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目] 晉主(司馬炎)가 질병에 걸려 위독했는데, 완쾌되자 여러 신하들이 축수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늘 역질로 죽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 슬픈 마음이 드니,
어찌 이 한 몸이 회복된 것으로 백성들을 잊겠는가. 올린 여러 가지 예물을 모두 거절하라.”라고 하였다.
예전에
文帝(
司馬昭)가 임종할 때에
晉主를 위하여
漢나라
淮南王(
劉長)과
魏나라
陳思王(
曹植)의 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齊王 司馬攸의 손을 잡아 그(
司馬炎)에게 잡게 해주었는데,
注+漢 文帝가 淮南厲王 劉長을 주살하였고, 魏 文帝가 陳思王 曹植을 용납하지 못하였으니, 이 두 가지 일을 끌어다 황제에게 절실히 경계한 것이다.
太后가
臨終 때에 역시 눈물을 흘리며
晉主에게 말하기를 “
桃符는 성격이 급하고 너는 형이 되어 자애롭지 못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염려되어 너에게 부탁하니, 나의 말을 잊지 말거라.”
注+桃符는 齊王 司馬攸의 어릴 때 字이다.라고 하였다.
〈晉主의〉 질병이 악화되자 朝野에서 모두 사마유에게 뜻을 두었는데, 사마유의 妃는 賈充의 장녀였다.
河南尹 夏侯和가 가충에게 말하기를 “
卿의 두 사위는
親疏가 같으니, 어떤 사람을 황제로 세울 적에는 마땅히 덕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가충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注+두 명의 사위는 司馬攸와 太子이다.
사마유는 평소에 荀勖과 馮紞이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순욱이 풍담을 시켜서 晉主를 설득하기를 “폐하께서 전일에 병환이 완쾌되지 않았다면 齊王이 公卿과 百姓이 뜻을 두는 바가 되었을 것이니,
태자가 비록 높은 뜻으로 양보를 하려고 해도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藩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注+苦는 ≪資治通鑑≫에 若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니,
晉主가 속으로 받아들이고는 하후화를 옮겨
光祿勳으로 삼고, 가충의 병권을 빼앗았지만 그 지위와 대우는 변함이 없었다.
注+賈充은 文帝(司馬昭) 때부터 병력을 거느렸다. 位는 직위이고, 遇는 예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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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羊祜가 상소를 올려 吳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운은 비록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지만, 功業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이룩되는 법이니, 한 번 크게 일어나 쓸어버리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도모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를 결정하는 것은 임금께서 홀로 해야 합니다. 험준한 지역에 의지하여 온전함을 얻는 것은 그 세력과 힘이 비슷한 경우일 뿐이니, 만약 경중이 같지 않고 강약의 형세가 다르면 비록 험준한 지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존할 수 없습니다.
蜀漢이란 나라는 〈땅이 험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르기를 ‘한 사내가 창을 집고 지키면 천 명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군대를 진격시키는 날에는 울타리의 한계가 없어 승세를 타고 멍석을 말 듯 신속하게 成都에 이르렀으니,
漢中의 여러 성이 모두 새들이 둥지를 틀 듯 굳게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한 것은 진실로 힘이 부족하여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注+漢中의 諸城은 漢城과 樂城을 말한다.
지금 長江과 淮河 지역의 험함은 劍閣만 못하고, 孫皓의 폭정은 劉禪보다 지나쳐서 吳나라 사람들이 겪는 곤란이 巴蜀보다 심하며,
위대한
晉나라의 병력이 과거보다 강성하니 이때에 천하를 평정하여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다시 험준한 곳에서 병사들이 지키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정벌하고 지키는 것으로 곤란을 겪게 하면 강성한 병사들이 쇠약해져 오래 갈수가 없습니다.
注+〈“經歷盛衰”는〉 병사들이 장년의 나이에 수자리를 살러 나가서 營陣에서 세월을 보내다 노쇠함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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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지금 만약
梁州와
益州의 병력을 이끌고 수로와 육로로 함께 내려가고,
注+王濬과 唐彬이 梁州와 益州의 병력을 통솔하였다. 荊과
楚의 군대가 나아가서
江陵까지 이르며,
注+荊과 楚 지역은 羊祜가 통솔한 곳이다. 平南將軍과
豫州刺史가 곧바로
夏口를 겨냥하고,
注+胡奮은 平南將軍이었고, 王戎은 豫州刺史였다.
徐州,
揚州,
靑州,
兗州에서 함께 나아가
秣陵(
建業)에서 함께 모이도록 하면
注+徐州와 揚州는 王渾이 통솔하였고, 靑州와 兗州는 琅邪王 司馬伷가 통솔하였다. 한 귀퉁이에 있는
吳나라로 천하의 병사를 대적하는 격이라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형세가 되어 대비가 급박해질 것이니,
한 곳이 무너지면 상하가 놀라 크게 소란해져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吳나라를 위해 계책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吳나라는
長江에 의지하여 세운 나라여서 동서가 수천 리가 되어 대적할 곳이 넓어 편안하게 쉴 수가 없고, 손호는 방자하고 사나워 장수들이 의심하고 병사들이 피곤하여
注+將(장수)은 子亮의 切이다. 평일에도 오히려 떠나가기를 생각하니,
우리 병사들이 나아가면 반드시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아울러 그들의 습속이 성급하여 지구전에 능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활과 쇠뇌, 창과 방패가 中國만 못하니, 오직 水戰이 익숙하지만,
한 번 그들의 경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長江이 다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고, 후퇴하여 그들의 城池에 들어가면 유리한 곳을 버리고 불리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우리들의 적수가 아닙니다.” 晉主(司馬炎)가 이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논의하는 자들 가운데 의견이 같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賈充‧荀勖‧馮紞이 더욱 吳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자, 양호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 가운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보통 열에 일고여덟이로다.
하늘이 준 기회를 받지 않으니, 어찌 그 일을 다시 경험할 자가 나중에 한스러워하지 않겠는가.”
注+〈“豈非更事者恨於後時哉”는〉 吳나라를 취할 수 있는데 취하지 않아 한 번 기회를 잃으면 그 일을 지나쳐 버린 자가 어찌 훗날에 한스러워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오직
杜預와
中書令 張華만
晉主와 뜻이 맞아서 그 계책에 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