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南陽處士鄭方이 上書諫曰 大王이 安不慮危하여 燕樂過度하시니 一失也요
宗室骨肉
이 互相疑貳
하니 二失也
요 蠻夷不靜
이어늘 不以爲意
하니 三失也
注+蠻夷不靜, 謂李特等寇亂梁‧益也.요
百姓困窮
이로되 不聞振救
하니 四失也
注+此一失, 蓋指成都王穎運米, 以收河南人心, 而不敢察察言之耳.요 義兵有功
이로되 久未論賞
하니 五失也
注+此言潁上之功, 猶有未敍者.니이다
孫惠亦上書曰 天下에 有五難, 四不可어늘 而明公이 皆居之하니 冒犯鋒刃이 一難也요
聚致英豪 二難也요 與將士均勞苦 三難也요 以弱勝彊이 四難也요 興復皇業이 五難也며
大名不可久荷요 大功不可久任이요 大權不可久執이요 大威不可久居라
大王
이 行其難而不以爲難
注+謂在潁上時也.하고 處其不可而謂之可
하시니 惠竊所不安也
로소이다
明公
이 宜思功成身退之道
하여 委重二王
하고 長揖歸藩
이면 則太伯, 子臧
이 不專美於前矣
注+老子曰 “功成名遂身退, 天之道.” 二王, 長沙‧成都二王也. 吳太伯以天下讓, 曹子臧以國讓.리이다 冏
이 不能用
하니 恵辭疾去
하다
目
榮은 故酣飮하여 不省府事하니 以廢職으로 徙爲中書侍郞하다
潁川處士庾袞이 聞冏期年不朝하고 歎曰 晉室卑矣라 禍亂將興이라하고 帥妻子하여 逃於林慮山中하다
王豹致牋於冏曰 河間, 成都, 新野三王이 以方剛之年으로 竝典戎馬하여 處要害之地어늘
而明公이 挾震主之威하고 獨據京都하여 專執大權하시니 未見其福也니이다
請悉遣王侯之國하고 依周, 召之法하여 以成都王爲北州伯하여 治鄴하고
王自爲南州伯
하여 治宛
하여 分河爲界
하여 各統王侯
하여 以夾輔天子
注+周之時, 周‧召分陝而治, 爲二伯, 以夾輔王室, 故豹欲依以爲法.하라
目
長沙王乂見豹牋하고 謂冏曰 小子離間骨肉하니 何不銅駝下打殺이니잇고
冏
이 乃鞭殺之
하니 豹將死
에 曰 縣吾頭大司馬門
하여 見兵之攻齊也
注+縣, 讀曰懸. 昔伍子胥爲吳王夫差所殺, 將死, 曰 “縣吾目於吳東門, 見越之入吳也.” 豹倣此語.라하다
顒長史李含이 因說顒曰 成都王이 至親有大功이어늘 推讓還藩하니 甚得衆心이요
齊王이 越親而專政하니 朝廷側目이라 今檄長沙王하여 使討齊하면 齊王이 必誅長沙하리니
吾因以爲齊罪而討之하여 去齊立成都하여 除逼建親하여 以安社稷이면 大勳也리이다 顒이 從之하다
顒이 表陳冏罪하고 請長沙王乂廢冏하고 以穎輔政이라하고 遂擧兵하여 遣李含, 張方等하여 趨洛陽하다
目
[目] 張微가 李特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특의 진영으로 진격하였는데, 李蕩이 병력을 인솔하고 이특을 구원하여 마침내 장미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를 죽였으며,
李驤은
毗橋(비교)에 주둔해 있었는데
注+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懷安軍 西北에 中江이 있는데 漢州에서 발원하니, 彌牟, 雒水(낙수), 毗橋水 세 물이 합하여 하나의 강이 된다. 懷安軍은 漢나라 廣漢 新都縣 지역이다.” 羅尙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여러 번 패하였다.
이양이 마침내 成都로 진격하고 李流는 成都의 북쪽에 주둔하였는데, 나상이 날래고 용감한 병사 만 명을 보내어 이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양이 이류와 병력을 합하여 공격해서 대파하니, 살아 돌아온 자가 열에 한두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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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南陽 處士 鄭方이 글을 올려 司馬冏에게 다음과 같이 諫하였다. “大王이 편안하면서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편안하고 즐거움이 度에 지나치시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요,
宗室의
骨肉들이 서로 의심하고 배반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요,
蠻夷(오랑캐)들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잘못이요,
注+“蠻夷不靜”은 李特 등이 梁州와 益州 지역을 침략하고 어지럽힘을 말한 것이다.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창고를 열어 구휼한다는 말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네 번째 잘못이요,
注+이 한 잘못(네 번째 잘못)은 아마도 成都王 司馬穎이 쌀을 운반하여 河南의 人心을 수합한 것을 가리킨 것이나 〈司馬冏에게〉 이를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義兵이
功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論功行賞을 하지 않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잘못입니다.”
注+“義兵有功 久未論賞”은 潁水 가의 功에 대해 아직도 상을 내려주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孫惠 또한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에 다섯 가지 어려움과 네 가지 不可함이 있는데, 明公이 모두 이것을 차지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國家를 위해〉 칼날을 무릅쓰고 죽는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영웅호걸을 불러 모음이 두 번째 어려움이요, 장병들과 노고를 똑같이 함이 세 번째 어려움이요,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이기는 것이 네 번째 어려움이요, 황제의 기업을 회복함이 다섯 번째 어려움입니다.
큰 명성은 오랫동안 간직해서는 안 되고, 큰 功은 오랫동안 차지해서는 안 되고, 큰 권력은 오랫동안 잡아서는 안 되고, 큰 위엄은 오랫동안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大王이 그 어려움을 행하시면서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注+〈“行其難而不以爲難”은〉 潁水 가에 있을 때를 이른다. 不可함에 처하여서도 이것을
可하다고 생각하시니, 저는 삼가 불안하게 여깁니다.
明公은 마땅히
功이 이루어지면 몸이 물러가는 방도를 생각해서 조정의 막중한 권세를 두
王에게 맡기고는 길게 읍하고
藩國으로 돌아가시면
太伯과
子臧이 옛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注+≪老子≫에 이르기를 “功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이루어지면 몸이 물러남은 하늘의 도이다.” 하였다. 두 王은 長沙王(司馬乂)과 成都王(司馬穎)이다. 사마경이 그 말을 따르지 못하니, 손혜는 병으로 사양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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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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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榮은 일부러 술에 취해
府의 일을 살펴보지 않으니, 직무를 폐했다 하여
中書侍郞으로
轉職되었다.
顧榮이 거짓으로 술에 취해 齊王을 멀리하다
潁川의 處士인 庾袞(유곤)은 司馬冏이 1년 동안 황제에게 조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기를 “晉나라 황실의 권위가 쇠하였다. 禍亂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는 妻子를 거느리고 林慮山 속에 은둔하였다.
王豹는 사마경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다. “河間王(司馬顒)과 成都王(司馬穎)과 新野王(司馬歆)이 모두 한창 젊은 나이로 함께 군대를 주관하여 要害地에 주둔해 있는데,
明公은 군주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위엄을 가지고 홀로 京都를 점거하여 큰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복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王侯들을 모두 封國으로 돌려보내고 周公과 召公의 법을 따라 成都王을 北州伯으로 삼아 鄴에 治所를 두게 하고,
王은 스스로
南州伯이 되어서
宛에 치소를 두어서 황하를 나누어 경계를 삼아서 각각
王侯를 통솔하여
天子를 좌우에서 보필하십시오.”
注+周나라 때에 周公과 召公이 陝(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려서 두 伯이 되어 왕실을 좌우에서 보필하였다. 그러므로 王豹가 이것을 따라 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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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長沙王 司馬乂가 王豹의 편지를 보고 司馬冏에게 이르기를 “小子가 骨肉 간을 이간질하니, 어찌 구리로 만든 낙타 아래에서 그를 쳐 죽이지 않습니까.” 하였다.
사마경이 마침내 채찍으로 매질하여 그를 죽였는데, 왕표는 장차 죽을 적에 말하기를 “내 머리를
大司馬門에 매달아서 적병이
齊王(사마경)을 공격하는 것을 보게 하라.”
注+縣(매달다)은 懸으로 읽는다. 옛날 王豹가 이 말을 모방한 것이다. 하였다.
사마경은 河間王 司馬顒이 본래 趙王 司馬倫에게 붙었다 하여 그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사마옹의 長史인 李含이 이로 인하여 사마옹을 설득하기를 “成都王(司馬穎)이 황제의 至親으로 큰 功이 있는데, 자리를 사양하여 藩鎭으로 돌아가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크게 얻었고,
제왕이 소원한 친족인데도 정권을 독점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곁눈질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사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제왕을 토벌하게 하면 제왕이 틀림없이 장사왕을 誅殺할 것이니,
우리가 이것을 이용하여 제왕의 죄로 삼아 토벌해서 제왕을 제거하고 성도왕을 세워, 핍박하는 자를 제거하고 황제의 至親을 세워 社稷을 평안히 한다면 이는 큰 功勳입니다.” 하니, 사마옹이 그의 말을 따랐다.
사마옹이 표문을 올려 사마경의 죄를 아뢰고, 장사왕 사마예에게 사마경을 폐하고 사마영으로 정사를 보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서 李含과 張方 등을 보내어 洛陽으로 달려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