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魏나라 荊州와 豫州의 都督인 王昶이 新野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注+≪三國志≫ 〈魏書王昶傳〉에 의하면 揚은 마땅히 荊으로 되어야 한다.
目
[目] 王昶이 上言하기를 “땅은 변하지 않는 험준함이 있으나 수비는 고정된 형세가 없다. 지금 宛에 주둔하여 襄陽과의 거리가 3백여 리니, 급보가 있어도 서로 달려가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新野로 옮겨서 주둔하였다.
역주
역주1日食旣 :
“皆旣日蝕은 큰 변고이다. 이로부터 陳祗와 黃皓가 권력을 부려서 蜀漢이 망하였으므로 이를 삼가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일식을 기록한 것이 367번이고, 皆旣日蝕은 12번인데 모두 크게 감응하지 않은 적이 없다.(惠帝 7년 〈5월 조에〉 자세하다.)[食旣 大變也 自是 陳祗黃皓用事 而漢亡矣 故謹書之 終綱目 書日食 三百六十七 而食旣者十二 無不有大應者也(詳惠帝七年)]” ≪書法≫
역주2(揚)[荊]豫都督 :
저본에는 ‘揚’으로 되어 있으나, 아래 訓義에 의거하여 ‘荊’으로 바로잡았다. 荊豫都督은 都督荊州豫州諸軍事를 가리킨 것이다. 督은 後漢 光武帝 시기에 督軍御史라는 직명이 보이나 後漢 말기에서 三國時代에 집중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혼란으로 인해 刺史를 중심으로 한 지방통치체제가 한계를 나타내고, 또한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주둔군의 사령관이 그 지방의 민정까지 통할하게 되면서 都督某州諸軍事, 또는 都督諸州諸軍事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吳나라와 蜀나라는 군사적 요지에 督이나 都督을 두어 그 지역의 민정까지 통할하였으며, 魏나라의 경우 文帝 黃初 初期에 정식으로 都督諸軍事를 두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