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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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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年(310)
四年이라
漢烈宗劉聰光興元年이라
春正月 寇徐, 豫, 兗, 冀諸郡하다
◑琅邪王睿 以周玘爲吳興太守하다
錢璯寇陽羨이어늘 玘糾合鄕里하여 討斬之注+璯, 黃外切. 陽羨縣, 前漢屬會稽郡, 後漢屬吳郡. 自吳以來, 分屬吳興郡.하다
玘三定江南하니 琅邪王睿 以爲吳興太守注+惠帝永興元年, 討石冰, 永嘉元年, 討陳敏, 今又討璯, 是三定江南. 吳分吳郡丹陽, 置吳興郡.하고 於其鄕里 置義興郡하여 以旌之注+時分吳興之陽羨及長城縣之西鄕‧丹陽之永世, 爲義興郡.하다
漢曹嶷 寇東平琅邪注+嶷, 魚力切.하다
◑蝗하다
◑秋七月 寇河內하여 陷之하다
漢主淵 寢疾 以陳留王歡樂爲太宰하고 楚王聰爲大司馬, 大單于하여 竝錄尙書事하고
安昌王盛 安邑王欽 西陽王璿 分典禁兵하다
少時 不好讀書하고 唯誦孝經, 論語하고 曰 誦此能行이면 足矣 安用多誦而不行乎리오
李憙見之하고 歎曰 望之 如可易라가 及至 肅如嚴君하니 可謂君子矣注+易, 弋豉切, 慢易也.로다
以其忠篤이라 故臨終 委以要任하니라
太子和卽位하니 和性猜忌無恩이라
宗正呼延攸 侍中劉乘 西昌王銳 說和曰注+攸, 翼之子也, 淵以其無才行, 終身不遷官, 乘素惡楚王聰, 銳恥不預顧命, 乃相與謀說和. 先帝不惟輕重之勢하고
使大司馬擁十萬衆하여 屯於近郊하니 陛下便爲寄坐耳 宜早爲之計注+惟, 思也. 屯於近郊, 謂聰屯平陽西也. 坐, 徂臥切. 寄坐, 言大權非己出, 託位於臣民之上, 勢同寄寓也.니이다 和信之하고 夜召盛, 欽告之注+和, 攸之甥也. 深信之.한대
盛曰 陛下勿信讒以疑兄弟하소서 兄弟 尙不可信이면 他人 誰足信哉잇가
攸, 銳怒하여 命左右刃之하고 遂攻聰于單于臺로되 不克注+劉淵置單于臺於平陽西.하다
銳等 走入南宮한대 聰前鋒 隨之하여 殺和及銳, 攸, 乘하다
聰以北海王 單后之子也라하여 以位讓之한대 义涕泣固請이어늘
遂卽位하여 以义爲皇太弟하여 領大單于하고 子粲爲河內王, 都督中外諸軍事하고 石勒爲幷州刺史하다
氐酋蒲洪 自稱略陽公注+洪家池中蒲生, 長五丈五, 節如竹形. 時咸謂之蒲家, 因以爲氏. 又隴右大雨, 謠曰 “雨若不止, 洪水必起.” 因名曰洪.하다
略陽臨渭氐酋也注+晉志, 略陽郡有臨渭縣, 蓋魏所置也. 驍勇多權略하니 群氐畏服之
拜洪平遠將軍이러니 不受하고 自稱秦州刺史, 略陽公하다
流民王如 寇南陽하여 以附漢하다
雍州流民 多在南陽이라 詔書遣還鄕里하니 流民 以關中荒殘이라하여 皆不願歸
山簡 遣兵促發이러니 京兆王如 潛結壯士하여 夜襲其軍하여 破之하고 攻城鎭하여 殺令長하니
衆至四五萬이라 自號大將軍하고 稱藩于漢하다
冬十月 寇洛陽하다
◑以拓跋猗盧爲大單于하여 封代公하다
匈奴劉猛어늘 劉虎代領其衆하여 居新興하고 號鐵弗氏하고 與白部鮮卑 皆附于漢注+虎, 匈奴右賢王去卑之孫. 胡人謂父爲鮮卑, 母爲鐵弗, 因以鐵弗爲姓.이러라
劉琨 將討之할새 遣使하여 卑辭厚禮하여 說拓跋猗盧하여 以請兵한대
猗盧使其弟弗之子鬱律 帥騎二萬助之하여 遂破劉虎, 白部하니
與猗盧 結爲兄弟하고 表爲大單于하여 以代郡封之하여 爲代公하다
代郡 屬幽州 王浚 不許하고 遣兵擊猗盧어늘 猗盧拒破之하니 由是與琨有隙이러라
猗盧以封邑 去國懸遠하여 民不相接이라하여 乃帥部落萬餘家하고 自雲中으로 入雁門하여 從琨求陘北之地注+陘北, 石陘關之北也.하니
不能制하고 且欲倚之爲援하여 乃徙樓煩, 馬邑, 陰館, 繁畤, 崞五縣民於陘南하고 以其地與之하니 由是 猗盧益盛注+胡三省曰 “樓煩, 匈奴之所居, 其地在北河之南, 今嵐州樓煩郡, 非古樓煩也. 漢馬邑, 則唐之大同軍是其地. 漢陰館縣, 在句西北. 繁畤縣, 在武州川. 崞縣, 爲北齊北顯州平寇縣. 今五縣雖存, 皆非古縣地矣.”하다
遣使하여 言於太傅越하여 請出兵하여 共討劉聰, 石勒하니 忌苟晞爲後患하여 不許注+越‧晞有隙, 事見元年.어늘
乃謝猗盧之兵하여 遣歸國하다
遣使하여 徵天下兵하여 入援하다
京師饑困日甚이어늘 太傅越 遣使하여 以羽檄徵天下兵하여 使入援京師하다
帝謂使者曰 爲我하여 語諸征鎭하라 今日尙可救어니와 後則無及矣리라 旣而 卒無至者
山簡 遣督護하여 將兵入援이러니 爲王如所敗하니 如遂大掠沔, 漢하고 進逼襄陽이라
朝議多欲遷都以避難이어늘 王衍以爲不可라하고 賣車牛以安衆心하다
漢石勒 擊幷王如兵하고 遂寇襄陽이어늘 十一月 하다
以胡寇益盛으로 內不自安하여 乃戎服入見하고 請討石勒하다
帝曰 今胡虜侵逼郊畿하니 豈可遠去하여 以孤根本이리오
對曰 臣出하여 幸而破賊이면 則國威可振이니 猶愈於坐待困窮也니이다
乃帥甲士四萬하여 向許昌하고 留何倫하여 防察宮省하고
以行臺自隨하여 用王衍爲軍司하니 朝賢素望 悉爲佐吏 名將勁卒 咸入其府
於是 宮省 無復守衛하고 荒飢日甚하여 盜賊 公行하니 府寺, 營署 竝掘塹自守러라
東屯項하여 自領豫州牧하다
寧州刺史王遜 滅五苓夷하다
李毅死 其子釗自洛往하니 州人 奉之하여 以主州事하다
遣使詣京師하여 求刺史한대 朝廷 乃以遜爲刺史러니 旣至 表釗爲朱提太守注+朱提, 音銖時. 朱提縣, 前漢屬犍爲郡, 後漢屬犍爲屬國都尉, 劉蜀分置朱提郡.하다
寧州外逼於成하고 內有夷寇하니 城邑 丘墟
惡衣菜食하고 招集離散하여 勞徠不倦하니 數年之間 州境 復安이라
誅豪右不奉法者十餘家하고 擊滅五苓夷하니 內外震服이러라
漢主聰 殺其兄恭하다
漢主聰 自以越次而立이라하여 忌其兄恭하여 殺之하다
漢太后單氏卒하다
單后年少美色하니 漢主聰 烝焉注+下淫上曰烝, 上淫下曰報.하니 太弟义屢以爲言한대 單后慙恚而死하니 义寵 由是漸衰
呼延后言於聰曰注+呼延后, 聰妻. 父死子繼 古今常道 太弟何爲者哉
陛下百年後 粲兄弟必無種矣리이다 心然之하다
义舅沖 謂义曰 疎不間親이니 主上 有意於河內王矣 殿下何不避之
义曰 天下者 高祖之天下注+劉淵廟號高祖. 兄終弟及 何爲不可리오 粲等旣壯이면 猶今日也
且子弟之間 親疎詎幾 主上 寧可有此意乎잇가


庚午年(310)
[] 나라 孝懷皇帝 永嘉 4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光興 원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前趙)가 徐州, 豫州, 兗州, 冀州의 여러 을 침략하였다.
[] 琅邪王 司馬睿周玘吳興太守로 삼았다.
[] 錢璯(전회)가 陽羨을 침략하자, 周玘鄕里 사람들을 규합하여 토벌하고 전회를 참수하였다.注+黃外이다. 陽羨縣前漢 때에는 會稽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吳郡에 속하였으며, 나라 이후로는 나뉘어 吳興郡에 속하였다.
주기가 江南 지역을 세 차례 평정하니, 琅邪王 司馬睿는 그를 吳興太守로 삼고注+〈“玘三定江南”은〉 惠帝 永興 원년(304)에 石冰을 토벌하였고, 永嘉 원년(307)에 陳敏을 토벌하였고, 이제 또다시 錢璯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江南 지역을 세 차례 평정한 것이다. 나라는 吳郡丹陽을 나누어 吳興郡을 설치하였다. 그의 향리에 義興郡을 설치하여 旌表하였다.注+이때 吳興郡陽羨長城縣西鄕, 丹陽郡永世를 나누어 義興郡으로 만들었다.
[] 나라(前趙) 曹嶷(조억)이 東平琅邪를 침략하였다.注+魚力이다.
[] 여름 4월에 王浚나라(前趙) 劉靈을 공격하여 죽였다.
[] 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 가을 7월에 나라(前趙)가 河內를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漢主 劉淵하니 太子 劉和가 즉위하였는데, 그의 아우 劉聰이 시해하고 대신 즉위하였다.
[] 漢主 劉淵이 병이 위독하자, 陳留王 劉歡樂太宰로 삼고 楚王 劉聰大司馬 大單于로 삼아서 錄尙書事를 겸하게 하였다.
安昌王 劉盛安邑王 劉欽西陽王 劉璿(유선)이 나누어 禁軍을 주관하였다.
[] 처음에 劉盛은 젊었을 적에 독서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孝經≫과 ≪論語≫를 외우며 말하기를 “이 두 책을 외워서 잘 행하면 충분하다. 많이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李憙가 그를 보고 감탄하기를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소홀히 여겨도 될 듯하다가,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엄숙함이 엄한 군주와 같으니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注+弋豉이니, 소홀히 하고 함부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劉淵은 그가 충성스럽고 독실하다고 여겨서 임종할 때에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 劉淵하자 太子 劉和가 즉위하였는데, 유화는 성품이 시기가 많고 은혜롭지 못하였다.
宗正呼延攸侍中 劉乘西昌王 劉銳가 유화를 설득하기를注+呼延攸呼延翼의 아들인데, 劉淵은 그가 재주와 행실이 없다 하여 종신토록 관직을 승진시키지 않았고, 劉乘은 평소 楚王 劉聰을 미워하였고, 劉銳顧命(임종할 때 내린 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서로 모의하여 劉和를 설득한 것이다.先帝께서 輕重의 형세를 생각하지 않고,
大司馬 劉聰으로 하여금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近郊에 주둔하게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바로 황제의 자리에 더부살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일찍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注+는 생각함이다. “屯於近郊”는 劉聰平陽의 서쪽에 주둔한 것을 이른다. (자리)는 徂臥이니, “寄坐”는 大權이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고 신하와 백성들의 위에 지위를 의탁하고 있으므로, 형세가 더부살이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니, 유화는 그 말을 믿고 밤에 劉盛劉欽을 불러 이 말을 전하였다.注+劉和呼延攸의 생질이므로 호연유를 깊이 신임하였다.
유성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참소하는 말을 믿어 형제를 의심하지 마소서. 형제도 믿을 수 없다면 타인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호연유와 유예가 노하여 左右에게 명하여 유성을 칼로 베어 죽이고 마침내 單于臺에서 유총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注+劉淵平陽 서쪽에 單于臺를 설치하였다.
유예 등이 南宮으로 도망해 들어가자, 유총의 선봉부대가 뒤따라가서 유화와 유예, 호연유, 유승을 죽였다.
[] 劉聰北海王 劉义單后의 아들이라 하여 황제의 지위를 그에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유차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유총에게 즉위할 것을 청하자,
유총이 마침내 즉위하여 유차를 皇太弟로 삼아 大單于를 겸하게 하고, 아들 劉粲河內王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石勒幷州刺史로 삼았다.
[] 氐族의 추장 蒲洪이 스스로 略陽公이라 칭하였다.注+蒲洪의 집안에 있는 못 가운데에 부들이 났는데 길이가 5 5이고 마디가 대나무 모습과 같으니, 이때 모두 포홍의 집을 蒲家라 일렀으므로 인하여 로 삼았다. 또 隴右 지역에 큰 비가 내렸는데, 동요에 이르기를 “비가 만약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홍수가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이라 한 것이다.
[] 蒲洪略陽 臨渭縣에 있는 氐族의 추장이다.注+晉書≫ 〈地理志〉에 略陽郡臨渭縣이 있으니, 아마도 나라가 설치한 듯하다. 날래고 용감하고 권모와 지략이 많으니, 여러 저족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나라(前趙)가 蒲洪平遠將軍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를 받지 않고 스스로 秦州刺史 略陽公이라 칭하였다.
[] 流民 王如南陽을 침략하고서 나라(前趙)에 귀의하였다.
[] 雍州流民들이 대부분 南陽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詔書를 내려 자기의 鄕里로 돌아가게 하니, 유민들은 關中 지역이 황폐하다 하여 모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山簡이 군대를 파견하여 출발을 재촉하였는데, 京兆 사람 王如가 비밀리에 壯士들과 결탁하고 밤중에 산간의 군대를 기습해서 격파하고 城市를 공격하여 令長을 살해하니,
병력이 4, 5만에 이르렀다. 왕여는 스스로 大將軍이라 칭하고 나라(前趙)에 귀의하여 藩臣을 칭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洛陽을 침략하였다.
[] 〈나라가〉 拓跋猗盧大單于로 삼고서 代公을 봉하였다.
[] 처음에 匈奴의 우두머리인 劉猛이 죽자 劉虎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 新興에 거주하면서 鐵弗氏라 칭하고는 白部鮮卑와 함께 나라(前趙)에 귀의하였다.注+劉虎匈奴右賢王 去卑의 손자이다. 북쪽 오랑캐들은 아비를 鮮卑라 하고 어미를 鐵弗이라고 하였는데, 인하여 鐵弗으로 삼은 것이다.
劉琨이 장차 이들을 토벌하려 할 적에, 拓跋猗盧에게 使者를 보내어 말을 공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갖춰서 설득하여 병력을 내어 지원해줄 것을 청하였다.
탁발의로가 그 아우인 拓跋弗의 아들 拓跋鬱律로 하여금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여 마침내 유호와 백부의 선비를 격파하였다.
拓跋猗盧가 鐵弗氏를 크게 격파하다拓跋猗盧가 鐵弗氏를 크게 격파하다
유곤은 탁발의로와 결의형제를 맺고 표문을 올려서 탁발의로를 大單于로 삼고서 代郡을 그에게 봉하여 代公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이때 代郡幽州에 속해 있었는데, 王浚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어 탁발의로를 공격하였다. 탁발의로가 항거하여 왕준의 군대를 격파하니, 왕준이 이로부터 유곤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 拓跋猗盧封邑이 자기의 나라와 너무 멀어서 두 곳의 백성들이 서로 왕래하지 못한다 하여, 마침내 만여 가호의 부락을 거느리고 雲中에서 雁門으로 들어가 劉琨에게 石陘關(석형관)의 북쪽 지역을 요구하였다.注+陘北”은 石陘關의 북쪽이다.
유곤은 그를 제재하지 못하였고 또 그에게 의지하여 원조를 얻고자 해서 마침내 樓煩, 馬邑, 陰館, 繁畤(번치), 崞縣(곽현) 등 5개 의 백성을 석형관의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이 지역을 그에게 주니, 이로 말미암아 탁발의로가 더욱 강성해졌다.注+胡三省이 말하였다. “樓煩은 흉노가 거주하던 곳으로 그 지역은 北河의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 嵐州樓煩郡이요 옛 누번이 아니다. 나라 馬邑나라의 大同軍이 바로 그 지역이다. 나라 陰館縣句注의 서북쪽에 있고, 繁畤縣武州川에 있다. 崞縣北齊北顯州 平寇縣이 되었다. 지금 5개의 이 다 있기는 하나, 모두 옛 현이 있던 지역이 아니다.”
유곤이 太傅 司馬越에게 사신을 보내어 진언하여 군대를 출동해서 함께 劉聰石勒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마월은 苟晞後患이 될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注+永嘉 원년(307)에 보인다.
유곤은 이에 탁발의로의 지원군을 사절하여 封國으로 돌려보냈다.
[] 〈나라가〉 使者를 보내어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 京師洛陽에 기근이 들어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太傅 司馬越使者를 보내서 격문으로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경사를 구원하게 하였다.
황제가 사자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의 장수들에게 말하라. 오늘은 그래도 구원할 수 있지만, 뒤늦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끝내 구원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
山簡督護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는데, 王如에게 패하니 왕여는 마침내 沔水漢水 지역을 크게 노략질하고 전진하여 襄陽 가까이까지 접근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遷都하여 을 피하고자 하는 자가 많았는데, 王衍이 불가하다 하고는 수레와 소를 팔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 나라(前趙) 石勒王如의 군대를 공격하여 합병하고 마침내 襄陽을 침략하자, 11월에 太傅 司馬越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석륵을〉 토벌하고자 지역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 司馬越은 북쪽 오랑캐(나라(前趙))의 침략이 더욱 치성하므로 내심 편안하지 못하여 마침내 군복을 입고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石勒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 북쪽 오랑캐가 이미 近郊王畿 지역 가까이까지 침략해왔는데, 이 어찌 멀리 떠나가서 근본인 이곳을 외롭게 하려 하는가.” 하자,
사마월이 대답하기를 “이 출정하여 다행히 적을 격파하면 국가의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니, 앉아서 곤궁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4만의 甲士를 거느리고서 許昌으로 향하고 何倫을 남겨두어 宮省을 방비하고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를 거느리고 가서 王衍을 등용하여 軍司로 삼으니, 조정의 어진 사람과 평소 명망 있는 자가 모두 그의 佐吏가 되었고, 유명한 장수와 강한 병졸이 모두 그의 로 들어갔다.
이에 宮省에는 더 이상 守衛하는 자가 없고, 또 기근이 날로 심하여 도적 떼가 공공연히 횡행하니, 의 관사와 營署가 모두 참호를 파고서 스스로 지켰다.
사마월이 동쪽으로 가서 지역에 주둔하고는 스스로 豫州牧을 겸하였다.
[] 寧州刺史 王遜五苓夷族을 멸망시켰다.
[] 처음에 李毅가 죽자, 그의 아들 李釗(이쇠)가 낙양에서 오니, 寧州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쇠가 京師로 사자를 보내어서 刺史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王遜刺史로 삼았는데, 왕손은 부임한 뒤에 표문을 올려서 이쇠를 朱提太守(수시태수)로 삼았다.注+朱提銖時이다. 朱提縣前漢 때에는 犍爲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犍爲屬國都尉에 속하였으며, 蜀漢 때에는 나누어 朱提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영주는 밖으로는 나라에게 핍박을 받고 안으로는 오랑캐의 침략이 있어서 城邑이 폐허가 되었다.
왕손이 해진 옷을 입고 채소만을 먹으면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위로하니, 수년 사이에 영주의 경내가 다시 안정되었다.
왕손이 豪右들 중에 법을 받들지 않는 10여 가호를 주벌하고 五苓夷族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니, 이에 내외가 놀라 복종하였다.
[] 漢主 劉聰이 형 劉恭을 살해하였다
[] 漢主 劉聰은 자신이 차례를 뛰어넘어 즉위했으므로 형 劉恭을 꺼리고 미워하여 죽였다.
[] 나라(前趙) 태후 單氏하였다.
[] 單后는 나이가 젊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漢主 劉聰이 그녀와 私通[]하였다.注+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이라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라 한다. 太弟 劉义가 여러 번 말하자, 單后가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하다가 죽으니, 이로 말미암아 유차에 대한 유총의 은총이 점점 쇠하였다.
呼延后가 유총에게 말하기를注+呼延后劉聰의 아내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뒤를 잇는 것은 古今의 떳떳한 도리이니, 太弟는 무엇 하는 자입니까.
폐하가 돌아가신 뒤에 劉粲 형제는 반드시 남은 종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유총은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유차의 외숙인 單沖이 유차에게 이르기를 “소원한 자가 친한 자를 이간질하지 않는 법이니, 주상은 河內王 유찬에게 뜻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자리를 피하지 않습니까?” 하니,
유차가 대답하기를 “천하는 高祖(劉淵)의 천하이니,注+劉淵廟號高祖이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승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유찬 등이 장성하면 오늘의 상황과 같을 것입니다.
또 아들과 아우 사이에 親疏의 차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상이 어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였다.


역주
역주1 王浚 擊漢劉靈 殺之 : “劉靈에게 ‘寇’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토벌하여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王浚에게 토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하여 왕준에게 토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왕준은 晉나라의 신하라 이름하지만 병력을 보유하고 관망하면서 나라의 어려움을 구원하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군대를 일으켜 司馬穎을 토벌하였으나 처음에는 모두 부득이해서였고 뒤에는 다시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으니, 황실에 마음을 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스스로 서로 공격한 것으로 썼으니, 그를 배척함이 심하다.[劉靈書寇矣 不書討殺 何 不予浚以討也 浚則曷爲不予以討 浚名爲晉臣 擁兵觀望 不救國難 雖嘗興兵討穎 初皆迫不得已 旣復大掠而還 非心乎帝室者矣 故綱目以自相攻擊書之 外之甚矣]” ≪書法≫
역주2 漢主淵……弑而代之 : “‘卒’이라고 쓰고 ‘弑’라고 써서 중국의 군주처럼 말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漢나라(前趙)를 올려준 것은 부득이해서였다.(蠻夷의 경우 〈‘卒’을〉 ‘死’라고 쓰고, ‘弑’를 ‘殺’이라고 쓴 것에 의거한 것이다.) 漢主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晉나라가 잘못하였기 때문이다.[書卒 書弑 如內辭 綱目之進漢 有不得已焉耳(據蠻夷書死 弑書殺) 主書卒 以晉也]” ≪書法≫
역주3 : 劉义는 보통 劉乂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서에서는 ≪資治通鑑考異≫에 “≪晉書≫ 〈載記〉에 ‘乂’로 되어 있으나, ≪十六國春秋≫에 ‘义’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 하였는바, 이 설을 취하였다. 또한 저본에도 劉义로 되어 있으며,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도 劉义로 되어 있다.
역주4 司馬越과……것 : 太傅 司馬越과 苟晞는 평소 친분이 두터워 결의형제를 맺었는데, 구희가 兗州에서 공을 세우자 潘滔가 사마월에게 구희를 참소하였다. 이에 사마월이 스스로 兗州牧을 겸하고 구희를 征東大將軍 靑州刺史로 삼으니, 사마월과 구희가 이로 말미암아 틈이 생기게 되었다. 본서 237쪽에 보인다.
역주5 (註)[注] : 저본에는 ‘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注’로 바로잡았다.
역주6 四征과 四鎭 : 征東‧征西‧征南‧征北과 鎭東‧鎭西‧鎭南‧鎭北을 이른다.
역주7 太傅越 率兵討之 次于項 : “토벌할 적에 ‘率兵(군대를 거느리고 갔다.)’이라고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率兵’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를 텅 비운 것을 죄책한 것이다. 나라를 텅 비우고 적을 토벌하면서 오랫동안 밖에 주둔하였으니, 司馬越에게 토벌할 뜻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에 군대를 징발하여 京師에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으나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온 자가 있지 않았는데도, 사마월이 마침내 현재 있는 병력을 모두 인솔하고 나라를 텅 비우고 떠나갔으니, 명분은 石勒을 토벌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끝내는 갑자기 적이 와서 乘輿를 호위할 사람이 없어 결국 걸어 나가지 못하여 城이 함락되자 황제가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사마월이 나라를 그르친 것을 이루 다 죄책할 수 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라고 썼고, ‘項 지역에 군대를 주둔했다.’라고 쓴 것은 거듭 사마월을 죄책한 것이다. 무릇 토벌할 적에 ‘次(주둔했다)’라고 쓴 것은 모두 비난한 것인데, 사마월처럼 5개월 동안이나 머뭇거린 자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討未有書率兵者 書率兵 何 罪空國也 空國討賊而久次于外 越之無討志 甚矣 於是徵兵入援 未有至者 越乃悉率見兵 空國而行 名爲討勒 實以自衛 卒之倉卒寇至 輿衛缺人 至於步行不前 城陷被執 越之誤國 可勝誅哉 綱目書率兵 書次于項 所以重罪越也 凡討伐書次 皆譏也 逗遛五月 未有如越者焉]” ≪書法≫
역주8 行臺 : 출정할 때 주둔지에 설치하여 중앙의 정무를 대신 수행하는 기구로, 魏晉時代부터 시작되었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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