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
에 匈奴劉猛
이 死
어늘 劉虎代領其衆
하여 居新興
하고 號鐵弗氏
하고 與白部鮮卑
로 皆附于漢
注+虎, 匈奴右賢王去卑之孫. 胡人謂父爲鮮卑, 母爲鐵弗, 因以鐵弗爲姓.이러라
劉琨이 將討之할새 遣使하여 卑辭厚禮하여 說拓跋猗盧하여 以請兵한대
猗盧使其弟弗之子鬱律로 帥騎二萬助之하여 遂破劉虎, 白部하니
琨이 與猗盧로 結爲兄弟하고 表爲大單于하여 以代郡封之하여 爲代公하다
時에 代郡이 屬幽州라 王浚이 不許하고 遣兵擊猗盧어늘 猗盧拒破之하니 浚이 由是與琨有隙이러라
目
京師饑困日甚이어늘 太傅越이 遣使하여 以羽檄徵天下兵하여 使入援京師하다
帝謂使者曰 爲我하여 語諸征鎭하라 今日尙可救어니와 後則無及矣리라 旣而요 卒無至者라
山簡이 遣督護하여 將兵入援이러니 爲王如所敗하니 如遂大掠沔, 漢하고 進逼襄陽이라
朝議多欲遷都以避難이어늘 王衍以爲不可라하고 賣車牛以安衆心하다
目
越이 以胡寇益盛으로 內不自安하여 乃戎服入見하고 請討石勒하다
帝曰 今胡虜侵逼郊畿하니 公이 豈可遠去하여 以孤根本이리오
對曰 臣出하여 幸而破賊이면 則國威可振이니 猶愈於坐待困窮也니이다
乃帥甲士四萬하여 向許昌하고 留何倫하여 防察宮省하고
以行臺自隨하여 用王衍爲軍司하니 朝賢素望이 悉爲佐吏요 名將勁卒이 咸入其府라
於是에 宮省에 無復守衛하고 荒飢日甚하여 盜賊이 公行하니 府寺, 營署 竝掘塹自守러라
目
[目] 劉淵이 卒하자 太子 劉和가 즉위하였는데, 유화는 성품이 시기가 많고 은혜롭지 못하였다.
宗正인
呼延攸와
侍中 劉乘과
西昌王 劉銳가 유화를 설득하기를
注+呼延攸는 呼延翼의 아들인데, 劉淵은 그가 재주와 행실이 없다 하여 종신토록 관직을 승진시키지 않았고, 劉乘은 평소 楚王 劉聰을 미워하였고, 劉銳는 顧命(임종할 때 내린 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서로 모의하여 劉和를 설득한 것이다. “
先帝께서
輕重의 형세를 생각하지 않고,
大司馬 劉聰으로 하여금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近郊에 주둔하게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바로 황제의 자리에 더부살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일찍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注+惟는 생각함이다. “屯於近郊”는 劉聰이 平陽의 서쪽에 주둔한 것을 이른다. 坐(자리)는 徂臥의 切이니, “寄坐”는 大權이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고 신하와 백성들의 위에 지위를 의탁하고 있으므로, 형세가 더부살이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니, 유화는 그 말을 믿고 밤에
劉盛과
劉欽을 불러 이 말을 전하였다.
注+劉和는 呼延攸의 생질이므로 호연유를 깊이 신임하였다.
유성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참소하는 말을 믿어 형제를 의심하지 마소서. 형제도 믿을 수 없다면 타인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호연유와 유예가 노하여
左右에게 명하여 유성을 칼로 베어 죽이고 마침내
單于臺에서 유총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注+劉淵이 平陽 서쪽에 單于臺를 설치하였다.
유예 등이 南宮으로 도망해 들어가자, 유총의 선봉부대가 뒤따라가서 유화와 유예, 호연유, 유승을 죽였다.
目
[目] 雍州의 流民들이 대부분 南陽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詔書를 내려 자기의 鄕里로 돌아가게 하니, 유민들은 關中 지역이 황폐하다 하여 모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山簡이 군대를 파견하여 출발을 재촉하였는데, 京兆 사람 王如가 비밀리에 壯士들과 결탁하고 밤중에 산간의 군대를 기습해서 격파하고 城市를 공격하여 令長을 살해하니,
병력이 4, 5만에 이르렀다. 왕여는 스스로 大將軍이라 칭하고 漢나라(前趙)에 귀의하여 藩臣을 칭하였다.
目
[
目] 처음에
匈奴의 우두머리인
劉猛이 죽자
劉虎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
新興에 거주하면서
鐵弗氏라 칭하고는
白部의
鮮卑와 함께
漢나라(
前趙)에 귀의하였다.
注+劉虎는 匈奴의 右賢王 去卑의 손자이다. 북쪽 오랑캐들은 아비를 鮮卑라 하고 어미를 鐵弗이라고 하였는데, 인하여 鐵弗을 姓으로 삼은 것이다.
劉琨이 장차 이들을 토벌하려 할 적에, 拓跋猗盧에게 使者를 보내어 말을 공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갖춰서 설득하여 병력을 내어 지원해줄 것을 청하였다.
탁발의로가 그 아우인
拓跋弗의 아들
拓跋鬱律로 하여금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여 마침내 유호와 백부의 선비를 격파하였다.
拓跋猗盧가 鐵弗氏를 크게 격파하다
유곤은 탁발의로와 결의형제를 맺고 표문을 올려서 탁발의로를 大單于로 삼고서 代郡을 그에게 봉하여 代公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이때 代郡은 幽州에 속해 있었는데, 王浚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어 탁발의로를 공격하였다. 탁발의로가 항거하여 왕준의 군대를 격파하니, 왕준이 이로부터 유곤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目
[目] 京師인 洛陽에 기근이 들어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太傅 司馬越이 使者를 보내서 격문으로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경사를 구원하게 하였다.
황제가 사자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의 장수들에게 말하라. 오늘은 그래도 구원할 수 있지만, 뒤늦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끝내 구원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
山簡이 督護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는데, 王如에게 패하니 왕여는 마침내 沔水와 漢水 지역을 크게 노략질하고 전진하여 襄陽 가까이까지 접근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遷都하여 難을 피하고자 하는 자가 많았는데, 王衍이 불가하다 하고는 수레와 소를 팔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目
[目] 司馬越은 북쪽 오랑캐(漢나라(前趙))의 침략이 더욱 치성하므로 내심 편안하지 못하여 마침내 군복을 입고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石勒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 북쪽 오랑캐가 이미 近郊인 王畿 지역 가까이까지 침략해왔는데, 公이 어찌 멀리 떠나가서 근본인 이곳을 외롭게 하려 하는가.” 하자,
사마월이 대답하기를 “臣이 출정하여 다행히 적을 격파하면 국가의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니, 앉아서 곤궁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4만의 甲士를 거느리고서 許昌으로 향하고 何倫을 남겨두어 宮省을 방비하고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를 거느리고 가서
王衍을 등용하여
軍司로 삼으니, 조정의 어진 사람과 평소 명망 있는 자가 모두 그의
佐吏가 되었고, 유명한 장수와 강한 병졸이 모두 그의
府로 들어갔다.
이에 宮省에는 더 이상 守衛하는 자가 없고, 또 기근이 날로 심하여 도적 떼가 공공연히 횡행하니, 府의 관사와 營署가 모두 참호를 파고서 스스로 지켰다.
사마월이 동쪽으로 가서 項 지역에 주둔하고는 스스로 豫州牧을 겸하였다.
目
[目] 처음에 李毅가 죽자, 그의 아들 李釗(이쇠)가 낙양에서 오니, 寧州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州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쇠가
京師로 사자를 보내어서
刺史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王遜을
刺史로 삼았는데, 왕손은 부임한 뒤에 표문을 올려서 이쇠를
朱提太守(수시태수)로 삼았다.
注+朱提는 音이 銖時이다. 朱提縣은 前漢 때에는 犍爲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犍爲屬國都尉에 속하였으며, 蜀漢 때에는 나누어 朱提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영주는 밖으로는 成나라에게 핍박을 받고 안으로는 오랑캐의 침략이 있어서 城邑이 폐허가 되었다.
왕손이 해진 옷을 입고 채소만을 먹으면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부지런히 위로하니, 수년 사이에 영주의 경내가 다시 안정되었다.
왕손이 豪右들 중에 법을 받들지 않는 10여 가호를 주벌하고 五苓의 夷族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니, 이에 내외가 놀라 복종하였다.
目
[
目]
單后는 나이가 젊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漢主 劉聰이 그녀와
私通[
烝]하였다.
注+아랫사람이 윗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烝이라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報라 한다. 太弟 劉义가 여러 번 말하자,
單后가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하다가 죽으니, 이로 말미암아 유차에 대한 유총의 은총이 점점 쇠하였다.
呼延后가 유총에게 말하기를
注+呼延后는 劉聰의 아내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뒤를 잇는 것은
古今의 떳떳한 도리이니,
太弟는 무엇 하는 자입니까.
폐하가 돌아가신 뒤에 劉粲 형제는 반드시 남은 종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유총은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유차의 외숙인 單沖이 유차에게 이르기를 “소원한 자가 친한 자를 이간질하지 않는 법이니, 주상은 河內王 유찬에게 뜻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자리를 피하지 않습니까?” 하니,
유차가 대답하기를 “천하는
高祖(
劉淵)의 천하이니,
注+劉淵의 廟號가 高祖이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승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유찬 등이 장성하면 오늘의 상황과 같을 것입니다.
또 아들과 아우 사이에 親疏의 차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상이 어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였다.