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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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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年(303)
二年이라 春二月 羅尙 大破李特하여 斬之하니 李流代領其衆하다
李特 潛渡江하여 擊羅尙하니 水上軍 皆散走注+水上軍, 郫水上軍也.
蜀郡太守以少城降이어늘 入據之호되 惟取馬以供軍하고 餘無侵掠하며
赦境內하고 改元建初하니 蜀民相聚爲塢者 皆送款於特이어늘 分流民於諸塢하여 就食하다
李流 言於特曰 諸塢新附하니 宜質其大姓子弟하고 聚兵自守하여 以備不虞니이다
怒曰 大事已定이라 但當安民이니 何爲更逆加疑忌하여 使之離叛乎
朝廷 遣荊州刺史宗岱等하여 帥水軍三萬하여 救尙하여 軍勢益盛하니 諸塢皆有二志
任叡言於尙曰 特 散衆就食하고 驕怠無備하니 天亡之時也
宜密約諸塢하여 刻期同發하여 內外擊之하면 破之必矣리이다
二月 遣兵하여 掩襲特營하니 諸塢皆應之 特兵 大敗어늘 斬特하여 傳首洛陽하다
李流及蕩, 雄 收餘衆하여 還保赤祖注+祖, 子邪切. 赤祖, 地名, 當在綿竹東.하여 自稱益州牧하여 保東營하고 蕩, 雄 保北營하다
遣督護何沖하여 攻流한대 流大破之하고 乘勝進扺成都하니 復閉城自守러니 中矛而死하다注+中, 去聲.
流以宗岱將至라하여 甚懼하여 欲降한대 李驤及特子雄 迭諫不納이어늘
乃誘說流民하여 與襲擊東軍하여 大破之하다
岱卒하여 軍退하니 流甚慙하여 由是 奇雄才하여 軍事 悉以任之하다
夏五月 義陽蠻張昌이어늘 詔以劉弘都督荊州軍事하다
新野王歆 督荊州하여 爲政嚴急하니 失蠻夷心이라
義陽蠻張昌 聚黨數千人하여 欲爲亂注+義陽, 本漢平氏縣之義陽鄕, 魏文帝黃初中, 分立義陽縣, 蓋治石城. 後分南陽郡, 立義陽郡, 治安昌城.이러니 州以詔發武勇하여 討李流하니 民憚遠征하여 皆不欲行이라
詔書督遣嚴急하여 所經郡界 停五日者 二千石免官하니
由是 郡縣官長 皆親出驅逐이러니 展轉不遠 輒復屯聚爲盜러라
張昌 因此하여 誑惑百姓하니 諸流民 避戍役 多往從之 江夏太守弓欽 討之러니 不勝하고 犇武昌注+弓, 姓也.하다
遂據江夏하여 得山都縣吏丘沈注+山都縣, 漢屬南陽郡, 晉屬襄陽郡.하여 更其姓名曰劉尼라하고 詐云漢後라하여
奉以爲主하고 而自爲相國하고 建元神鳳하니 江, 沔間 所在起兵以應之하여 旬月間 衆至三萬이라
皆著絳帽하고 以馬尾作髯이러라 至樊城하니 出拒之라가 衆潰하여 爲昌所殺이어늘
詔以荊州刺史劉弘代歆하여 爲鎭南將軍하여 督荊州軍하다
弘以南蠻長史廬江陶侃으로 爲大都護하고 衙門將皮初 爲都戰帥하여 進據襄陽하니 攻之不克注+南蠻校尉, 有長史‧司馬. 都戰帥, 官名也. 杜佑曰 襄陽, 漢中廬縣也.하다
李雄 攻陷郫城하다
李雄 攻殺汶山太守하고 遂取郫城注+汶, 音民. 郫縣, 屬蜀郡.하다 李流徙屯郫하니 蜀民 皆保險結塢하며
或南入寧州하고 或東下荊州하여 城邑皆空하고 野無煙火
流衆 飢乏注+武帝泰始七年, 分益州南中四郡, 置寧州.호되 唯涪陵千餘家 依靑城山處士范長生注+靑城山, 在汶山郡都安縣. 長生, 涪陵人, 率衆保之.이러라
平西參軍徐轝 說羅尙하여 求守汶山하여 邀結長生하여 與共討流注+尙爲平西將軍, 以轝爲參軍.한대 不許
轝怒하여 出降於流하고 說長生하여 使給流軍糧하니 流軍 復振이러라
秋七月 劉弘 遣陶侃하여 討張昌하니 昌走하고 衆降하다 別將石冰 據臨淮하니 不下하다
張昌黨石冰 寇揚州하여 敗刺史陳徽하니 諸郡 盡沒하다
又破江州하고 攻武陵, 零陵, 豫章, 武昌, 長沙하여 皆陷之注+江州時治豫章.하니 於是 荊, 江, 揚, 豫, 徐五州之境 多爲昌所據
更置牧守하니 皆桀盜小人이라 專以劫掠爲務注+桀盜, 桀黠盜也.러라
劉弘 遣陶侃等하여 攻昌於竟陵하여 大破之注+竟陵縣, 屬江夏郡.하니 逃于下雋山하고 其衆悉降호되 惟石冰 尙據臨淮注+下雋山, 長沙下雋縣之山也. 漢置臨淮郡, 章帝以合下邳國, 晉太康元年, 復置臨淮郡.러라
◑初 少孤貧하여 爲郡督郵러니 長沙太守萬嗣 見而異之하여 命其子與結交하다
後察孝廉하여 至洛陽한대 郞中令楊晫 薦之於顧榮하니 由是知名注+晫, 竹角切.이러라
旣克張昌하니 劉弘 謂曰 吾昔爲羊公參軍하니 謂吾後當居其處라하더니 今觀卿하니 必繼老夫矣注+羊公, 謂羊祜也. 祜甞都督荊州軍事. 鎭襄陽. 至是, 劉弘亦以荊州刺史都督荊州軍事, 故弘謂羊公之言驗也. 其處, 通鑑作身處, 晉人多自謂爲身.로다
荊部守宰多闕이라 請補選한대 詔許之어늘 敍功銓德하고 隨才授任하니 人皆服其公當注+銓, 量也, 選也. 當, 去聲.이러라
表皮初補襄陽太守하니 朝廷以初望淺이라하여 更用弘壻夏侯陟이어늘
下敎曰 夫治一國者 宜以一國爲心이니 必若姻親然後 可用이면 則荊州十郡 安得十女壻然後爲政哉注+按晉志, 荊州統二十二郡, 時已分桂陽‧武昌‧安成三郡, 屬江州, 尙統十九郡. 又分新城‧魏興‧上庸三郡, 屬梁州, 尙統十六郡. 至懷帝, 分長沙‧衡陽‧湘東‧零陵‧邵陵‧桂陽六郡, 屬湘州, 此時荊州猶統十一郡. 此蓋言當時缺守者十郡也.리오하고
乃表陟姻親이니 舊制 不得相監이요 皮初之勳 宜見酬報라한대 詔聽之하다
於是 勸課農桑하고 寛刑省賦하니 公私給足하고 百姓愛悅이러라
河間王顒 顒將張方 入城大掠하다
河間王顒 初用李含計하여 欲俟齊王冏殺長沙王乂而討之하고
遂廢帝하고 立成都王穎하고 以己爲相이러니 旣而 不如所謀
穎亦恃功驕奢하여 百度廢弛하고 嫌乂在內하여 不得逞其欲하여 欲與顒共攻乂
盧志諫曰 公 委權辭寵하니 時望美矣 今宜頓軍關外하고 文服入朝 伯主之事也注+關外, 謂郊關之外.니이다
參軍邵續 諫曰 人有兄弟 如左右手어늘 今公 欲當天下之敵이로되 而先去其一手 可乎
皆不聽하고 與顒共表乂論功不平하며 與僕射羊玄之 將軍皇甫商으로 專擅朝政하니 請遣乂還國하고 誅玄之等이니이다
詔曰 顒, 穎 敢擧兵向闕하니 吾將親帥六軍以討之 其以乂爲太尉, 都督中外諸軍事하라
以張方爲都督하여 將精兵七萬하여 東趨洛陽하고
引兵屯朝歌하여 以陸機爲前鋒都督하여 督王粹, 牽秀, 石超等軍二十餘萬하여 向洛陽注+超, 苞之孫也.하니
機以羇旅事穎이라가 一旦 頓居諸將之右하니 粹等 心皆不服이라
孫惠勸機讓都督於粹한대 機曰 彼將謂吾首鼠兩端이라하리니 適所以速禍也注+首鼠, 一前一却也. 鼠性疑, 出穴多不果, 故持兩端者, 謂之首鼠.니라
帝如十三里橋注+橋在洛城西, 去城十三里, 因以爲名.하니 乂使皇甫商으로 將萬餘人하여 拒張方於宜陽이러니 襲敗之하니 帝軍于芒山하다
羊玄之憂懼而卒하니 帝遂幸緱氏하여 擊牽秀하여 走之하다 張方 入京城하여 大掠하여 死者萬計러라
李流死하니 代領其衆하다
李流疾篤 謂諸將曰 前軍英武 殆天所相이니 可共受事注+雄爲前將軍. 相, 息亮切.하라 流卒 衆推雄爲益州牧하여 治郫城하다
冬十月 長沙王乂奉帝하여 及穎兵戰于建春門하여 大破之하다
帝自緱氏還宮하니 遣將軍馬咸하여 助陸機어늘
乂奉帝하여 與機戰于建春門注+建春門, 漢雒城之上東門也.할새 乂司馬王瑚 使數千騎 繫戟於馬하여 以突咸陳하니 咸軍이어늘 執而斬之하다
機軍 大敗하여 赴七里澗하여 死者如積하니 水爲之不流注+水經註 “鴻臺陂, 在洛陽東北二十里, 其水東流, 左合七里澗.” 爲, 去聲.러라
宦人孟玖 有寵於穎하니 玖欲用其父爲邯鄲令注+邯鄲縣, 漢屬趙國, 魏‧晉屬廣平郡.한대
右司馬陸雲 固執不許하고 曰 此縣 公府掾資 豈有黃門父居之邪아하니 玖深怨之注+公府, 三公之府也. 言歷此縣者, 其資級可得公府掾.러라
玖弟超 爲小督이러니 未戰 縦兵大掠이어늘 機錄其主者注+錄, 收也.한대
超將鐵騎하고 直入麾下하여 奪之하고 顧謂機曰 貉奴 能作督不注+貉, 莫客切, 蠻貉也. 機, 吳人, 故罵曰貉. 一說 “貉, 音鶴, 獸名, 善睡, 似狐. 超蓋詈機爲貉奴.” 不, 讀曰否.아하다
機司馬孫拯 勸機殺之호되 機不能用이러니 及戰 超不受機節度하고 輕兵獨戰이라가 敗沒하다
玖疑機殺之하고 譖於穎하여 曰 機有二心於長沙라한대 牽秀等 素諂事玖 相與證之하니
大怒하여 使秀將兵收機하다 機聞秀至하고 釋戎服하고 著白帢하여 與秀相見하고 爲牋辭穎注+帢, 苦洽切, 帽也. 弁缺四隅, 謂之帢.이러니
旣而 嘆曰 華亭鶴唳 可復聞乎 秀遂殺之注+華亭時屬吳郡. 嘉興縣界, 有華亭谷‧華亭水, 其地出鶴, 土人謂之鶴窠. 唳, 郞計切, 鶴鳴曰唳. 機發此言, 有咸陽市上嘆黃犬之意.하다
又收雲及拯하여 下獄하니 記室江統, 蔡克等 流涕固請한대 惻然有宥雲之色이러니
玖扶穎入하여 催令殺雲하고 夷三族하다 獄吏掠拯數百하여 兩踝骨見호되 終言機冤注+腿兩傍曰內外踝. 見, 賢遍切.이라
吏知拯義烈하고 謂曰 二陸之枉 誰不知之리오마는 君可不愛身乎
仰天歎曰 陸君兄弟 世之奇才 吾蒙知愛하니 今旣不能救其死 忍復從而誣之乎
玖等 令獄吏詐爲拯辭하여 亦夷三族하다 拯門人費慈, 宰意 詣獄明拯冤注+費慈‧宰意, 二人也.한대
譬遣之하여 曰 吾義不負二陸이니 死自吾分이어니와 卿何爲爾邪注+譬, 喩也. 分, 扶問切.오한대
曰 君旣不負二陸하시니 僕又安可負君이리오하고 固言拯冤한대 玖又殺之하다
十一月 長沙王乂 奉帝討張方이라가 不克하니 進兵逼京師어늘 詔雍州刺史劉沈하여 討顒하다
長沙王乂奉帝攻張方한대 方兵 望見乘輿하고 皆退走 遂大敗하니 衆懼하여 欲夜遁이어늘
方曰 勝負 兵家之常이니 善用兵者 能因敗爲成이라 今我更前作壘하고 出其不意하면 此奇策也라하고
乃夜潛進하여 逼洛城七里하여 築壘數重하고 外引廩穀以足軍食注+重, 直龍切.이러라
乂旣戰勝 以爲方不足憂러니 聞方壘成하고 攻之不利하다
進逼京師하니 公私窮踧하여 米石萬錢이요 詔命所行 一城而已注+踧, 與蹙同. 窮踧, 窮極迫促也.러라
驃騎主簿祖逖 言於乂曰注+祖, 姓也. 乂爲驃騎將軍, 以逖爲主簿. 劉沈忠義果毅하고 雍州兵力 足制河間하니
宜啓上하여 詔沈發兵襲顒이니 顒窘急이면 必召張方以自救하리니 此良策也니이다
乂從之하니 奉詔하여 合七郡之衆凡萬餘人하여 趣長安注+雍州統郡七, 京兆‧馮翊‧扶風‧安定‧北地‧始平‧新平.하다
十二月 議郞周玘等 起兵討石冰하다
議郞周玘等 起兵江東하여 以討石冰注+玘, 處之子也. 玘, 口紀切.할새 推前吳興太守顧祕하여 都督揚州九郡하고
傳檄州郡하여 殺冰所署將吏注+揚州統郡十八, 帝割豫章‧鄱陽‧廬陵‧臨川‧建安‧南康‧晉安, 屬江州, 揚州統十一郡. 今止推秘, 督丹陽‧宣城‧毗陵‧吳‧吳興‧會稽‧東陽‧新安‧臨海九郡, 淮南‧廬江, 在江北, 不與也.하니 於是 前侍御史賀循 廬江內史華譚葛洪, 甘卓 皆起兵以應祕注+循, 卲之子. 卓, 寧之曾孫也.하다
遣其將拒玘어늘 玘擊斬之하니 自臨淮 退趨壽春이라 征東將軍劉準 不知所爲어늘
廣陵度支陳敏 統衆在壽春注+敏自尙書令史, 出爲合肥度支, 漕運南方米穀, 以濟中州, 遷廣陵度支.이라가 謂準曰 此等 以不樂遠戍 逼迫成賊하여 烏合之衆이니
其勢易離 請爲公破之하노이다 乃益敏兵하다
閏月 李雄 攻走羅尙하고 遂入成都하다
◑封鮮卑段務勿塵하여 爲遼西公하다
幽州都督王浚 以天下方亂이라하여 欲結援夷狄하여 乃以一女妻務勿塵하고 一女妻宇文素怒延注+宇文國有別帥, 曰素怒延. 晉書, 作蘇恕延.하고
又表以遼西郡封務勿塵하니 沈之子也


癸亥年(303)
[] 나라 孝惠皇帝 太安 2년이다. 봄 2월에 羅尙李特을 대파하여 참수하니, 李流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렸다.
[] 李特이 남몰래 강을 건너가서 羅尙을 공격하니, 郫水(비수) 가에 주둔해 있던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注+水上軍”은 郫水(비수) 가에 있는 군대이다.
蜀郡太守少城을 가지고 항복하자, 이특이 들어가 점거하였으나 오직 말을 취하여 군수물자에 보탤 뿐이었고 나머지는 침략하지 않았으며,
境內에 사면령을 내리고 建初라고 改元하니, 지역 백성들로서 서로 모여 를 만든 자가 모두 이특에게 정성을 바쳤다. 이특이 유민들을 여러 에 나누어 그곳에 가서 먹게 하였다.
李流가 이특에게 말하기를 “여러 가 새로 귀부하였으니, 마땅히 그 大姓子弟들을 인질로 삼고 병력을 모아 스스로 지켜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특이 하며 말하기를 “大事가 이미 정해졌다. 다만 백성들을 편안히 해야 하니, 어찌하여 다시금 의심과 시기를 미리 해서 離叛하게 하느냐.” 하였다.
[] 朝廷에서 荊州刺史 宗岱 등을 보내어 水軍 3만을 거느리고 가서 羅尙을 구원하게 하여 軍勢가 더욱 강성해지니, 여러 에서 모두 두 마음을 품었다.
任叡(임예)가 나상에게 말하기를 “李特이 병력을 분산하여 〈에〉 나아가 먹게 하고 교만하고 태만하여 방비가 없으니, 이는 하늘이 그를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마땅히 여러 와 은밀히 약속해서 날짜를 잡아 동시에 출발하여 안팎으로 공격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 하였다.
[] 2월에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어 李特의 진영을 습격하니, 여러 가 모두 호응하였다. 이특의 군대가 크게 패하자, 이특을 참수하여 파발마로 그 머리를 洛陽으로 보내었다.
李流李蕩李雄이 남은 무리를 수합하여 돌아가 赤祖를 지켰는데,注+子邪이다. 赤祖地名이니, 마땅히 綿竹의 동쪽에 있을 것이다. 이류는 益州牧이라 자칭하여 동쪽 진영을 지키고 이탕과 이웅은 북쪽 진영을 지켰다.
羅尙督護何沖을 보내어 이류를 공격하자, 이류가 그를 대파하고 乘勢를 타고 전진하여 成都에 이르니, 나상이 다시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이때에 이탕이 창을 맞아 죽었다.注+(맞다)은 去聲이다.
이류는 宗岱의 병력이 장차 쳐들어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 항복하고자 하였는데, 李驤과 이특의 아들 이웅이 번갈아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웅은 마침내 流民들을 설득해서 그들과 함께 東軍(荊州의 군대)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때 마침 종대가 하여 荊州의 군대가 후퇴하니, 이류는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이류가 이로 말미암아 이웅의 재주를 기특히 여겨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 여름 5월에 義陽蠻族張昌이 배반하자, 詔令을 내려서 劉弘都督荊州軍事로 삼았다.
[] 新野王 司馬歆荊州를 도독하면서 정사를 엄하게 하고 몰아붙이니, 오랑캐들의 마음을 잃었다.
義陽蠻族張昌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注+義陽은 본래 나라 平氏縣義陽鄕이니, 나라 文帝 黃初 연간(221~226)에 義陽縣을 나누어 세우고 石城을 치소로 삼았다. 뒤에 南陽郡을 나누어 義陽郡을 세우고 安昌城을 치소로 삼았다. 이때 마침 형주에서 詔令으로 武勇이 있는 자를 징발하여 李流를 토벌하게 하니, 백성들은 멀리 정벌하러 가는 것을 꺼려서 모두 가고자 하지 않았다.
詔書를 내려서 이들을 督責하여 보낼 적에 엄하게 다그쳐서 경유하는 곳의 경계에서 5일을 지체한 자는 二千石의 관리(太守國相)를 파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郡縣官長들이 모두 직접 나와 백성들을 몰아갔는데, 백성들은 展轉하여 멀리 가지 않고 곧 다시 한곳에 모여 도둑질을 하였다.
장창이 이로 인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키니, 여러 유민들과 병역을 피하는 자들이 그를 많이 따라갔다. 江夏太守 弓欽이 그를 토벌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武昌으로 달아났다.注+이다.
[] 張昌이 마침내 江夏를 점거하고서 山都縣의 관리인 丘沈을 얻어注+山都縣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襄陽郡에 속하였다. 그의 姓名을 바꾸어 劉尼라 하고 거짓으로 나라 宗室의 후손이라 하였다.
江夏에서는 그를 받들어 로 삼고 자신은 相國이 되고 연호를 神鳳이라고 하니, 長江沔水 사이의 여러 곳에서 군대를 일으켜 그에게 호응해서 열흘 내지 한 달 사이에 무리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붉은 모자를 쓰고 말꼬리로 수염을 만들었다. 장창이 樊城에 이르자, 司馬歆이 출병하여 이들을 막다가 무리가 궤멸하여 장창에게 살해되니,
詔令을 내려 荊州刺史 劉弘으로 사마흠을 대신해서 鎭南將軍을 삼아 荊州의 군대를 도독하게 하였다.
유홍은 南蠻長史廬江 사람 陶侃大都護로 삼고 衙門將皮初都戰帥로 삼아서 나아가 襄陽을 점거하니, 장창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注+南蠻校尉長史司馬가 있었다. 都戰帥는 관직 이름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襄陽漢中廬縣이다.” 하였다.
[] 李雄郫城(비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 李雄汶山太守를 공격하여 죽이고 마침내 郫城을 점령하였다.注+이다. 郫縣蜀郡에 속하였다. 가을에 李流가 주둔지를 郫城으로 옮기니, 지역 사람들이 모두 험요한 곳을 확보하고 를 만들었으며,
혹은 남쪽으로 寧州로 들어가고 혹은 동쪽으로 荊州로 내려가서 城邑이 모두 비고 들에는 불을 때서 밥을 짓는 인가가 없었다.
李流의 무리가 굶주려 궁핍하였는데,注+ 武帝 泰始 7년(271)에 益州南中 지역 4을 나누어 寧州를 설치하였다. 오직 涪陵에 있는 천여 가구가 靑城山處士范長生에게 의지해 있었다.注+靑城山汶山郡 都安縣에 있다. 范長生涪陵 사람이니, 무리를 거느리고 이곳을 점령하였다.
平西參軍 徐轝(서여)가 羅尙을 설득하여 자신이 汶山太守가 되어 범장생을 맞이하여 결탁해서 그와 함께 이류를 토벌하자고 하였으나,注+羅尙平西將軍이 되어 徐轝參軍으로 삼았다. 나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여는 노하여 나와 이류에게 항복하고 범장생을 설득하여 이류의 군대에 군량을 지급하게 하니, 이류의 군대가 다시 떨치게 되었다.
[] 가을 7월에 劉弘陶侃을 보내어 張昌을 토벌하니, 장창이 패주하고 무리가 항복하였다. 別將 石冰臨淮를 점거하였는데, 그곳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 張昌의 무리인 石冰揚州를 침략하여 刺史 陳徽(진휘)를 패퇴시키니, 여러 이 모두 함락되었다.
장창의 무리가 또다시 江州를 격파하고 武陵零陵, 豫章, 武昌, 長沙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하니,注+江州는 이때 豫章을 치소로 삼았다. 이에 荊州, 江州, 揚州, 豫州, 徐州 다섯 의 지역이 대부분 장창에게 점거 당하였다.
장창은 牧使守令을 바꾸어 두니, 모두 凶暴小人이라서 오로지 겁탈하고 노략질하는 것을 힘썼다.注+桀盜”는 흉포한 도둑이다.
劉弘陶侃 등을 보내어 竟陵에서 장창을 공격하여 대파하니,注+竟陵縣江夏郡에 속하였다. 장창은 下雋山으로 도망하였고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으나, 오직 석빙만은 아직도 臨淮를 점거하고 있었다.注+下雋山長沙 下雋縣에 있는 이다. 나라는 臨淮郡을 설치하였는데 後漢 章帝下邳國(하비국)으로 통합하였으며, 나라 太康 원년(280)에 다시 臨淮郡을 설치하였다.
[] 처음에 陶侃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여 督郵가 되었는데, 長沙太守 萬嗣가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그 아들에게 명하여 그와 친구를 맺게 하였다.
뒤에 孝廉으로 천거되어 洛陽에 이르자, 郞中令 楊晫(양작)이 그를 顧榮에게 천거하니, 도간이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注+竹角이다.
도간이 張昌을 이기자, 劉弘이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 羊公參軍이 되었는데, 양공이 나더러 뒤에 마땅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을 보니 반드시 이 老夫의 뒤를 이을 것이다.”注+羊公羊祜을 이른다. 양호가 일찍이 都督荊州軍事가 되어 襄陽에 진주했었는데, 이에 劉弘이 또한 荊州刺史 都督荊州軍事가 되었으므로 劉弘羊公의 말이 맞았다고 말한 것이다. “其處”는 ≪資治通鑑≫에는 “身處”로 되어 있으니,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일러 이라 하였다. 하였다.
이때에 荊州에 있는 수령들이 결원이 많았다. 유홍이 수령들을 선발하여 보임할 것을 청하자, 조정에서 詔令을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유홍은 을 헤아리고 재주에 따라 임무를 맡기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공정하고 합당함에 복종하였다.注+은 헤아림이요, 뽑음이다. (합당하다)은 去聲이다.
陶侃陶侃
[] 劉弘이 표문을 올려서 皮初襄陽太守로 보임하니, 조정에서는 피초가 명망이 낮다 하여 다시 유홍의 사위인 夏侯陟을 등용하였다.
유홍이 敎令을 내리기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한 나라를 마음으로 삼아야 하니, 반드시 姻戚이 된 뒤에야 등용해서는 안 되고, 荊州 열 고을에 내가 어떻게 열 명의 사위를 얻은 뒤에야 정사를 하겠는가.”注+晉書≫ 〈地理志〉를 살펴보건대 荊州는 22개 을 통솔하였는데, 이때 이미 桂陽, 武昌, 安成 3개 을 나누어 江州로 소속시켜서 여전히 19개 을 통솔하였다. 그러다가 또다시 新城魏興, 上庸 3개 을 나누어 梁州로 소속시켜서 여전히 16개 을 통솔하였는데, 懷帝 때에 다시 長沙, 衡陽, 湘東, 零陵, 邵陵, 桂陽의 6개 을 나누어 湘州로 소속시켰다. 그리하여 이때 荊州는 아직도 11개 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이는 당시에 수령의 결원이 생긴 곳이 10개 임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표문을 올리기를 “하후척은 저의 인척이니 옛 제도에 따르면 서로 감독해서는 안 되고, 피초의 功勳은 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합니다.” 하자, 詔令을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유홍이 백성들에게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부역을 줄이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재정이 풍족하고 백성들이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 河間王 司馬顒成都王 司馬穎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자, 9월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사마영을 토벌하니, 사마옹의 장수 張方이 도성에 들어가 크게 노략질하였다.
[] 河間王 司馬顒이 처음에는 李含의 계책을 따라 齊王 司馬冏長沙王 司馬乂를 죽이기를 기다려 그를 토벌하고,
마침내 황제를 폐위하고 成都王 司馬穎을 세운 다음 자기가 정승이 되려고 하였는데, 이윽고 계책한 바와 같이 되지 못하였다.
사마영 또한 자신의 을 믿어 교만하고 사치하여 여러 가지 법도가 모두 해이해졌으며, 사마예가 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어 자기 욕심을 부릴 수 없음을 혐의하여 사마옹과 함께 사마예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盧志하기를 “이 권력을 내놓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사양하시니, 당시 명망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마땅히 郊關의 밖에 군대를 주둔하여 文臣의 의복을 입고 들어가 조회하여야 하니, 이는 霸主가 되는 일입니다.”注+關外郊關(城邑의 사방 교외에 세운 관문)의 밖을 이른다. 하였다.
參軍 邵續하기를 “사람이 형제가 있음은 왼손과 오른손이 있는 것과 같은데, 이제 이 천하의 적을 상대하고자 하면서 먼저 그 한 손을 제거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사마영은 모두 듣지 않고 사마옹과 함께 표문을 올려서 “사마예가 論功行賞함에 공평하지 못하였으며 僕射 羊玄之將軍 皇甫商과 함께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청컨대 사마예를 封國으로 보내고 양현지 등을 誅殺하소서.” 하였다.
황제는 詔令을 내리기를 “사마옹과 사마영이 감히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니, 내가 장차 친히 六軍을 거느리고서 이들을 토벌하겠다. 사마예를 太尉 都督中外諸軍事로 삼는다.” 하였다.
[] 司馬顒張方都督으로 삼아 정예병 7만을 거느리고서 동쪽으로 洛陽으로 달려갔고,
司馬穎은 군대를 이끌고 朝歌에 주둔하여 陸機前鋒都督으로 삼아서 王粹牽秀, 石超 등의 군대 20여 만을 거느리고 洛陽으로 향하게 하였다.注+石超石苞의 손자이다.
陸機陸機
육기가 他地 사람으로서 사마영을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여러 장수의 위에 있게 되니, 王粹 등은 마음에 모두 복종하지 않았다.
孫惠가 육기에게 도독 자리를 왕수에게 사양할 것을 권하였으나, 육기가 말하기를 “저들은 장차 내가 쥐가 구멍에서 나올 때처럼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니, 다만 화를 부를 뿐이다.”注+首鼠”는 한 번 앞으로 가고 한 번 뒤로 물러나 주저하는 것이다. 쥐는 의심하는 성질이 있어서 구멍에서 나올 적에 과감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진과 후퇴 두 가지를 유지하는 것을 首鼠라 한다. 하고 듣지 않았다.
황제가 十三里橋로 가니注+다리는 洛陽城의 서쪽에 있는데 과 13리 떨어진 지점에 있으므로 인하여 十三里橋라 한 것이다. 司馬乂皇甫商으로 하여금 병력 만여 명을 거느리고서 張方宜陽에서 맞이하여 막게 하였는데, 장방이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니 황제가 芒山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羊玄之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하자, 황제가 마침내 緱氏(구지)로 행차하여 牽秀를 공격해서 패주시키니, 장방이 京城으로 들어와 크게 노략질하여 죽은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 李流가 죽으니, 李雄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렸다.
[] 李流가 병이 위독하자,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前將軍(李雄)의 英明武勇은 거의 하늘이 도운 것이니, 그와 함께 직무를 받도록 하라.”注+李雄前將軍이 되었었다. (돕다)은 息亮이다. 하였다. 이류가 하자, 여러 사람들이 李雄을 추대하여 益州牧으로 삼아서 郫城(비성)에 治所를 두었다.
[] 겨울 10월에 長沙王 司馬乂가 황제( 惠帝)를 받들고 司馬穎의 군대와 建春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 황제가 緱氏(구지)에서 還宮하니, 司馬穎將軍 馬咸을 보내어 陸機를 돕게 하였다.
司馬乂가 황제를 받들고 建春門에서 육기와 싸울 적에注+建春門나라 雒城(낙성)의 上東門이다. 사마예의 司馬王瑚가 수천 명의 기병으로 하여금 창을 말에 매달고 마함의 진영으로 돌진시키니, 마함의 군대가 혼란해지자 그를 잡아 참수하였다.
그리하여 육기의 군대가 대패하여 七里澗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산처럼 쌓이니, 물이 이 때문에 흘러가지 못하였다.注+水經註≫에 “鴻臺陂洛陽 동북쪽 20리에 있는데, 그 물이 동쪽으로 흘러서 왼쪽으로 七里澗과 합류한다.” 하였다. (위하다)는 去聲이다.
[] 처음에 환관인 孟玖司馬穎에게 총애를 받으니, 맹구는 자기 아버지를 邯鄲令으로 임용하고자 하였으나,注+邯鄲縣나라 때에는 나라에 속하였고, 나라와 나라 때에는 廣平郡에 속하였다.
右司馬陸雲이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의 수령은 公府의 아전이 될 수 있는 품계이니, 어찌 黃門(환관)의 아비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맹구가 깊이 원망하였다.注+公府三公이다. 〈“公府掾資”는〉 이 의 수령을 지낸 자는 그 품계가 公府의 아전에 오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陸雲陸雲
맹구의 아우 孟超小督이 되었는데, 싸우기 전에 군대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하자 陸機가 이를 주관한 자를 체포하니,注+(체포함)이다.
맹초가 鐵騎를 거느리고 곧바로 육기의 麾下로 쳐들어가 육기가 체포한 자를 빼앗고 돌아보고서 육기에게 이르기를 “오랑캐야, 네가 능히 이 될 수 있겠느냐.”注+莫客이니, 오랑캐이다. 陸機나라 사람이므로 꾸짖기를 오랑캐라 한 것이다. 一說에 “이니 짐승의 이름인바, 잠자기를 좋아하는데 여우와 비슷하다. 孟超가 육기를 꾸짖어 과 같은 종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로 읽는다. 하였다.
육기의 司馬孫拯이 육기에게 그를 죽이도록 권하였으나, 육기는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전투할 때에 맹초가 육기의 지휘를 받지 않고 경솔하게 군대를 출동하여 홀로 싸우다가 병사들이 敗沒하였다.
맹구는 육기가 맹초를 죽였을 것이라 의심하고 사마영에게 참소하기를 “육기가 長沙王에게 두 마음을 품는다.” 하니, 牽秀 등은 평소 맹구에게 아첨하여 섬겼으므로 서로 함께 증명하였다.
사마영이 크게 노하여 견수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육기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육기는 견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군복을 벗고 白帢(일반 선비가 쓰는 관)을 쓰고서 견수와 서로 만나보고 편지를 써서 사마영에게 사례하였는데,注+苦洽이니, 모자이다. 에 네 귀퉁이가 없는 것을 이라 이른다.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이윽고 탄식하기를 “華亭에 학 우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견수는 마침내 육기를 죽였다.注+華亭은 이때 吳郡에 속하였다. 嘉興縣 경계에 華亭谷이 있고 華亭水가 있는데 이 지역에서 학이 나오니,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鶴窠라 하였다. 郞計이니, 학이 우는 것을 라 한다. 陸機가 이 말을 한 것에는 이 있다.
[] 司馬穎은 또다시 陸雲孫拯을 체포하여 下獄시키니, 記室 江統蔡克 등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간청하였다. 사마영은 측은히 여겨서 육운을 용서할 기색을 보였는데,
孟玖가 사마영을 붙들고 들어가서 재촉하여 육운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게 하였다. 獄吏가 손증을 수백 번 매질로 고문해서 살이 터져 두 복사뼈가 밖으로 드러났으나 손증은 끝내 陸機의 억울함을 말하였다.注+大腿의 양옆 부분을 內外踝라 한다. (드러남)은 賢遍이다.
옥리는 손증의 義烈함을 알고 말하기를 “두 陸氏의 억울함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그대는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가?” 하니,
손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陸君의 형제는 세상에 드문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육씨가 나를 알아주고 아껴주었으니, 지금 내가 그의 죽음을 구원하지는 못하나 다시 차마 따라서 무함하겠는가.” 하였다.
맹구 등은 옥리로 하여금 손증이 자백한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또한 삼족을 멸하게 하였다. 손증의 門人費慈宰意가 옥에 나와 손증의 억울함을 밝히자,注+費慈宰意는 두 사람이다.
손증이 타일러 보내며 말하기를 “나는 의리상 두 육씨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는 것이 본래 나의 분수이지만, 들은 어찌하여 이러는가?”注+는 타이름이다. (분수)은 扶問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께서 이미 두 육씨를 저버리지 않으시니, 저희들이 또 어찌 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는 굳이 손증의 억울함을 말하자, 맹구가 또다시 이들을 죽였다.
[] 11월에 長沙王 司馬乂가 황제( 惠帝)를 받들고 張方을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니, 司馬穎이 군대를 전진하여 京師를 핍박하자, 雍州刺史 劉沈에게 詔令을 내려서 司馬顒을 토벌하게 하였다.
[] 長沙王 司馬乂가 황제를 받들고 張方을 공격하자, 장방의 병사들은 황제가 탄 수레를 바라보고는 모두 물러나 달아났다. 마침내 장방을 대파하니,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밤에 도망하려 하였다.
장방이 말하기를 “한번 이기고 지는 것은 兵家常事이니, 용병을 잘하는 자는 능히 패전으로 인하여 성공한다. 지금 우리가 다시 앞으로 가서 보루를 만들고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격하면, 이는 기이한 계책이다.” 하고는
마침내 밤중에 몰래 진군하여 洛陽城 7리까지 다가가서 몇 겹의 보루를 쌓고 밖에서 창고의 곡식을 끌어다가 군대의 식량을 충족하였다.注+(중첩)은 直龍이다.
사마예는 싸워 승리하고는 “장방은 근심할 것이 못 된다.” 하였는데, 장방이 보루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 司馬穎이 전진하여 京師를 핍박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곤궁해서 쌀 한 섬의 값이 萬錢이고, 詔命이 행해지는 것은 겨우 한 뿐이었다.注+과 같으니, “窮踧”은 곤궁하여 압박을 받는 것이다.
驃騎將軍主簿祖逖(조적)이 司馬乂에게 말하기를注+이다. 司馬乂驃騎將軍이 되어 祖逖主簿로 삼았다.劉沈忠義롭고 과감하고 굳세며 雍州兵力은 충분히 河間王(司馬顒)을 제압할 수 있으니,
마땅히 에게 아뢰어 유침에게 해서 군대를 출동시켜 사마옹을 기습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마옹이 곤란하고 급박하면 반드시 張方을 불러 자기를 구원하게 할 것이니, 이는 좋은 계책입니다.” 하였다.
사마예가 그 말을 따르니, 유침이 詔令을 받들어 7개 의 병력 만여 명을 규합해서 長安으로 달려왔다.注+雍州는 통솔한 이 일곱이었는데, 京兆, 馮翊, 扶風, 安定, 北地, 始平, 新平이다.
[] 12월에 議郞 周玘 등이 군대를 일으켜 石冰을 토벌하였다.
[] 議郞 周玘 등이 江東에서 군대를 일으켜 石冰을 토벌할 적에注+周玘周處의 아들이다. 口紀이다. 吳興太守 顧祕를 추대하여 揚州의 9을 도독하게 하고,
州郡에 격문을 돌려서 석빙이 임용한 장수와 관리들을 죽이니,注+揚州는 18개 을 통솔하였는데, 황제가 豫章, 鄱陽(파양), 廬陵, 臨川, 建安, 南康, 晉安을 떼어서 江州에 소속시켜 揚州가 통솔하는 군은 11개 군이었다. 그런데 이제 다만 顧祕를 추대하여 丹陽, 宣城, 毗陵, , 吳興, 會稽, 東陽, 新安, 臨海의 9개 군을 도독하게 하고, 淮南廬江江北에 있으므로 여기에 들지 않았다. 이에 侍御史賀循廬江內史華譚丹陽 사람 葛洪甘卓이 모두 군대를 일으켜 고비에게 응하였다.注+賀循賀卲의 아들이다. 甘卓甘寧의 증손이다.
석빙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주기를 막자, 주기가 공격하여 그를 참수하니, 석빙이 臨淮에서 후퇴하여 壽春으로 달려갔다. 征東將軍 劉準은 〈석빙의 군대가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廣陵度支陳敏이 병력을 거느리고 수춘에 있다가注+陳敏尙書令史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合肥度支가 되었는데, 남방의 쌀과 곡식을 잘 漕運하여 中州(中國)를 구제하니, 廣陵度支로 승진하였다. 유준에게 이르기를 “
형세상 쉽게 離散할 것입니다. 나는 을 위하여 이들을 격파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유준이 마침내 진민에게 병력을 보태주었다.
[] 윤12월에 李雄羅尙을 공격하여 敗走시키고 마침내 成都로 쳐들어갔다.
[] 鮮卑段務勿塵을 봉하여 遼西公으로 삼았다.
[] 幽州都督 王浚이 천하가 한창 혼란하다 하여 오랑캐들과 원조 관계를 맺고자 해서, 마침내 한 딸은 段務勿塵에게 시집보내고 한 딸은 宇文素怒延에게 시집보내고,注+宇文國에 별도의 장수가 있었으니, 素怒延이라고 하였다. ≪晉書≫에는 蘇恕延으로 되어 있다.
또 표문을 올려서 단무물진을 遼西郡으로 봉하게 하였으니, 王浚王沈의 아들이다.


역주
역주1 : 魏晉時代의 혼란 속에서 유민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등장한 것 중에 하나가 塢이다. 塢는 작은 성채나 보루를 뜻하는데, 後漢 시기 羌族의 침략으로 변방에 塢侯를 설치한 것에서 그 연원을 찾으며, 西晉 말엽에 들어서면서 백성들이 自衛를 위하여 직접 설치하게 된다. 특히 유민들에 의해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들 塢를 지배하는 자들을 塢主라 하였다. 塢는 그 구조와 규모가 일정하지 않으며 천연의 요새가 될 만한 곳에 세워진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체 규약에 의한 독자적 활동을 하였다. 塢는 기존의 지역공동체였던 鄕里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이 시대를 이해하는 대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역주2 成都王穎……帝自將討穎 : “司馬顒과 司馬穎이 司馬乂가 조정을 전횡한다고 표문을 올린 것이, 사마예가 예전에 표문을 올려 司馬冏을 성토한 것과 똑같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反’이라고 썼는가. 사마예가 비록 정권을 전횡하였으나 사마경에 견줄 바가 아닌데, 사마옹과 사마영이 곧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는 반란일 뿐이다. 그러므로 ‘討’라고 쓴 것이다.[顒穎表乂專朝 與前表冏 一也 此則曷爲書反 乂雖專政 非冏比也 而輒擧兵 是反而已矣 故書討]” ≪書法≫
“典午(司馬氏)의 亂에 여러 왕들이 번갈아 서로 도륙하였는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지를 밝힌 자가 있지 않았다. 司馬顒과 司馬穎이 군대를 일으킨 것은 ≪晉書≫의 기록에서 보면 ‘河間王 司馬顒과 成都王 司馬穎이 군대를 일으켜 長沙王 司馬乂를 토벌하였다.’ 하였고, ≪資治通鑑≫에서 보면 ‘사마옹이 군대를 일으켜서 곧바로 장사왕 사마예를 토벌하였고 大將軍 사마영이 표문을 올려서 張昌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고 써서 모두 두 사람의 반란을 분명하게 말한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資治通鑑綱目≫은 사마옹과 사마영의 반란을 크게 써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사마옹은 처음 李含의 계책을 따라 사마경이 사마예를 죽이기를 기다려 그를 토벌하고는 마침내 황제를 폐위하고 사마영을 세우려 하였으니, 이는 사마옹이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고 사마영 또한 이 계획에 참여하여 안 것이다. 이제 또다시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해서 乘輿를 범하고 忠義로운 선비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반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直筆로 이것을 썼으니, 또한 그 사실을 조사하여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크게 혼란한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지 아니하고 옥과 돌이 분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날의 역사책은 잘못을 그대로 인습해서 그 죄를 지적하여 밝히지 못하였고, 후인들이 역사책을 살펴볼 적에 또한 분별하지 못했으니, 옳고 그름을 근본적으로 미루어 연구하는 군자가 아니면 아득하고 아득한 천년에 누가 능히 이것을 밝혔겠는가. 아! 이것은 ≪자치통감강목≫이 훌륭한 ≪자치통감강목≫이 된 이유이니 이 세상에 功이 있는 것이다.[典午之亂 諸王更相屠戮 未有明其孰是孰非者 顒穎擧兵 自晉紀觀之 則曰河間王顒 成都王穎 擧兵討長沙王乂 自通鑑觀之 則曰顒起兵 討長沙王乂 大將軍穎上表 請討張昌 皆未有明言二人之反者 今綱目 大書顒穎之反 略不少恕 何哉 顒初用李含計 欲俟冏殺乂而討之 遂廢帝立穎 是顒有無君之心 而穎亦預聞者也 今又擧兵向闕 至犯乘輿 殺忠義之士 是非反而何 直筆書之 蓋亦核其實耳 然大亂之世 眞贗不分 玉石無別 故前史承訛襲舛 不能指名其罪 後人觀之 亦不能辨 不有君子推原是否 則悠悠千載 孰能明之 嗚呼 此綱目之所以爲綱目 有功於斯世也歟]” ≪發明≫
역주3 李斯가……뜻 : 黃犬은 털빛이 누런 개인 누렁이를 이르는바, 이 내용은 秦나라 승상 李斯가 무함을 받고 咸陽의 시장에서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그의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너와 함께 다시 누렁이를 끌고 上蔡의 동문으로 나가서 약빠른 토끼를 쫓으려고 한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吾欲與若復牽黃犬 俱出上蔡東門 逐狡兔 豈可得乎]”라고 탄식했던 고사를 말한 것이다.(≪史記≫ 권87 〈李斯列傳)
역주4 이들은……烏合之卒이니 : 이들은 원래 荊州의 蠻族과 백성들로 당시 蜀 지역 李流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에 이들이 멀리 정벌하러 가는 것을 꺼려 만족 張昌의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들 중 石冰의 무리가 揚州를 침략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167쪽과 169쪽 참조.
역주5 丹陽 : 丹陽은 원래 丹水의 북쪽[陽]을 뜻한다. ≪資治通鑑≫ 권70 註에 丹陽은 丹陽山에 붉은 버드나무[赤柳]가 많아 ≪晉書≫와 ≪南史≫에서 楊字를 병용하였다고 한다. 저본에는 ‘丹楊’으로 되어 있는데, 丹陽으로 바꾸어 썼다. 晉나라 이후로 ≪資治通鑑綱目≫이나 ≪자치통감≫, 正史에서 丹陽과 丹楊이 혼용되어 사용된다. 다만 漢나라 때 단양과 晉‧宋 이후의 단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다수 존재한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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