니, 이는 先王께서 만드신 예법이므로 백대가 지나도 바꾸지 않는 것이다.
漢文帝는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배우지 않아 옛날의 예법을 고치고 파괴하여 부자간의 은혜를 끊어버리고 군신의 의리를 헐어버리자,
후세의 제왕들이 슬픈 감정을 돈독히 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은 아첨하여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注+釐는 力之의 切이니, 다스린다는 뜻이다.
晉武帝 때에 이르러서 홀로 천성에 의하여 이를 바로잡아 시행하였으니 세상에 없는 훌륭한 임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裵秀와 傅玄 같은 무리들은 고루하며 못난 신하이므로 일상적인 것과 옛것에 익숙해 있어서 임금의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를 수 없었으니 서글프다.”注+將은 받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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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吳나라가 陸凱와 萬彧을 左丞相과 右丞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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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主는 남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싫어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는 이가 없었다.注+惡(싫어하다)은 烏故의 切이다.陸凱가 말하기를 “君主와 臣下는 서로 面識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만약에 갑자기 의외의 일이 있으면 갈 곳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하자, 吳主는 육개가 자기를 쳐다보도록 허락하였다.注+오직 陸凱만 그를 쳐다볼 수 있었고, 타인은 이전처럼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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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主가 武昌에서 살게 되자, 揚州 백성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主君이 사용할 물건을 공급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아주 고통스러워하였고, 또 사치하여 법도가 없어서 公的으로나 私的으로 궁핍하였다.注+吳나라 武昌은 荊州에 속하고, 丹陽‧宣城‧毗陵‧吳‧吳興‧會稽‧東陽‧新都‧臨海‧建安‧豫章‧臨川‧鄱陽‧廬陵이 모두 揚州에 소속하였다. 그러므로 서쪽으로 올라가기에 고생하면서도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건을 공급한 것이다.
陸凱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재앙이 없는데도 백성들의 목숨이 다 없어질 지경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나라의 재물이 텅 비었으니 신은 이를 통탄합니다. 옛날에 漢나라 황실이 쇠퇴하고 나자 三國이 정립하였는데,
지금 曹氏(魏)와 劉氏(蜀漢)가 道를 잃어서 모두 晉나라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것이 눈앞에 본 분명한 증거입니다. 어리석은 臣은 다만 폐하를 위하여 우리나라를 애석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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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武昌은 토지가 험준하고 척박하니 王者의 도읍이 아닙니다.注+塉(척박하다)은 秦背의 切이니 토양이 척박하다는 뜻이다. 또 童謠에 말하기를 ‘차라리 建業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의 물고기를 먹지 않고,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러 살지 않겠다.’注+이것은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힘들게 물건을 공급하여 이 때문에 노래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충분히 백성의 마음과 하늘의 뜻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라에는 1년 먹을 저축이 없어서 나무뿌리가 점점 드러날 지경인데 관리들은 힘써 가혹한 짓을 하여 조금도 구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注+“露根之漸”은 나무로 비유한 것이다. 나무가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점차 드러나면 그 근본이 뽑히게 될 것이다.
大帝(孫權) 시절에는 후궁에 궁녀가 백 명을 채우지 않았는데 景帝 이후에는 마침내 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재물을 극심하게 소모한 것입니다.
또 좌우 측근들이 대부분 온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여러 패거리들이 서로 협조하여 충성스런 사람을 해치고 현명한 사람을 매몰시키니, 이런 모든 것이 정치를 좀먹고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수많은 부역을 줄이고 가혹하며 소란스러운 일을 철폐하고 궁중의 여인들을 헤아려서 내보내고 백관을 공평하게 선발하신다면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들이 따라서 국가가 편안할 것입니다.”
注+≪禮記≫ 〈禮器〉 鄭玄註에 “높은 것을 만드는 데에 반드시 丘陵에 의거하는 것은 冬至에 圓丘 위에서 하늘에 祭祀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낮은 것을 만드는 데에 반드시 川澤에 의거하는 것은 夏至에 네모난 못에서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四郊祭는 또한 圓丘와 方澤 밖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나라 景初 원년(237)에 처음으로 洛陽의 남쪽 委粟山에 圓丘를 만들어서 冬至에 圓丘에서 皇皇帝天(위대하고 위대한 하늘)을 제사 지내고, 夏至에 方丘에서 皇皇后地(위대하고 위대한 땅)를 제사 지냈다. 하늘을 郊外에서 제사 지내는 호칭을 皇天之神이라 하고, 땅을 郊外에서 제사 지내는 호칭을 皇地之祇라고 하는데, 지금 동지와 하지의 제사를 南郊와 北郊의 제사에 합하여 지냈다. 이 이후로 圓丘와 方澤을 별도로 세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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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晉나라가 山陽公(漢獻帝)을 감시하는 군대를 철폐하고 그 禁制를 제거하였다.注+魏나라가 漢獻帝를 받들어 山陽公으로 삼았다. 封國이 河內山陽縣濁鹿城에 있으며 감시하는 군대를 설치하여 護衛하게 하였다. 晉나라 때에 이르러 漢獻帝의 손자인 劉康이 계승하니 인심이 漢나라를 떠난 지 오래되었으므로 그 호위병을 파하고 禁制를 제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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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12월에 吳나라가 建業으로 還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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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主가 建業으로 환도하여 황후의 아버지인 衛將軍滕牧에게 武昌에 머물러 수비하게 하였다. 조정 인사들은 등목이 황제의 인척이기에 그를 추대하여 황제에게 간쟁하게 하니 滕皇后에 대한 총애가 이로 말미암아 점차 쇠퇴하였다.
등목을 蒼梧로 좌천시키니 등목이 걱정하다 죽었다. 황후는 다시금 나아가 吳主를 알현할 수가 없었고, 여러 姬妃 가운데 황후의 璽綬를 차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또한 黃門(환관)에게 州郡을 두루 순찰하게 하여 장군과 관리 집안의 딸을 선발하도록 하고,注+行(순행하다)은 去聲이다.
그중 二千石 대신들의 자녀는 모두 해마다 그 이름을 말하게 하고 선발에 들지 않아야 마침내 출가할 수가 있었다.注+中(맞다)은 去聲이다.
역주
역주1七廟 :
황제는 사당에 7명의 조상을 모시도록 되어 있는데 司馬炎이 황제에 즉위하였으므로 七廟 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자는 晉나라 선조인 司馬鈞, 司馬量, 司馬儁, 司馬防, 司馬懿, 司馬師, 司馬昭이다.
역주2五帝 :
여기서의 五帝는 三皇五帝와 같이 정치적인 의미로 쓰인 五帝가 아니라, 靑帝, 赤帝, 黃帝, 白帝, 黑帝를 말하며 이는 오행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천제는 그 처한 시기의 기운에 따라서 그 이름을 달리한다는 것인데, 동쪽이며 木의 기운일 경우에는 청제라 하고 남쪽이며 火의 기운일 경우에는 적제가 된다. 즉 五帝一神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주3晉主謁崇陽陵 :
“陵에 배알하는 것은 옛 도리가 아니고, 後漢 明帝부터 시작되었다. 陵에 배알하는 것을 다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기록한 것은 효성스러운 생각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朝陵 非古也 自明帝始矣 不悉書 書此 嘉孝思也]” ≪書法≫
역주4漢……폐지하였으니 :
漢 文帝가 죽기 전에 遺詔를 내려서 臣民들에게 3년 동안 상복을 입지 말고 短喪을 하여 3일 이후에 상복을 벗도록 한 조치를 말한다.(≪資治通鑑≫ 漢 文帝 後元 7년(B.C.157))
역주5하루로……지가 :
상복 기간의 한 달을 하루로 대체하여 줄이는 것을 말한다. 이를 ‘以日易月制’라고 하는데 三年喪의 제도를 漢 文帝가 고쳐서 36일 만에 상복을 벗게 한 제도이다.(≪漢書≫ 〈文帝紀〉)
역주6孔子가……말 :
孔子의 제자 宰予가 삼년상이 길고 현실에 맞지 않으니 1년으로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공자는 재여에게 1년이 지나서 복을 벗으면 몸과 마음이 편하냐고 되물었다. 재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자네가 편하다면 편한 대로 하라고 나무랐다. 재여가 문을 나가자 “재여는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삼년상은 온 천하에 통행되는 喪制이다. 재여는 제 부모에게 삼년의 사랑이 있는 것인가.[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라고 하였다.(≪論語≫ 〈陽貨〉)
역주7晉나라가……지냈다 :
圓丘는 둥글게 만든 제단인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方丘는 네모나게 만든 제단인데 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南郊와 北郊는 수도의 남쪽 교외와 북쪽 교외에 만든 제단인데, 남교에서는 하늘에게 북교에서는 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역주8(科)[料] :
저본에는 ‘科’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料’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