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에 侍中尙書令賈充이 自文帝時로 寵任用事러니 晉主爲太子에 充頗有力이라 故益有寵이러라
充爲人巧諂
하여 與太尉荀顗侍中荀勖越騎校尉馮紞
으로 相爲黨友
하니 朝野惡之
注+紞, 都感切.러라
晉主問侍中裴楷以方今得失
注+楷, 秀之從弟也.한대 對曰 陛下受命
에 四海承風
호되
所以未比德於堯舜者는 但以賈充之徒가 尙在朝耳라 宜引天下賢人하여 與弘政道요 不宜示人以私니이다
侍中任愷河南尹庾純이 皆與充不協이러니 會樹機能亂秦雍하니 晉主以爲憂한대
愷曰 宜得威望重臣有智略者하여 以鎭撫之니이다 晉主曰 誰可者오하니 愷及純因薦充하여 使督秦涼諸軍이라
充患之하여 問計於勖한대 勖曰 是行也는 辭之實難하니 獨有結婚太子면 可不辭而自留矣니이다
目
初
에 濬爲羊祜參軍
하니 祜深知之
注+晉制, 諸位從公爲持節都督, 參軍六人.러니 或曰 濬爲人志大奢侈
하니 不可專任
이라한대
祜曰 濬有大才하여 將以濟其所欲하리니 必可用也니라
濬至益州에 明立威信하니 蠻夷歸附어늘 俄遷大司農이러니
時
에 晉主與羊祜謀伐吳
할새 祜以爲宜藉上流之勢
라하여 密表留濬
하여 加龍驤將軍
하여 監梁益軍
注+龍驤將軍之號始此. 晉制方面之任, 資重者爲都督諸軍事, 資望輕者爲監軍事.이라
詔使罷屯田兵하고 大作舟艦한대 別駕何攀曰 屯兵五六百人이 作船不能猝辦하니 後者未成에 前者已腐라
宜召諸郡兵하여 合萬餘人造之니 歲終可成이라 濬欲先上須報한대
攀曰 朝廷
이 猝聞召萬兵
하면 必不聽
하리니 不如輒召
注+輒, 專也.라 設或見却
이라도 功夫已成
에 勢不得止
라하니
濬從之하여 令攀典造라 於是에 作大艦하니 長百二十步요 受二千餘人하고
以木爲城하고 起樓櫓하여 開四出門하면 其上에 可馳馬往來러라
時作船木柹
가 蔽江而下
注+柹, 方廢切, 斫木札也.하니 吳建平太守吳郡吾彦
이 取以白吳主曰 晉必有攻吳之計
니 宜增建平兵
하여 以塞其衝
이니이다한대
吳主不從
注+建平郡, 漢南郡之巫縣, 吳主權分置宜都郡, 吳主休永安三年, 分宜都立建平郡.하니 彦乃爲鐵鎖
하여 橫斷江路
하다 濬雖受
募兵
이나 而無虎符
러니
廣漢太守張斆收濬從事列上
注+列上, 謂陳列而封上.한대 晉主召斆還
하고 責曰 何不密啓而便收從事
오하니
斆曰 蜀漢絶遠
하니 劉備嘗用之矣
라 輒收
注+句.도 臣猶以爲輕
하노이다하니 晉主善之
러라
目
初에 抗以江陵北에 作大堰遏水以絶寇叛이러니 祜欲因水運糧하여 而揚聲將破堰以通步軍한대
抗聞卽決之하니 諸將皆惑하여 屢諫不聽이러니 祜至當陽聞堰敗하고 乃以車運하니 大費功力이러라
十一月
에 肇至西陵
이어늘 抗自將憑圍對之
注+憑長圍以對之, 則彼爲客, 我爲主.하니 都督兪贊亡詣肇
한대
抗曰 贊舊吏라 知吾虛實하니 吾常慮夷兵素不簡練이라 若敵攻圍면 必先此處라하고 卽夜易夷兵하여 以精兵守之러니
明日에 肇果攻故夷兵處하여 衆敗夜遁이어늘 抗欲追之나 而慮闡伺間하고 兵不足分하여
於是
에 但鳴鼓若將追者
하니 肇衆兇懼
하여 悉解甲挺走
注+挺, 拔也. 挺走, 拔身而走也.어늘 抗使輕兵躡之
하니 肇又大敗
하고 祜等
이 皆引軍還
이라
抗遂拔西陵하여 誅闡及同謀將吏數十人하여 皆夷三族한대 東還樂鄕에 貌無矜色이러라
吳主旣克西陵
에 志益張大
하여 使術士尙廣
으로 筮取天下
注+張, 去聲. 尙廣, 姓名.한대
對曰 吉
하니 庚子歲
에 靑蓋當入洛陽
注+其後吳亡, 皓入洛, 歲在庚子.이라하니 吳主喜
하여 不修德政
하고 專爲兼幷之計
러라
目
祜歸自江陵하여 務修德信以懷吳人하니 每交兵에 刻日方戰하며 不爲掩襲之計하고
將帥有欲進譎計者어든 輒飮以醇酒하여 使不得言하고
軍行吳境에 刈穀爲糧한대 皆計所侵하여 送絹償之하고 每遊獵에 常止晉地하고
所得禽獸가 或先爲吳人所傷者어든 皆送還之하니 於是에 吳邊人이 皆悅服이러라
祜與陸抗對境
에 使命常通
注+使, 疏吏切.하여 抗遺祜酒
에 祜飮之不疑
하고 抗疾
에 祜與之成藥
이어든 抗卽服之
하니
人多諫抗
이어늘 抗曰 豈有酖人羊叔子哉
注+成藥, 已合成熟藥也. 叔子, 祜字.리오 抗告其邊戍曰 彼專爲德
하고 我專爲暴
면 是不戰而自服
이니 各保分界而已
요 無求細利
注+分, 扶問切.하라
吳主聞而責之한대 抗曰 一邑一鄕도 不可以無信義어든 況大國乎아 臣不如此면 適足彰彼之德이니 於祜無傷也니이다
目
中書令賀卲諫曰 臣聞興國之君은 樂聞其過하고 荒亂之主는 樂聞其譽라하니
聞其過者는 過日消而福臻하고 聞其譽者는 譽日損而禍至하나니
陛下嚴刑法以禁直辭하고 黜善士以逆諫口하여 杯酒造次에 死生不保하니
是以
로 正士摧方
하고 庸臣苟媚
하여 人執反理之評
하고 士吐詭道之論
注+摧方, 言刓稜角而爲圓也. 詭, 違也, 異也.하여 遂使仕者
로 以退爲幸
하고
居者로 以出爲福하니 非所以保洪緖也로소이다 何定이 妄興事役하여 發江邊戍兵하여 以驅麋鹿하니 老弱飢凍하고 大小怨歎이라
傳曰 國之興也
에 視民如赤子
하고 其亡也
에 以民爲草芥
注+左傳, 陳逢滑曰 “國之興也, 視民如傷, 其亡也, 以民爲土芥.”라하니
今法禁轉苛하고 賦調益繁하여 呼嗟之聲이 感傷和氣하고
且國無一年之儲하며 家無經月之蓄이로되 而後宮坐食이 萬有餘人이라
北敵注目
하여 伺國盛衰
하니 長江之限
은 不可久恃
라 苟不能守
면 一葦可航也
注+航, 通作杭.니
願陛下
는 豐基彊本
하고 割情從道
하시면 則聖祖之祚隆矣
注+聖祖謂孫權.리이다
吳主深恨之어늘 於是에 左右誣玄與卲로 謗訕政事라하니 俱被詰責하여 徙玄於交趾러니 竟殺之하다
目
[目] 예전에 侍中 尙書令 賈充이 晉 文帝(司馬昭)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 중용되어 일을 주관하였는데, 晉主(司馬炎)가 태자가 될 적에 가충이 꽤 힘을 썼으므로 더욱 총애를 받았다.
가충은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여
太尉 荀顗,
侍中 荀勖,
越騎校尉 馮紞(풍담) 등과 서로
黨友가 되니,
朝野에서 그를 미워하였다.
注+紞은 都感의 切이다.
晉主가
侍中 裴楷에게 현재의 잘잘못을 묻자,
注+裴楷는 裴秀의 從弟이다.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서 천하 사람들이 교화를 받들고 있지만,
그 恩德을 堯舜에게 견주지 못하는 것은 다만 가충의 무리가 여전히 조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천하의 현인을 발탁하여 그들과 政道를 넓히고, 남들에게 사사로운 마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侍中 任愷, 河南尹 庾純이 모두 가충과 마음이 맞지 않았다. 때마침 禿髮樹機能이 秦州와 雍州 지역을 어지럽히자 晉主가 근심을 하였는데,
임개가 아뢰기를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있는 重臣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임명하여 그곳을 진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晉主가 “누가 적임자인가.”라고 하자, 임개와 유순이 이로 인해 가충을 천거하여 그에게 秦州와 涼州의 모든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충이 근심하여 순욱에게 계책을 묻자, 순욱이 말하기를 “이번에 가게 될 일은 실로 사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太子와 혼인을 맺는다면 사양하지 않아도 저절로 여기에 남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晉主가 처음에 태자를 위해 衛瓘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려고 하였는데, 賈充의 처 郭槐(곽괴)가 楊皇后의 주위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양황후로 하여금 晉主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자 晉主가 말하기를 “衛公의 딸은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고, 賈公의 딸은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 衛氏는 종족이 현명하고 아들이 많으며, 용모가 아름답고 키가 크며 흰 피부를 지녔다. 賈氏는 종족이 투기심이 있고 아들이 적으며, 용모가 추하고 키가 작으며 검은 피부를 지녔다.”라고 하였다.
양황후가 굳게 청하였는데,
注+다섯 가지 좋은 점은 종족이 현명한 것이 첫 번째이고, 아들이 많은 것이 두 번째이며,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세 번째이고, 키가 큰 것이 네 번째이며, 흰 피부를 지닌 것이 다섯 번째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은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荀勖이 또
荀顗,
馮紞과 함께 모두 가충의 딸이 절세미인이며
才德을 갖추었다고 하자,
晉主가 드디어 그들의 말을 따라 가충을 머물러 다시 이전 직임을 맡게 하였다.
賈妃는 나이가 15세로, 태자보다 두 살이 많았다. 투기에다 권모술수와 속임수가 많아 태자가 총애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目
[
目]
司馬孚는 성품이 충성스럽고 신중하여
宣帝(
司馬懿)가
政事를 펼칠 때, 늘 스스로 겸손하였고,
미리 모의를 한 적이 없었는데,
晉主가 즉위하고는 은혜와 예우를 더욱 융숭히 하였다.
元旦의 조회 때에 사마부에게 조령을 내려 가마를 탄 채로
殿閣에 오르라고 하였고,
晉主(
司馬炎)가
阼階에서 맞이하여 배알하였으며,
注+“阼階”는 동쪽 섬돌이니, 주인이 다니는 계단이다. 자리에 앉고 나서는 직접 술잔을 올려 축수하여 민간 집안에서 행하는 예처럼 하였다.
사마부가 비록 존경과 은총을 받았으나 늘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는데, 임종 때에 遺命을 내려 “魏나라의 곧은 선비 河內 사람 사마부는 字가 叔達인데,
伊尹도 되지 못하고, 周公도 되지 못하였으며, 管夷吾도 되지 못하고, 柳下惠도 되지 못하였지만, 몸을 세워 道를 행한 것이 시종 한결같았으니, 〈장레에〉 마땅히 평상복을 입히고 무늬가 없는 관을 사용하여 염을 하라.” 하고 卒하니, 나이가 93세였다.
諡號를
獻이라 하고, 조서를 내려
東園의
溫明秘器를 내려주었는데, 그 집안에서는 그의 유언을 따라 어떤 물품도 쓰지 않았다.
注+服虔이 말하기를 “東園의 溫明은 모양이 네모난 漆桶 같다. 한쪽을 열면 옻칠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거울이 있는데, 이것을 시체 위에 걸어두었다가 大斂 때에 아울러 덮는다.”라고 하였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東園은 官署의 명칭으로 少府에 속하였는데, 그 관서에서 이 기물을 제작하는 것을 주관한다. 秘器와 梓棺은 흉한 기물이므로, 그것을 숨긴다.”라고 하였다.
目
[
目] 당시에
汶山의
白馬胡가 여러 종족을 침략하자,
注+汶은 읽는 것이 崏과 같다. 白馬胡는 西南 오랑캐 종족의 명칭이니, 汶山郡에 있다. 益州刺史 皇甫晏이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注+益州는 蜀郡, 犍爲郡, 汶山郡, 漢嘉郡, 江陽郡, 朱提郡, 越巂郡, 牂柯郡을 관할한다.
그러자 從事 何旅가 간언하기를 “오랑캐가 서로 해치는 것은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한여름에 出兵을 하면 필시 전염병이 발생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牙門 張弘이 난을 일으켜 황보안을 죽였는데,
兵曹從事 楊倉이 병사를 무장하여 싸우다가 죽자,
注+漢나라 이후로 여러 州에 軍事에 관한 일이 있어서는 兵曹從事를 두었다. 장홍이 마침내 황보안이 반란을 도모했다고 무고하여 그의
首級을
京師로 보냈다.
主簿 何攀이 한창 모친의
喪中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洛陽에 이르러 황보안이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注+州의 主簿는 閤下의 일을 기록하고 文書를 살피며, 郡의 主簿도 직무가 대략 동일하다.
廣漢主簿 李毅가 太守 王濬에게 말하기를 “廣漢이 成都와 아주 가깝지만 梁州의 통제를 받게 한 것은 조정에서 益州의 요충지를 제압하려고 한 것이니,
바로 오늘날과 같은 변고를 막고자 한 것입니다. 의당 때에 맞춰 토벌하러 나아가야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注+漢나라 때에는 廣漢郡이 雒縣에 治所를 두었다가 泰始 2년(266)에 新都郡을 분할하여 雒縣에 치소를 두고 광한군은 廣漢縣에 치소를 두었는데, 成都와 서로 가까웠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먼저 조정에 알려 요청하고자 하였는데,
注+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니, 아래에 나오는 “先上”과 “列上”의 上도 동일하다.
이의가 말하기를 “主將을 죽인 적은 악행이 더욱 크니, 마땅히 일상적인 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어찌 요청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준이 이에 군사를 출동하여 장홍을 토벌하여 참수하니, 조서를 내려서 왕준을 益州刺史로 삼았다.
目
[
目] 예전에
王濬이
羊祜의
參軍으로 있었는데, 양호가 그를 잘 알았다.
注+晉나라 제도에 의하면 으로 持節 都督이 된 사람은 參軍이 6명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왕준은 사람됨이 뜻이 크고 사치하니,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양호가 말하기를 “왕준은 큰 재주를 지니고 있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益州에 이르러 위엄과 신의를 분명히 세우니 蠻夷가 귀부하자, 얼마 있다가 大司農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
晉主가 양호와
吳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하였는데, 양호가
長江 上流에 위치한 형세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여 비밀리에
晉主에게 표문을 올려 왕준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여
龍驤將軍의 직책을 더해주어
梁州와
益州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注+龍驤將軍의 호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晉나라 제도에 의하면 方面의 직임을 맡는 경우 資級이 중한 사람이 都督諸軍事가 되고, 資級과 人望이 가벼운 사람이 監軍事가 되었다.
조서를 내려 屯田兵을 철폐하고 艦船를 대대적으로 건조하게 하니, 別駕 何攀이 말하기를 “屯田兵 5, 6백 명이 갑작스레 배를 만들 수 없으니, 뒤에 만드는 것이 완성되기 전에 이전에 만든 배가 썩어버릴 것입니다.
의당 여러 郡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도합 1만여 명으로 만들어야 하니, 그렇게 하면 한 해를 마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먼저 보고를 하여 응답을 기다리려고 하자,
하반이 말하기를 “조정이 대번에 1만 명의 군사를 소집한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전적으로 결단하여 소집하는 것만 못합니다.
注+輒(오로지)은 專이라는 뜻이다. 설령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이 이미 이루어져 형세상 중지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준이 그 말을 따라 하반에게 배를 만드는 일을 맡겼다. 그리하여 큰 함선을 만드니, 길이가 120步이고, 2천여 명을 태울 수 있었으며,
배에는 나무로 城을 만들고 망루를 세워서 사방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놓으면 그 위에서 말을 달리며 왕래할 수 있었다.
그때 배를 만들던 나무 조각이 장강을 덮으며 떠내려가니,
注+柹는 方廢의 切이니, 쪼개진 나무 조각이다. 吳나라
建平太守 吳郡 사람
吾彦이 나무 조각을 주워
吳主에게 아뢰기를 “
晉나라가 필시
吳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의당
建平의 병력을 증강하여 그 요충지를 막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吳主가 그 말을 따르지 않자,
注+建平郡은 漢나라 때에 南郡의 巫縣이었는데, 吳主 孫權이 나누어 宜都郡을 두었고, 吳主 孫休 永安 3년(260)에 宜都郡을 나누어 建平郡을 세웠다. 오언이 이에 쇠사슬을 만들어 장강을 가로질러 물길을 가로막았다. 왕준이 비록 조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虎符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廣漢太守 張斆(장효)가 왕준의 종사관을 잡아들여 정황을 열거하여 보고하였다.
注+“列上”은 열거하여 봉함해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晉主가 장효를 불러
京師에 돌아오게 하고 나무라기를, “어찌하여 은밀히 아뢰지도 않고 바로 종사관을 잡아들였는가?”라고 하니,
장효가 아뢰기를 “
蜀과
漢中은 아주 먼 지역인데,
劉備가 이 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잡아들인 것도
注+여기서 句를 뗀다. 신은 오히려 너무 가볍게 처리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니,
晉主가 훌륭하다고 여겼다.
目
[目] 賈充은 侍中 任愷와 함께 모두 晉主(司馬炎)의 총애를 받았는데, 가충이 명예와 권세를 독차지하려 하여 임개를 시기하니, 이에 조정의 인사들은 각기 朋黨을 이루게 되었다.
晉主가 가충과 임개를 불러서 연회를 베풀며 말하기를 “조정은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하고, 大臣은 마땅히 화합해야 한다.”라고 하니, 가충과 임개가 절하며 사과하였다.
얼마 후에 晉主가 알면서도 문책을 하지 않자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서 겉으로는 상대를 존숭하였지만, 속으로는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가충이 이윽고 임개를 추천하여 吏部尙書로 나가게 하고는 荀勖, 馮紞(풍담)과 함께 그를 참소하니, 임개가 이로 말미암아 죄를 얻어 집으로 폐출되었다.
目
[目] 吳나라 陸抗은 步闡이 〈西陵에서〉 반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장군 吾彦을 파견하여 토벌하니, 晉나라에서는 荊州刺史 楊肇를 파견하여 보천을 맞이하였다.
羊祜는 江陵으로 출발하고, 徐胤은 建平을 공격하여 보천을 구원하였다. 육항이 서릉으로 간 군사들에게 성을 포위하는 담장을 견고히 구축하라고 명을 내려
赤谿에서
故市까지 쌓아서 이로써 안으로는 보천을 포위하고 밖으로는
晉나라 군사들을 막게 하여 밤낮으로 독촉하니, 군사들이 매우 고생을 하였다.
注+胡三省이 말하기를 “≪水經註≫에 ‘江水는 西陵의 협곡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故城洲를 가로지른다. 洲의 북쪽이 해안에 붙어 있는데, 洲의 윗부분은 郭洲로 길이가 2리이고, 폭이 1리이다. 그 위에 步闡 옛 城이 있는데, 네모나고 둥근 모양이 洲와 걸맞고 주위를 둘러 대략 가득 차 있다. 故城洲 위에 5리에 걸쳐 있는 성이 있는데 보천의 아버지인 보즐이 쌓은 것이다. 또 〈江水가〉 동쪽으로 陸抗 옛 城을 지나간다.’ 하였다. 지금의 峽州 遠安縣이 江北에 위치하여 거기에 孤山, 육항 옛 城, 丹山이 있다. 당시에 붉은 기운이 있었는데, 赤溪가 마땅히 丹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故市는 바로 보즐 옛 城으로, 거처하는 곳에 市가 형성되었는데, 보천이 별도로 성을 쌓았기 때문에 故市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切은 급박하다는 뜻이다.
여러 장수들이 간언하기를 “지금 군사들의 銳氣를 이용하여 보천을 공격해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포위하는 것을 일삼아서 군사와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육항이 말하기를 “이
城은 지세가 견고하고 군량이 넉넉하며 방어 무기를 모두 내가 알고 있다.
注+陸抗이 이전에 西陵을 감독한 적이 있다. 지금 도리어 그들을 공격하면 빨리 함락할 수가 없고, 북쪽의 병사들이 이르렀는데 아무 대비가 없으면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이니,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공격하자고 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육항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키려고 하여 한 번 공격하도록 허락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득이 없었다. 포위망이 비로소 완성되자 양호의 병력 5만이 江陵에 도착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육항이 서릉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
注+樂鄕에서 서쪽을 향해 西陵으로 나아간 것이 올라가는 것이 된다. 육항이 말하기를 “강릉은
城이 견고하고 병력도 충분하니, 걱정할 것이 없다. 가령 적들이 강릉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필시 지켜내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손해가 적지만,
만약
晉나라가 서릉을 차지한다면
南山의 여러 오랑캐들이 동요하게 될 것이니 그 근심을 헤아릴 수 없다.”
注+“南山”은 江南의 여러 산을 말하는데, 여러 오랑캐들이 의지하는 험준한 지형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서릉으로 갔다.
目
[目] 예전에 陸抗은 江陵의 북쪽에 큰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아서 적의 노략질과 내부 반란을 단절시켰다. 羊祜는 수로를 통해 군량을 운반하려고 하여 일부러 소리를 질러 “장차 둑을 무너뜨려서 보병을 통과시키겠다.”라고 하였다.
육항이 그 소식을 듣고는 즉시 둑을 트라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여 여러 차례 간언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호가 當陽에 이르러 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레로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대단히 많은 힘이 소비되었다.
11월에
楊肇가
西陵에 이르렀는데, 육항이 스스로 병력을 거느리고 성을 포위하는 담장에 의지하여 대항하였다.
注+성 주변을 두른 장벽에 의지하여 대치하면 저들은 客이 되고, 우리는 主가 된다. 吳나라
都督 兪贊이 도망쳐서 양조에게 가자,
육항이 말하기를 “유찬은 〈우리 군중에〉 오래 있던 관리라, 우리의 虛實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늘 夷族의 병력이 평소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않은 것을 염려하였는데, 만약 적들이 우리의 포위망을 공격해온다면 반드시 이곳을 먼저 공략할 것이다.”라고 하고, 그날 밤에 夷族의 병력을 바꾸어 정예병으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다음 날 양조가 과연 원래 夷族의 병력이 있던 곳을 공격하였다가 군사들이 패배하여 밤에 도망갔다. 육항이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步闡이 틈을 보고 공략할까 염려되고 병력을 나누기에도 부족하여
다만 북을 울리며 추격하는 것처럼 하니, 양조의 군대가 두려워 모두 갑옷을 벗고 몸만 빼내어 도망쳤다.
注+挺은 뽑는다는 뜻으로, “挺走”는 몸을 빼내 도망치는 것이다. 육항이 경무장한 병력들로 그들을 뒤쫓게 하자 양조가 또 크게 패배하였고, 양호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육항이 드디어 서릉을 함락하여 보천과 같이 모의한 장군과 관리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이들의 삼족을 모두 멸하였는데, 동쪽으로 樂鄕에 돌아가서도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吳主가 이미 서릉에서 승리하고는 뜻이 더욱 커져서
術士 尙廣에게 천하를 차지할 시기를 점치게 하니,
注+張(확장하다)은 去聲이다. 尙廣은 姓名이다.
대답하기를 “길합니다.
庚子年(280)에
로 장식된 수레가 낙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注+그 후에 吳나라가 망하여 孫皓가 洛陽으로 들어갔으니, 庚子年의 일이었다.라고 하니,
吳主가 기뻐하면서
德政을 펴지 않고 오로지 겸병할 계책만을 세웠다.
目
[
目]
羊祜가
江陵에서 돌아와 은덕을 베풀고 신의를 쌓아
吳나라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교전을 벌일 때마다 날짜를 정하여 전투를 하였으며, 몰래 습격하는 계책을 쓰지 않았고,
羊祜
장수들 가운데 속임수를 쓰자고 진언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좋은 술을 마시게 하여 말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군대가 吳나라의 접경 지역에 가서 곡식을 베어 군량으로 썼는데, 침탈한 양을 모두 계산하여 비단을 보내어 배상하고, 사냥을 할 때는 늘 晉나라의 땅에 그쳤고,
만약 잡은 짐승 중에 먼저 吳나라 사람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 있으면 모두 돌려보내니, 吳나라의 변경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탄복하였다.
양호와
陸抗이 경계를 마주하면서
使者들이 늘 왕래하여
注+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면 양호는 의심하지 않고 이를 마셨으며, 육항이 병이 나자 양호가 조제해놓은 약을 그에게 주었는데, 육항이 즉시 복용하였다.
사람들이 대부분 육항에게 간언을 하자 육항이 말하기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毒을 줄
羊叔子이겠는가.”
注+“成藥”은 이미 합성하여 조제한 약이다. 叔子는 羊祜의 字이다.라고 하였다. 육항이 변경의 수비병들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전적으로 덕을 쌓는데 우리는 전적으로 포악한 짓을 한다면 이는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니, 각자 나누어진 경계를 지킬 뿐, 자잘한 이익을 구하지 말라.”
注+分(경계)은 扶問의 切이다. 하였다.
吳主가 그 일을 듣고는 육항을 꾸짖자, 육항이 말하기를 “한 邑이나 한 鄕도 信義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더군다나 大國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臣이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다만 저들의 덕행을 드러낼 뿐이니, 양호에게는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中書令 賀卲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신이 듣건대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고, 나라를 혼란하게 하는 군주는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허물이 날로 줄어들어 복된 일이 찾아오고, 자신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칭찬이 날마다 줄어들어 재앙이 이르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엄한 형법으로 곧은 말을 막고, 훌륭한 인물을 내쫓아서 간언하는 말을 막아서 술잔을 돌리는 연회에서조차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니,
이 때문에 올바른 인물은 바른 절조를 굽히고, 용렬한 신하는 구차히 아첨하여 사람들은 이치에 어긋나는 평의를 채택하고, 선비들은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펼쳐
注+“摧方”은 모난 곳을 깎아서 둥글게 만드는 것이다. 詭는 어기고 다르다는 뜻이다. 이윽고 벼슬하는 자들에게 물러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하고,
중앙에 있는 관원에게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복으로 여기게 하니, 大業을 보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何定이 제멋대로 事役을 일으키고 江邊을 지키는 병사들을 징발하여 사슴 사냥을 하도록 하니, 노약자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어른과 아이들은 원망하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傳(옛 책)에 이르기를 ‘나라가 흥성할 때에는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여기지만,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초개처럼 여긴다.’
注+≪春秋左氏傳≫ 哀公 원년에 陳逢滑이 이르기를 “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백성 보기를 다칠 것처럼 하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초개처럼 간주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형법과 금령이 점점 가혹해지고, 조세는 날로 많아져서 부르짖고 한탄하는 소리가 和氣를 해치고 있으며,
또 나라 안에는 1년 정도 버틸 곡식이 없고, 민가에도 한 달을 넘길 양식이 없는데, 후궁에서 가만히 앉아 밥을 먹는 이들이 1만여 명입니다.
북쪽의 적국(
晉나라)이 주의를 기울여 우리나라의 성쇠를 엿보고 있으니,
長江의 한계는 오래 믿을 것이 못됩니다. 만일 우리가 능히 장강을 지킬 수 없다면 뗏목 한 척으로 건널 수 있으니,
注+航은 杭과 통용하여 쓴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기초와 근본을 두텁고 굳건하게 하시고 개인적인
感情을 버리고
道를 따르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聖祖의 복이 융성해질 것입니다.”
注+聖祖는 孫權을 말한다.
吳主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는데, 이때에 좌우 신하들이 누현과 하소를 무함하여 政事를 비방하였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힐책을 받아서, 누현을 交趾로 귀양을 보냈다가 마침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