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처음에 惤縣(견현)의 縣令劉柏根이 배반하자 王浚이 토벌하여 참수하니注+惤은 堅, 弦 두 가지 음이다. 惤縣은 漢나라 이후로 東萊郡에 속하였다. 마침내 그의 長史王彌가 도적 떼가 되었는데, 이때에 靑州와 徐州를 침략하고 東萊太守를 살해하였다.
綱
[綱] 3월에 陳敏의 장수 顧榮과 周玘가 진민을 죽이고서 항복하였다.
目
[目] 陳敏은 형벌과 정사에 법도가 없고 자제들도 흉악하고 포악하니, 顧榮과 周玘 등이 걱정하였다.
廬江內史華譚이 고영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진민이 吳會 지역을 도둑질해 점거하여 목숨이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다. 이제 皇輿(황제)가 동쪽으로 돌아와서 준걸스러운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장차 六軍을 동원하여 建業 지역을 깨끗이 청소할 것이다. 諸賢들이 무슨 얼굴로 다시 中州의 선비들을 만나보겠는가.”注+“東返”은 長安에서 洛陽으로 돌아온 것을 이른다.
고영 등은 평소 진민을 도모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편지를 보고는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征東將軍劉準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알리고, 유준에게는 군대를 징발하여 강가로 오게 하고 자신들은 內應이 되기로 하고는 머리를 깎아 信標로 삼았다.
유준이 揚州刺史劉機 등을 보내어 진민을 토벌하자, 진민이 그의 아우 陳昶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烏江에 주둔하게 하고 陳宏은 牛渚에 주둔하게 하였다.注+晉나라는 烏江縣을 설치하여 淮南郡에 소속시켰다. 이곳은 바로 烏江의 亭長이 배를 대고 項羽를 기다리던 곳이므로 縣의 이름을 오강이라고 한 것이다.
주기가 은밀히 진민의 司馬錢廣으로 하여금 진창을 죽이고 이어서 朱雀橋 남쪽에서 군대를 무장하게 하자,注+朱雀橋는 建業宮城의 남쪽에 있으니, 秦淮水에 걸쳐 있는바 이는 朱雀門 앞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大桁이라고도 한다. 진민이 甘卓을 보내어 전광을 토벌하게 하였다.
고영은 진민이 자기를 의심할까 염려하여 진민에게 찾아가니, 진민이 말하기를 “卿은 마땅히 사방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진정하여 나를 호위해야 하는데, 어찌 나에게 왔는가.”注+“鎭衛”는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바로 陳敏을 호위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目
[目] 顧榮이 마침내 나와서 周玘와 함께 다음과 같이 甘卓을 설득하였다. “陳敏은 평범한 재주인데다가 정사와 명령도 이랬다저랬다 하니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들이 편안히 그의 관직과 녹봉을 받고 있으니, 일이 실패하는 날에 만일 江西의 여러 군대가 우리의 머리를 잘라 함에 넣어 洛陽으로 보내면서 ‘역적 고영과 감탁의 머리’라고 쓴다면, 이는 萬代의 치욕이 될 것이다.”注+“江西諸軍”은 劉準이 강가로 보낸 자들을 이른다.
감탁은 마침내 거짓으로 병을 칭탁하여 딸을 불러들이고 朱雀橋를 끊어 배를 南岸으로 거두어들이고서 주기와 고영, 紀瞻과 함께 진민을 공격하였다.注+永興 2년(305), 陳敏이 아들 陳景을 甘卓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橋는 바로 朱雀橋이다. 建業의 城은 秦淮水 북쪽에 있으므로 감탁이 배를 거두어 南岸에 머물게 한 것이다.
진민이 직접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감탁을 토벌하였는데, 감탁의 병사들이 물을 사이에 두고 진민의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본래 진민에게 힘을 바쳤던 이유는 바로 顧丹陽(고영)과 周安豐(주기) 때문이었는데,注+〈“顧丹陽周安豐”은〉 陳敏이 顧榮을 丹陽太守로 삼고, 周玘를 安豐太守로 삼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지금 이들이 모두 딴마음을 품고 있다. 너희들은 무슨 짓을 하는가.” 하였다. 진민의 병사들이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영이 白羽扇을 흔드니, 모두 궤멸하여 도망하였다.注+白羽扇은 흰 깃털을 엮어서 만든다. 諸葛亮은 항상 이 백우선을 들고 三軍을 지휘하였다.
진민이 單騎로 도망하자 추격하여 참수하고 그의 삼족을 멸하고 머리를 파발마로 京師에 보내었다.
詔令을 내려 고영을 徵召하여 侍中으로 삼고 紀瞻을 尙書郞로 삼았으며, 太傅司馬越은 주기를 辟召하여 參軍으로 삼았는데, 고영 등은 徐州에 이르러서 北方이 더욱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돌아갔다.
綱
[綱] 西陽의 夷族이 江夏를 침략하였다.
目
[目] 西陽의 夷族이 江夏를 침략하자,注+西陽縣은 춘추시대 弦子의 나라이니, 漢나라 때에는 縣으로 만들어 江夏郡에 소속시켰고 晉나라 때에는 弋陽郡에 소속시켰다.江夏太守楊珉이 督將들을 청하여 의논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方略을 말하였으나,
유독 騎督朱伺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양민이 묻기를 “장군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하니, 주사가 대답하기를 “여러 사람들은 혓바닥으로 적을 공격하는데, 저는 오직 힘으로 공격할 뿐입니다.” 하였다.
양민이 또 묻기를 “장군은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적을 공격하였는데, 어찌하여 항상 승리하였는가.” 하니, 주사가 대답하기를 “두 적이 서로 대치할 적에는 오직 참아야 하니, 적들은 참지 못하였고 저는 참았습니다. 이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하니, 양민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綱
[綱] 淸河王司馬覃의 아우 司馬詮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綱
[綱] 太傅司馬越이 나가 許昌에 진주하였다.
目
[目] 황제가 직접 큰 정사를 총괄하고 여러 일에 마음을 두니, 司馬越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굳이 藩(지방)으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綱
[綱] 南陽王司馬模를 都督秦雍等州軍事로 삼았다.
綱
[綱] 여름 5월에 도적 떼인 汲桑과 石勒이 鄴城으로 쳐들어와 都督인 新蔡王司馬騰을 죽이고 다시 兗州를 공격하자, 太傅司馬越이 苟晞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目
[目] 公師藩이 죽자 汲桑이 도망하여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돌아와서注+〈“苑中”은〉 茌平縣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다. 汲桑이 여기에서 군대를 일으켜 公師藩에게 달려갔었는데, 공사번이 죽자 도망하여 돌아온 것이다. 다시 병력을 모아 成都王司馬穎의 원수를 갚겠다고 크게 선포하고 石勒을 선봉대로 삼으니,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승리하였고 마침내 전진하여 鄴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업성은 재정이 이미 바닥이 났으나, 新蔡王司馬騰은 재물이 매우 넉넉한데도注+이해에 東燕王司馬騰을 新蔡王으로 삼았다. 성품이 인색하여 은혜를 베푸는 바가 없었고,
위급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장병들에게 쌀 몇 되와 비단 몇 자를 하사하니, 이 때문에 장병들이 그를 위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
급상이 마침내 업성으로 쳐들어가서 사마등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고 크게 노략질하고 떠나가서 남쪽으로 兗州를 공격하자, 太傅司馬越이 苟晞 등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석륵과 구희 등이 서로 대치한 지 수개월 동안 크고 작은 싸움이 30여 차례 있었는데, 서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綱
[綱] 가을 7월에 琅邪王司馬睿를 安東將軍都督揚州諸軍事로 삼아 建業에 진주하게 하였다.
目
[目] 司馬睿가 建業에 이르러 王導를 謀主로 삼고 마음을 다하여 친애하고 신임해서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였다.
사마예는 평소 명망이 낮으니, 吳 지역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서 오랫동안 건업에 있었으나 士大夫 중에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注+“名論”은 명예와 의논(평가)이다.
마침 사마예가 밖에 나가 禊를 구경할 적에, 왕도가 사마예로 하여금 肩輿(가마)를 타고 威儀를 갖추게 하고는 왕도와 여러 명사들이 모두 말을 타고 수행하니,注+禊는 胡計의 切이니, 상서롭지 못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漢儀≫에 “季春上巳日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동쪽 흐르는 물가에서 禊를 했다.” 하였다. 肩輿는 平肩轝이니, 사람이 어깨에 이 가마를 메고 간다. 騎(타다)는 奇寄의 切이다. 從(거듭)은 才用의 切이다.
紀瞻과 顧榮 등이 이를 보고는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서 서로 거느리고 따라와서 길 왼쪽에서 절하였다. 왕도가 인하여 사마예를 설득하기를 “顧榮과 賀循은 이 지역의 명망 있는 자들이니,
마땅히 그들을 불러들여 인심을 결속시켜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이 귀의해오면 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사마예가 마침내 왕도로 하여금 직접 찾아가게 하였다. 하순과 고영이 모두 명에 응하여 오자,
하순을 吳國內史로 삼고 고영을 軍司에注+軍司는 軍司馬이다.散騎常侍를 겸직하게 하여注+직책은 軍司이고, 이것(散騎常侍)은 겸직이다. 모든 軍府의 政事를 다 이들과 상의하였다.
또 기첨을 軍祭酒로 삼고 卞壼(변곤)을 從事中郞으로 삼고, 周玘와 劉超, 張闓(장개), 孔衍을 모두
[目] 王導가 司馬睿에게 겸허함으로써 선비를 대하고 검소함으로써 재정을 풍족히 하며 淸靜無爲로써 정사를 다스려서 新舊의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편하게 할 것을 설득하니, 이 때문에 江東 지역의 인심이 사마예에게 돌아왔다.注+〈“新舊”의〉 新은 中原에서 온 자를 이르고, 舊는 江東 사람을 이른다.
사마예가 建業에 처음 와서는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한 경우가 많았는데, 왕도가 이에 대하여 말하자, 사마예는 술을 따르도록 명하고는 술잔을 가져다가 뒤엎고 이로부터 마침내 술을 끊었다.
綱
[綱] 苟晞가 汲桑과 石勒을 공격하여 大破하니, 급상은 패주하다가 죽고 석륵은 漢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目
[目] 苟晞가 汲桑을 추격하여 그의 8개 보루를 격파하니,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급상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달아나다가 살해를 당하였고, 石勒은 樂平으로 달아났다.注+“馬牧”은 茌平縣에 있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다. 幷州에 樂平郡이 있는데, 晉武帝泰始 연간에 설치되었으니, 唐나라의 遼州이다.
太傅司馬越이 구희에게 都督靑兗諸軍事를 겸직하게 하였다. 구희는 강한 적을 여러 번 격파하여 위엄과 명성이 매우 성대하였고, 번거로운 일을 잘 처리하고 법을 준엄하게 적용하였다.
그의 이모가 그에게 의지하니, 봉양을 매우 잘하였다.注+從(친속)은 才用의 切이니, “從母”는 어머니의 자매이다. 이모의 아들이 장수로 삼아 줄 것을 청하자,
구희는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법을 가지고 남을 용서하지 않으니, 장차 후회하는 일이 없겠느냐.” 하였으나, 굳이 청하자, 마침내 그를 督護로 삼았다.
뒤에 그가 법을 범하자, 구희가 節을 잡고 가서 그를 참수하였는데, 이모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얼마 후 素服을 입고 가서 哭하며 말하기를 “卿을 죽인 자는 兗州刺史이고, 이종 아우를 哭하는 자는 苟道將이다.”注+道將은 苟晞의 字이다. 하였다.
오랑캐의 部長인 張㔨督 등이 병력을 거느리고 上黨에 보루를 쌓아 주둔하였는데,注+大는 長과 같으니, 오랑캐 사람들은 한 部의 長을 部大라고 칭하였다. 張은 성이고 㔨督은 이름이다. 석륵이 가서 그를 따르고 인하여 장배독 등을 설득해서 함께 漢나라로 귀의하니,
마침내 아우 王澄을 荊州都督으로 삼고 族弟인 王敦을 靑州刺史로 삼았다. 왕연이 이들에게 말하기를 “荊州는 長江과 漢水의 견고함이 있고, 靑州는 바다를 등지고 있는 험함이 있는데,
卿 두 사람이 밖에 있고 내가 중앙(조정)에 있으니, 3개의 굴이 되기에 충분하다.”注+窟은 굴이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토끼가 굴을 팔 때에 반드시 언덕을 등져 서로 통하게 한다.” 하니, 이른바 교활한 토끼는 굴이 3개라는 것이다. 하였다.
왕징은 진영에 이르자 밤낮으로 술을 마셔서 여러 사무를 살펴보지 아니하여, 도적 떼와 오랑캐의 공격으로 사정이 급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綱
[綱] 太傅司馬越이 스스로 兗州牧을 겸하고 苟晞를 옮겨 靑州刺史로 삼았다.
目
[目] 처음에 司馬越은 苟晞와 친하여 서로 이끌고 堂에 올라가서 결의형제가 되었다.
司馬潘滔가 사마월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兗州는 요충지로, 魏나라 武帝(曹操)가 이곳을 가지고 創業을 하였습니다. 구희는 큰 뜻을 품고 있어서 결코 순수한 신하가 아닙니다.
만약 그를 靑州로 옮기고 公이 직접 兗州의 牧이 되어서 여러 中華를 다스리고 本朝를 호위한다면, 이는 이른바 혼란하기 전에 다스린다는 것입니다.”注+≪老子≫에 이르기를 “일이 생기기 전에 방비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린다.” 하였다.
사마월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스스로 兗州牧을 겸하고 구희를 征東大將軍靑州刺史로 삼으니, 사마월과 구희가 이로 말미암아 틈이 생기게 되었다.
구희가 청주에 부임하여 엄하고 각박함으로 위엄을 세워서 매일 사람을 죽이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일러 ‘백정의 우두머리(屠伯)’라고 하였다.注+〈“謂之屠伯”은〉 백정이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伯은 우두머리이다.
綱
[綱] 王彌와 그의 무리인 劉靈이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目
[目] 劉靈은 젊은 시절 가난하고 미천하였으나, 힘이 세어 날뛰는 소를 제재하고 달리기를 잘하여 치달리는 말을 따라잡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록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나, 그를 천거하여 등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유영은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하늘이여! 언제나 난세를 만날 것인가.” 하였다.
公師藩이 군대를 일으키자, 유영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趙와 魏 지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다가 王彌와 함께 漢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綱
[綱] 慕容廆가 스스로 鮮卑大單于라고 칭하였다.
綱
[綱] 拓跋祿官(탁발록관)이 卒하였다.
目
[目] 아우 拓跋猗盧가 3개의 部를 총괄하고서 慕容廆와 우호를 통하였다.
역주
역주1(𢮂)[惤] :
저본에는 ‘𢮂’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惤’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陳敏將顧榮周玘殺敏以降 :
“陳敏에 대해 일찍이 ‘토벌했다’라고 썼는데, 이때 그를 참수하였는데도 ‘誅’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顧榮과 周玘가 그를 주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영과 주기는 어찌하여 그를 주살할 수 없는가. 고영과 주기는 자신의 지조를 잃고 진민을 따랐으니, 이제 그를 죽인 것은 겨우 자신의 죄를 속죄했을 뿐, 진실로 토벌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민의 장수 고영과 주기’라고 썼으니, 자신의 지조를 잃은 자를 경계하는 것이 두려워할 만하다. 그렇다면 〈前漢 景帝 때에〉 東越 또한 〈吳‧楚 등 七國을〉 따라 배반하였다가 얼마 후 吳王 劉濞를 주살하였는데, 어찌하여 ‘誅’라고 썼는가. 越은 오랑캐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夷狄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현자에게 完備하기를 바란다. 이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越나라 사람이 吳王 濞를 주살했다.’라고 써서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주었고, 현자에게 완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민의 장수가 진민을 죽였다고 써서 지조를 잃은 사람을 경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敏嘗書討矣 於是斬之 則其不書誅 何 顧周不得而誅之也 顧周則曷爲不得而誅之 顧周失身從敏 今而殺之 僅足以自贖耳 固不可予之以討也 書曰陳敏將顧榮周玘 其爲失身者之戒 凜凜矣 然則東越亦從反者 旣而誅濞 則何以書誅 越 夷也 綱目不治夷狄 而責備賢者 不治夷狄 故書越人誅濞 以開自新之塗 責備賢者 故書敏將殺敏 以示失身之戒]” ≪書法≫
역주3(童)[章] :
저본에는 ‘童’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章’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太傅越 出鎭許昌 :
“이때 司馬越이 굳이 나가 진주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는데, ‘詔越(사마월에게 詔命을 내렸다.)’라고 쓰지 않고 ‘越出鎭(사마월이 나가 진주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사마월이 제멋대로 했기 때문이다. 사마월이 나가고 들어옴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군주를 심하게 무시하였으니, 이것을 쓴 것은 그를 죄책한 것이다. 이 때문에 태부 사마월이 제멋대로 하면 ‘태부 사마월이 나가서 許昌에 진주했다.’라고 쓰고, 〈五代 시대에〉 徐溫이 제멋대로 하면 ‘서온이 나가서 潤州에 진주했다.’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기록하고 삭제하는 것이 엄격하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出鎭’이라고 쓴 것이 4번인데(이해(307), 東晉 孝武帝 太元 10년(385), 安帝 義熙 원년(405), 後梁 乙亥年(915)), 劉裕는 글을 올렸기 때문에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於是 越固求出鎭 帝從之 不書詔越 書越出鎭 何 越專也 越之出入自己 無君甚矣 書 罪之也 是故太傅越專 則書太傅越出鎭許昌 徐溫專 則書徐溫出鎭潤州 綱目之筆削 嚴矣哉 終綱目 書出鎭四(是年 武帝太元十年 安帝義熙元年 後梁乙亥年) 惟劉裕上書 以無譏焉]” ≪書法≫
역주5群盜汲桑……遣苟晞討之 :
“‘入(쳐들어갔다)’라고 쓰고, ‘殺(죽였다)’라고 쓴 것은 쉽게 이루었음을 나타낸 말이다. 전혀 방비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都督’이라고 썼는가. 司馬騰을 허물한 것이다. ‘도독’이라고 쓴 것이 어찌하여 허물한 것이 되는가. 이는 자신(사마등)이 도독으로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죽였다고 말한 것이니, 이 도독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많은 것이다.[書入 書殺 易辭也 無備甚矣 然則何以書都督 咎騰也 書都督則曷爲咎之 若曰身爲都督 盜得入而殺焉 有愧斯名 多矣]” ≪書法≫
역주6掾屬 :
보좌하는 관리로, 漢나라 때부터 三公에서 郡縣에 이르기까지 上官이 모두 연속을 직접 선발하여 보좌로 두었는데, 魏‧晉 이후로는 吏部에서 임명하였다.
역주7拓跋祿官卒 :
“처음으로 索頭라는 말을 빼고 ‘卒’이라고 썼으니, 이는 拓跋祿官을 올려준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올려주었는가. 그의 아우 拓跋猗盧가 晉나라에서 匈奴와 鮮卑를 토벌할 적에 도왔기 때문에 장차 탁발의로를 봉하려 하였으므로 그를 올려준 것이다.[始去索頭 書卒 進之也 曷爲進之 弟猗盧將以助晉封 故進之]”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