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
에 鄧艾之死
를 人皆冤之
나 而無爲之辨者
注+爲, 去聲, 下樂爲同.러니 及晉主卽位
에
議郞段灼
이 上疏曰 艾本屯田掌犢人
注+艾本義陽棘陽人, 魏太祖破荊州, 徙汝南, 爲農民養犢.이러니 寵位已極
하고 功名已成
하니 七十老公
이 復何所求
리오
正以劉禪이 初降에 遠郡未附로 矯令承制하여 權安社稷이라
鍾會有悖逆之心호되 畏艾威名하여 因其疑似하여 構成其事하니 艾被詔書에 卽束身就縛하니 誠知奉見先帝에 必無當死之理也라
會受誅之後에 艾將吏愚戇하여 自共追艾하여 解其囚執하니
艾在困地
하여 未嘗與謀
나 而獨受腹背之誅
하니 豈不哀哉
注+腹在前, 背在後, 謂前後皆不免於誅.아
謂宜聽艾歸葬하고 還其田宅하며 繼封定諡면 則艾死無所恨이요
而天下徇名之士와 思立功之臣이 必投湯火하여 樂爲陛下死矣리이다
晉主善其言而未能從也
러니 至是
하여 問給事中樊建以諸葛亮之治蜀
하고 曰 吾獨不得如亮者而臣之乎
注+建故蜀臣.아
建稽首曰 陛下知鄧艾之冤
이로되 而不能直
하시니 雖得亮
이라도 得無如馮唐之言乎
注+言不能用也.아
目
[
目] 예전에
鄧艾의 죽음을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으나, 그를 위해 변명하려는 자가 없었는데,
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 “樂爲”의 爲도 같다. 晉主가 즉위하자
議郞 段灼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등애는 본래
屯田을 하는 곳에서 소 기르는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는데,
注+鄧艾는 본래 義陽 棘陽 사람으로, 魏나라 太祖가 荊州를 격파했을 때, 汝南으로 이주하여 농민이 되어 소를 길렀다. 총애와 지위가 이미 지극하고
功名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일흔 살 된 노인이 다시 무엇을 구하였겠습니까.
바로 劉禪이 처음 항복하였을 때 멀리 있는 郡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아 명령을 사칭하고 承制하여 임시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鍾會가 悖逆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등애의 威名을 두려워하여 그의 의심스런 일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꾸며대자, 등애가 조서를 펴보고는 즉시 자기 몸을 결박하였으니, 진실로 先帝(司馬昭)를 받들어 알현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마땅히 죽어야 할 이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회가 주살된 뒤에 등애의 장령과 관리들이 어리석어 함께 등애를 쫓아가서 갇힌 등애를 풀어주니,
등애가 곤경에 처하여 아직 더불어 모의한 적이 없었는데, 홀로 앞뒤로 주벌을 받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注+배는 앞에 있고 등은 뒤에 있으니, 앞뒤에서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땅히 등애를 歸葬하도록 허락하시고 그의 田宅을 돌려주시며 후손들이 封爵을 잇게 하고 諡號를 정해주시면 등애가 죽었지만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천하에서 명예를 좇는 선비와 공로를 세울 것을 생각하는 신하들이 반드시 펄펄 끓는 물과 타는 불속에도 뛰어들어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晉主가 그 말을 좋게 여겼지만, 아직 따를 수는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給事中 樊建에게
諸葛亮이
蜀漢을 다스린 상황을 묻고서 말하기를 “나만 제갈량과 같은 신하를 얻어 신하로 삼을 수 없단 말인가.”
注+樊建은 옛날 蜀漢의 신하이다.라고 하니,
번건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등애가 원통하게 죽은 사실을 아시면서도 바로잡을 수 없으셨는데, 비록 제갈량과 같은 자를 얻는다 하더라도
注+〈“得無如馮唐之言乎”는〉 등용하지 못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晉主가 웃으며 말하기를 “卿의 말이 나의 생각을 일깨워주었다.”라고 하고, 鄧郞을 郞中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