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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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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年(241)
四年이라
魏正始二年이요 吳赤烏四年이라
夏四月 吳人攻魏어늘 魏擊却之하다
吳主權 將伐魏할새 零陵太守殷札 言曰 今天棄曹氏하여 喪誅累見하고 虎爭之際而幼童莅事注+喪誅累見, 言死亡誅戮者屢見. 一說 “喪誅, 謂魏累有大喪, 蓋天誅也.”하니
陛下宜身自御戎하여 滌荊揚之地하여 擧彊羸之數하여 使彊者執戟하고 羸者轉運注+滌, 洗也, 言擧國興師後無留者, 其地如洗也.하소서
命益州하여 軍于隴右注+益州, 謂蜀也.하고 諸葛瑾朱然 指襄陽하고 陸遜朱桓 征壽春하고
大駕入淮陽하여 歷靑徐注+前漢之淮陽, 後漢章帝改曰陳郡, 此直謂淮水之陽耳.하여 掎角竝進이면 民必內應이라
一軍敗績하면 則三軍離心이니 便當乘勝逐北하여 以定華夏
若不悉軍動衆하고 循前輕擧 民疲威消하여 時往力竭이니 非上策也니이다 權不能用注+傾國出師, 決勝負於一戰, 苻堅之所以亡也, 吳主非不能用殷札之計, 不肯用也.하다
四月 命全琮略淮南하고 朱然圍樊하고 諸葛瑾攻柤中注+襄陽記曰 “柤, 讀如租稅之租. 柤中在上黃界, 去襄陽一百五十里. 魏時夷敷兄弟三人部曲萬餘家屯此, 分布在中廬‧宜城西山鄢沔二谷中, 土地平敞, 宜桑痲, 有水陸良田. 沔南之膏腴沃壤, 謂之柤中.”이러니 魏將軍王凌 與琮戰하여 敗之하니
司馬懿曰 柤中民夷十萬 流離無主하고 樊城被攻歷月하니 此危事也 請自討之라하고 遂督諸軍救樊한대 吳軍夜遁하다
◑蔣琬 徙屯涪하다
琬以諸葛亮 數出秦川 道險運難하여 卒無成功注+關中之地, 沃野千里, 秦之故國, 謂之秦川.이라하여 乃多作舟船하고 欲乘漢沔東下하여 襲魏興上庸注+漢‧沔之水, 自漢中東歷魏興‧上庸以達于襄陽. 欲爭天下, 則當出兵秦川, 魏興‧上庸, 非其地也.이러니
會疾動未行하니 朝廷咸以爲事有不捷하면 還路甚難이라한대 帝遣費禕姜維하여 喩指하니
琬言호되 今魏跨帯九州하여 根蔕滋蔓注+跨, 苦化切. 蔕, 音帝, 草木綴實也. 蔓, 音萬, 延也.하니
若東西幷力하여 首尾掎角이면 雖未能速如志 且當分裂蠶食하여 摧其支黨이라 然吳期二三이로되 連不克果注+言與吳國期約, 掎角伐魏, 二三次矣, 不能果所期也.하니
輒與禕等議하여 以涼州 胡塞之要 進退有資하고 且羌胡乃心思漢如渇하니 宜以維爲刺史
若維征行하여 御制河右 臣當帥軍爲繼注+御, 馬勒也. 今涪水陸四通하여 惟急是應이니
若東北有虞라도 赴之亦易 請徙屯涪라한대 帝從之하다
魏置淮南北屯田하고 廣漕渠하다
魏欲廣田畜穀於揚豫之間하여 使尙書郞鄧艾 行陳項已東至壽春注+行, 去聲. 陳縣, 漢屬陳國. 項縣, 漢屬汝南郡. 晉志 “二縣竝屬梁國.”하니
艾以爲호되 太祖破黃巾하고 因爲屯田하고 積穀許都하여 以制四方하니
今三隅已定하니 事在淮南이라 每大軍出征 運兵過半하여 功費巨億이라
陳蔡之間 土下田良하니 可省許昌左右稻田하고 幷水東下注+汝水‧潁水‧蒗蕩渠水‧渦水, 皆經陳‧蔡之間而東入淮.하여
令淮北屯二萬人 淮南三萬人으로 什二分休하면 常有四萬人하여 且田且守注+什二分休, 謂十人之中, 以二人分番休息也. 五萬人分一萬番休迭戍, 周而復始, 是常有四萬人屯田.
益開河渠하여 以增灌漑하여 通漕運하면 計除衆費하고 歲完五百萬斛이니 六七年間 可積三千萬斛於淮上이라
此則十萬之衆五年食也 以此乘吳 無不克矣注+乘, 伐也.리라 司馬懿善之하여 是歲 始開廣漕渠하니
每東南有事 大軍泛舟하여 達于江淮하니 資食有儲而無水害하더라
寧名行高潔하여 人望之者 邈然若不可及이라가 卽之熙熙和易하여 能因事導人於善하니 人皆化服이러라
年八十四하다 天下知與不知 聞之無不嗟嘆이러라


辛酉年(241)
[] 나라(蜀漢) 後主 延熙 4년이다.
[] 魏主 曹芳 正始 2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赤烏 4년이다.
[] 여름 4월에 나라 사람들이 나라를 공격하자,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 처음에 吳主 孫權나라를 정벌하려고 할 적에 零陵太守 殷札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하늘이 曹氏를 버려서 죽고 죽이는 일이 자주 나타나고, 호랑이처럼 서로 다투는 시기에 어린아이가 정사를 맡았습니다.注+喪誅累見”은 死亡하고 誅戮하는 일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 “‘喪誅’는 나라에 자주 大喪이 있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하늘의 주벌이다.” 하였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친히 군사를 인솔하여 荊州揚州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여 강한 자와 노약자의 수를 헤아려서 강한 자에게는 창을 잡게 하고 노약자에게는 물자를 운반하게 하소서.注+은 씻는다는 뜻이니, 온 나라에 군사를 동원한 뒤에 머무는 사람이 없는 것이 그 땅이 씻은 듯함을 말한 것이다.
益州(蜀漢)에 명하여 隴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注+益州蜀漢을 말한다. 諸葛瑾朱然襄陽으로 향하게 하고, 陸遜朱桓壽春을 정벌하게 하고,
폐하께서는 淮水의 북쪽으로 들어가 靑州徐州를 경유하여注+前漢淮陽後漢 章帝가 고쳐서 陳郡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淮水의 북쪽을 말한 것이다. 掎角之勢를 이루어서 나란히 진공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안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나라 한 방면의 군대가 패하면 남은 세 방면의 부대가 마음이 흩어질 것이니, 곧 승세를 타고 패배한 자를 추격하여 華夏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사를 모두 동원하지 않고, 이전처럼 소규모로 출동하면 백성은 피로해지고 위세를 잃게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국력이 고갈될 것이니, 상책이 아닙니다.” 손권이 은찰의 계책을 쓰지 못했다.注+나라의 힘을 기울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 번 전쟁에서 승부를 결정한 것이 吳主殷札의 계책을 쓸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 4월에 〈吳主 孫權이〉 명령하여 全琮에게 淮南을 경략하게 하고, 朱然에게 樊城을 포위하게 하고 諸葛瑾에게 柤中(조중)을 공격하게 하였는데,注+襄陽記≫에 말하기를 “租稅와 같이 읽는다. 柤中上黃 경계에 있고 襄陽과 거리가 150리이다. 나라 때 夷王梅敷 형제 3인의 部曲 1만여 가 여기에 주둔하여 中廬宜城西山鄢谷沔谷의 두 골짜기 중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광활하여 뽕나무와 삼이 잘 자라며, 水田陸田의 좋은 밭이 있다. 沔水의 남쪽의 기름진 옥토를 柤中이라고 한다.” 하였다. 나라 將軍 王凌나라 전종과 싸워서 전종을 패퇴시켰다.
司馬懿가 말하기를 “柤中의 백성과 夷人 10만 명이 유리하여 주인이 없고, 번성이 공격당한 지 1개월이 지났으니, 이는 위급한 일입니다. 제가 그들을 토벌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여러 군사를 감독하여 번성을 구원하자, 나라 군사들이 밤에 도망갔다.
[] 나라 太子 孫登하였다.
[] 蔣琬涪縣으로 옮겨서 주둔하였다.
[] 蔣琬諸葛亮이 자주 秦川으로 출병했을 적에 길이 험해 운송이 어려워서 마침내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겨注+關中의 땅은 기름진 들이 천리인데, 나라 옛 국토이므로 秦川이라고 한다. 마침내 배를 많이 만들고는 漢水沔水가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이용하여 魏興上庸을 습격하고자 하였다.注+漢水沔水의 물은 漢中으로부터 동쪽으로 魏興上庸을 거쳐서 襄陽에 도달하게 된다. 天下를 다투려고 하면 마땅히 秦川으로 병력을 출동해야 하는데, 魏興上庸은 그에 적합한 땅이 아니다.
마침 장완이 병이 나서 실행하지 못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쟁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돌아오는 길이 매우 곤란할 것이라고 하였다. 後主費禕姜維를 파견하여 이런 뜻을 유시하니,
장완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九州를 차지하고 있어 뿌리와 줄기 꼭지가 무성하게 뻗어 있습니다.注+(걸치다)는 苦化이다. 는 음이 이니, 草木이 열매에 이어진 꼭지이다. 은 음이 이니, 뻗어나간다는 뜻이다.
만약 〈蜀漢나라가〉 동서에서 힘을 합쳐 앞뒤에서 협공을 하면 비록 뜻한 대로 빨리 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분열시켜서 땅을 잠식하여 그 支黨을 꺾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약속한 것이 두세 차례였으나 연이어 수행하지 못했습니다.注+蜀漢이〉 나라와 기약해서 나라를 앞뒤에서 협공하기로 한 것이 두세 차례였는데, 〈나라가〉 약속한 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다.
번번이 제가 비위 등과 상의하였는데, 涼州胡人 지역의 변방 요충지이므로 군대가 나아가고 물러날 적에 바탕으로 삼을 수 있고, 또 羌人胡人들은 마음속으로 나라를 갈구하고 있으니, 마땅히 강유를 刺史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강유가 정벌을 행하여 河西 지역을 제어하게 된다면 신은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후원이 될 것입니다.注+는 말굴레이다. 지금 涪縣은 수로와 육로가 사방으로 통하여 긴급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으니,
만약 동쪽과 북쪽에 근심이 있더라도 위급한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또한 쉽습니다. 부현으로 옮겨 주둔하기를 바랍니다.” 後主가 그 말을 따랐다.
[] 나라가 淮南의 북쪽에 屯田을 설치하고 漕渠(漕運하는 하천)를 넓혔다.
[] 나라가 揚州豫州 사이에 농지를 넓혀 곡식을 저축하고자 하여 尙書郞 鄧艾로 하여금 陳縣項縣의 동쪽에서 壽春까지 순시하게 하였다.注+(순시하다)는 去聲이다. 陳縣나라 때 陳國에 속하였다. 項縣나라 때 汝南郡에 속하였다. ≪晉書≫ 〈地理志〉에 “두 은 모두 梁國에 속하였다.” 하였다.
鄧艾鄧艾
등애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太祖(曹操)께서 황건적을 격파하시고 이어서 둔전을 하여 許都에 곡식을 쌓아 사방을 제압하셨습니다.
지금 세 방면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일이 淮南에 달려 있습니다. 대군이 출정할 때마다 운송 병력이 반을 넘어 공력과 비용이 억으로 헤아릴 정도입니다.
일대는 지형이 낮고 토지가 비옥하니, 許昌 부근에 벼를 심는 전지를 줄이고 하천들을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여서,注+汝水潁水蒗蕩渠水渦水는 모두 일대를 경유하여 동쪽 淮水로 들어간다.
淮水 북쪽에 주둔한 2만 명과 회수 남쪽에 주둔한 3만 명 중에 10분의 2를 순번을 나누어 쉬게 하면 항상 4만 명이 있게 되어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注+什二分休”는 열 명 중에 두 명씩 순번을 나누어 쉬게 하는 것을 이른다. 5만 명을 1만 명씩 나누어 순번에 따라 쉬고 번갈아 수자리를 서게 하여, 한 바퀴 돌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이에 항상 4만 명이 둔전을 하였다.
運河를 더욱 개척해서 灌漑 시설을 늘려서 漕運을 통하게 하면, 여러 비용을 계산하여 제하고도 해마다 5백만 을 온존할 수 있으니, 6, 7년 사이에 3천만 곡을 淮水 가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이는 10만의 병력이 5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입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정벌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注+은 정벌한다는 뜻이다. 사마의가 그의 말을 훌륭하게 여겨 이해에 처음으로 漕渠를 개척하여 넓혔다.
동남 지역에 일이 있을 때마다 대군이 배를 타고서 長江淮水에 도달하니, 물자와 식량은 비축이 있고 수해가 없었다.
[] 管寧나라에서 하였다.
[] 管寧은 명성과 행실이 고결하여,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득하여 따를 수 없을 것 같다가도 그에게 나아가면 화락하고 온순하여 일에 따라 사람을 으로 인도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고 복종하였다.
84세의 나이로 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그의 죽음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한탄하였다.


역주
역주1 苻堅이……이유이다 : 前秦王 苻堅이 100만 대군으로 晉나라에 침입하자, 晉나라는 謝玄을 장수로 삼았다. 부견이 肥水 가에 진을 쳐서 사현의 군사가 건널 수 없자 사현이 부견에게 “그대가 우리의 경내에 깊이 들어와 물가에 진을 친 것을 보니 速戰할 생각이 아니다. 군사를 조금 물려서 우리가 물을 건너도록 해준다면 나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고 관망하겠다.”라고 하니, 부견이 자기 쪽의 군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믿고 진을 조금 물리도록 명하였다. 이 와중에 부견의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사현이 8천 명의 군사로 강을 건너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肥水大戰이라 하며 前秦이 이를 계기로 몰락하였다.(≪晉書≫ 〈謝玄列傳〉)
역주2 (正權)[王梅] : 저본에는 ‘正權’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志≫ 〈吳書 朱然傳〉의 注에 의거하여 ‘王梅’로 바로잡았다.
역주3 吳太子登卒 : “太子가 卒했다고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에게 ‘卒’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홉 번이고(吳나라 太子 登과 代나라 世子 寔, 魏나라 太子 晃, 齊나라 太子 長懋, 梁나라 太子 統, 隋나라 太子 昭, 唐나라 太子 寧과 太子 永, 後唐 太子 弘冀), ‘薨’이라고 쓴 것은 한 번이고(唐나라 太子 弘), ‘死’라고 쓴 것은 한 번이다.(唐나라 太子 重俊)[卒太子始此 終綱目 太子書卒者九(吳太子登 代世子寔 魏太子晃 齊太子長懋 梁太子統 隋太子昭 唐太子寧 太子永 後唐太子弘冀) 書薨一(唐太子弘) 書死一(唐太子重俊)]” ≪書法≫
역주4 管寧卒於魏 : “布衣의 신분인데 어찌하여 ‘卒’이라 기록하였는가. 현인임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布衣에게 ‘卒’을 기록한 것이 둘이니, 黃憲과 管寧은 모두 현인임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魏나라에서 卒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魏나라가 그를 신하 삼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孟軻는 天下의 大賢이니 魏(梁)나라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鄒나라 사람 孟軻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管寧도 天下의 善士이니 魏나라에서 卒하였다고 기록하고 魏나라 사람 管寧이라고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布衣也 何以卒 錄賢也 終綱目 布衣書卒二 黃憲管寧 皆錄賢也 然則其書卒於魏 何 不使魏得臣之也 是故 孟軻天下之大賢也 書至魏 而不書鄒孟軻 管寧亦天下之善士也 書卒於魏 而不書魏管寧]” ≪書法≫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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