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 제17권 하 晉惠帝元康 9년(299)~晉惠帝永興 원년(304) 己未年(299) [綱] 가을 8월에 侍中賈模가 卒하니, 裴頠(배외)를 尙書僕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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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賈后가 음란함과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太醫令인 程據 등과 은밀히 간통하였다. 裴頠가 賈模, 張華와 함께 황후를 폐위하고 다시 謝淑妃를 황후로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注+謝淑妃는 태자의 어머니이다.
가모와 장화가 모두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주상이 스스로 황후를 폐하고 내칠 뜻이 없으신데, 우리들이 멋대로 행했다가 혹시라도 성상이 옳게 여기지 않으시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여러 왕들이 한창 강성하여 각각 붕당을 세우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화가 일어나면 목숨도 잃고 나라도 위태로워 社稷에 유익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배외가 말하기를 “진실로 공의 말씀과 같다. 그러나 中宮이 혼우하고 포학한 짓을 자행하니, 난이 당장 일어날 수 있다.” 하니,
장화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卿 두 분은 모두 중궁의 친척이므로 말씀을 드리면 믿음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마땅히 禍를 초래하지 않도록 警戒의 말씀을 자주 아뢰어 거의 큰 잘못이 없게 하면 천하가 아직 혼란에 이르지 않아 우리들이 편안히 놀면서 한 해를 마칠 수 있습니다.”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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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裴頠가 아침저녁으로 그의 從母인 廣城君郭槐를 설득하여 賈后에게 태자를 친애하고 후대하도록 경계하고 타이르게 하였으며, 賈模도 여러 번 가후를 위하여 禍와 福을 말하자, 가후는 도리어 가모가 자기를 훼방한다 하여 소원하게 대하니, 가모가 우울과 분통 속에서 지내다가 卒하였다.
배외는 비록 가후의 친족이었으나 평소 명망이 높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행여 권세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배외를 尙書僕射로 임명하고 또 詔令을 내려서 門下省의 일을 전담하게 하니,注+晉나라 제도에 侍中과 給事黃門侍郞이 함께 門下省의 일을 관장하였다. 裴頠가 시중이 되어서 문하성의 일을 전담한 것은 賈后의 뜻이다. 배외가 表文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혹자가 배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진언할 수 있으면 마땅히 中宮에게 말을 다해야 할 것이요, 말을 해도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 만일 두 가지 중에 하나도 하지 못하면 비록 표문을 10번 올리더라도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으나, 배외는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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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황제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미련하였다.注+騃는 語駭의 切이니, 어리석음이다. 일찍이 華林園에 있으면서 蝦蟆(개구리 따위의 양서류)의 울음소리를 듣고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蝦蟆가 官을 위해서 우는가? 사사로운 개인을 위해 우는가?”注+魏나라가 芳林園을 세웠는데, 뒤에 齊王曹芳의 諱를 피하여 ‘華林園’으로 고쳤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하였다.
이때 천하에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어 죽었는데,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注+麋는 忙皮의 切이니, 죽을 말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권세를 차지하여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와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세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집안들이 번갈아 서로 사람을 추천하고 청탁해서 벼슬을 마치 서로 물건을 사고팔듯이 하였으며,
賈氏와 郭氏 집안이 횡포를 부려서 뇌물을 공공연하게 주고받으니, 南陽魯褒가 〈錢神論〉을 지어 비난하였다.注+〈錢神論〉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돈은〉 德이 없으면서도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가 없으면서도 힘이 성대해져 고관대작의 집으로 들어가고 대궐문으로 들어가서 위태로운 자를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며 귀한 자를 천하게 할 수 있고 산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벼슬길이 침체한 자는 돈이 아니면 승진하지 못하며,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리지 못하고 좋은 명성은 돈이 아니면 드러나지 못한다. 붉은 관복을 입고 요직에 있는 洛陽의 선비들이 모두 우리 家兄(돈)을 끊임없이 좋아한다. 우리 가형의 손을 꼭 잡고서 품속에서 절대로 떨어트리지 않으니, 지금 사람들에게는 오직 돈이 최고이다.”
또 조정의 신하들이 까다롭게 살피는 것을 서로 숭상하고,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의논이 있을 때마다 각기 사사로운 의견을 주장하니, 형률이 일치되지 못하여 獄訟이 크게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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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尙書劉頌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근세 이래로 법령이 점점 여러 곳에서 나와 법령이 매우 통일되지 못하니, 관리들이 지킬 방법을 알지 못하고 아랫사람이 피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군주와 신하의 직분이 각각 맡은 바가 있는데, 법은 반드시 받들고자 하므로 법을 주관하는 자로 하여금 법조문을 지키게 하고,
논리는 궁하고 막힘이 있으므로 大臣으로 하여금 침체함을 풀어주게 하고, 일에는 시의에 적절함이 있으므로 군주가 권력으로 결단합니다.
본래 이러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법령에 따라 처리하니, 그런 뒤에야 법이 아랫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아 政事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詔令을 내려서 郞과 令史로 하여금 다시 법령에서 벗어나 논박하는 자들을 일에 따라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또한 고치지 못하였다.注+郞과 令史는 尙書郞과 尙書令史‧蘭臺令史이다. “出法駁案”은 법 밖으로 나와서(법을 초월하여) 논박함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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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裴頠가 平陽 사람 韋忠을 張華에게 천거하자注+魏나라 邵陵厲公正始 8년(247)에 河東郡의 汾北을 나누어 平陽郡으로 만들었다. 장화가 그를 辟召하였는데, 위충은 병으로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위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張茂先은 화려하기만 하고 실제가 없으며 裴逸民은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떳떳한 禮를 버리고 역적인 황후를 따르니, 이것이 어찌 대장부가 할 짓이겠는가.注+茂先은 張華의 자이고, 逸民은 裴頠의 자이다. 厭(만족하다)은 於鹽의 切이다. 항상 그 깊은 못에 빠져서 餘波가 나에게 미칠까 염려되니, 하물며 내가 치마를 걷고 나아가겠는가.”
關內侯索靖(삭정)은 천하가 장차 혼란할 줄을 알고注+索은 蘇各의 切이다.洛陽의 宮門에 있는 銅으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마침내 네가 가시나무 덤불 속에 묻히는 것을 보겠구나.”注+“銅駝”는 蜀漢後主建興 15년(237)에 魏나라 明帝가 長安에서 洛陽으로 옮겨왔다.
[目] 처음에 廣城君郭槐는 賈后가 자식이 없다 하여 항상 가후에게 太子를 사랑할 것을 권하였고, 韓壽의 딸을 태자의 妃로 삼고자 하였다.
태자도 韓氏와 혼인하여 스스로 지위를 견고히 하고자 하였으나, 한수의 아내인 賈午와 가후가 모두 듣지 않고 태자를 王衍의 작은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注+賈午는 賈后의 여동생이다.
태자는 왕연의 長女가 아름다운데 가후가 賈謐(가밀)을 그녀에게 장가들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불평을 하여 이것을 자주 말하였다.
뒤에 광성군이 병이 들어 임종할 때 가후의 손을 잡고 태자에게 마음을 다하라고 당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趙粲과 賈午는 반드시 너의 집안을 어지럽힐 것이다.”注+趙粲은 武帝의 궁인이다. 하였다.
그러나 가후는 이를 따르지 않고 다시 조찬과 가오와 함께 태자를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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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太子가 어려서는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장성하자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좌우의 시종들과 장난하고 놀았으며, 賈后가 또 환관들로 하여금 태자를 유인해서 사치하고 포악한 행위를 하게 하니, 이 때문에 평판이 점점 나빠졌다.
태자는 종종 조정에서 황제를 모시는 것을 폐하고 방종하게 놀고 안일하였으며, 궁중에 시장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를 썰어 팔고 술을 팔게 하고, 태자가 직접 고기의 斤兩을 저울질하면 무게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는데,注+屠는 고기를 써는 것이다. 酤는 술을 파는 것인데, 일설에는 “술을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본래 백정의 딸이었으므로 태자가 이것을 좋아한 것이었다.
게다가 西園에서 아욱과 채소, 쪽 열매와 닭, 麵 등의 물건을 팔게 하여 그 이익을 거두었고, 또 陰陽의 術數를 좋아하여 피하거나 꺼리는 것이 많았다.注+葵 또한 채소이다. 藍(쪽)은 盧甘의 切이니, 풀 중에 청색을 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本草圖經≫에 이르기를 “쪽 열매는 사람들의 집에 딸린 채소밭에 두둑을 만들어 심는다. 3, 4월에 싹이 나오는데, 싹의 높이가 3, 4尺이며 잎은 여뀌와 같고 꽃은 홍백색이다. 열매도 여뀌와 같으나 크기가 크고 흑색이며 5, 6월에 열매를 딴다.” 하였다. 麪은 소맥을 갈아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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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洗馬江統이 太子에게 上書하여 다섯 가지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注+다섯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비록 약간의 고통(병환)이 있더라도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황제를 뵙고 모셔야 할 것이요, 두 번째는 마땅히 부지런히 保傅를 뵙고 善한 방도를 물어야 할 것이요, 세 번째는 방을 아름답게 꾸미는 공사를 우선 줄이고 後園의 조각하는 여러 일을 한결같이 모두 없애야 할 것이요, 네 번째는 西園에서 아욱과 쪽을 파는 일은 국가의 체통을 손상하고 훌륭한 명성을 훼손하는 것이니 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다섯 번째는 담장을 수리하고 기와를 바르게 놓는 일은 굳이 사소한 禁忌에 구애될 필요 없이 시행해야 할 것이다.
中舍人杜錫이 매번 忠心으로 諫言을 극진히 올려서 태자에게 德業을 닦고 훌륭한 명성을 보존할 것을 매우 간절한 말로 권하니,注+≪晉書≫ 〈職官志〉에 “太子中舍人이 네 사람인데 咸寧 4년(278)에 두었는바, 舍人 중에 재주와 학문이 뛰어난 자를 이 벼슬에 임명하여 中庶子와 함께 文翰을 관장하게 하니, 직위가 黃門侍郞과 같았으며 중서자의 아래와 洗馬의 위에 있었다.” 하였다. 杜錫은 杜預의 아들이다.
태자가 이것을 싫어하여 두석이 항상 앉는 털방석 가운데에 바늘을 꽂아놓아 거기에 찔려 피가 흐르게 하였다.注+著(놓다)은 陟略의 切이다.
태자는 성질이 剛直하여 賈謐이 中宮을 믿고 교만하게 구는 것을 알고 너그럽게 보아 넘기지 못하였다.注+〈“不能假借之”는〉 상대방에게 말과 얼굴빛을 너그럽게 꾸미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가밀이 賈后에게 참소하기를 “태자가 사사로운 재물을 많이 저축하여 소인들과 결탁하는 것은 우리 賈氏를 제거하려는 것이니, 일찍 계책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가후는 마침내 태자의 단점을 소문내고 또 거짓으로 자신이 임신을 했다 하여 볏짚으로 만든 물건(해산에 사용하는 물품의 일종)과 해산 준비물을 안으로 들이게 하고는 妹夫인 韓壽의 아들을 데려다가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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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 朝野에서는 모두 賈后가 太子를 살해할 뜻이 있음을 알았다. 左衛率劉卞이 이 일을 가지고 張華에게 묻자,注+率은 所律의 切이다. 황제가 東宮에 있을 적에 衛率을 설치하니 처음에는 中衛率이라고 하였다. 泰始 5년(269)에 이것을 나누어 左衛率과 右衛率로 삼아 각각 한 軍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愍懷太子가 동궁에 있으면서 또 다시 前衛率과 後衛率을 더하니, 이것을 ‘四率’이라 이른다. 민회태자는 司馬遹의 시호이다. 장화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유변이 말하기를 “東宮에는 준걸들이 숲처럼 많고 四率의 정예병이 만 명이니, 만약 공의 명령을 얻는다면 황태자가 조회할 때를 인하여 들어가 錄尙書事의 직임을 맡고, 賈后를 金墉城에 廢하는 것은 黃門(환관) 두 명의 힘이면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장화는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지금 천자는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있고, 태자는 자식의 입장에 있다.注+군주가 남쪽을 향하여 밝은 곳을 보고 서서 천하를 다스리므로 “當陽”이라 한 것이다. 나는 또
의 직책에 임명되지 않았는데,注+〈“吾又不受阿衡之命”은〉 張華가 자신이 맡은 일과 임무는 伊尹으로 자처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갑자기 서로 이것을 행하면 이는 君父를 무시하고 불효하는 것을 천하에 보이는 것이다.
비록 능히 성공하더라도 오히려 죄를 면치 못할 터인데, 하물며 권력이 있는 친척들이 조정에 가득해서 위엄과 권력이 통일되지 않으니, 성공을 기필할 수 있겠는가.”
가후는 자못 이 말을 듣고는 劉卞을 雍州刺史로 삼으니, 유변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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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12월에 황후가 거짓으로 황제가 편치 않다고 사칭하고 태자를 불러 入朝하게 하였다. 태자가 오자 별실에 가두어두고 계집종인 陳舞를 보내어 황제의 명으로 술 서 되를 하사하고 재촉하여 다 마시게 하니, 태자가 마침내 크게 취하였다.
황후가 黃門侍郞인 潘岳으로 하여금 글의 초고를 짓게 하면서 詔令이라고 칭하고 쓰게 하였다. 이 글에 “폐하가 마땅히 스스로 생을 마쳐야 하니 스스로 마치지 않으면 내가 응당 들어가서 마치게 할 것이요,
中宮이 마땅히 스스로 속히 생을 마쳐야 하니 스스로 마치지 않으면 내가 응당 내 손으로 마치게 하겠다. 그리고 아울러 謝妃와 함께 약속하고 기한을 정하여 두 곳에서 함께 출동해서 患害를 제거할 것이다.”注+要는 약속함이니, 〈“幷與謝妃共要……掃除患害”는〉 함께 이 글을 가지고 謝妃와 약속하고 기일을 정하여 內外가 함께 출동함을 말한 것이다. 하니,
태자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서 마침내 쓰라는 대로 썼으나, 글자의 태반은 제대로 글자가 되지 못하였다. 황후가 글자를 보충하여 작성해서 황제에게 올렸다.
賈后가 皇太子를 모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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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황제가 式乾殿에 행차하여注+式乾殿은 마땅히 皇后宮에 있었을 것이다. 坤은 어머니가 되고 乾은 아버지가 되는바, 〈“式乾”은〉 황후가 천하의 어머니가 되어서 乾을 법식으로 삼음을 말한 것이니, 남편을 따르라는 뜻이다.公卿들을 불러 들어오게 해서 태자의 글을 보여주고 말하기를 “司馬遹의 글이 이와 같으니, 사약을 내리노라.” 하였다.
여러 王公들 중에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張華가 말하기를 “이것은 나라의 큰 禍입니다. 예로부터 항상 正嫡을 폐출함으로 인하여 멸망과 혼란을 초래하였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자세히 살피소서.” 하였다.
裴頠는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이 글을 전한 자를 조사하여 비교하라.” 하고, 또 청하기를 “태자가 손수 쓴 글인가를 비교하여야 하니, 속임수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의논이 해가 기울 때까지도 결단을 보지 못하였다.
황후는 일이 뒤바뀔까 염려해서 마침내 글을 올려 태자를 파면하여 庶人으로 삼기를 청하자, 황제가 조령을 내려 허락하고 그의 아들 司馬虨과 司馬臧과 司馬尙을 모두 金墉城에 유폐하였다.注+虨과 臧과 尙은 太子의 세 아들의 이름이다. 虨은 甫斤과 方閑의 두 가지 切이다.
王衍은 스스로 표문을 올려 태자와 이혼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謝淑媛을 죽였고, 사마반도 얼마 후 卒하였다.
역주
역주1돈의……있어서 :
乾과 坤의 두 형상이 있다는 것은 돈(동전)의 모양이 바깥은 하늘처럼 둥글고 안은 땅처럼 네모난 뜻을 취하여 말한 것이다.
역주2字를……한다 :
돈을 ‘孔方’이라고 칭하는바, 돈의 구멍이 네모난 모양임을 뜻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3張釋之가……것 :
張釋之는 漢나라 文帝 때의 명신이고, 犯蹕은 어가를 범한다는 뜻으로 황제가 출행할 적에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도록 辟除하는 것을 범함을 이른다. 장석지가 廷尉를 맡아 법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집행하였는데, 한번은 문제가 中渭橋를 지날 적에 다리 아래에 있던 사람이 달려 나와 御駕의 말이 놀랐다. 문제가 장석지에게 처리하게 하자 “한 사람이 犯蹕한 행위이므로 벌금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문제가 노하여 더 무겁게 처벌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장석지가 법규에 따라야 한다고 설득하니, 문제가 결국 수긍하였다.(≪史記≫ 권102 〈張釋之列傳〉, ≪資治通鑑≫ 권14 漢 文帝 3년)
역주4公孫弘이……것 :
郭解는 武帝 때의 협객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아 布衣의 평민이면서도 권세가 막강하였으며 증오하는 인물이 있으면 반드시 살해했는데, 훗날 행실을 고쳐 공손하게 살았으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어떤 儒生이 곽해가 마음대로 法을 범하여 어질지 않다고 비판하자 곽해의 門客이 곽해 모르게 이 유생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御史大夫 公孫弘이 논죄하기를 “곽해는 평민의 신분으로 豪俠을 좋아하고 권세를 행사하는 자이다. 사소한 원한 때문에 살인하였는데 곽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는 곽해가 죽인 것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한 죄이니, 大逆無道한 죄로 처단해야 한다.” 하여 마침내 곽해를 멸족하였다.(≪漢書≫ 권92 〈遊俠傳〉, ≪資治通鑑≫ 권18 漢武帝 元朔 2년)
역주5漢나라……것 :
丁公은 楚나라 項羽의 장수로 高祖 劉邦을 추격하여 彭城의 서쪽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고조가 “두 훌륭한 인물이 어찌 서로 해치려고 하는가?[兩賢豈相厄哉]”라고 설득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항우가 죽자 정공이 고조를 찾아갔는데, 고조는 정공이 항우의 신하로서 불충하였다는 죄목으로 정공을 참수하여 후세의 신하들이 그를 거울삼도록 하였다.(≪史記≫ 권100 〈季布列傳〉, ≪資治通鑑≫ 권11 漢 高祖 5년)
역주6關內侯……하였다 :
索靖(239~303)은 惠帝 때에 關內侯가 된 인물로, ≪晉書≫ 권60 〈索靖列傳〉에 “삭정이 선견지명과 원대한 기국이 있어 천하가 장차 혼란할 줄을 알고 洛陽의 宮門에 있는 銅으로 만든 낙타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마침내 네가 가시나무 덤불 속에 묻히는 것을 보겠구나.’ 하였다.[靖有先識遠量 知天下將亂 指洛陽宮門銅駝 歎曰會見汝在荊棘中耳]”라고 하였다.
역주7廢太子遹爲庶人 :
“司馬遹를 폐위한 것은 賈后인데 ‘皇后’라고 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황제의 죄를 질책한 것이다. 황제가 아버지가 되어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죄가 진실로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근본을 바로잡기 때문에 ‘가후가 폐했다.’고 쓰지 않았고, 그를 죽임에 이르러서는 ‘가후가 죽였다.’고 썼다.[廢遹者 賈后也 不書皇后 何 罪帝也 帝爲人父而不能辨其詐 則罪固不在人矣 綱目正本 故不書后廢 至其殺之也 則書后殺矣]” ≪書法≫
역주8阿衡 :
商나라 때의 가장 높은 벼슬자리인데, 伊尹이 일찍이 이 관직을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湯王의 어진 재상인 이윤을 가리키기도 하고 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書經≫ 〈商書 太甲〉에 “새로 즉위한 왕이 아형에게 불순히 하였다.[惟嗣王 不惠于阿衡]”고 하였는데, 蔡沈의 ≪集傳≫에 “아형은 商나라의 관직 이름으로, 천하가 의지하여 균평하게 됨을 말한 것이니, 또한 保衡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윤의 호라고도 한다.[阿衡 商之官名 言天下之所倚平也 亦曰保衡 或曰 伊尹之號]”라고 보인다. 당시 이윤도 아형으로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湯王이 죽고 얼마 후 太甲이 즉위하였으나 방탕한 짓을 자행하자, 이윤은 그를 탕왕의 묘소가 있는 桐 땅으로 유배 보냈다가 태갑이 개과천선한 뒤에 그를 복위시키고 자신은 퇴임하였는바, 여기서는 張華가 賈后를 폐위시킬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