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兗州와 豫州 등에 칙령을 내려 漢나라 때 있던 옛 제방을 보존하여 물을 저장하게 하고 나머지는 제방을 모두 터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곳의 물고기와 수초, 소라나 조개 같은 것을 넉넉히 얻도록 하면 이 방법이 눈앞에 그날의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螺(소라)는 盧戈의 切이니, 蜯(방합)의 부류이다. 蜯은 步項의 切이니, 蚌과 同字로 蜃의 부류이다.
홍수가 지나간 다음에 진흙이 메워진 밭에서 이랑당 몇 鍾(부피 단위)의 수확을 얻으면 이것은 또 다음 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淤(진흙)는 依據의 切이니, 진흙이다.
典牧(목축 담당 관리)에게 種牛(종자 소) 4만 5천여 頭가 있으니, 백성들에게 공급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도록 하여 그 조세를 받게 하면 이는 또 몇 년 뒤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晉書≫ 〈職官志〉에 “典牧令은 太僕에 속한다.” 하였다. 種(심다)은 朱用의 切이니, 種植(초목을 심다)의 種과 같다.
晉主가 그 의견을 따르니, 백성들이 그 이익에 의지하였다. 두예가 7년 동안 尙書로 있으면서 여러 정무를 줄이거나 보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注+泰始 6년(270)에 杜預가 度支尙書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7년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杜武庫’라고 하였으니, 그가 빠짐없이 갖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杜預
綱
[綱] 吳나라가 中書令張尙을 죽였다.
目
[目] 吳主(孫皓)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꺼려하였는데, 張尙은 사람됨이 말을 잘하고 민첩하여 말할 때마다 그 의표를 드러내니,注+張尙은 張紘의 손자이다.吳主가 한스러워하는 감정을 쌓아두었다.
그 후에 묻기를 “孤가 술을 마시는 것을 누구에게 비할 수 있겠는가?”注+方은 비유하다는 뜻이다.라고 하니, 장상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100觚의 주량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吳主가 말하기를 “장상은 孔丘가 왕 노릇을 못한 것을 알고서도 짐을 그에게 비유하였다.”라고 하고, 그로 인해 화를 내어 그를 죽였다.注+≪孔叢子≫에 이르기를 “趙나라 平原君이 孔子高와 술을 마시면서 공자고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堯 임금은 1,000鍾을 마시고, 孔子는 100觚를 마셨으며, 子路는 말이 많았지만 오히려 10榼을 마셨다.」라고 하였다. 옛날의 성현들은 술을 마시지 못한 자가 없었는데, 그대는 어찌 사양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하였다. 觚는 술잔이니, 2升이 들어간다. 王(왕 노릇 하다)은 于況의 切이다.
綱
[綱] 겨울에 晉나라가 衛瓘을 尙書令으로 삼았다.
目
[目] 이때에 朝野에서는 太子가 우둔하여 後嗣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衛瓘이 아뢰려고 하였으나 감히 못하였다.
마침 凌雲臺에서 晉武帝를 모시고 잔치할 적에注+凌雲臺는 魏文帝 때 지어진 것이다. 위관이 술 취한 척하며 晉主의 앞에 꿇어앉아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친 것이 세 차례였다.
이어서 손으로 용상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가 참으로 아깝습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그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이어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공은 정말 크게 취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東宮의 官屬들을 모두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尙書臺에서 아직 처결하지 못한 안건을 밀봉하여 태자에게 결정하도록 하니, 賈妃가 크게 두려움에 떨며 밖에 있는 사람의 손을 빌어 대신 답을 하게 하면서 대부분 古義(고서의 의리)를 인용하였다.注+倩(빌리다)은 七正의 切이니, 〈“倩外人”은〉 남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給使張泓이 말하기를注+給使는 給東宮使令이다. 泓은 烏宏의 切이다. “태자께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폐하께서도 아시는 사실이니, 의견을 그대로 답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賈妃가 크게 기뻐하며 장홍에게 말하기를 “곧 나를 위해 좋은 답을 한다면 부귀를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注+“與我”는 ≪資治通鑑≫에 “爲我”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홍이 바로 초안을 만들어 태자 자신에게 베껴 쓰도록 하였다.
晉主가 살펴보고는 아주 기뻐하면서 먼저 위관에게 보여주니, 위관이 크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위관이 태자에 관해 말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注+“踧踖”은 스스로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賈充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賈妃에게 말하기를 “위관 이 늙은이가 네 집안을 망칠 뻔하였다.”라고 하였다.
綱
[綱] 吳나라 사람들이 皖城(환성)을 대규모로 개간하자 晉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目
[目] 吳나라 사람들이 皖城을 대규모로 개간하고 晉나라의 변경을 침입할 것을 모의하였는데,注+佃(개간하다)은 亭年의 切이니, 밭을 개간한다는 뜻이다.晉나라의 都督揚州諸軍事王渾이 병력을 보내어 공격하여 격파하니,
목을 벤 것이 5천 級이고, 저장된 곡식 180여만 곡을 불태웠으며, 稻苗 4천여 頃을 짓밟았고, 배 600여 척을 부수었다.
綱
[綱] 11월에 晉나라가 조서를 내려 기이한 기예와 이상한 의복을 바치지 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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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晉나라 太醫司馬程據가 雉頭裘를 바쳤는데,注+≪晉書≫ 〈職官志〉에 “太醫는 宗正에 속한다.” 하였다. 꿩의 머리털이 색이 화려하고 찬란하여 모아서 갖옷을 만든 것이다.晉主(司馬炎)가 이를 궁전 앞에서 태우고 그로 인해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
晉 武帝가 雉頭裘를 불태워 검소함을 보이다
綱
[綱] 晉나라가 杜預를 鎭南大將軍都督荊州諸軍事로 삼았다. 鉅平侯羊祜가 卒하였다.
目
[目] 羊祜가 병이 위독해지자 杜預를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고 卒하니, 晉主(司馬炎)가 몹시 애달프게 곡을 하였다. 양호가 유언을 남겨
晉主가 말하기를 “양호가 진실로 몇 년간 사양을 하였는데, 몸이 죽어서도 사양함을 보존하였으니,注+〈“身沒讓存”은〉 자신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侯의 인장을 사양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다시 본래 封爵을 회복시켜서 그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점을 빛나게 하라.”라고 하고, 諡號를 成이라 하였다.注+羊祜는 본래 鉅平侯에 봉해졌다.
南州(荊州) 백성들이 양호가 卒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장을 열지 않고, 골목에서 곡을 하였으며,注+南州는 荊州를 말한다.吳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將士들도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양호는 峴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注+峴은 胡典의 切이니, 峴山은 襄陽城 남쪽 10리에 있다.襄陽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고는 歲時에 제사를 올리니, 비석을 바라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 비를 ‘墮淚碑’라고 하였다.
두예가 진영에 이르러 정예병을 선발하여 吳나라의 西陵督인 張政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장정은 吳나라의 이름난 장수인지라 패배를 부끄러워하여 그 사실을 吳主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두예가 이들을 이간질하려고 晉主에게 표문을 올려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하니, 吳主(孫皓)가 과연 장정을 소환하고 留憲을 보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綱
[綱] 晉나라 司空何曾이 卒하였다.
目
[目] 何曾이 후하게 자신을 봉양한 것이 임금보다 더하였는데, 司隷劉毅가 자주 탄핵을 하였지만, 晉主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가 卒하자 博士秦秀가 논의하기를 “하증이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도를 지나쳤으며 이름이 九域을 덮었으니,注+九域은 九州 지역이다. 만약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죽어서도 아무런 폄론이 없다면 王公이나 貴人이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삼가 諡法을 살펴보건대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繆’라 하고, 어지러움을 틈타 이익을 취하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醜’라 하니, 마땅히 諡號를 繆醜公이라고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晉主가 詔策으로 ‘孝’라는 시호를 내렸다.注+“策諡”는 博士의 논의를 쓰지 않고 詔策으로 諡號를 하사한 것이다.
綱
[綱] 晉나라 淸泉侯傅玄이 卒하였다.
目
[目] 傅玄은 성격이 엄격하고 급하여 司隷가 되어 매번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릴 때에 혹 해가 저물고 나면 白簡(관원을 탄핵하는 상주문)을 받들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초조해하며 잠을 자지 않고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注+簡은 간단한 문서이다. 옛날에는 笏을 잡고 있다가 일이 있으면 기록하였기 때문에 늘 붓을 꽂고 있었다. 帶는 革帶이니, 옛날의 鞶帶이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들이 두려워하니, 臺閣에 새로운 기풍이 생겨났다. 卒한 뒤에 시호를 剛이라 하였다.注+≪周禮≫ 〈地官師氏〉에 “나라의 貴遊子弟가 그곳에서 배운다.”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貴遊子弟는 王公의 子弟이고, 遊는 관직이 없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부현은 尙書左丞崔洪과 잘 지냈는데, 최홍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람의 허물을 면전에서 나무라기를 좋아하고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존중하였다.
역주
역주1秋晉大水螟 :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螟蟲을 기록한 것이 다섯 번인데(漢 武帝 元光 5년(B.C.130)에 자세하다.),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으니, 이는 史官이 빠뜨린 것이다.[終綱目 書螟五(詳漢武帝元光五年) 舍是無書者矣 史失之也]” ≪書法≫
역주2左民曹과 度支曹 :
左民曹는 三國時代 魏나라의 民曹를 바꾸어 설치한 것인데 尙書가 長官이었다. 修繕功作, 鹽池, 園苑 등 土木工程을 담당하였다. 度支曹는 魏‧晉 때에 처음 설치하였는데, 全國의 財政 收支를 담당하였다. 長官은 度支尙書였다.
역주3吳殺其中書令張尙 :
“甲申年(264)부터 이해(278)까지 ≪資治通鑑綱目≫에서 ‘殺’이라고 기록한 것이 모두 열한 번인데, 전부 無罪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그중에〉 孫皓가 열 번을 차지한다. 손호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이와 같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自甲申至是 綱目凡十一書殺 皆殺無罪也 而孫皓居其十 皓之淫虐如此 不亡得乎]” ≪書法≫
역주4南城侯의……하니 :
羊祜(221~278)는 晉나라 泰山 南城 사람으로, 晉 武帝가 양호에게 태산 남쪽의 5개 縣을 떼어 주어 南城侯에 封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양호가 죽은 뒤에 武帝는 侍中과 太傅를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征南大將軍 南城侯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양호의 從弟 羊琇가 양호의 유언을 전하여 南城侯의 인장을 靈柩에 넣지 말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무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發引을 하고 나서 무제는 大司馬門에서 상여를 전송하였는데 양호의 아내가 侯爵으로 斂襲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양호에 대해 “몸은 죽어도 사양함을 보존하였다.[身沒讓存]”라고 칭찬하고 본래 封爵을 회복시켜서 높고 아름다운 점을 빛나게 하라고 하였다.(≪晉書≫ 〈羊祜列傳〉)
역주5(主)[王] :
저본에는 ‘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