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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何曾이 侍武帝宴이라가 退하여 謂諸子曰 主上이 開創大業호되 吾每宴見에 未嘗聞經國遠圖하고
唯說平生常事하니 非貽厥孫謀之道也니 及身而已라 後嗣其殆乎인저 汝輩는 猶可以免이어니와
指諸孫曰 此屬은 必死於難하리라 及綏死에 兄嵩이 哭之曰 我祖其殆聖乎인저하니라
曾이 日食萬錢호되 猶云 無下箸處하고 子劭日食二萬하고 綏及弟機, 羨이 汰侈尤甚하여 與人書疏에 詞禮簡傲라
王尼見綏書
하고 謂人曰 伯蔚
이 居亂世
하여 而矜豪乃爾
하니 其能免乎
注+伯蔚, 綏字.아
人曰 伯蔚
이 聞卿言
이면 必相危害
리라 尼曰 伯蔚
이 比聞我言
이면 自已死矣
注+比, 及也.리라 及永嘉之末
에 何氏無遺種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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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越이 京師로 들어오자, 中書監 王敦이 친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太傅가 위엄과 권세를 전횡하는데,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표문을 올려 주청할 때마다 尙書에서 옛 제도를 가지고 제재하니, 태부가 이번에 반드시 몇 사람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太弟로 있을 적에 繆播와 친하였는데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심복의 임무를 맡기고, 황제의 외숙인 散騎常侍 王延과 尙書 何綏와 太史令 高堂沖은 모두 機密에 참여하였다.
劉輿와 潘滔가 사마월에게 권하여 이들을 주살하게 하니, 사마월은 마침내 목파 등이 亂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모함하여 甲士 3천 명을 궁중으로 들여보내 황제의 곁에서 목파 등 10여 명을 붙잡아 廷尉에 회부하여 죽이니,
황제는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하수는 何曾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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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何曾이 武帝를 사사로이 모시고 있다가 물러 나와서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主上이 국가의 큰 기업을 창건하였으나 매번 사사로이 뵐 적에 일찍이 나라를 경륜할 원대한 계책을 들은 적이 없고,
오직 平常의 일반적인 일만을 말씀하니, 이는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방도가 아니다. 〈창업의 영광이〉 자신에게만 미칠 뿐, 후손은 아마도 위태로울 것이다. 너희들은 그래도 禍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또 여러 손자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반드시 亂에 죽을 것이다.” 하였다. 何綏가 죽자 형 何嵩(하숭)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아마도 聖人인가 보다.” 하였다.
하증은 하루에 1만 錢 어치나 되는 식사를 하면서도 오히려 수저를 내려놓을 만한 찬이 없다고 음식 투정을 하였고, 아들 何劭는 하루에 2만 전 어치가 되는 식사를 하였으며, 하수와 그의 아우 何機, 何羨은 더욱 교만하고 사치하여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말하는 禮가 간략하고 오만하였다.
王尼는 하수의 편지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伯蔚이
亂世에 살면서 이와 같이 오만하고
豪氣를 부리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注+伯蔚는 何綏의 字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울이
卿의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경을 해칠 것이다.” 하니, 왕니가 말하기를 “백울이 나의 말을 들을 때쯤이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注+比는 미침이다. 하였다.
永嘉 말년에 이르러
何氏 집안에는 남은 후손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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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何曾이 武帝가 구차하고 나태하여 당장 눈앞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원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으며,
천하가 장차 혼란하여 자기의 자손이 반드시 그 우환을 겪게 될 줄을 알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현명한가.
注+與(참여하다)는 預로 읽는다.
그러나 자신이 분수에 넘치고 사치한 짓을 하여 자식들로 하여금 그 유풍을 계승해서 끝내 교만과 사치로 집안을 망하게 했으니, 그 현명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또 자신이 宰相이 되어서 군주의 잘못을 분명히 알면서도 직접 아뢰지 않고 집안에서 사사로이 말했으니, 그는 忠臣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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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漢主 劉淵이 劉景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黎陽을 공격하게 하여, 유경이 여양을 함락시키고 또 王堪을 延津에서 패퇴시켜 남녀 3만여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게 하였다.
유연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유경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朕을 만나보겠는가. 또 天道가 어찌 이를 용납하겠는가.
내가 제거하고자 하는 자는 司馬氏뿐인데,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고 그를 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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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張賓은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큰 뜻이 있어서 항상 자신을 張子房(張良)에게 견주었다.
石勒이
山東 지역을 경략하자, 장빈이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러 장수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이 오랑캐 장군 같은 자가 없으니, 그와 더불어 대업을 이룰 만하다.”
注+石勒은 본래 胡族이다. 그러므로 胡將軍이라 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검을 차고 석륵의 軍門에 나아가서 큰 소리로 만나보기를 청하였는데, 석륵은 그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빈이 자주 계책을 가지고 석륵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얼마 후 모든 일이 그가 말한 바와 같으니, 석륵이 이로부터 그를 기특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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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漢主 劉淵이 王彌와 楚王 劉聰으로 하여금 함께 壺關을 공격하게 할 적에 石勒을 前鋒都督으로 삼았다. 劉琨이 군대를 보내어 호관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司馬越이 河南內史인 王曠과 將軍 施融을 보내어 왕미 등을 막게 하였는데, 왕광이 황하를 건너고서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자,
시융이 말하기를 “저들이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기회를 틈타 출동하니, 우리는 우선 강물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면서 형세를 살펴야 합니다.”
注+間(틈)은 古莧의 切이다. 하였다.
왕광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여러 사람의 사기를 꺾으려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太行山을 넘어 長平에서 유총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모두 죽으니, 호관이 漢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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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主 劉淵이 또다시
劉聰 등을 보내어
洛陽을 침략하여
西明門에 주둔하게 하자,
注+西明門은 낙양성의 서쪽 방향 남쪽 가장자리에서 2번째 문이다.
北宮純 등이 밤에 勇士를 거느리고 나가 漢나라 성벽을 공격하여 장군 呼延顥(호연호)를 참수하였다.
유총이 남쪽으로
洛水에 주둔하였는데,
大司空 呼延翼이 또 그의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니, 무리가 마침내 궤멸하여 돌아갔다.
注+洛水는 낙양성 남쪽을 지나간다.
宣于脩之가 유연에게 말하기를 “辛未年이 되어야 마침내 낙양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晉나라 기운이 아직도 왕성하니, 우리의 大軍이 돌아오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연이 마침내 유총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유총과 劉曜가 平陽으로 돌아오고 王彌가 남쪽으로 轘轅으로 출동하니,
潁川과
襄城,
汝南,
南陽,
河南에 있던
流民 수만 가호가 평소 이 지역에 원래부터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터라, 모두
長吏를 살해하고 왕미에게 호응하였다.
注+襄陽縣은 漢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속하였는데, 晉 武帝 泰始 2년(266)에 나누어 襄城郡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