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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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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年(304)
永興元年이라
漢高祖劉淵元熙元年이요
◑成太宗李雄建興元年이라
◑是歲 僭國二 大一小一이라
春正月 尙書令樂廣하다
廣女爲成都王妃 譖諸太尉乂어늘 乂以問廣한대
神色不動하고 徐曰 廣豈以五男易一女哉注+謂附穎, 則五男被誅.리오 乂猶疑之하니 廣以憂卒하다
乂屢破穎兵하고 而未嘗虧奉上之禮 城中糧食 日窘이로되 士卒 無離心이러라
張方 以爲洛陽未可克이라하여 欲還長安이러니 而東海王越 慮事不濟하고 潛與殿中諸將으로 夜收乂하고
啓帝下詔하여 免官하여 置金墉城하고 大赦, 改元注+改元永安.하다
城旣開 將士見外兵不盛하고 悔之하여 更謀劫出乂以拒穎이라
하여 遣人密告張方한대 炙殺之하니 方軍士亦爲流涕注+炙, 之石切, 置肉火上也. 爲, 去聲.러라
入京師라가 復還鎭于鄴이어늘 詔以穎爲丞相하고 越守尙書令하다
遣石超等하여 帥兵屯十二城門하고 殿中宿所忌者 皆殺之하고 悉代去宿衛兵注+洛陽城東, 有建春‧東陽‧淸明三門, 南有開陽‧津陽‧平昌‧宣陽四門, 西有廣陽‧西明‧閶闔三門, 北有大夏‧廣莫二門, 凡十二門.하다
頓軍于鄭하여 爲東軍聲援注+鄭縣, 屬京兆郡.이러니 聞沈兵起하고 退入長安하여 急召張方한대
掠洛中官私奴婢萬餘人而西하다 渡渭而軍하여 與顒戰하니 屢敗
使衙博, 皇甫澹으로 以精甲五千으로 襲長安하여 入其門하여 力戰至顒帳下하다
沈兵來遲하니 顒黨張輔 見其無繼하고 橫擊之하여 殺博及澹하니 沈兵 遂敗
南走어늘 獲之하니 謂顒曰 知己之惠하고 君臣之義注+顒留沈爲軍師, 遂爲雍州刺史.하니
不可違天子之詔하여 量彊弱以苟全이라 投袂之日 期之必死하니 葅醢之戮 其甘如薺니라하여 斬之注+投袂, 猶言拂袖也. 左傳 “宋殺楚使, 楚子聞之, 投袂而起.”하다
新平太守張光 數爲沈畫計注+爲, 去聲.러니 執而詰之한대
光曰 劉雍州不用鄙計 故令大王得有今日이라하니 壯之하여 表爲右衛司馬하다
詔羅尙하여 權統巴東三郡하다
羅尙 逃至江陽하여 遣使表狀注+華陽國志曰 瀘州瀘川縣, 本漢江陽縣, 又江安縣, 亦漢江陽縣也.한대 詔尙權統巴東, 巴郡, 涪陵하여 以供軍賦注+三郡本屬梁州, 尙權統之.하다
遣別駕李興하여 詣劉弘求糧이어늘 弘以三萬斛給之하니 賴以存하다
願留爲參軍이어늘 奪其手板而遣之注+手板, 卽古笏也. 參施敬府公, 故持手板, 今奪興手板遣之, 不許其去尙而事己也.하니라
于時 流民在荊州者 十餘萬戸 羈旅貧乏하여 多爲盜賊이라
大給其田及種糧注+種, 章勇切.하고 擢其賢才하여 隨資敍用하니 流民 遂安이러라
二月 하다
◑廣陵度支陳敏及周玘 擊石冰於建康하여 斬之하다
冰衆 十倍於敏이로되 擊之 所嚮皆捷하고 遂與玘合攻斬冰하니 揚, 徐二州平이라
玘及賀循 皆散衆還家하여 不言功賞하니 朝廷 以敏爲廣陵相하다
◑秋七月 東海王越 奉帝征穎하고 復皇后, 太子하다
帝遂入鄴하니 走歸國하다
僭侈日甚하고 嬖倖用事하여 大失衆望注+時, 人望穎以匡輔帝室, 今乃若此, 故大失衆望.이라
東海王越 與右衛將軍陳眕으로 勒兵하고 入雲龍門하여 以詔召三公百僚하여 戒嚴討穎한대 石超犇鄴하니 復皇后羊氏及太子覃하다
奉帝北征할새 徵前侍中嵇紹하여 詣行在注+長沙王乂當國, 以紹爲侍中, 乂死, 紹黜免爲庶人. 今討穎, 故復徵詣行在.하니 侍中秦準 謂紹曰 今往 安危難測이라 卿有佳馬乎
紹正色曰 臣子扈衛乘輿 死生以之 佳馬何爲리오
檄召四方兵하니 比至安陽 十餘萬注+晉志 “安陽縣, 屬魏郡.”이러라
會群僚問計한대 東安王繇曰 天子親征하시니 宜釋甲縞素하여 出迎請罪니이다 不從하고 遣石超하여 師衆拒戰하다
陳眕弟自鄴赴行在하여 云 鄴中 皆已離散이라하니 由是 不甚設備러니
超軍 奄至하니 乘輿敗績於蕩陰注+蕩, 音湯. 蕩陰縣, 漢屬河內郡, 晉屬魏郡.하여 帝頰中三矢하고 百官侍御皆散注+頰, 面旁也. 中, 去聲.하다
嵇紹朝服登輦하여 以身衛帝러니 兵人 引紹斫之어늘 帝曰 忠臣也 勿殺하라
對曰 奉太弟令하여 惟不犯陛下一人耳라하고 遂殺紹하니 血濺帝衣러라 帝墮於草中하여 亡六璽하다
超奉帝幸其營하니 帝餒甚이라 超進水하고 左右奉秋桃注+桃以夏熟者進御. 秋桃非所以奉至尊而奉之, 恤所無也.러라 迎帝入鄴하여 改元建武하다
左右欲浣帝衣注+浣, 戶管切, 濯也.한대 帝曰 嵇侍中血이니 勿浣也하라 陳眕, 上官巳 奉太子覃하여 守洛陽하다
還東海하니 孫惠勸邀結藩方하여 同奬王室한대 越以恵爲記室參軍하여 與參謀議하다
北軍中候苟晞 奔豫州都督范陽王虓하니 虓以爲兗州刺史注+虓, 范陽康王綏之子. 咸寧五年, 嗣封, 時鎭許昌. 綏, 宣帝弟馗之子也. 虓, 許交切.하다
三王之討趙王倫也 王浚 擁衆하고 挾兩端하여 禁所部士民하여 不得赴三王召募하니
陰圖之로되 不克하다 至是하여 又稱詔徵之하니
遂與鮮卑段務勿塵 烏桓羯朱及幷州刺史東嬴公騰으로 同起兵討穎注+羯, 居謁切. 羯朱, 人名也.한대 遣石超擊之하니 越之弟也
八月 殺東安王繇하니 하다
怨東安王繇前議하여 殺之注+怨其使己縞素迎天子請罪也.하다 繇兄子琅邪王睿 沈敏有度量이러니 爲左將軍하여 與東海參軍王導善注+導, 敦之從父弟也, 參東海王越軍事.하다
導識量淸遠이러니 以朝廷多故라하여 每勸睿之國이러라 及繇死 睿從帝在鄴이라
恐及禍하여 將逃歸러니 先勅關津하여 無得出貴人注+關, 立於經塗要會處, 以譏出入. 津者, 濟渡江河, 所必由之處.이라
睿至河陽하여 爲津吏所止하니 從者宋典 自後來하여 以鞭拂睿而笑曰 舍長 官禁貴人이어늘 汝亦被拘邪注+舍長, 舍中之長, 相稱常人之辭, 典詭稱琅邪王爲舍長, 以惑津吏也. 官字屬下句, 猶言官司‧官法也.아하니
吏乃聽過 至洛陽하여 迎太妃夏侯氏하여 俱歸國하다
張方 復入京城하여 廢皇后, 太子하다
表匈奴左賢王劉淵하여 監五部軍事하여 使將兵在鄴注+楊駿輔政, 以淵爲五部大都督. 元康末, 坐部人叛, 出塞免官. 穎鎭鄴, 表監五部軍事.하다
淵子聰 驍勇絶人하고 博涉經史하며 善屬文하며 彎弓三百斤이라 弱冠 遊京師하니 名士莫不與交러라
淵從祖宣 謂其族人曰 漢亡以來 我單于徒有虛號하고 無復尺土 自餘王侯 降同編戶
今吾衆雖衰 猶不減二萬하니 奈何斂手受役하여 奄過百年注+奄, 忽也, 遽也.이리오
左賢王 英武超世하니 天苟不欲興匈奴인댄 必不虛生此人也리라
今司馬氏骨肉相殘하여 四海鼎沸하니 復呼韓邪之業 此其時矣注+漢宣帝時, 稽侯㹪來朝, 稱呼韓邪單于, 光武時, 日逐王比內附, 亦稱呼韓邪單于.라하고
乃相與謀하여 推淵爲大單于할새 使其黨呼延攸 詣鄴告之注+北狄傳 “匈奴四姓, 有呼延氏‧卜氏‧蘭氏‧喬氏, 而呼延氏最貴.”하다
白穎하여 請歸會葬한대 勿許 令攸先歸하여 告宣等하여 使招集五部하여 聲言助穎이나 實欲叛之러라
及幽, 幷起兵 說穎曰 今二鎭跋扈하니 恐非宿衛及近郡士衆所能禦也注+二鎭, 謂幽‧幷. 請還說五部하여 赴國難하리이다
穎曰 吾欲奉乘輿還洛陽하여 傳檄天下하여 以逆順制之 何如注+言見力不足以制二鎭, 欲檄徵天下兵, 杖順制逆.
淵曰 殿下 武皇帝之子 有大勳於王室하여 威恩遠著하니이다
王浚 豎子 東嬴 疎屬이니 豈能與殿下爭衡邪注+東嬴公騰, 宣帝弟東武侯馗之孫, 故云疎屬.잇가 但殿下一發鄴宮이면 示弱於人하여
洛陽 不可得至 雖至洛陽이나 威權 不復在殿下也리이다 願撫勉士衆하여 靖以鎭之하소서
淵爲殿下하여 以二部摧東嬴하고 三部梟王浚하리니 二豎之首 可指日而懸也리이다
하여 拜淵爲北單于, 參丞相軍事하다 至左國城注+左國城, 蓋匈奴左部所居城也. 杜佑曰 左國城, 在石州離石縣. 劉宣等 上大單于之號하니
二旬之間 有衆五萬하여 都於離石注+離石縣, 自漢以來, 屬西河郡.하다
幽, 幷兵 至鄴이어늘 奉帝還洛陽하니 하다
王浚, 東嬴公騰 合兵하여 敗石超於平棘하고 乘勝進軍하니 鄴中 犇潰注+平棘縣, 漢屬常山郡, 晉屬趙國.
將數十騎하여 奉帝御犢車하고 南犇하니 倉卒無齎注+晉制, 皁輪犢車, 諸公乘之. 齎, 備也, 裝也.
中黃門被囊中 齎私錢三千이어늘 詔貸之하여 於道中買飯하여 食以瓦盆하다
至溫하여 將謁陵注+帝之先, 河內溫縣孝敬里人, 自京兆尹防以上, 皆葬于溫.할새 帝喪履하여 納從者之履하고 下拜流涕러라
張方 迎帝還宮하니 犇散者稍還하여 百官粗備러라 入鄴暴掠하고 復還薊하다
劉淵 聞穎去鄴하고 歎曰 不用吾言하여 遂自犇潰하니 眞奴才也로다이나 吾與之有言矣 不可以不救라하고
將發兵擊鮮卑, 烏桓이러니 劉宣等 諫曰 晉人 奴隷御我러니 今其骨肉相殘하니 是天棄彼而使我復呼韓邪之業也
鮮卑, 烏桓 我之氣類 可以爲援이라 奈何擊之注+鮮卑‧烏桓, 東胡之種, 與匈奴同稟北方剛強之氣, 又同類也.잇고
淵曰 善하다 大丈夫當爲漢高, 魏武 呼韓邪 何足效哉리오 宣等 稽首曰 非所及也니이다
冬十月 李雄 自稱成都王하다
雄以范長生有名德하여 爲蜀人所重이라하여 欲迎以爲君한대 長生 不可
遂卽王位하여 約法七章하고 以叔父驤爲太傅하고 兄始爲太保하고 李離爲太尉하고 李國爲太宰하다
以國, 離有智謀라하여 事必咨而後行이나 然國, 離事雄彌謹이러라
劉淵 遷都左國城하니 胡, 晉歸之者愈衆이라 謂群臣曰 昔 漢有天下 久長하여 恩結於民이라
漢氏之甥으로 約爲兄弟하니 兄亡弟紹 不亦可乎아하고 乃建國號曰漢이라하다
依高祖하여 稱漢王하고 尊安樂公禪하여 爲孝懷皇帝하고 以右賢王宣爲丞相하고
崔遊爲御史大夫하고 後部人陳元達爲黃門郞注+淵, 皆用漢官制. 後部, 卽匈奴北部也, 居新興.하고 族子曜爲建武將軍注+沈約志 “魏置建武將軍.”하니 遊固辭不就하다
元達 少有志操 嘗招之호되 不答이러니 及淵爲王 或謂曰 君其懼乎
元達 笑曰 不過二三日 驛書必至라하더니 其暮 果徵之하다
元達 事淵 屢進忠言호되 退而削草하여 雖子弟라도 莫得知也注+草, 奏藁也.러라
曜生而眉白하고 目有赤光하며 幼聰慧하고 有膽量注+謂有膽氣志量.이라
早孤하고 養於淵이러니 及長 儀觀魁偉하고 性拓落高亮하여 與衆不群注+觀, 古玩切. 儀觀, 儀形神觀也. 拓落, 豁達之貌. 高亮, 高明之義.하고
好讀書하고 善屬文하며 鐵厚一寸 射而洞之注+洞, 貫也.하니 劉聰 重之하여 以爲漢世祖, 魏武帝之流라하니라
十一月 張方 遷帝於長安하니 僕射荀藩 立留臺于洛陽하고 復皇后羊氏하다
張方 在洛旣久 剽掠殆竭이라 乃引兵入殿하여 以所乘車迎帝하여 逼使上車어늘
帝垂泣從之하고 令方具車하여 載宮人, 寳物하니 軍人 因妻略後宮하고
分爭府藏하며 割流蘇武帳하여 爲馬帴하니 魏, 晉蓄積 掃地無遺注+武帳之上, 有流蘇之飾, 故曰流蘇武帳. 流蘇, 盤線繪繡之毬, 五綵錯爲之同心而下垂者也. 蘇, 猶鬚也, 又散貌. 以其蘂下垂, 故曰蘇. 帴, 將先切, 馬鞍具也. 一作𩋋.러라
擁帝及穎, 豫章王熾等하여 趨長安注+熾, 太煕元年, 受封.하니 迎于霸上하여 以征西府爲宮注+征西府, 征西將軍府, 顒所居也.하다
唯僕射荀藩及司隷劉暾等 在洛陽하여 爲留臺하여 承制行事하여 復稱永安하고 立羊后하고 號東, 西臺注+藩, 勖之子也. 暾, 他昆切. 洛陽爲東臺, 長安爲西臺.러라
帝兄弟二十五人 時存者唯穎, 熾及吳王晏注+晏, 太康十年受封.이라 材庸下하고 沖素好學이라
故太宰顒 立之하니 詔穎還第하고 而以顒都督中外하고 又以東海王越爲太傅하여 與顒夾輔帝室하고
王戎 參錄朝政하고 王衍 爲左僕射하고 張方 爲中領軍, 錄尙書事하다
令州郡蠲除苛政하고 愛民務本하며 淸通之後 當還東京注+淸通之後, 謂阻兵者解兵, 道路淸通之後也. 帝時在長安, 故謂洛陽爲東京. 通鑑, 東京下云 “大赦, 改元.” 卽永興.하다
顒以四方乖離하여 禍難不已 故下此詔하여 和解之하여 冀獲少安이러라 辭太傅不受하다
漢寇太原, 西河郡하다
漢王淵 遣劉曜하여 寇太原하여 取泫氏注+泫, 工玄切. 漢書地理志 “上黨有泫氏縣.”하고 喬晞寇西河하여 取介休注+介休縣, 漢屬太原郡, 晉屬西河郡, 唐屬汾州.하다
介休令賈渾 不降이어늘 晞殺之하고 將納其妻宗氏러니 宗氏罵晞而哭한대 晞又殺之하다
聞之하고 大怒하여 曰 使天道有知 喬晞望有種乎아하고 追還하여 降秩四等하고 收渾屍하여 葬之하다


甲子年(304)
[] 나라 孝惠皇帝 永興 원년이다.
[] 나라(前趙) 高祖 劉淵 元熙 원년이고
나라 太宗 李雄建興 원년이다.
이해에 僭國(혼란한 시기에 帝位를 찬탈하거나 지역에 웅거한 나라)이 두 나라이니, 큰 나라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하나이다.
[] 봄 정월에 尙書令 樂廣하였다
[] 樂廣의 딸이 成都王의 왕비가 되었다. 혹자가 그를 太尉 司馬乂에게 참소하자, 사마예가 악광에게 물으니,
악광이 정신과 얼굴빛을 조금도 변치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내 어찌 다섯 아들로 한 딸을 바꾸겠습니까.”注+〈“廣豈以五男易一女哉”는〉 司馬穎에게 붙으면 다섯 아들이 죽임을 당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사마예가 여전히 의심하니, 악광은 근심으로 하였다
[] 東海王 司馬越張方을 시켜서 長沙王 司馬乂를 죽이니, 司馬穎京師에 들어가서 스스로 丞相이 되고 얼마 후 돌아가 지역에 鎭守하였다.
[] 司馬乂가 여러 번 司馬穎의 군대를 격파하고 일찍이 (황제)을 받드는 를 손상한 적이 없었다. 성안의 양식이 날로 궁핍하였으나 士卒들이 배반할 마음이 없었다.
張方洛陽을 함락할 수 없다 하여 長安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東海王 司馬越은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은밀히 殿中에 있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밤중에 사마예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 아뢰어 詔令을 내려 사마예의 관직을 파면해서 金墉城에 유치하고 大赦令을 내리고 改元을 하게 하였다.注+永安으로 改元하였다.
성문이 열리자 장병들은 성 밖에 있는 장방의 병력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는 후회하여 다시 위협하여 사마예를 탈출시켜 사마영을 막고자 모의하였다.
이에 사마월이 두려워하고 사람을 보내어 장방에게 은밀히 하자, 장방이 사마예를 구워서 죽이니, 장방의 병사들 또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注+之石이니, 불 위에 고기를 올려놓는 것이다. (위하다)는 去聲이다.
사마영이 京師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가 지역에 鎭駐하자, 詔令을 내려서 사마영을 丞相으로 삼고 사마월을 守尙書令으로 삼았다.
사마영이 石超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려 12城門에 주둔하게 하고 殿中의 사람 중에 예전부터 미워하던 자들을 모두 죽이고는 宿衛하는 병사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로 바꾸었다.注+洛陽城 동쪽에는 建春, 東陽, 淸明의 세 이 있고, 남쪽에는 開陽, 津陽, 平昌, 宣陽의 네 이 있고, 서쪽에는 廣陽, 西明, 閶闔의 세 이 있고, 북쪽에는 大夏, 廣莫의 두 문이 있으니, 모두 12개 이다.
[] 雍州刺史 劉沈司馬顒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 司馬顒鄭縣에 군대를 주둔하여 동쪽 군대의 聲援이 되었는데,注+鄭縣京兆郡에 속하였다. 劉沈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후퇴하여 長安으로 들어가서 급히 張方을 부르자,
장방은 洛陽 안에 있는 官奴婢私奴婢 만여 명을 노략질하여 서쪽으로 데리고 갔다. 유침이 渭水를 건너 군대를 주둔하여 사마옹과 싸우니, 사마옹이 여러 번 패하였다.
유침이 衙博皇甫澹으로 하여금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長安을 습격하게 하여 성문으로 들어가서 힘써 싸워 사마옹의 장막 아래에 이르렀다.
이때 유침의 군대가 서서히 왔는데, 사마옹의 도당인 張輔는 유침의 군대가 뒤이어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가운데를 가로질러 공격하여 아박과 황보담을 죽이니, 유침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였다.
유침이 남쪽으로 도망가자 그를 사로잡으니, 유침이 사마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를 알아주는 은혜는 가볍고 君臣 간의 의리는 무겁습니다.注+司馬顒劉沈을 붙잡아 軍師로 삼았다가 마침내 雍州刺史로 삼았다.
나는 천자의 詔命을 어기고서 세력의 강하고 약함을 헤아려 구차히 생명을 온전히 할 수가 없습니다.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날에 반드시 죽기로 기약하였으니, 죽어서 김치나 젓으로 담가지는 것을 냉이처럼 달게 여깁니다.” 사마옹은 노하여 그를 참수하였다.注+投袂”는 소매를 떨친다는 말과 같다.
[] 新平太守 張光이 여러 번 劉沈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올렸는데注+(위하다)는 去聲이다. 司馬顒이 그를 붙잡아 힐문하자,
장광이 말하기를 “劉雍州가 저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大王으로 하여금 오늘의 승리가 있게 하였습니다.” 하니, 사마옹은 그를 하게 여겨서 표문을 올려 右衛司馬로 삼았다.
[] 羅尙에게 詔令을 내려 巴東의 세 을 임시로 통솔하게 하였다.
[] 羅尙이 도망하여 江陽에 이르자, 사자를 보내어 표문을 올려 상황을 아뢰니,注+華陽國志≫에 말하였다. “瀘州瀘川縣은 본래 나라 江陽縣이다. 또 江安縣 또한 나라의 江陽縣이다.” 나상에게 詔令을 내려 巴東巴郡, 涪陵을 임시로 통솔하여 군수품을 공급받게 하였다.注+은 본래 梁州에 속하였는데, 羅尙이 임시로 통솔한 것이다.
나상이 別駕 李興을 보내어 劉弘에게 가서 양식을 구하게 하자, 유홍이 3만 을 그에게 지급하니, 나상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다.
李興이 남아서 參軍이 되기를 원하였는데, 유홍은 허락하지 않고 그의 手版을 빼앗아 나상에게 보내었다.注+手板은 바로 옛 이다. 參佐에게 敬禮를 베풀므로 수판을 잡는데, 이제 劉弘李興의 수판을 빼앗아 보낸 것은 그가 羅尙을 버리고 자기를 섬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유민으로서 荊州에 있는 자가 10여만 였는데, 寓居하며 가난하고 궁핍해서 도적질을 많이 하였다.
유홍이 이들에게 田地와 곡식의 종자를 많이 주고注+(종자)은 章勇이다. 어진 이와 재주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자질에 따라 등용하니, 유민들이 마침내 편안하였다.
[] 2월에 司馬穎皇后 羊氏太子 司馬覃을 폐하였다.
[] 廣陵度支 陳敏周玘石冰建康에서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石冰의 무리가 陳敏보다 10배나 되었는데, 진민이 이들을 공격할 적에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고, 마침내 周玘와 연합하여 석빙을 공격하여 참수하니, 揚州, 徐州가 평정되었다.
주기와 賀循은 모두 병력을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을 말하지 않으니, 조정에서 진민을 廣陵相으로 삼았다.
[] 司馬顒이 표문을 올려 司馬穎皇太弟로 삼고 스스로 太宰雍州牧이 되었다.
[] 가을 7월에 東海王 司馬越이 황제( 惠帝)를 받들어 司馬穎을 정벌하고, 황후와 태자를 복위시켰다.
사마영이 군대를 보내어 蕩陰에서 항거하여 싸우니, 이때 侍中 嵇紹가 죽었다. 황제가 마침내 지역으로 들어가니, 사마월이 달아나 자신의 封國으로 돌아갔다.
[] 司馬穎의 참람함과 사치함이 날로 심해지고 총애하는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여 사람들의 信望을 크게 잃었다.注+당시 사람들은 司馬穎이 황실을 바로잡고 보필하기를 바랐는데, 지금 마침내 이와 같으므로 사람들의 신망을 크게 잃은 것이다.
東海王 司馬越右衛將軍 陳眕과 함께 군대를 무장하고 雲龍門으로 들어가서 詔令으로 三公과 백관들을 불러 戒嚴을 하고 사마영을 토벌하자, 石超 지역으로 달아나니, 皇后 羊氏太子 司馬覃을 복위시켰다.
司馬越이 황제를 받들고 북쪽으로 정벌할 적에 侍中 嵇紹를 불러 行在所에 나오게 하니,注+長沙王 司馬乂가 국정을 담당하여 嵇紹侍中으로 삼았는데, 사마예가 죽자 혜소가 관직에서 내쫓겨 庶人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사마영을 토벌하므로 다시 그를 불러 行在所로 나오게 한 것이다. 侍中 秦準이 혜소에게 이르기를 “지금 갈 경우 一身安危를 예측하기 어렵다. 에게 좋은 말이 있는가?” 하니,
혜소가 正色을 하며 말하기를 “신하가 乘輿(황제)를 호위함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니, 좋은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마월이 격문을 보내어 四方의 군대를 부르니, 安陽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이 10여만이 되었다.注+晉書≫ 〈地理志〉에 “安陽縣魏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 司馬穎이 여러 관리들을 모아 계책을 묻자, 東安王 司馬繇(사마요)가 말하기를 “天子가 친히 정벌하시니, 마땅히 갑옷을 벗고 흰옷을 입고서 나와 황제를 맞이하여 죄를 청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사마영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石超를 보내서 군대를 거느리고 항거하여 싸우게 하였다.
陳眕의 아우가 지역에서 行在所로 와서 말하기를 “ 지역은 모두 이미 병사들이 離散되었다.” 하니, 이 때문에 매우 방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초의 군대가 갑자기 몰려오자, 乘輿(황제)가 蕩陰에서 크게 패하여注+이다. 蕩陰縣나라 때에는 河內郡에 속하였는데, 나라 때에는 魏郡에 속하였다. 황제가 뺨에 화살 세 발을 맞았고 百官侍御들이 모두 흩어졌다.注+은 얼굴의 옆이다. (맞다)은 去聲이다.
嵇紹朝服을 입고 에 올라 몸으로 황제를 擁衛하였는데 병사들이 혜소를 끌어내려 칼로 찌르자, 황제가 말하기를 “그는 충신이니 죽이지 말라.” 하였다.
嵇紹衛帝(嵇紹가 황제를 보호하다)嵇紹衛帝(嵇紹가 황제를 보호하다)
병사들이 대답하기를 “太弟(사마영)의 명령을 받들어 오직 폐하 한 사람만 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혜소를 죽이니, 피가 황제의 옷에 튀었다. 황제가 풀 속으로 떨어져서 여섯 개의 옥새를 잃었다.
석초가 황제를 받들고 자기 진영으로 갔는데, 황제가 몹시 굶주린 상태였다. 석초가 물을 올리고 좌우에서 가을 복숭아를 올렸다.注+복숭아는 여름에 익은 것을 임금에게 올린다. 가을 복숭아는 至尊에게 올리는 것이 아닌데도 받들어 올린 것은 에 정한 것을 갖출 수 없음[所無]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이다. 사마영이 황제를 받들어 지역으로 들어가서 建武改元하였다.
[] 좌우 신하들이 황제의 옷을 빨려 하자,注+戶管이니, 세탁함이다. 황제가 말하기를 “嵇侍中의 피이니, 빨지 말라.” 하였다. 陳眕上官巳太子 司馬覃을 받들어 洛陽을 지켰다.
司馬越東海로 돌아가니, 孫惠가 사마월에게 藩鎭들을 맞아 결탁하여 함께 황실을 도울 것을 권하자, 사마월은 손혜를 記室參軍으로 삼아서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北軍中候 苟晞(구희)가 豫州都督范陽王 司馬虓에게 달아나니, 사마효가 그를 兗州刺史로 삼았다.注+司馬虓范陽康王 司馬綏의 아들이니, 咸寧 5년(279)에 父王을 이어 봉해져서 이때 許昌鎭駐하였다. 司馬綏宣帝의 아우인 司馬馗(사마규)의 아들이다. 許交이다.
[] 幽州都督 王浚幷州刺史 東嬴公 司馬騰이 군대를 일으켜 司馬穎을 토벌하였다.
[] 처음에 세 趙王 司馬倫을 토벌할 적에 王浚이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양쪽을 관망하여 관할하는 병사와 백성들에게 禁令을 내려 세 의 모집에 달려가지 못하게 하니,
司馬穎이 은밀히 그를 제거하려고 도모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때 다시 詔令하여 그를 부르니,
왕준이 마침내 鮮卑段務勿塵烏桓羯朱, 幷州刺史東嬴公 司馬騰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사마영을 토벌하자,注+居謁이다. 羯朱는 사람의 이름이다. 사마영이 石超를 보내어 그를 공격하였다. 사마등은 司馬越의 아우이다.
[] 8월에 司馬穎東安王 司馬繇를 죽이니, 琅邪王 司馬睿가 달아나 자신의 封國으로 돌아갔다.
[] 司馬穎東安王 司馬繇가 예전에 한 의논을 원망하여 그를 죽였다.注+司馬繇가 자기로 하여금 素服을 입고 천자를 맞이하여 죄를 청하게 함을 원망한 것이다. 司馬繇의 형의 아들인 琅邪王 司馬睿는 침착하고 민첩하며 도량이 있었는데 左將軍이 되어서 東海王參軍王導와 친하였다.注+王導王敦從父弟(사촌 아우)이니, 東海王 司馬越參軍事가 되었다.
王導王導
왕도는 지식과 도량이 높고 원대하였는데, 조정에 변고가 많다 하여 매번 사마예에게 封國으로 갈 것을 권하였다. 사마요가 죽자 사마예는 황제를 따라 지역에 있었다.
그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장차 도망하여 돌아가려 하였으나, 사마영이 미리 관문과 나루터에 명하여 貴人을 내보내지 못하게 하였다.注+은 다니는 길의 중요한 곳에 세워 출입하는 자를 기찰하는 것이고, 江河를 건널 때 반드시 경유하는 곳이다.
사마예가 河陽에 이르러 나루터의 관리에게 저지를 당하자, 수행원인 宋典이 뒤쪽에서 와 채찍으로 사마예를 치고 웃으며 말하기를 “舍長아, 관청에서는 貴人하는데 너도 또한 제지를 당하는가.”注+舍長은 집안의 어른이니,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서로 칭하는 말이다. 宋典이 거짓으로 琅邪王을 칭하여 舍長이라고 해서, 나루터를 지키는 관리를 헷갈리게 한 것이다. 자는 아래 에 붙여 읽으니, 〈“官禁”은〉 官司, 官法이라는 말과 같다. 하니,
나루터의 관리가 마침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洛陽에 이르러 太妃 夏侯氏를 맞이하여 함께 봉국으로 돌아갔다.
[] 張方이 다시 京城에 들어가서 皇后太子를 폐위하였다.
[] 劉淵이 스스로 大單于라 칭하였다.
[] 처음에 司馬穎表文을 올려 匈奴左賢王 劉淵에게 五部軍事를 감독해서 병력을 거느리고 지역에 있게 하였다.注+楊駿이 정사를 보필할 적에 劉淵五部大都督으로 삼았는데, 元康 말년에 部族 사람의 반란에 걸려서 변방으로 나가 관직을 파면당했었다. 그러다가 司馬穎 지역에 鎭駐하면서 표문을 올려 五部軍事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劉淵의 아들 劉聰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고 經書와 역사책을 널리 섭렵하였으며, 글을 잘 짓고 3백 의 활을 당겨 쏠 수 있었다. 弱冠의 나이에 京師에 와서 유학하니, 名士들이 그와 사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연의 從祖劉宣이 그 族人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 單于는 한갓 有名無實한 호칭만 있고 더 이상 한 자 되는 땅도 없으며 나머지 들은 降等하여 編戶와 같다.
지금 우리가 비록 쇠약하였으나 아직 2만 명을 밑돌지 않으니, 어찌하여 손을 걷고 남의 사역을 받으며 어느덧 백 년을 지났는가.注+은 갑자기이고, 급함이다.
左賢王(유연)의 英明武勇은 세상에서 특출하니, 하늘이 만약 우리 匈奴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탄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司馬氏骨肉 간에 서로 해쳐서 四海가 솥에 물이 끓듯 하니, 呼韓邪의 왕업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 적기이다.”注+나라 宣帝稽侯 (산)이 와서 조회하자 呼韓邪單于라고 칭하였고, 光武帝日逐王 가 조정에 歸屬하자 또한 呼韓邪單于라고 칭하였다.
이어서 서로 모의하여 유연을 大單于로 추대할 적에 그 呼延攸로 하여금 지역에 가서 이를 〈司馬穎에게〉 하게 하였다.注+晉書≫ 〈北狄傳〉에 “匈奴의 네 성씨는 呼延氏卜氏, 蘭氏, 喬氏가 있는데 호연씨가 가장 귀하다.” 하였다.
[] 劉淵司馬穎에게 아뢰어 돌아가 〈族人의〉 葬禮에 참석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마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연은 呼延攸로 하여금 먼저 돌아가서 劉宣 등에게 하여 五部의 무리를 불러 모아 사마영을 돕는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으나, 실제는 배반하고자 한 것이었다.
幽州幷州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유연이 사마영을 설득하기를 “지금 두 진영이 跋扈하니, 宿衛兵과 가까운 의 병사로는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듯합니다.注+두 진영은 幽州(王浚)와 幷州(司馬騰)를 이른다. 청컨대 제가 돌아가 五部를 설득하여 國難에 달려오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사마영이 “내가 乘輿를 받들어 洛陽으로 돌아가서 천하에 격문을 돌려 으로 제재하고자 하니, 어떻겠는가?”注+〈“傳檄天下 以逆順制之”는〉 힘이 幽州幷州 두 진영을 제압할 수 없음을 알므로 격문을 돌려 천하의 병력을 징발해서 忠順함을 가지고 反逆함을 제재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하고 묻자,
유연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殿下武皇帝의 아드님이고 황실에 큰 공이 있어서 위엄과 은혜가 멀리 드러나 있습니다.
王浚은 못난 자식이고 東嬴公은 소원한 친속이니, 어찌 전하와 비교가 되겠습니까.注+東嬴公 司馬騰宣帝의 아우인 東武侯 司馬馗(사마규)의 손자이므로 소원한 친속이라 한 것이다. 다만 전하가 한 번 鄴宮을 출발하면 남에게 약함을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洛陽에 이를 수가 없고 비록 낙양에 이른다 하더라도 위엄과 권세가 다시 전하에게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병사들을 어루만지고 권면해서 난을 조용히 鎭定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전하를 위하여 두 로 동영공을 꺾고 세 王浚梟首할 것이니, 두 사람의 머리를 며칠 안으로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영이 기뻐하고 유연을 北單于 參丞相軍事로 삼았다. 유연이 左國城에 이르자,注+左國城匈奴左部가 거주하는 인 듯하다. 杜佑가 말하기를 “左國城石州離石縣에 있다.” 하였다. 劉宣 등이 大單于의 칭호를 올리니,
20일 사이에 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여 離石에 도읍하였다.注+離石縣나라 이후로 西河郡에 속하였다.
[] 幽州幷州의 군대가 지역에 이르자, 司馬穎이 황제를 받들고 洛陽으로 돌아가니, 王浚 지역을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 王浚東嬴公 司馬騰이 병력을 규합하여 石超平棘에서 패퇴시키고 勝勢를 타고 進軍하니, 지역이 무너져 달아났다.注+平棘縣나라 때에는 常山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나라에 속하였다.
사마영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황제를 받들어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몰고 남쪽으로 달아나니, 창졸간의 일이어서 챙겨간 물자가 없었다.注+나라 制度에 검은 수레바퀴를 달고 송아지가 끄는 수레는 諸公들이 탔다. 는 준비함이요, 가져옴이다.
中黃門의 이불 주머니 안에 개인 돈 3천 을 휴대하였는데, 詔令을 내려 이것을 꾸어서 길 가운데서 밥을 사 질그릇에 담아 먹었다.
溫縣에 이르러 장차 을 배알하려 할 적에注+황제의 선조는 河內 溫縣 孝敬里 사람인데, 京兆尹 司馬防 이상은 모두 溫縣에 장례하였다. 황제가 신을 잃어 수행원의 신을 신고 내려가 절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張方이 황제를 맞이하여 궁중으로 돌아가니, 흩어져 달아났던 자들이 다소 돌아와 백관이 대략 갖추어졌다. 왕준이 지역에 들어가서 포악하게 노략질하고 다시 薊縣(계현)으로 돌아갔다.
[] 劉淵司馬穎 지역을 떠나갔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아서 마침내 스스로 달아나 무너졌으니, 참으로 종놈의 재주이다. 그러나 내가 그와 더불어 한 약속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장차 군대를 일으켜 鮮卑烏桓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劉宣 등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우리를 노예로 대하였는데 지금 그 골육들이 서로 해치니, 이는 하늘이 저들을 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呼韓邪王業을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鮮卑烏桓은 우리와 같은 종류이니, 援助할 만합니다. 어찌 그들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注+鮮卑烏桓東胡의 종족이니, 匈奴와 함께 북방의 강한 기운을 받고 태어났고 또 같은 族類이다.
유연은 말하기를 “좋다. 大丈夫는 마땅히 나라 高祖(劉邦)와 나라 武帝(曹操)가 되어야 하니, 호한야를 어찌 본받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선 등은 머리를 조아리며 “ 하였다.
[] 겨울 10월에 李雄이 스스로 成都王이라 칭하였다.
[] 李雄范長生이 명망과 덕이 있어서 지역 사람들에게 중망을 받는다 하여 그를 맞이하여 군주로 삼고자 하였으나, 범장생이 수락하지 않았다.
이웅은 마침내 成都王의 왕위에 올라 7의 간략한 법을 시행하기로 약속하고, 叔父李驤太傅로, 형 李始太保로, 李離太尉로, 李國太宰로 삼았다.
이웅은 이국과 이리가 智謀가 있다 하여 일을 반드시 자문한 뒤에 행하였으나, 이국과 이리는 더욱 조심하여 이웅을 공손히 섬겼다.
[] 劉淵이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였다.
[] 劉淵左國城으로 천도하니, 오랑캐와 나라에서 귀의하는 자가 더욱 많았다. 유연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기간이 長久하여 은혜가 백성들에게 깊이 베풀어졌다.
나는 나라의 외손으로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국호를 이라고 公布하였다.
그리고 나라 高祖를 따라 漢王이라고 칭하고 蜀漢安樂公 劉禪을 높여 孝懷皇帝라 하고, 右賢王 劉宣丞相으로,
崔遊御史大夫로, 後部의 사람인 陳元達黃門郞으로,注+劉淵은 모두 나라 官制를 따랐다. 後部는 바로 匈奴北部이니, 新興에 거주하였다. 族子劉曜建武將軍으로 삼으니,注+沈約의 ≪宋書≫ 〈百官志〉에 “나라에서는 建武將軍을 설치했다.” 하였다. 최유는 굳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 陳元達은 젊어서부터 지조가 있었다. 劉淵이 일찍이 그를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유연이 漢王이 되자 혹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두렵지 않은가?” 하니,
진원달이 웃으며 말하기를 “2, 3일 안에 파발마로 부르는 편지가 도착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유연이 과연 글을 보내어 불렀다.
진원달은 유연을 섬길 적에 충직한 말을 자주 올렸으나, 물러가면 초고를 삭제하여 비록 자제들이라도 알지 못하게 하였다.注+는 아뢴 글의 草藁이다.
劉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썹이 희고 눈에 붉은 광채가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롭고 담력과 큰 포부가 있었다.注+〈“有膽量”은〉 담력과 큰 포부가 있음을 이른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유연에게 양육되었는데, 장성하자 儀表가 훤칠하고 거룩하였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高明하여 보통 사람과 무리 짓지 않았다.注+古玩이다. “儀觀”은 儀形神觀(정신으로 나타남)이다. “拓落”은 활달한 모양이요, “高亮”은 高明한 뜻이다.
책을 읽기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으며 한 치 두께의 쇠를 활로 쏘아 관통시키니,注+은 관통함이다. 劉聰이 그를 소중히 여겨서 나라 世祖(光武帝)와 나라 武帝(曹操)의 부류라 하였다.
[] 11월에 張方이 황제( 惠帝)를 長安으로 옮기니, 僕射 荀藩洛陽留臺를 세우고 皇后 羊氏를 다시 복위시켰다.
張方이 御駕를 겁박하여 長安으로 옮기다張方이 御駕를 겁박하여 長安으로 옮기다
[] 張方洛陽에 오랫동안 있자, 병사들이 노략질하니, 백성들의 재정이 거의 고갈되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궁전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탄 수레로 황제를 맞이해서 핍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하니,
황제는 눈물을 떨구며 이를 따랐고, 장방으로 하여금 수레를 장만하여 궁인과 보물을 싣게 하였다. 軍人들이 이로 인하여 후궁들을 아내로 삼고 노략질하고,
창고에 있는 물건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으며 流蘇가 달린 武帳(병기를 보관해두는 장막, 또는 武士를 무늬로 넣은 휘장)을 잘라 말안장으로 삼으니, 나라와 나라에서 저축해놓은 것들이 땅을 쓸 듯이 모두 없어졌다.注+武帳의 위에 流蘇(수레‧깃발‧휘장 등 가장자리에 늘어뜨린 술)의 꾸밈이 있으므로 “流蘇武帳”이라 하였다. 流蘇는 실을 감아 색을 입히고 수를 놓은 공에 五綵로 섞어서 同心結(비단실로 짠 끈을 고리형으로 엮은 매듭)을 만들어 아래로 드리운 것이다. 는 수염과 같고 또 흩어진 모양인데, 그 술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라 한 것이다. 將先이니, 말안장의 도구이다. 一本에는 𩋋으로 되어 있다.
[] 張方이 황제와 司馬穎豫章王 司馬熾 등을 끼고 長安으로 달려가니,注+司馬熾太煕 원년(290)에 封地를 받았다. 司馬顒霸上에서 이들을 맞이하여 征西將軍으로 삼았다.注+征西府征西將軍이니, 司馬顒이 거처하는 곳이다.
오직 僕射 荀藩司隷 劉暾 등이 洛陽에 남아서 留臺를 만들고 制令을 받들어 일을 처리하면서 年號를 다시 永安이라 칭하였다. 羊后皇后로 세우고 洛陽東臺, 長安西臺注+荀藩荀勖의 아들이다. 他昆이다. 洛陽東臺라 하고, 長安西臺라 하였다.라 칭하였다.
[] 12월에 太宰 司馬顒太弟 司馬穎을 폐위하고 다시 豫章王 司馬熾를 세워 皇太弟로 삼았다.
[] 황제의 형제 25명 중에 이때 생존한 자가 오직 司馬穎司馬熾, 吳王 司馬晏이었는데,注+司馬晏太康 10년(289)에 封地를 받았다. 사마안은 재주가 용렬하였고 사마치는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太宰 司馬顒이 그를 세운 것이다. 詔令을 내려 사마영에게 本第로 돌아가게 하고, 사마옹을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또 東海王 司馬越太傅로 삼아 사마옹과 함께 帝室을 좌우에서 보필하게 하고,
王戎으로 하여금 조정의 정사를 참여하여 총괄하게 하고 王衍左僕射로 삼고 張方中領軍 錄尙書事로 삼았으며,
州郡으로 하여금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농업에 힘쓰게 하였으며, 도로가 깨끗이 소통한 뒤에는 마땅히 東京(洛陽)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注+淸通之後”는 병력으로 막고 있는 자가 군대를 해산해서 도로가 깨끗이 소통한 뒤를 이른다. 황제가 이때 長安에 있었으므로 洛陽을 일러 東京이라 한 것이다. ≪資治通鑑≫에는 “東京” 아래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改元을 하였다.” 하니, 바로 永興이다.
사마옹은 사방이 乖離되어서 이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 조령을 내려서 화해시켜 조금 편안해지기를 바란 것이었다. 사마월은 太傅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나라(前趙)가 太原西河郡을 침략하였다.
[] 漢王 劉淵劉曜를 보내 太原을 침략하여 泫氏(현지)를 점령하고,注+工玄이다. ≪漢書≫ 〈地理志〉에는 “上黨泫氏縣이 있다.” 하였다. 喬晞를 보내어 西河를 침략하여 介休를 점령하게 하였다.注+介休縣나라 때에는 太原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西河郡에 속하였으며, 나라 때에는 汾州에 속하였다.
介休令 賈渾이 항복하지 않자, 교희가 그를 죽이고 장차 가혼의 아내 宗氏를 아내로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종씨가 교희를 꾸짖고 하자, 교희는 또다시 그녀를 살해하였다.
유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만일 天道知覺이 있다면 교희는 종자가 보존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뒤쫓아 돌아오게 해서 품계를 네 등급 낮추고 가혼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東海王越……尋還鎭鄴 : “張方이 司馬顒을 도와 역적질을 하여 京城을 크게 노략질해서 친히 황제의 大駕와 항거하고 싸웠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예전에 이미 ‘司馬乂가 황제를 받들고 장방을 토벌했다.’고 썼으면 그 逆‧順이 매우 분명하다. 지금 비록 司馬穎의 군대가 전진하여 京師를 핍박하였으나,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마땅히 서로 굳게 지켜서 외부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힘이 아직 꺾이지 않았는데 司馬越이 마침내 갑자기 스스로 생각을 바꾸었으니, 그렇다면 이는 사마영이 반란했을 뿐만이 아니요, 사마월 또한 반란한 것이다. ‘사마월이 장방으로 하여금 사마예를 죽이게 했다.’고 쓰고 ‘장방을 시켰다.’고 썼으면 사마월의 죄가 더욱 분명하다. 더구나 사마영이 이로 인하여 도성에 들어가서 스스로 丞相이 됨에 있어서랴. ‘들어갔다’는 것은 順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고, ‘스스로 되었다’는 것은 君主를 무시하는 일이다.[張方助顒爲逆 大掠京城 親與乘輿拒戰 綱目前已書乂奉帝討方 則其逆順甚明 今雖穎兵進逼京師 在臣子 猶當相與堅守 以待外援 況力尙未屈 越乃遽自改圖 然則非特穎反 越亦反也 書越使張方殺乂 曰使 則越之罪益明矣 況穎因以入京 自爲丞相者乎 入者 不順之詞 自爲者 無君之事]” ≪發明≫
역주2 雍州刺史劉沈……死之 : “앞에서 ‘劉沈에게 命하여 司馬顒을 토벌하게 했다.’고 썼으면 이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해서 명분과 의리가 매우 바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관직을 썼었는데, 여기서 재차 그의 관직을 든 것은 그가 충절에 죽은 의리가 있음을 찬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복함을 혐의하지 않은 것이다.[前書詔沈討顒 則是奉命討罪 名義甚正 然已書其官矣 而此再擧之者 美其有死節之誼 故無嫌於重復也]” ≪發明≫
역주3 春秋左氏傳에……하였다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宣公 14년에 보이는바, 楚나라 莊王이 宋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사신 申舟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송나라를 치러갈 때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역주4 (估)[佐] : 저본에는 ‘估’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佐’로 바로잡았다.
역주5 廢皇后羊氏及太子覃 :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요, 태자는 천하의 근본이다. 司馬穎이 신하로서 이들을 폐한 것이 옳겠는가. 사실에 입각하여 곧바로 썼으니, 죄악이 심하다.[皇后 天下之母也 太子 天下之本也 穎以人臣廢之 可乎 據事直書 罪惡甚矣]” ≪發明≫
역주6 顒表穎爲皇太弟……雍州牧 : “‘皇太弟’라는 이름이 ≪資治通鑑綱目≫에 일찍이 있지 않았는데, 〈이때 처음 기록되었다.〉 司馬穎이 太子를 폐하였으니, 이는 자신이 태자가 될 뜻이 있는 것이다. 司馬顒이 사마영의 뜻을 받들어서 처음으로 이 칭호를 만들어내고 표문을 올려서 사마영으로 하여금 太弟가 되게 하였으니, 태제는 태자와 같다. 어찌 신하가 표문을 올려서 시킬 수 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 위에서는 ‘사마영이 太子 司馬覃을 폐했다.’고 썼고, 아래에서는 ‘사마옹이 표문을 올려서 사마영을 황태제로 삼았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사마옹과 사마영이 서로 겉과 속이 됨을 볼 수 있는바, 두 사람 모두 죄책한 것이다. ‘황태제’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황태제로 삼았다.’고 쓴 것이 6번인데(成都王 司馬穎, 豫章王 司馬熾, 慕容沖, 唐나라 穎王 李瀍, 壽王 李傑, 南唐 李景遂), 즉위한 자가 넷이요, 지위를 사양한 자가 하나요(이경수), 폐위된 자가 하나이다.(사마영)[皇太弟之名 入綱目以來 未有也 穎廢太子 意有在矣 顒承穎意 始創此號 而表使爲之 太弟 猶太子也 豈臣下所得表爲之哉 綱目 上書穎廢太子覃 下書顒表穎爲皇太弟 則顒穎之相表裏可見矣 交罪之也 書皇太弟始此 終綱目 書以爲皇太弟六(成都王穎 豫章王熾 慕容沖 唐穎王瀍 壽王傑 南唐景遂) 而卽位者四 辭位者一(景遂) 廢者一(穎)]” ≪書法≫
“만일 司馬穎이 마땅히 太弟가 되어야 한다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에서 나와야 옳은데, 이제 ‘司馬顒이 표문을 올려 태제를 삼았다.’고 썼으면 그 마땅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래에 ‘스스로 太宰와 雍州牧이 되었다.’고 썼으면 사마옹이 배반하고 반란하여 君主가 없는 것이니, 이 또한 한 趙王 司馬倫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마영은 홀로 죄가 없는가. 사마옹이 자신을 태제로 세우는 것을 받아주고 그 자리를 편안히 여겼으니, 또 어찌 貶斥하고 끊기를 기다린 뒤에 죄가 나타나겠는가. 그러나 사마영이 황후와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는데, 어찌 홀로 스스로 태제가 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반드시 사마옹의 표문을 기다렸는가. 亂臣賊子가 서로 겉과 속이 되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충분히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고, 밝은 저울과 거울 아래에서는 진짜와 거짓이 분명히 드러남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역사책에서는 ‘顒請(사마옹이 청하였다)’이라고 칭하고 ‘詔以(詔令을 내려 누구로서)’라고 칭하였는데, 여기서 모두 삭제한 것은 그 실제를 조사하여 이름을 정한 것이니, 아! 書法이 엄격하다.[使穎當爲太弟邪 必出於朝廷之命 可也 今書顒表爲之 則其不當 明矣 下書自爲太宰雍州牧 則顒之反叛無君 是亦一趙王倫耳 然則穎獨無罪乎 受其所立而安於其位 又豈待貶絶而後見哉 雖然 穎不難於廢皇后太子 何獨難於自爲太弟 而必待於顒表邪 亂臣賊子相爲表裏 自謂足以欺世 而不知衡鑑之下 眞僞曉然 故前史稱顒請 稱詔以 而此皆削之者 所以核其實而定其名也 嗚呼 嚴矣]” ≪發明≫
역주7 東海王越……侍中嵇紹死之 : “‘征’이란 무엇인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정벌함을 이른다. 長沙王 司馬乂는 ‘討’라고 썼는데, 여기서는 ‘討’라고 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司馬越은 능히 토벌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蕩陰의 패전에 嵇紹가 죽자 사마월이 달아나 封國으로 돌아갔으니, 의리를 지킨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 군주를 받든 것은 똑같은데 司馬昭가 자기에게 잘못이 있으면 ‘攻’이라고 썼고, 동해왕 사마월이 토벌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征’이라고 썼으니, 반드시 장사왕 사마예와 같이 한 뒤에야 ‘討’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무릇 ‘황제를 받들었다.’고 쓰고 ‘그 군주를 받들었다.’고 쓴 것은 모두 일이 그 황제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征者 何 上伐下之辭也 長沙王乂書討 此其不書討 何 越非能討者也 蕩陰之敗 嵇紹死之 越走歸國 仗義何有焉 故奉其主一也 司馬昭曲在己則書攻 東海王越非能討則書征 必若長沙王乂而後得書討 凡書奉帝 奉其主 皆事不在其上也]” ≪書法≫
“司馬越이 예전에 司馬乂를 죽이고 司馬穎을 도왔는데, 이제 도리어 황제를 받들어 사마영을 정벌하였으니, 과연 어디에 이르겠는가. 그런데도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씀에 조금도 폄하한 말이 없는 것은 順함을 가지고 역적을 토벌하여 前日의 죄를 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蕩陰에서 크게 패하자, 嵇紹는 부름을 받고 行在所로 나와서 오히려 正色하고 절의를 지켜 죽었는데, 사마월은 남의 군대를 도모하다가 패하였는데도 죽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받들어 쥐처럼 도망함은 과연 무슨 의리인가. 위에서 ‘사마월이 황제를 받들어 사마영을 정벌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사마월이 이 거사에서 실로 그 일을 맡았음을 볼 수 있고, 아래에서 ‘사마월이 달아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갔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사마월이 乘輿(황제)를 버리고 난을 피하여 구차히 면해서 군주가 욕되면 신하가 죽는 의리에 어두웠음을 볼 수 있으니, 그 죄가 모두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越前殺乂助穎 今乃奉帝征之 果何所及 而綱目書之 略無貶詞者 仗順討逆 不責其前日之罪也 至於蕩陰敗績 嵇紹召詣在所 猶能正色死節 越謀人之軍師 敗不能死 乃奉身鼠竄 果何義邪 上書越奉帝征穎 則見越於此擧實任其事 下書越走歸國 則見越委棄乘輿 逃難苟免 昧於主辱臣死之義 其罪皆不言自見矣]” ≪發明≫
역주8 幽州都督王浚……起兵討穎 : “王浚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였는데, 조정이 전복할 때를 당하여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크다. 이제 司馬穎이 詔令을 칭하여 그를 부르자 처음으로 부득이 군대를 일으켰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마침내 사마영을 토벌한 것을 인정함은 어째서인가. 사마영이 반역하여 난을 提唱해서 宗室을 전복시켰는데, 천자가 바로잡지 못하고 제후가 토벌하지 못하였다. 왕준이 비록 죄가 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능히 의리를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으니, 그렇다면 군자가 진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왕준을 인정함은 사마영을 주벌하기 위한 것이니, 그 뜻이 엄격하다.[王浚身擁彊兵 當朝廷傾覆之時 坐視不救 其罪大矣 今穎稱詔召之 始不得已而擧兵 然綱目乃予其討穎者 何哉 穎反逆唱亂 傾陷宗室 天子不能正 諸侯不能討 浚雖有罪 然能仗義興師 則君子固不得不予之 蓋予浚 所以誅穎也 其旨嚴矣]” ≪發明≫
역주9 琅邪王睿走歸國 : “‘司馬睿가 달아나 封國으로 돌아갔다.’고 썼으니, 司馬越이 달아나 봉국으로 돌아간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다면 사마예 또한 乘輿(황제)를 버린 것인가. 위에서는 ‘司馬穎이 東安王 司馬繇를 죽였다.’고 쓰고 아래에서는 ‘사마예가 달아나 봉국으로 돌아갔다.’고 썼다. 그렇다면 사마예가 죽음을 피하는 데 압박을 받은 것이요, 사마월과 같은 무리가 아님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은 글을 엮어 사건을 나란히 기록하는 뜻이다. 司馬繇가 이전에 올바른 議論을 하였는데 사마영이 그 말을 따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 원망하여 그를 죽였으니,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요의 관직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書睿走歸國 與越走歸國 何異 然則睿亦委棄乘輿邪 曰 上書穎殺東安王繇 下書睿走歸國 則見睿迫於逃死 非越之比 此屬辭比事之意也 繇前有正議 穎不惟不能從 又追怨而殺之 死不以罪 故不去其官]” ≪發明≫
역주10 劉淵稱大單于 : “劉淵이 어찌해서 ‘배반했다.’고 쓰지 않았는가. 晉나라가 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을 살피지 못하고서 그를 內地에 두었는데, 이제 骨肉 간에 서로 해쳐서 황실이 전복되자 오랑캐 무리들이 때를 틈타 몰래 나왔으니, 진실로 저들이 용감하게 中華를 어지럽힌 것이 아니요, 晉나라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劉淵何以不書反 晉氏不審華戎之辨 置之內地 今骨肉相殘 帝室傾覆 醜類乘時竊發 固非彼敢於猾夏也 晉自使之然耳 是以書法如此]” ≪發明≫
역주11 浚大掠鄴中而還 :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다고 함은 어째서인가. 王浚의 죄를 책한 것이다. 왕준은 군대를 모아 역적을 토벌하다가 역적을 토벌하기도 전에 갑자기 돌아갔고 또 인하여 크게 노략질하였으니, 義擧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군대를 일으켜 司馬穎을 토벌했을 때에는 그의 관직을 갖추었고,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을 때에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指斥한 것이다.[大掠而還 何 罪浚也 成師討賊 賊未討而遽還 又因以肆大掠 則不得爲義擧矣 故綱目於起兵討穎 則具其官 大掠而還 則斥其名]” ≪書法≫
“王浚을 앞에서 가장 가벼운 죄로 책하였던 것은 司馬穎을 토벌함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인데, 지금 마침내 이와 같이 방종하고 포악하다면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크게 노략질했다.’고 특별히 써서 그를 죄책한 것이다.[浚前末減其罪者 爲急於討穎故也 今乃縱暴如此 則不可赦矣 故特書大掠以罪之耳]” ≪發明≫
역주12 저희들이……아닙니다 : 劉宣 등은 자기들이 晉나라를 돕지 말고 自立하여 呼韓邪의 王業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劉淵은 한술 더 떠서 劉邦이나 曹操처럼 皇帝가 되겠다고 말하였으므로 “자신들은 도리어 미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3 劉淵自稱漢王 : “아! 이것은 夷狄이 王이라 칭하고 황제라 칭한 시초이다. ≪春秋≫에서는 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을 엄격히 해서 吳와 楚, 徐와 越이 上世에 모두 드러난 공로가 있어서 周나라 왕실과 통하였으니, 본래는 모두 中華의 諸侯였다. 그런데 聖人은 이들이 분수를 따르지 않고 참람하게 왕을 칭했다 하여 마침내 일체 오랑캐로 대하였다. ≪춘추≫의 經文을 보건대 吳‧楚 등에 대해 혹은 子라 칭하고 혹은 그 나라를 들지 않고 州라고 칭하였으니, 일찍이 이들이 王이라고 칭했다 하여 마침내 王이라고 불러준 적이 있지 않았다. 중국으로서 오랑캐로 변한 자도 聖人의 書法이 오히려 이와 같이 조심스러웠는데, 하물며 본래의 夷狄이 왕이라 칭하고 황제라 칭하여 우리 중국의 큰 칭호를 참칭해서 이른바 ‘德이 三皇을 겸하고 功이 五帝보다 더하다.’고 한 자에 있어서랴. 劉淵은 본래 匈奴族이다. 우리 中華에 들어와서 우리의 큰 칭호를 참칭하였는데, 지금은 漢王이라고 써주고 다른 날에는 또 황제라고 써주었으니, ≪춘추≫의 書法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내가 일찍이 중화와 오랑캐가 盛하고 衰한 연고를 통하여 世道의 盛하고 衰하는 幾微에 대해 탄식하였다. 예로부터 夷狄이 中國의 폐해가 됨은 犬戎이 周나라 幽王을 시해한 것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견융은 곧바로 멀리 도망하였고, 수십 년의 장기간에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고 중국의 인민을 신하로 삼고 중국의 칭호를 참칭하는 데까지 이른 자가 없었다. 이러한 경우는 유연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것을 초래한 근본 이유를 따져보면, 어찌 夷狄의 죄이겠는가. 중국 사람들이 감응하여 불러온 것이다.
옛날 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했을 적에 辛有가 伊川에 갔다가 머리를 산발하고 들에서 제사하는 자를 보고는 말하기를 “백 년 안으로 이 지역은 오랑캐들이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魯나라 僖公 때에 이르러 秦나라와 晉나라가 과연 陸渾의 戎族을 이곳으로 옮겼다. 아! 이미 못이 되었다면 장마 물이 저절로 돌아와 모이고, 이미 오랑캐 풍속을 하였다면 戎狄이 저절로 이르니, 氣數는 같은 것끼리 서로 감응하고 風聲은 같은 것끼리 서로 부르는바, 여기에는 연유가 있는 것이다. 漢나라 明帝 때를 당하여 황제는 이유 없이 꿈에 恍惚한 생각이 있었다 하여 먼 변방 사막에 사신을 보내어 오랑캐 귀신인 부처를 맞이하고 오랑캐 책인 불교 서적을 가져와서 제왕의 궁궐을 지어 부처를 거처하게 하고 제왕의 높은 신분을 굽혀 부처를 섬겼다. 불교를 이처럼 높이 받들어 공경한 것은 고작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들에서 제사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불러 마침내 五胡가 中華를 어지럽히는 禍가 발생하여 北朝가 나누어 다스려지게 되는 발단을 만들었고, 蒙古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오랑캐가 온 세상에 넘쳐나 중국의 토지와 인민이 모두 오랑캐의 소유가 되었다. 아! 성인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중국의 제왕이 직접 이룩한 천하가 어찌 모두 오랑캐에게 망하지 않겠는가.[嗚呼 此夷狄稱王稱帝之始 夫春秋謹華夷之辨 吳楚徐越 上世皆有顯功 通乎周室 本皆華夏之諸侯也 聖人以其不循分守 僭號稱王 遂一切以夷狄待之 其見于經 或稱以子 或不擧其國而稱其州 未嘗以其稱王而遂王之也 中國之變於夷者 聖人之書法 猶謹之如此 矧本夷狄稱王稱帝 而僭吾中國之大號 所謂德兼三皇 功過五帝者哉 劉淵 本匈奴也 入我中華 僭我大號 今日以漢王書之 他日又以皇帝書之 春秋書法 豈若是哉 愚嘗因華夷盛衰之故 而歎世道升降之幾 自古夷狄爲中國害 莫甚於犬戎之弑幽王也 然旋卽遠遁 未有據中國之地 臣中國之人 僭中國之號 而至于數十年之久者 有之 始自劉淵焉 原其所以致此者 豈夷狄之罪哉 中國之人 有以感召之也 昔平王之東遷 辛有適伊川 見有被髮而祭于野者 曰 不及百年 此其戎乎 後至魯僖之時 秦晉果遷陸渾之戎于此 嗚呼 旣爲沮澤 潦水自歸 旣爲夷俗 戎狄自至 氣數之相感 風聲之相召 有由然矣 當漢明帝時 無故以夢寐恍惚之思 遣遐荒絶漠之使 迎胡鬼 致胡書 構帝王之宮以居之 屈帝王之尊以事之 其所以尊崇敬奉之者 不止被髮野祭而已也 以夷召夷 遂有五胡亂華之禍 濫觴於北朝之分治 滔天於蒙古之混一 而中國之土地人民 盡爲胡有矣 嗚呼 不有聖人復生 則中國帝王所自立之天下 幾何而不盡淪於夷哉]” ≪發明≫
역주14 太宰顒……爲皇太弟 : “司馬顒과 司馬穎에 대해 ‘군대를 일으켜 반란했다.’고 쓴 뒤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指斥하여 불렀을 뿐이다. 太宰는 사마옹이 스스로 된 것인데, ‘태재 사마옹’이라 씀은 어째서인가. 그가 칭한 것을 따라 칭한 것이니, 그의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伏誅함에 이르러서는 다만 ‘河間王’이라고 칭하였다. 앞에서는 ‘표문을 올려 사마영을 太弟로 삼았다.’고 쓴 것은 비판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태제 사마영’이라고 썼으니 여기서 사마영이 태제가 된 것을 이루어준 것은 어째서인가. 태제가 된 것을 이루어준 것은 거듭 사마옹을 죄책한 것이다 .사마옹이 표문을 올려 사마영을 태제로 삼은 것은 잘못이요, 사마영을 폐하고 다시 司馬熾를 태제로 세움은 더욱 큰 잘못이다.[顒穎自書擧兵反 斥名而已 太宰 其自爲也 書曰太宰顒 何 因其稱而稱之 所以著其悖也 至伏誅 則止稱河間王矣 前書表穎爲太弟 則譏之 此書太弟穎 是成之爲太弟 何也 成之爲太弟 所以重罪顒也 表爲太弟 非矣 廢而更立 甚哉]” ≪書法≫
“司馬顒과 司馬穎이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켜서 번갈아 서로 겉과 속이 되었으니, 晉나라 황실의 혼란을 풀 수 없었던 이유가 이 두 사람의 죄에서 더욱 드러난다. 또 太弟가 이전에는 있지 않았는데 사마옹이 표문을 올려 세웠는바, 사마영 또한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태제가 되었으며, 이제 사마영이 세력이 곤궁하자 사마옹은 또다시 그를 폐위하니, 사마옹과 사마영에 대해서는 본래 굳이 말할 것이 못 된다. 특별히 쓰고 여러 번 써서 우선 司馬氏[典午氏]의 혼란을 드러냈을 뿐이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顒穎反叛 更相表裏 晉室之亂 所以不可解者 二人之罪尤著 且太弟前此未有 而顒表立之 穎亦不顧義理而爲之 今穎勢窮 顒又從而廢之 在顒穎 本不足道也 特書屢書 姑以著典午氏之亂而已 可勝歎哉]” ≪發明≫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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