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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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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年(269)
晉泰始五年이요 吳建衡元年이라
春二月 晉以胡烈爲秦州刺史하다
先是 鄧艾納鮮卑降者數萬하여 置雍涼之間하여 與民雜러니
朝廷 恐其久而爲患하여 乃分雍涼梁州하여 置秦州하고 以烈素著名西方이라 使鎭撫之注+此河西鮮卑也.하다
◑晉 以羊祜都督荊州軍事하다
晉主有滅吳之志하여 使祜都督荊州鎭襄陽하고 東莞王伷都督徐州鎭下邳하다
祜綏懐遠近하여 甚得江漢之心하고 與吳人開布大信하여 降者欲去 皆聽之하고
減戍邏之卒하여 以墾田八百餘頃注+戍, 守邊也. 邏, 遊兵也.하니 其始至也 軍無百日之糧이러니 及其季年 乃有十年之積이니라
祜在軍 常輕裘緩帶하고 身不被甲하고 鈴閣之下 侍衛不過十數人注+鈴下卒及閤下威儀也. 鈴下者, 有使令則掣鈴以呼之, 因以爲名. 閤下威儀, 掌出入贊導及納謁受事.이러라
濟陰太守文立호되 故蜀名臣子孫 宜量才敍用하여 以慰巴蜀之心하고 傾吳人之望이라한대
晉主從之하여 詔曰 諸葛亮在蜀 盡其心力하고 子瞻臨難死義하니 其孫京 宜隨才署吏하고
蜀將傅僉父子 死於其主 息著募沒入奚官하니 宜免爲庶人注+息, 子也. 著與募, 二子之名也. 少府有奚官令, 凡男女沒入者屬焉. 魏以來, 鄴都有奚官督.하라하고 又以立爲散騎常侍하다
漢故尙書程瓊 雅有德業하여 與立深交러니 晉主聞其名하고 以問立한대
對曰 臣至知其人한대 但年垂八十하고 稟性謙退하니 無復當時之望注+言其意望不求聞達於當時也.이라 不以上聞耳로이다
瓊聞之曰 廣休 可謂不黨矣로다 此吾所以善夫人也注+廣休, 文立字也.니라
秋九月 有星孛于紫宮하다
◑冬十月 吳左丞相陸凱卒하다
何定 嘗爲大帝給使러니 自表舊人이니 求還內侍어늘 吳主以爲都尉하여 典知酤糴한대 遂專威福하니
吳主信任之하여 委以衆事어늘 凱面責之曰 卿見前後事主不忠傾亂國政이요 寧有得以壽終者邪
宜自改厲 不然이면 方見卿有不測之禍이라하니 定大恨之하더라
凱竭心公家하여 忠懇內發하여 表疏 皆指事不飾注+皆指實事, 不爲文飾也.이러니
及疾病 吳主遣中書令董朝問所欲言한대 凱陳호되 不可用이요 奚熙 小吏 建起浦里田하니 亦不可聽注+奚熙, 姓名. 吳主休之時, 嚴密嘗建此議, 熙蓋祖其說.이요
姚信樓玄賀邵張悌郭逴薛瑩滕脩及族弟喜抗 或淸白忠勤하고 或資才卓茂하니 皆社稷之良輔 願訪以時務하여 使各盡其忠注+邵, 齊之孫也. 逴, 勅角‧勅略二切. 瑩, 綜之子也.하소서
凱尋卒하니 吳主素銜其切直하고 且聞何定之譖하여 徙其家建安注+有所恨怒, 蓄而不發者爲銜. 沈約曰 “建安本閩越, 秦立爲閩中郡, 漢虛其地, 後立爲縣, 屬會稽郡, 後分(治)[冶]地, 爲會稽東南二部都尉. 東部, 臨海是也. 南部, 建安是也. 吳主休永安三年, 分南部立爲建安郡.” 宋白曰 “孫策於建安十二年, 分東候官之地, 立建安縣, 卽以年號爲名.”하다


己丑年(269)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泰始 5년이고, 吳主 孫皓 建衡 원년이다.
[] 봄 2월에 나라가 胡烈秦州刺史로 삼았다.
[] 이보다 앞서 鄧艾鮮卑族 가운데 항복한 사람 수만 명을 받아들여서 雍州涼州 사이에 두고 백성과 더불어 섞여 살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날이 오래되면 걱정거리가 될까 두려워하여 雍州, 涼州, 梁州로 나누어 秦州를 설치하고, 胡烈이 평소 서방 지역에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내어 백성들을 鎭撫하게 하였다.注+이는 河西鮮卑族이다.
[] 나라 靑州, 徐州, 兗州에 홍수가 났다.
[] 나라가 羊祜都督荊州軍事로 삼았다.
[] 晉主나라를 멸망시킬 뜻을 가지고 있어서 羊祜荊州都督으로 임명하여 襄陽鎭守하도록 하고 東莞王(동관왕) 司馬伷徐州都督으로 삼아 下邳鎭守하도록 하였다.
[] 羊祜는 원근의 백성들을 잘 품어주어서 長江漢水 지역의 인심을 크게 얻었고 나라 사람들과 크게 신의를 펼쳐 항복한 자가 떠나가려 하면 다 들어주었고,
수비와 순찰하는 군졸을 줄여 농지 8백여 을 개간하였다.注+邊境을 수비하는 것이다. 遊軍이다. 양호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에는 군대에 1백 일을 버틸 양식도 없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10년의 동안 먹을 양식이 축적되었다.
양호가 군대에 있을 때에 항상 가벼운 가죽옷에 띠를 느슨히 매고 몸에는 갑옷을 입지 않았고, 방울[] 아래와 閤門 아래에는 시중드는 호위가 십수 명을 넘지 않았다.注+〈“鈴閣之下 侍衛不過十數人”은〉 鈴下卒( 아래 있는 병졸)과 閤下威儀(閤門 아래에서 威儀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鈴下命令할 일이 있으면 방울을 끌어당겨 사람을 호출함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閤下威儀는 출입할 때에 길을 인도하는 일과 拜謁하려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일을 접수하는 것을 담당한다.
[] 나라는 옛 나라(蜀漢)의 名臣들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 濟陰太守 文立이 말하기를 “옛날 蜀漢名臣들의 자손을 마땅히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여 巴蜀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에게 향해 오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晉主가 이 말을 따라서 조서를 내리기를 “諸葛亮蜀漢에 있을 때 그의 마음과 힘을 다하였고 아들 諸葛瞻도 환난을 만나 의리를 지켜 죽었으니, 그의 손자 諸葛京을 마땅히 재주에 따라 관리로 임명하라.
蜀漢의 장수인 傅僉 父子는 그의 주군을 위하여 죽자 〈부첨의 아들〉 傅著傅募奚官籍沒되어 들어갔으니, 마땅히 사면하여 庶人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注+은 아들이다. 는 〈傅僉의〉 두 아들의 이름이다. 少府에는 奚官令이 있는데, 적몰되어 들어간 남녀들이 소속되어 있다. 나라 이래로 鄴都奚官督이 있었다.라고 하고, 또 문립을 散騎常侍로 삼았다.
[] 蜀漢의 옛 尙書 程瓊이 평소 덕업을 쌓아 文立과 깊이 교제하였다. 晉主가 그 이름을 듣고서 문립에게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이 그의 사람됨을 매우 잘 아는데 다만 나이가 거의 80살이고 품성이 겸손하니, 다시 당세의 명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注+〈“無復當時之望”은〉 그의 바람이 당세에 영달을 구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황상께서 듣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경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廣休朋黨을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저 사람(문립)을 훌륭하게 여기는 이유이다.”注+廣休文立이다.라고 하였다.
[] 가을 9월에 孛星紫宮星에 나타났다.
[] 겨울 10월에 나라 左丞相 陸凱하였다.
[] 예전에 何定이 일찍이 나라 大帝 孫權給使 노릇을 하였었는데, 스스로 表文을 올려 자신은 〈先帝(손권)의〉 옛 신하이니 內侍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吳主(孫皓)가 그를 都尉로 삼아서 술과 곡식의 구입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위엄(형벌)과 복록(상)을 내려주는 일을 전횡하였다.
吳主는 하정을 신임하여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陸凱가 면전에서 하정을 꾸짖기를 “이 보건대 古今에 주군을 섬기면서 不忠하여 나라의 정사를 기울이고 어지럽히고서 어찌 天壽를 누린 사람이 있는가.
마땅히 스스로 고쳐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에게 예측할 수 없는 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 하정이 크게 원한을 품었다.
[] 陸凱는 국가에 마음을 다하여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와 표문과 상소문에서 모두 사실대로 지적하면서 수식하는 일이 없었다.注+〈“皆指事不飾”은〉 모두 사실을 지적하고 수식하지 않은 것이다.
병이 들자 吳主(孫皓)가 中書令 董朝를 파견하여 육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게 하였는데 육개가 말하였다. “何定은 중용해서는 안 되고, 奚熙는 자잘한 官吏로서 공사를 하자고 건의하였으니 또한 들어줄 수 없습니다.注+奚熙姓名이다. 吳主 孫休 때에 嚴密이 일찍이 이 의견을 건의하였는데, 奚熙가 엄밀의 말을 계승한 것이다.
姚信樓玄賀邵張悌郭逴(곽탁)‧薛瑩滕脩族弟陸喜陸抗은 어떤 사람은 청렴결백하며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어떤 사람은 재주와 자질이 뛰어나니, 모두 社稷을 보필할 훌륭한 인물입니다. 바라건대 時務를 물어서 각자 그들의 충성을 다하게 하십시오.”注+賀邵賀齊의 손자이다. 勅角勅畧의 두 이다. 薛瑩薛綜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육개가 얼마 뒤에 죽자 吳主는 평소 육개의 간절하고 정직한 말에 앙심을 품은 데다 하정의 참소를 듣고서는 육개의 집안을 建安으로 귀양 보냈다.注+忿怒가 있어 몸에 쌓여 드러나지 않은 것을 이라 한다. 沈約이 말하기를 “建安은 본래 閩越인데 나라가 閩中郡을 설립하였고 나라는 그 지역을 비워두었다가 후에 冶縣을 설립하여 會稽郡에 속하게 하였다. 후에 지역을 나누어 會稽東部都尉南部都尉를 두었으니, 東部臨海가 이곳이고 南部建安이 이곳이다. 吳主 孫休 永安 3년(260)에는 남부를 나누어 建安郡을 설립하였다.”라고 하였다. 宋白이 말하기를 “孫策建安 12년(207)에 東候官(地名)의 지역을 나누어 建安縣을 설립하였으니 바로 年號로 이름을 삼았다.”라고 한다.


역주
역주1 : 夷狄 등 外族과 구별할 때 民이라는 말을 써서 漢族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鮮卑族과 구별되는 漢族을 말한다.
역주2 晉靑徐兗州 大水 : “지난해에 晉나라의 홍수를 기록했는데, 지금에 또 홍수가 있어 몇 州에 연이어지니, 變異가 자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홍수를 기록한 것이 63번인데, 몇 州에 연이어진 것이 11번이다.(이해(269), 太康 4년(283), 惠帝 元康 5년(295), 8년(298), 隋 煬帝 大業 7년(611), 唐 太宗 貞觀 7년(633), 8년(634), 中宗 神龍 원년(705), 德宗 貞元 8년(792), 宣宗 大中 12년(858), 懿宗 咸通 14년(873))[去年晉書大水矣 於是復大水 而連數州焉 變異可謂頻矣 綱目書大水六十三 連數州郡者十有一(是年 太康四年 惠帝元康五年 八年 隋煬帝大業七年 唐太宗貞觀七年 八年 中宗神龍元年 德宗貞元八年 宣宗大中十二年 懿宗咸通十四年)]” ≪書法≫
역주3 晉 錄用故漢名臣子孫 : “옛 漢나라의 名臣은 누구인가. 諸葛亮과 傅僉의 무리이다. 그 자손들을 녹용하였으니, 晉나라가 이때에 선행을 잘 권면한 것이므로, 기록하여 허여한 것이다.[故漢名臣 何 葛傅之儔也 錄其子孫 晉於是能勸善矣 故書予之]” ≪書法≫
역주4 蒲里田 : ≪資治通鑑≫에는 ‘田’이 ‘塘’으로 되어 있다. 塘은 제방, 둑을 의미한다.
역주5 (治)[冶]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冶’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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